기갑무림 4화
등을 타고 전해오는 전율에 입이 벌어졌다.
쿵쾅대는 심장에 호흡마저 가빠질 정도였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도 감탄이 나왔는데, 지금에 비할 바는 못 됐다.
그만큼 눈앞에 있는 거인 형태의 은빛 갑옷은 기이하면서도 대단해 보였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이상한 기시감이 스쳤다.
“이건…….”
나는 놀라움을 삼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갑옷의 재질을 어디선가 보았던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떨어질 때 보았던 것과 비슷한데?”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기이한 경험으로 각인되어 버린 차가운 금속의 느낌.
절벽에서 추락할 당시 몸에 달라붙었던 게 이 갑옷 같았다면 착각일까.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이 갑옷은 박제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꼼짝 않고 이렇게 있는데, 어떻게 절벽에서 떨어지는 나를 구한단 말인가.
‘역시 잘못 보았나.’
알 수 없는 허탈감이 들었다.
절벽 중간 부분에 떨어졌다고는 하나, 일반인이라면 즉사할 수 있는 높이였다.
그런데도 큰 상처 없이 살았다.
그 이유가 이 커다란 갑옷이라 한다면…… 너무 큰 비약일 터다.
“뭘 기대한 거지.”
환상이든 착각이든 간에, 다시는 그 기이한 감각을 느낄 수 없다는 사실에 허망함이 들었다.
힘없이 등 돌리려는데, 거인이 등지고 있는 벽 쪽으로 글씨들이 보였다.
[천갑무신(天甲武神), 이곳에 잠들다.]
천갑무신?
나는 갑자기 돋아오르는 소름을 뒤로하고 머릿속을 뒤졌다.
그러자 떠오르는 한 사람.
“천갑무신이라면, 이백 년 전 마교를 격퇴하고 무림을 구한 영웅이잖아!”
무척 특이한 갑옷을 입고 귀신처럼 싸웠다고 전해지는 사라진 무인이었다.
그런 천갑무신의 갑옷이 여기에 있다니!
무림사에 남을 기인이사의 주인공이자, 고금제일인 이였던 남자였다.
그로 인해 마교천하가 되지 않았고, 지금의 무림은 그 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 대단한 사람이 내 선조였다는 말이야?’
너무 놀라면 오히려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나는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이 갑옷의 주변을 훑기 시작했다.
천갑무신의 유품이나 이 갑옷의 작동법 등을 담은 무엇이라도 발견하길 간절히 바라면서.
그러나 시체는 없고 오직 거대한 갑옷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 상황을 설명하는 그 어떤 글이나 사용법을 알려주는 서책 하나 없었다.
“하아.”
보물을 앞에 두고도 아무것도 못 하다니.
이 허망한 상황에 열기 섞인 메마른 한숨이 터져 나왔다.
‘천갑무신의 갑옷을 발견하면 뭐 하나? 쓰질 못하는데!’
앞의 이 기물은 어떻게 만든 것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것은 맞았다.
하지만 갑옷이면 입을 수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보아도 입는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별짓을 다 해봐도 꿈쩍도 하지 않는 갑옷.
“미치겠네.”
정말 환장할 것만 같았다.
이걸 움직일 수만 있다면 천갑무신의 무력을 가지는 건 꿈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을 깨닫고 정신을 차리자 보이는 것은 곧 죽을지 모를 초라한 내 모습이었다.
조금 전까지 꿈에 부풀어 있던 내 입에선 한탄이 새어나왔다.
“……영약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갇혀서 굶어 죽어가고 있는 사람에게, 먹을 수도, 팔 수도 없는 값진 보석이 생겨 버린 셈이었다.
빌어먹을 몸으로 태어나 간절히 바랐던 것은 영약이었건만.
신이 내게 주신 것은 어떻게 쓸지도 모를 기물이었다.
아무리 대단한 것이라 한들, 움직일 수도 없는데 무슨 소용 인가 싶었다.
만약 저 기물을 판다면 좋은 영약을 구해 건강한 몸을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연 그게 가능할까?
나는 씁쓸한 입맛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되지도 않겠지.’
영약을 먹어봐야 겨우 일반인보다 조금 나은 몸일 테고, 이런 거대 갑옷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 무림은 난리가 날 것이 자명했다.
게다가 천갑무신이 쓰던 갑옷이라니.
한바탕 피바람이 날 터였다.
그 사이에서 과연 내가 목숨을 지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과는 다 빼앗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겠지.
처음부터 사용법은커녕 이런 곳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었다.
그저 아버지가 말씀하셨던 푸른빛을 따라 희망을 품고 뛰어내렸고 이곳을 발견했을 뿐.
다만, 모든 것들이 죽은 듯 멈춰 있는 이곳은 낯설지 않고 기이한 포근함을 주고 있었다.
아늑하면서도, 죽음과도 같은 정적이 흐르는 커다란 무덤 같은 편안함.
‘여기에서 맞는 죽음도…… 나쁘지는 않을 거야.’
얼마 남지 않은 목숨. 그동안 아버지께 빚진 마음이 들어 죽지도 못하고 아등바등 살았다.
이제 아버지의 바람도 이루었으니.
최소한 죽어서 아버지를 만난다 해도 할 말은 충분히 있었다.
털썩.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듯 누웠다.
망가진 몸으로 계단을 내려와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이제 곧 보겠네요.’
나는 바닥에 누워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죽음을 기다렸다.
“이젠…… 정말 끝이로구나.”
눈을 감자, 길지 않았던 생들이 지나쳐 갔다.
서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으나, 마지막치곤 외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멋진 거인이 내 마지막을 지켜주는 것만 같아서.
“너도 불쌍하구나.”
이렇듯 지하 깊숙한 곳에 묻혀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할 것이 아닌가.
나야 죽으면 한 줌 흙으로 되겠지만.
그냥 보기에도 대단해 보이는 기물이 이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묻혀 버리다니.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네가 빛을 보았다면 좋았을 텐데.”
말을 하면서도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지금 당장 내 몸이 죽어가는데 누가 누굴 걱정하는지.
그래서일까.
안타까움을 담아 말한 작은 소망에, 목걸이가 반짝이며 반응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투욱.
남은 생기가 끝나 가는지 누운 몸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갔다.
말라 버려 나오지 않을 것 같았던 눈물이 한 방울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죽음이라는 깊은 나락으로 침잠되어가는 의식 속에서…….
나는 정신을 잃었다.
[진천(眞天)의 소망을 수렴합니다.]
자휘가 정신을 잃자, 돌연 어떤 목소리가 공동 안을 울렸다.
목소리가 나온 곳은 천장의 작은 격자무늬로 구성된 특이한 정사각형 판.
격자무늬는 점점 커져 어느새 공동 전체가 격자무늬로 일렁였다.
기갑의 몸체 또한 격자무늬를 띄더니, 점점 작디작은 정사각의 형체로 분해되기 시작했다.
[기갑이 분자화되어 흡수됩니다.]
[동화율 0.3]
[진행을 위한 동력이 부족합니다.]
동력이 부족하다는 목소리에 목걸이에 있던 붉은 돌이 따로 떨어져 나왔다.
붉은 돌은 서서히 떠오르며 자휘의 몸 위를 맴돌더니, 돌연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팟.
명치 부분을 파고든 돌이 주변과 똑같이 격자무늬로 빛을 발했다.
[최상급 마석의 에너지를 사용합니다.]
목소리는 기다렸다는 듯 기갑 주변으로 빛들을 끌어들였다.
스슷―
아주 작은 사각 무늬로 분해되던 기갑이 연기처럼 휘돌더니, 돌 안으로 스며들었다.
[동화율 8, 9…… 25.]
[생체로 이식된 최상급 마석으로 기갑이 이전되었습니다.]
빛나는 가루가 되어 흩어지던 기갑은 어느새 완전히 사라졌다.
자휘의 몸에 이식된 마석 안으로 흘러들어와 흡수되어 버린 것이다.
아버지의 유물이자 진가장의 가보였던 목걸이의 붉은 돌이자, 최상급 마석.
마석의 신비한 기능에 의해 기갑은 장착되었고, 자휘는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기연을 얻게 되었다.
[기갑 장착을 완료했습니다.]
천장에서 나오던 목소리는 할 일을 다 마쳤다는 듯, 마지막을 고했다.
[진천의 영광을 기원합니다.]
* * *
이상했다.
아니, 이상함을 넘어 괴이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왜 이곳에 있는 거지?”
분명 죽어가고 있었는데…….
눈을 떠보니 진가장으로 올라가는 산의 초입 부근의 동굴 안이었다.
꽤 구석진 곳에 있어 진가장에 살면서도 발견하지 못하던 곳이었다.
게다가 내가 가지고 있었던 아버지의 목걸이는 붉은 돌 부분이 사라진 상태였다.
“으윽.”
갑자기 뻐근해진 명치 부위에 나는 옷을 헤치고는 부근을 살폈다.
그러자, 목걸이에 있었던 붉은 돌이 내 가슴팍에 박혀 있는 것이 아닌가!
마치 심장처럼 펄떡대는 붉은 빛은 생명과도 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이게 무슨……!”
나는 당황스러웠다.
아버지의 마지막 유품이 내 몸 안에 박혀 있다니.
내가 기절한 사이, 대체 무슨 일이 생겼던 것일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붉은 돌로 인해 내가 건강해졌다는 것이다.
진영현에게 구타당하고 절벽에서 떨어진 나는 당장 죽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는데.
처음으로 느껴보는 충만함은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러왔다.
“건강하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몸에는 힘이 넘쳤으며, 뼈가 부러지고 상처가 가득했던 몸은 상처 하나 없었다.
오히려…….
입고 있던 옷이 작아진 걸 보면 키와 몸집까지 꽤 커진 듯했다.
피부까지 좋아진 상태를 보니 이런 게 환골탈태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후우.”
우선 심호흡을 하며 혼란스러운 마음을 진정시켰다.
‘목걸이의 푸른빛을 보고 기연을 얻어 강해진 것일까?’
아버지의 말씀대로라면, 이 상황이 조금은 이해가 가긴 했다.
아마도 목걸이의 붉은 돌이 내 몸에 박혀 나를 건강하게 만들었으리라.
그러나 아버지는 강해진다고 하셨는데.
건강한 몸과 강한 것과는 차이가 있지 않나.
그럼에도 건강하다 못해 힘이 넘치는 이 몸은 내가 평생 원했던 것이었다.
진작 이랬다면 진영현에게 현무학관의 입학자격을 빼앗기지 않았을 테니.
“이제 현무학관에 갈 수 있는 건가?”
내 몸은 진영현과 비교해도 더 좋았으면 좋았지, 나쁘지 않은 상태였다.
무당의 현로가 갑자기 건강해진 날 보고 놀란다고 하여도 기연을 얻었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단 하나 걸리는 것이 있다면 가슴 부근의 돌.
‘명치에 박힌 붉은 돌만 감출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러자, 신기하게도 붉은 돌은 작은 격자무늬로 빛나더니 사라졌다.
“……!”
놀란 나는 명치 부근을 더듬었고, 돌이 있던 부근이 볼록 튀어나온 것이 느껴졌다.
“아, 보이지만 않는 것이로구나.”
다행이었다.
기연에 관해 묻고 몸을 살핀다면 이 돌에 관해 설명할 것이 마뜩잖았는데.
이 정도라면 내공이 늘어난 것도 아닌 고작 몸이 건강해진 것뿐이라, 크게 궁금해하진 않을 것이다.
‘어떻게 안 보이게 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말이야.’
절벽에서 목걸이가 푸른 빛을 발했을 때부터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그러나 모두 꿈이든 사실이든 간에 지금 중요한 것은 현재의 바뀐 내 모습이었다.
난 건강해졌고, 이제는 현무학관에 갈 수 있는 자격이 생긴 것이다.
생각이 정리되자 마음이 급해졌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지?”
동굴 밖을 나와 보니, 어슴푸레한 하늘이 보였다.
대략 유시(17~19시) 정도의 시각.
무당의 현로가 하룻밤을 머물고 간다 했으니, 아직 기회가 남은 셈이었다.
일단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나니, 누더기가 된 옷이 눈에 들어왔다.
하기야 그렇게 다친 데다가 굴렀으니 멀쩡한 것이 이상할 터였다.
“완전 거지꼴이군. 다들 날 못 알아보겠어.”
개방도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상거지 꼴이었다.
워낙 진가장에서 나가지 않아 얼굴을 아는 사람도 적긴 했지만, 달라진 모습은 누구라도 못 알아볼 법했다.
그러나 급한 건 시간이었다.
만일 이곳에서 있던 시간이 하루가 지났다면 이미 현로는 진영현을 데리고 현무학관으로 갔을지 몰랐다.
더 늦기 전에 가야만 했다.
나는 더러워진 얼굴을 소매로 대충 문대어 닦고는 동굴 밖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