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갑무림 1화
이백 년 전.
정파가 짓밟히고 마교 천하가 도래할 무렵 한 사내가 나타났다.
거인과 같은 전신을 감싸는 갑옷에, 믿을 수 없는 괴력과 강력한 강기를 지닌 남자.
그는 당대 최고수였던 천마를 압도적인 실력 차로 이기고, 정파를 승리로 이끈 후 홀연히 사라졌다.
사람들은 이 기이한 고금 제일인을 천갑무신(天甲武神)이라 불렀다.
* * *
지방에서는 힘 좀 쓴다지만, 무림 전체로 보면 힘없는 진가장.
그곳에서 오랜만에 연회가 열렸다.
규모는 작으나 나름 신경 쓴 티가 많이 나는 연회를 연 이유는 무당의 장로급 도사가 왔기 때문이었다.
유명한 무당의 도사를 또 언제 보겠는가.
사람들은 상다리가 휘도록 차린 음식들은 보지도 않고 흰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인의 풍모를 풍기는 무당의 도사는 한 아이의 진맥을 보더니 손을 놓으며 말끝을 흐렸다.
“너는 오성은 매우 좋으나…….”
그는 난감한 표정으로 잠시 후 말을 이었다.
“참으로 조악한 근골을 가졌구나.”
연회에 참석한 모든 이들의 시선이 도사 앞에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소년에게 찌를 듯 닿았다.
진가장의 적자임에도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소외되었던 소년, 진자휘.
늘 가문의 모임에서 제외되었던 그가 무당의 장로가 있는 곳에 소환되어 진맥까지 받고 있었다.
가주가 된 숙부가 웬일로 자휘를 이 자리에 불렀던 것이다.
“네 체질은 노부도 알 수 없으리만큼 특이하며 온몸의 생기 또한 무척이나 미약하다.”
충격적인 말에도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문에서 소외되었다지만 그는 이곳의 적자. 그가 한 말들은 예전부터 익히 알고 있던 사실들이기 때문이었다.
소년의 행색을 유심히 바라보던 무당의 현로가 조용히 물었다.
“그런데, 너는 가문의 적자라면서 왜 이렇게 비루한 모습이더냐?”
체질이야 그렇다 쳐도 아이의 마른 몸은 영양이 부족해 보였고, 옷 또한 입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먼저 진맥을 해주었던 사촌 형과 행색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는 훤칠한 키에 덩치가 좋았고 입었던 옷 또한 꽤 고급스러운 것들이었다.
반면, 이 소년은 마치 하인의 행색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부모가 죽고 숙부가 가주를 맡았다더니, 방치되어 자란 모양이었다.
현로는 못마땅한 눈으로 가주를 바라보았다.
탐탁지 않은 눈빛에 괜스레 찔끔한 가주가 소년 대신 재빨리 답했다.
“아이가 마른 것은 몸도 약하거니와 워낙 입이 짧아서 그렇습니다. 옷도 분명 좋은 옷을 보내줬건만 왜 저런 옷을 입고 왔는지 모르겠군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조카의 모습을 아래위로 곁눈질하던 가주가 다시 혀를 놀렸다.
“어미가 이 아이를 낳고 산고로 죽었다 보니 좀…… 이 녀석이 제멋대로입죠.”
한마디로 자신들은 잘 해줬건만 어미 없이 자라 이런 자리에 저런 몰골로 나왔다는 것.
그의 대답에 얌전히 있던 소년의 몸이 분노로 작게 떨려왔다.
“게다가 이 아이는 몸이 부실하다 못해 깨진 도자기 같습니다. 이런 몸으로 무학으로 유명한 현무학관에 갈 수 있겠습니까?”
가주는 현로를 바라보며 옆자리에 앉은 큰아들을 가리켰다.
“누가 보더라도 학관에 가는 것은 우리 영현이가 되어야 합니다. 근골도 좋을뿐더러, 외공을 익혀도 될 만큼 튼튼합니다. 도사님께서 보시기에도 그렇지 않습니까?”
무당의 도사는 가주의 물음에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가 이곳을 방문한 이유는 자휘에게 현무학관 입관을 안내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막상 진맥을 해보니 원래 가야 할 아이의 신체가 너무 안 좋은 것이 아닌가.
병약함은 둘째 치고, 알 수도 없는 절증을 가진 아이였다.
‘자질로만 따진다면 영현이라는 아이가 더 낫다. 하지만 저 아이는…….’
현로의 눈이 영현에게 갔다가 소년에게로 넘어왔다.
그의 눈에 갈등이 서렸다.
아이에 대한 동정과 실리 중 하나를 택해야 했던 것이다.
침묵이 돌자 소년이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와 동시에 낮은 미성이 울려 퍼졌다.
“제 모습이 비루먹었든, 아니든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창백한 낯에 도전적인 눈빛을 지닌 소년, 자휘의 얼굴이 드러나자 그는 놀라움을 삼켰다.
만약 여아로 태어났다면 경국지색으로 불릴 만큼 꽤 얼굴선이 고왔던 까닭이었다.
그러나 거친 무림을 살아가는 그들에게 고운 얼굴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중요한 것은, 제가 현무학관에 갈 수 있는 의지와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소년은 지금 자신이 학관에 갈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항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의 몸은 절맥과는 비슷하게 보이지만 확연히 다른 아주 특이한 체질.
이런 몸으로 어떻게 수련을 한단 말인가.
“무엇을 걱정하시는지 압니다만, 그곳에서 몸을 낫게 할 방법이 생길 수도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자휘의 말대로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성적이 좋은 이들에게 주어지는 영약과 각종 혜택이 몸을 나아지게 만들지도 몰랐다.
“그러니 원래 가기로 한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
자휘가 고개를 깊이 숙이며 읍소했지만, 잠시간 고민하던 현로는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네 사정은 안타까우나…….”
무인으로서의 성장 가능성이 전혀 없는 아이를 데려가 봐야 무엇을 할까.
간절함이 담긴 소년의 눈을 외면한 그가 내키지 않는다는 듯 말을 이었다.
“진맥의 결과로 보건대, 노부가 보기에 현무학관의 자리는…… 네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구나.”
“그럼, 제 몸이 정상이 아니라서 현무학관 입학이 불가능한 것입니까?”
“그렇다. 네 몸이 정상이라면 내가 왜 다른 아이를 선택했겠느냐?”
그러나 저 아이가 바라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터였다.
현로의 눈에 안타까움이 스쳤다.
“절실한 네 마음은 알겠다만,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구나. 미안하다.”
현로는 길게 합장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렇군요.”
자휘는 허탈함에 한숨을 흘렸다.
무당의 도사가 왔다길래 희망을 품었으나 차라리 오지 않느니만 못했다.
푹 꺼질듯한 아쉬움을 애써 감추고는 현로에게 고개 숙여 포권을 취했다.
몸을 돌려 연회장을 빠져나오려는데, 사람들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등을 따갑게 찔렀다.
“허 참, 저렇게 버릇이 없어서야.”
“무당의 도사님께 먼저 등을 돌리는 것도 모자라 가족들에게 말도 없이 나가려 하다니.”
“맞소이다. 평생 가도 못 만날 귀인에게 조언까지 듣게 배려해 주었건만. 저러니 무시당하는 것이지요!”
문밖으로 나가려던 발이 멈췄다.
조언과 배려를 해줬다라…….
숙부는 자신을 위하는 척 허울 좋게 진맥을 받는 자리를 마련했고, 진맥 후 무당 도사는 진영현을 택했다.
대체 얼마만큼 바닥으로 떨어져야 만족한다는 것일까?
자휘는 서늘한 눈빛으로 가족이라 부르는 이들을 한번 돌아보았다.
“…….”
연회의 가장 상석인 무당의 도사 옆자리에 앉아 웃음 짓는 숙부.
그 옆에 화려하게 차려입고 자신을 독사처럼 쏘아보는 숙모.
곁에 앉아 기뻐하는 앳된 청년은 앞과 뒤가 다른 사촌 형.
겉보기에는 멀쩡하나, 알고 보면 남보다 못한 이들이었다.
“가족이라.”
자휘가 차갑게 읊조리자, 모두의 눈길이 한군데로 모였다.
“제가 이곳의 진짜 가족이 맞긴 합니까?”
억눌린 목소리 사이로 새어 나오는 질문.
“귀한 분 앞에서 가족을 운운하다니! 가족이 아니라면 누가 너 따위를 이런 자리에 부른단 말이냐? 네놈이 우리를 망신 주려 작정을 했구나!”
자휘의 물음에 체면이 상한 가주가 벌게진 얼굴로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그 모습에 일말의 기대조차 떨어져 나간 소년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말은 바로 하셨으면 합니다. 망신은 가주님이 아니라 제가 당했습니다.”
“뭐, 뭐라?”
벌컥 성질을 내는 가주를 보며 자휘는 작정한 듯 서늘한 음성을 뱉어냈다.
“모두 아시다시피, 예전부터 현무학관에 가기로 한 사람은 저였습니다.”
어쩐지 이상했다.
가주가 사람 많은 연회에 자신을 불렀다는 것이.
그런데 현무학관의 자리를 탐내고 이런 짓을 벌일 줄이야.
“가주님이야말로 무당의 도사님이 오시자마자 제 자질을 논하며 조롱하셨지요. 이것이 제가 당한 망신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그게 왜 망신인 것이냐? 네놈이 학관에 들어가 비실한 몸으로 진가장에 먹칠을 하는 것이 진정한 망신이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제가 학관에 입학할 수 없는 몸임을 알리신 것입니까? 당신의 아들을 대신 보내기 위해서?”
이제는 숙부라 부르지도 않는 사람을 보는 소년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저는 몸은 비록 비루할지 모르나 무인입니다.”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들 앞에서 약점을 알리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하물며, 자신은 무인이거늘 어떻게 이런 사형선고를 대놓고 내리게 만드는가.
고작, 학관에조차 들어가지 못하는 몸이라고 말이다.
“제 몸이 어떤지 알면서도 무당 도사님의 입을 빌려 무인으로서 완전히 매장당하게 하는 사람들이―”
자휘는 슬며시 눈을 돌리는 주변인들을 쏘아보며 남은 말을 짓씹듯 내뱉었다.
“어떻게 피와 정으로 이어진 가족이란 말입니까?”
이렇듯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무인으로서의 사형선고를 내리고 조롱하는 사람들이 어찌하여 가족인가 하는 물음.
장내는 말이 끝남과 함께 묵직한 정적이 맴돌았다.
“그, 그건.”
자휘의 물음에 가주는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서둘러 입을 열었다.
“네가…… 오해하는 부분이 있구나. 나는 한시라도 빨리 무당의 도사님께 보여 네 몸을 낫게 하는 방법을 알고 싶었을 따름이다.”
“그렇군요. 하도 뵙지 못해서 그렇게 생각하시는 줄 몰랐지 뭡니까.”
비아냥대는 조카 앞에서 변명으로 일관하는 그는 겉으론 웃고 있지만 속은 열불이 나는 상태였다.
그는 이를 갈며 망나니 같은 놈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내가 널 자주 보지는 못했어도 생각만은 하고 있었다는 걸 알아주길 바란다. 몸도 안 좋아 보이는데 빨리 들어가 쉬거라!”
가주는 상황을 종료시키기 위해 등을 홱 돌리며 어서 꺼지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그 뒷모습에 자휘는 비틀린 웃음을 짓고는 좌중을 둘러보며 천천히 포권을 취했다.
“그럼 부족한 저는 물러나도록 하지요. 남은 시간, 아주 즐겁게 보내시길.”
사람들은 나가려는 소년을 보며 붉어진 얼굴로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병약한 놈이라 만만히 봤건만, 혀에 날카로운 칼을 물고 있었을 줄이야.
괜스레 저 칼에 찔릴까 저어하며 등 돌려 혀만 차는 사람들.
그 모습들이 왜 이리 우스운지.
피식.
자휘는 그들을 향해 비웃음을 한번 날리고는 연회장의 문을 세게 닫았다.
“저런…… 버릇없는―!”
쾅 하는 문소리와 함께 비난을 담은 날 선 목소리들이 순식간에 잠겼다.
* * *
연회장을 나와 몇 걸음 걷지도 않았건만 숨이 가빠오고 다리는 흔들렸다.
구석진 담벼락에 기대어 털썩 주저앉고는 숨을 몰아쳤다.
“젠장, 망할 몸뚱이 같으니.”
연회에서 잠깐 서 있었다고 다리가 후들거리다니.
스스로에게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결국 현무학관에는 가지 못하게 되었구나.”
진득하게 달라붙는 고통을 참고 모처럼 나왔건만 소득은 없었다.
그저 병약한 놈의 망나니짓이 또 하나 추가되었을 뿐이다.
이 진절머리 나는 곳을 떠나 희망을 찾고 싶었건만.
희망은 꺾여 버렸다.
“제기랄.”
나는 욕을 뱉고는 담벼락 사이에 숨겨둔 것을 찾기 시작했다.
툭.
작은 돌을 빼어내자 그 안에 숨겨두었던 작은 목걸이가 나타났다.
아버지의 유품이자, 나에게는 생명줄과도 같은 귀물(貴物).
남들에게는 그저 별것 아닌 돌로 보이겠지만 신기하게도 내 몸 상태를 조금은 낫게 만들어 주는 물건이었다.
“하아,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목걸이를 목에 걸자, 고통이 사라지며 숨이 편하게 쉬어진다.
아버지와 같은 체질이어서인가.
유독 아버지와 내게만 이런 효능이 발휘되었다.
보석도 아닌 것이 돌인데도 붉은빛을 내는 알 수 없는 목걸이.
‘이 붉은 돌은 대체 무엇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자세히 보면 미세하게 심장처럼 펄떡대며 살아 움직이는 듯싶었다.
붉은빛들이 움직이는 걸 보면 그에 반응해 심장이 떨릴 정도로.
그리고 신기하게도…….
같은 체질인 아버지조차 보지 못했던, 오직 나에게만 보이는 광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