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
<174화>
모용곽의 걱정은 바로 그것이었다. 찾아온 남궁적이 과연 서문휘로부터 맹주 자리를 넘겨받은 현당인지, 단목가를 멸문시킨 남궁적인지 말이다.
그렇게 법석을 떨고 있는 모용곽의 앞에 현당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뒤로 우희가 조용히 따라왔다.
“혀, 현당…….”
현당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겠지요. 놈들은 모두 저곳에 모여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하, 하지만…….”
“단목가는 멸문 당했으니, 제해야 할 것입니다. 서문세가와 독고세가가 동의했습니다. 그리고 남궁세가는 제 아버지가 가주이십니다. 게다가 이미 아버지에게 일어난 변고에 대해 들으셨을 것입니다. 이제 모용세가만 남았습니다. 동의하신다면 남부맹은 이제 하나가 되어 문당을 제거할 것입니다. 남부맹을 배신하고 맹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공작을 꾸몄던 문당을.”
“그, 그렇기도 하지만…….”
모용곽은 빠르게 주판알을 튕겼다.
사대 세가 중에 삼대 가문이 동의한 셈이었다. 모용세가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지 이미 대세는 결정되어 있었다. 그토록 갈망하던 맹주 자리는 이미 고릿적에 물 건너간 상태였다. 단목기도 이기지 못한 자신과는 달리 지금 눈앞의 이놈은 서문휘마저 이겼다. 그럼 문제는 어떻게 하면 체면을 차리면서 자리를 양보하느냐는 점이었다.
“내가 자네를 키웠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되네.”
“그거야 잘 알고 있습니다.”
“좋아. 그리고 자네와 내 딸아이의 태중 약혼은 아직도 유효한 것으로 알겠네.”
현당은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순간, 좀 전과는 딴소리를 하고 있는 현당을 보는 우희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 * *
“놈들이 모용세가로 들어갔습니다.”
밖에서 경비를 서던 자가 뛰어 들어오며 보고했다. 현당과 우희가 모용세가로 들어가는 광경을 목격했던 것이다.
“놈들이라니?”
“현당, 그자와 우희 말입니다.”
남궁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놈들이?”
“예.”
남궁적은 주변에 서 있던 수하들을 바라보았다. 그중에 그가 원하는 일을 가장 잘할 사람을 가리고 있었다.
“장이.”
“예!”
이 작전에 대한 인선은 이미 예전에 끝나 있었다. 남궁적은 계획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 * *
“우희. 우희…… 내 말 좀 들어봐…….”
“필요 없어.”
“내 말 좀 들어보라니까…….”
“필요 없다니까…….”
현당의 코앞에서 방문이 닫혔다.
문당이 내려다보이는 다루 앞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머뭇거렸다. 미리 현당의 지휘를 받고 따라와서 기다리고 있던 독고진과 이건용이었다. 준비가 끝났다고 이야기를 하려는데 현당과 우희 사이가 애매한 것을 보고 망설이고 있었다.
“뭐, 남녀 문제가 다 그런 것 아니겠어? 준비는?”
“끝나 있네.”
독고진이 대답했다.
“그렇군.”
현당이 길 건너 서 있는 문당의 건물을 바라보았다.
새벽안개 속에서 오늘따라 유독 문당이 을씨년스럽게 보였다.
수하들과 나뉘어 다루를 감시하던 장이는 드디어 기회를 포착했다.
적당한 때를 잡아서 배신자를 처단하는 것!
그게 그의 이번 임무였다. 그리고 마침내 기회가 생겼다. 항상 현당과 붙어 다니던 우희가 혼자 떨어진 것이다.
우희를 제거하는 임무는 그들에게 상당히 중요했다. 그동안 남부맹에서 벌인 모든 임무와 작전이 모두 우희를 통해서 나갔다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희만 제거하면 문당의 모든 병력과 간세는 조용히 사라지기만 해도 되는 것이었다.
때마침 우희가 현당과 싸우고 혼자 있었다. 기왕이면 현당도 제거하면 좋겠지만 그를 상대하는 것은 힘에 부칠 듯했다. 게다가 혼자가 아닌 현당을 덮쳐 힘을 분산시키기보다는 우희를 제거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쳐라!”
장이가 소리쳤다.
독고진, 이건용과 함께 앞으로의 계획을 확인하고 있던 현당은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평소 부산했던 문당의 아침과는 달리 너무 조용했던 것이다.
“이건 설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때였다.
“쳐라!”
고함과 함께 우희가 들어간 방향에서 집기가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희…….”
현당이 소리쳤다.
우희는 한두 놈은 상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십여 명이 한꺼번에 달려드는 것은 도리가 없었다. 같은 사형제일지라도 단목기는 규화신공을, 모용탄은 은둔술을, 그리고 그녀는 지략과 지모를 익혔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 중에는 장이도 있었다.
한 놈을 피하고 문을 향해 신형을 날렸지만 두 번째 놈이 휘두르는 칼을 피하지 못하고 등에 칼을 맞고 말았다.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었다. 다탁을 붙잡고 겨우 몸을 일으킨 순간, 또 한 놈이 달려들었다. 주변을 둘러보다 곁에 있는 호롱불을 던졌다. 놈이 피하는 바람에 호롱불이 엎어지면서 불씨가 침상에 옮겨 붙었다.
지친 우희는 바닥에 쓰러졌다. 덕분에 다탁 위에 놓여 있던 등잔도 엎어지면서 바닥으로 기름이 흘렀다.
때를 놓치지 않고 장이가 우희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 어찌나 세게 박았는지 칼날이 부러졌다.
“우희…….”
현당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문 앞에 쓰러져 있는 우희 때문에 문이 열리지 않았다.
바닥으로 불이 번졌다.
“보았느냐? 배신자의 최후를!”
장이는 목소리를 높여서 작전의 승리를 만천하에 알렸다.
불꽃과 연기가 건물 전체로 퍼지기 시작했다.
“우희…….”
장이는 일장 연설을 하고 싶었지만 이대로 있다가는 빠져나가지 못할 것 같았다.
“작전 성공! 이제 철수! 철수다.”
현당이 문을 두들기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사람들이 간신히 현당을 끌어냈다. 하지만 이미 건물 전체로 퍼진 불길 때문에 우희의 시신은 건지지도 못했다.
* * *
어느새 몰려든 사람으로 문당은 사면초가, 고립무원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고작 있는 인원은 수십 명. 문당의 인원 오십에 각 세가에 숨어 있던 이십여 명의 간세들까지 합해야 칠십이었다. 하지만 밖에 몰려든 사람들은 모용세가만 백 명이었다. 정말 인원을 많이 동원하기를 좋아하는 모용세가였다.
그나마 좋은 소식은 우희가 죽었다는 것과 남궁찬이 운기행공을 잘못하는 바람에 주화입마에 빠졌다고 하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속속 사대 세가의 병력들이 들이닥치고 있었다.
“공자…….”
이삼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남궁적을 바라보았다.
“풋…….”
가능할 것 같았다. 삼사를 제거하고 각 세가에 나가 있는 간세들을 이용해서 세가 가주들을 선동하면, 그가 남부맹의 맹주 자리에 오르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 같았다.
한데 단목가는 멸문시켰지만 단목기의 제거에는 실패했다. 그리고 문당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우희를 제거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문당의 정체를 이미 사대 세가가 모두 파헤치고 난 이후였다.
사대 세가의 가주들을 설득하고 싶었지만 이미 그들은 자신을 가짜 남궁적으로 믿고 있었다. 그들 눈에는 진짜라고 생각되는 훌륭한 인물이 밖에 있었으니까.
“크크큭. 그런 거였어. 그런 거…….”
결국 혈육인 남궁찬을 제외하고 나머지 모든 사람에게는 누가 진짜인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사대 세가와 남부맹을 배신한 일당이 이 문당에 모두 모여 있고, 자신이 그들의 수장으로 나와 있으며, 또 한 사람은 사대 세가를 이끌고 저쪽에 있다는 것이었다.
누가 진짜건 상관없이 하나만 없어지면 되는 셈이었다. 그리고 남은 하나가 남궁세가와 나머지를 잘 이끌면!
“와아아.”
드디어 공격 명령이 떨어졌는지 밖에서 함성이 들려오고,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궁적은 이삼과 장이, 공일을 이끌고 공생이 만든 비밀통로로 빠져나갔다. 정작 그곳으로 문당을 빠져나간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사실 남궁적이 그렇게 되도록 지시를 내렸다. 다수가 문당에서 죽어야만 남부맹 또는 사대 세가의 추격이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떻게든 몸 성히 살아나기만 하면 기회는 언제든지 또 만들 수 있었다. 지금 현재 남부맹의 신임 맹주가 현당이 된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가 남궁적이라고 알 테고 자신이 남궁적인 이상 가짜 남궁적, 즉 현당을 없애고 그 자리에 앉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문제였다.
남궁찬도 주화입마에 빠져서 사지가 굳은 데다 말도 제대로 못하고 우희도 제거된 마당에 천하에 남궁적과 현당을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는 셈이었다. 그러므로 이곳만 빠져나가면 후일을 도모할 수 있었다.
그것이 남궁적의 생각이었건만…….
“여어, 이게 누군가?”
현당이 출구를 가로막고 있었다. 당황한 이삼이 먼저 소리쳤다.
“놈! 어찌 알았느냐?”
“내가 누군가? 천하의…….”
남궁적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뒷말이 궁금했다.
“천하의?”
“글쎄…… 그래, 천하의 남궁현당이 아닌가!”
남궁적은 분노에 휩싸였다.
“네, 네놈이…….”
남궁적보다 먼저 장이와 공일이 움직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현당이 천인혈을 펼쳤다. 신형은 유운신법을 따라 흐르면서 도끝에서 불꽃이 튀었다. 한 점 화려하게 피어오른 불꽃은 망설이지 않고 공일의 정수리를 꿰뚫었다.
“일지선이라네.”
이어지는 칼 시위가 장이의 몸을 갈랐다.
“이건 유운검이고!”
남궁적은 슬쩍 이삼의 등을 두들겼다. 그것을 좌우 합격(合擊)이라고 생각한 이삼이 달려들자 현당은 기다렸다는 듯이 천인혈을 앞으로 내질렀다.
천인혈에서 시작한 번개가 이삼의 신형을 꿰뚫었다.
“영광으로 알아라. 화룡파란으로 죽는 것을!”
전신이 폭발하며 이삼의 신형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남궁적이 멍하니 현당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그게…….”
“그래. 이게 제대로 펼친 비폭연 최후식 화룡파란이네.”
“그렇군.”
한숨을 내쉬는 남궁적을 보며 현당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왜?”
남궁적이 의아해하자 현당이 답했다.
“자네가 이삼의 등을 슬쩍 두들기는 것을 봤어. 한데 자네는 움직이지 않았지. 그 뜻은 이 두 사람까지 완전하게 살인멸구를 하겠다는 것! 자네는 나를 이기면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내 행세를 하면서 남부맹을 차지하겠다는 속셈 아닌가?”
남궁적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버릇은 어쩔 수 없는지 비열하게만 느껴졌다.
“맞네. 역시 현당이군!”
“내가 누군가? 내가 자네이고 자네가 곧 나인데, 내가 어찌 자네 속을 모르겠나?”
남궁적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가? 그럼!”
말을 길게 이을 것 같던 남궁적이 신형을 화살처럼 폭사시켰다. 기다렸다는 듯이 현당의 천인혈이 이를 받아쳤다.
콰르르.
한창 문당을 점령하고 정리를 하던 사람들은 산 너머에서 들리는 폭음에 깜짝 놀랐다.
“진짜 싸움은 저기에서 벌어지고 있었군!”
독고진이 고개를 흔들었다.
“가봐야겠어.”
쓸데없이 독고진이 나서는 것을 모용곽이 말렸다.
“쓸데없이 나서지 말고 여기 정리나 먼저 끝내거라. 괜히 나섰다가 방해나 될라…….”
모용곽은 현당은 쳐다보지도 않는데 독고진이 모용미를 찾아온 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그를 핀잔하고 나섰다.
한차례 격동이 있은 후 조용했다. 남궁적이 쓰는 검법과 현당이 쓰는 도법이 모두 남궁세가의 무공이었기 때문이다. 남궁적이 움직이기 전에 현당이 반응하고 있었고, 현당이 공격하기 전에 이미 남궁적은 현당의 초식을 파해하고 있었다. 게다가 남궁적이 지금 펼치는 것은 검맹 남궁덕의 용봉록에 담겨 있는 용봉쌍련이었다.
두 사람의 신형이 일 장 이상이나 벌어졌다.
도기와 검기가 두 자루의 칼과 검이 서로 몸을 비비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만나지 않아도 두 병기는 서로의 기운을 뿌리면서 초목산천을 유린하고 있었다.
황폐화. 더 말이 필요 없었다.
현당과 남궁적이 충돌을 일으키는 그 곳은 말 그대로 무너지고 붕괴되고 뒤집히면서 황무지로 변하고 있었다.
서로 멀어지기만 하던 두 사람의 신형이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폭사되며 하나로 합쳐졌다.
촤르르.
오랜만에 도와 검이 몸을 비비며 진동을 일으켰다. 남궁적의 용봉검이 갈라지며 또 한 자루의 검이 튀어나왔다. 천인혈로 한 검을 막고 있었지만 도신을 타고 미끄러지는 또 한 자루의 검은 막을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당의 허리에도 한 자루의 단도가 더 걸려 있었다. 애초에 천인혈과 짝을 이루는 단도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단도가 튀어나왔고, 때마침 모습을 드러낸 단도가 용검에서 갈라진 봉검을 쳐냈다.
“어떻게 알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