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무사-159화 (159/175)

# 159

<159화>

순간, 서문휘는 발견할 수 있었다. 조각조각 쪼개진 언월도의 잔해들이 비무대 위에 널려 있었다.

‘이, 이런…….’

서문휘의 마지막 일초를 완벽하게 막고 그것을 고스란히 퉁겨낸 단목기는 서문휘에게 승리를 양보하고 ‘져준 것’이었다.

‘젠장…….’

승리를 주웠다는 생각에 치욕으로 몸을 떨고 있는 서문휘에게 세상 사람들의 찬사가 쏟아지고 있었다.

“우희.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놀란 사람은 여기 또 있었다. 잡아먹을 듯이 우희를 노려보면서 남궁적이 물었다.

“아니, 어떻게 무사 단목기가 서문휘에게 패할 수 있지? 저건 실력으로 진 게 아니라 져준 거라고. 직접 두 눈으로 봐도 모르겠나?”

우희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도 똑똑히 봐서 알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 도를 거두는 바람에 밀려드는 기파(氣波)를 이기지 못하고 언월도가 산산조각이 나는 것을. 그리고 그 기파의 압력에 튕겨나가는 단목기의 신형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목격했다.

범인은 단목기가 공격을 막지 못해서 튕겨나갔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단목기가 도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대로 밀어냈다면 관중석에 메다꽂힌 사람은 단목기가 아니라 서문휘였을 것이다. 분명히 단목기는 다 이긴 경기를 마지막 순간에 도를 거둠으로써 지는 연기를 했다.

‘왜?’

우희는 자문했다. 냉철한 두뇌로 단목기가 비무에 패함으로써 얻게 되는 이익을 빠른 속도로 계산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몇 번에 걸쳐 머릿속으로 손익계산서를 작성해 보아도 손실 난에 기록되는 것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이익 난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드러나는 이익이 없음에도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 비무에서 지는 연기를 했다면 분명 이면 계약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단목기와 서문휘, 어쩌면 다른 사람에 의해 우희가 알 수 없는 무엇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퍼뜩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

‘현당. 현당이야!’

그렇게밖에 생각이 되지 않았다. 무공은 뛰어날망정 정략이라는 것은 전혀 모르는 단목기였다. 그런 단목기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서문휘와 밀약을 맺었을 리 없었다. 이 모든 것은 또 다른 사람이 만든 작품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현당이 이것으로 무엇을 얻었을까 생각하던 우희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기 시작했다.

“뭐야? 뭔데?”

남궁적이 우희를 다그쳤다.

떨리는 목소리로 우희가 대답했다.

“무사 철벽 단목기가 우리와 잡은 손을 놓았어요!”

이삼이 더욱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어, 어떻게? 왜?”

우희는 짧게 대답했다.

“현당!”

굳이 긴 설명이 필요 없었다. 현당이라는 두 글자만으로도 그의 능력과 권모술수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 사이에 거래된 내막은 몰라도 현당이 관여했다고 가정할 경우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충분한 설명처럼 느껴졌다.

남궁적이 실눈으로 우희를 노려보았다. 한참을 그녀만 노려보면서 거친 숨만 내쉬던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역시 놈을 잡아야겠어! 놈이 강호를 활보하는 이상 제대로 일이 될 리가 없어.”

남궁적이 이삼을 바라보며 턱짓을 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이삼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도록 우희의 소매를 붙잡았다.

*  *  *

이건용의 포목점으로 장이가 찾아왔다.

“받아라, 너희 점주에게 전하는 서찰이다.”

장이는 포목점의 점소이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편지 겉봉에는 현당 친전(親傳)이라고 쓰여 있었다. 편지를 받은 점소이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 사람이 저희 점주님이라구요? 뭔가 착각하신 것 아닙니까? 우리 점주님은 이 건자…….”

장이가 고개를 흔들었다.

“점주가 바로 금질 이건용이라는 것도 모르고 찾아온 줄 아느냐? 하지만 점주님에게 이 편지를 전하면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장이는 막무가내로 편지를 점소이에게 넘겼다.

“행여 이 편지가 점주에게 전해지지 않는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을 것이다. 개중에 어쩌면 너희들도 포함될지 모르는 일이고…….”

장이는 금방이라도 점소이의 목을 물어뜯을 맹수처럼 이를 드러내며 키득거렸다. 섬뜩한 느낌에 점소이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편지를 건네받았다.

*  *  *

우희는 단목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뭐라고 변명이라도 할 줄 알았건만 단목기는 그녀와 마주하고도 아무 말도 없었다.

“왜 그랬죠?”

결국은 우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서문휘가 무엇을 약속해 주던가요?”

단목기는 침묵했다.

“현당이 단목가를 다시 세가로 부활시켜주기라도 하겠다던가요?”

여전히 단목기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그래서 잃는 게 무엇인가는 생각 안 해보셨나요?”

단목기는 더 듣고 싶지도 않다는 듯 우희의 시선을 외면했다. 우희의 눈에 측은한 심정이 담겨 있었다.

“무사께서는 교의 기대를 저버린 꼴이 되었습니다.”

우희는 한숨을 내쉬며 하고 싶지 않은 말을 해야 하는 것처럼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상황 판단 후에 교에서 적절한 벌이 내려질 것도 아시겠지요.”

처음으로 단목기가 반응을 보였다. 콧방귀를 뀌면서 고개를 돌렸다.

그것으로 필요한 말은 다 한 것 같았다. ‘벌이라고? 누가 나를 벌한단 말인가? 내가 그것을 두려워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나는 단목가의 가주 단목기다’라는 말이 그의 행동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것도 거부하신다면, 결국은…… 결국은 사형은 그곳으로부터 버림받겠지요.”

순간, 단목기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정면으로 우희를 바라보면서 되물었다.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그것이라는 생각은 안 해보았나?”

단목기의 어조에 격랑의 파도가 느껴졌다.

“이것으로 나는 버림받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찾은 것이다.”

그 표정을 본 우희의 머릿속으로 순간적으로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고사성어가 떠올랐다.

단목기는 팽 당하기 전에 먼저 팽한 것인지도 몰랐다.

*  *  *

이건용은 현당에게 축배의 잔을 건넸다.

“대단하군. 그 모든 경기의 결과를 다 맞추다니!”

현당은 이건용이 건네는 잔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계획된 공연이었기 때문이지. 시합이 아니라…….”

이건용이 건배라도 제안하는 것처럼 현당의 눈높이로 잔을 치켜들었다.

“그래도 남들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자네만은 그것을 파악하지 않았나? 게다가 공연이라는 그것도 각본을 자네가 수정까지 하면서 말이야…….”

“재미가 없으면 볼 맛이 나나?”

이번에는 현당이 잔을 눈높이로 치켜들었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잔을 들이켰다.

“이제 어쩔 것인가?”

“어쩌긴! 계속해서 놈들의 수족을 잘라내야지.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몸통과 만날 것이 아닌가?”

이건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다음은 누구 차례인가?”

“우선 놈들의 반응을 기다려야지. 놈들이 십여 년을 준비해 온 모든 것이 이번 한 번에 송두리째 날아갔네. 남부맹에 문사 무사를 심고, 간세를 심어두고 한 것이 다 왜라고 생각하나? 바로 남부맹을 그들의 뜻대로 좌지우지 하겠다는 속셈이었지. 하지만 그런 계획이 맨주로 서문휘가 자격을 취득함으로써 보기 좋게 빗나갔지. 자, 그럼 어찌 될까? 남부맹에 심어둔 문사, 무사 두 중요 인물 중에서 무사가 놈들을 배반했네. 당연히 놈들은 조치를 취하겠지. 누가 움직일까? 남부맹에는 참모가 세 사람 아닌가? 문사 우희 나연희, 무사 철벽 단목기. 이 두 사람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만 나머지 한 사람, 책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진 바가 없네. 느끼는 바로는 우희 역시 그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 같아. 내 생각에는 무사가 떨어져나가면, 책사가 드러날 것이야. 그럼 그때 그것을…….”

현당은 내려놓았던 잔을 낚아챘다.

“잡아채야지! 그럼 몸통이 나타날 거야.”

이건용이 현당을 바라보며 믿음직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현당을 향해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나저나 어떻게 단목기를 설득할 수 있었나? 난 그게 정말 궁금하네. 오랜 기간 그들에게 포섭되어 있던 단목기였을 텐데 말이야.”

현당이 술 상 위로 종이를 한 장 꺼냈다.

“최근에 작성한 목록이네.”

거기에는 세가의 이름과 명단이 적혀 있었다. 남궁세가에는 남궁적, 모용세가에는 모용탄, 서문세가에는 공생, 독고세가에는 독고진이 쓰여 있었다. 이 외에도 단조문의 오룡, 문당의 주근혜와 이삼, 장이 등 여러 사람들의 이름도 보였다.

“이들이 드러난 사람들일세. 이 외에도 더 있을 것이야. 그런데 보게. 예전부터 활동하던 사람이 바로 문사 우희와 무사 단목기일세. 이삼이 나타나기 전에는 아마도 이 둘이 최상급자였을 것이야.”

현당은 손끝으로 이삼을 가리켰다.

“그런데 얼마 전에 놈들은 문사 우희보다 더 높은 사람으로 이삼을 파견했네. 결국 문사나 무사의 역할과 범위가 축소되었겠지.”

현당은 다시 남궁적의 이름을 가리켰다.

“또다시 이번에는 남궁적이 놈들의 사람이 되어서 돌아왔네. 그런데 남궁적이 처음부터 그곳 사람이었을까? 나는 아니라고 보네. 그랬다면 애초에 주화입마에 빠지지도 않았을 것이고, 굳이 나라는 사람을 살려내서 일을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야. 결국 남궁적은 놈들에게 포섭된 지 고작 육 개월밖에 안 되는 신참내기였을 거야. 그런데 문제는 육 개월짜리 남궁적이 오히려 문사나 무사뿐만 아니라 이삼보다 더 높은 계급장을 달고 왔다는 것이야.”

현당은 이건용을 빤히 쳐다보았다.

“입교한 지 고작 육 개월밖에 안 되는 놈이 십수 년 교를 위해 충성했던 단목기보다 상급자로 내려왔다. 자네가 단목기라면 어떠했을 것 같은가?”

“흐음…….”

신음 소리를 내면서 이건용이 턱을 쓰다듬었다.

“배신감을 느꼈겠지!”

“그래. 무사 단목기가 그들을 배반하기 이전에 그들로부터 배반당한 것이네. 그렇다면 단목기는 무엇을 해야 할까?”

현당이 이제 설명이 다 끝났다는 듯이 허리를 폈다.

“단목기가 마지막 비무에서 이겨서 남부맹의 맹주가 될지라도 결국은 그들의 꼭두각시에 불과하지. 그리고 언제 그들은 또 단목기로부터 맹주 자리를 빼앗을지도 몰라. 토사구팽당할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 전에 먼저 팽하는 수가 있지. 난 단목기에게 그 기회를 주었을 뿐이야!”

이건용이 혀를 내둘렀다.

“부탁이 있네.”

“응?”

현당은 다시 목록에 있는 사람들을 손으로 가리켰다.

“무사 단목기가 배반을 하기 시작했으니 이제 이들이 움직일 거야. 교에서는 어떻게든 단목기에게 조치를 취할 테고. 그러기 위해서 사람들이 움직이겠지. 그럼 이들을 쫓다보면 놈들의 몸통과 연결될 것이네. 그래 주게.”

이건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대신에 나도 부탁이 있네.”

현당이 이건용을 바라보았다.

“나도 자네를 배반하지 않을 테니 자네도 나를 배신하지 말아주게.”

현당은 깜짝 놀랐다.

“그건 무슨 소린가?”

“자네같이 무서운 사람을 적으로 둔다고 생각하니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잘 것만 같아서 말이야.”

“사람, 말하는 것 하고는…….”

현당이 특유의 싱그러운 미소로 이건용의 너스레를 받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현당과 이건용이 몇 가지 수에 대해 논의를 할 즈음 밖에서 이건용을 찾아서 사자가 왔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이건용이 다시 돌아왔을 때 그의 손에는 서찰이 한 장 들려 있었다. 겉봉에 쓰인 ‘현당 친전’이라는 네 글자가 유난히 크게 보였다.

“장이가 들고 왔다는군!”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반응에 현당이 눈을 크게 떴다.

“내게? 하긴, 지금 강호와 나 사이를 연결하는 유일한 선이 자네이고, 자네가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그들도 알 터이니, 내게 연락을 취하려면 자네를 통하는 수밖에 없겠지. 아마도 우희라면 예전에 자네가 누구인지, 그리고 자네 뒤에 누가 있는지 분석을 해놓았을 거야.”

심드렁한 표정으로 이건용이 서찰을 내밀었다.

“오기 전에 확인해 보았네. 독이나 무슨 수작을 부린 흔적은 없는 것 같으이.”

“그런 조잡한 수작을 부릴 정도로 어리석지 않아, 우희는.”

현당은 봉서를 뜯고 안의 편지를 꺼냈다.

“무슨 내용인가?”

읽어본 현당이 편지를 이건용에게 내밀었다. 보낸 사람은 우희로 되어 있었다. 위험에 처해 있으니 도움이 필요하다. 모일(某日) 모처(某處)에서 만나자는 간략한 내용이었다.

이건용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호오. 배교의 우희가 자네에게 도움을 청하다니! 이건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군.”

“가짜야.”

“응? 가짜?”

현당이 미소로 이건용의 말을 받았다.

“우희는 절대로 남에게 도움을 청할 사람이 아니야. 하지만…….”

현당이 편지를 다시 받아서 술상 위에 올려놓았다.

“편지의 내용은 진짜일 것 같군.”

“그건 또 무슨 소린가?”

현당이 편지의 글귀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위험에 처했다는 구절 말이네. 이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야. 무사 단목기가 남부맹의 맹주 자리를 박차고 내던져 버렸네. 그럼 더 이상 그들에게 단목기는 쓸모가 없어졌어. 게다가 이미 더 좋은 남궁적이라는 패가 생겼으니 굳이 죽은 패에 미련을 둘 필요가 없겠지. 간단히 단목기를 버릴 수도 있겠지. 그러면 버리기 이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쓸 생각을 갖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단목기는 이제 곧 위험에 처할 것이네.”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인가?”

“단목기만 버릴까? 단목기가 배반을 했으니 단목기와 연관이 있는 문사 우희 나연희 역시 의심을 사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오호! 그래서 편지를 우희가 보냈다는 것은 거짓이지만 문사 우희가 위험에 처했다는 내용은 진짜란 말이군.”

“그렇지.”

이건용이 소리를 죽이며 웃음을 삼켰다.

“큭큭큭. 미련한 놈들이군. 그런 것을 알 자네인데 자네가 그런 꾀에 속아 넘어가리라고 생각하다니!”

현당이 정색을 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나는 갈 것이네.”

“아니, 왜?”

현당의 말에 이건용이 깜짝 놀랐다.

“그러니까 자네는 지금 그것이 함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제 발로 놈들의 아가리에 뛰어들겠다는 소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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