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
<155화>
서문장미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 놀라움은 금방 사라졌고 대신 비웃음만 자리했다.
“하아! 독? 무슨 독?”
그녀는 의, 술, 기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명가, 서문세가의 장녀였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독에 중독되었다고? 그 말은 화타가 병에 걸렸다는 소리나 매한가지였다.
“먹거나 마시거나 바르거나…… 그런 독은 해독약이라도 있지, 당신의 독은 그런 것으로 치료가 가능한 것이 아니오. 오로지 당신의 굳은 각오와 부단한 수련을 통해서만이 해독할 수 있소. 아니 해독은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르오. 단지 중독으로부터 벗어날 뿐…….”
너무나 차분한 공생의 말에 서문장미는 반신반의하게 되었다. 조용히 그의 말을 듣기만 했다. 그런 독이라면 중독될 수도 있었다.
“당신이 중독된 독은 조련제마공, 다른 이름으로는 흡정대법이라는 내공 독이오.”
순간, 서문장미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럴 가능성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단지 설마하고 있던 것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남궁 공자가 배교의 금지된 무공을 익혔다는 소린가요?”
공생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그럼요?”
서문장미는 공생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히 그녀가 사랑을 나눈 상대는 남궁적이었다. 따라서 조련제마공을 익힌 사람은 남궁적이어야 했다.
“당신을…… 그러니까 당신과 함께 한 그 사람은 남궁적이 아니라 그동안 남궁적을 대신했던 현당이라는 자요. 그래 봤자 결국 그들이 조련제마공을 익혔다는 사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오만, 여하튼 당신이 고작 하룻밤을 나눈 그 남자에게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은 그가 조련제마공을 익혔기 때문이고, 당신이 살기 위해서는 그것을 깨달아야 하오.”
“잠깐!”
서문장미는 혼란스러웠다. 그녀가 사무치도록 그리워하는 사람이 남궁적이 아닌 그의 대역이었다는 공생의 말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남궁적의 대역이라고요?”
“반년 전에 남궁적이 주화입마에 빠졌다는 소문이 돈 것은 당신도 알 것이오.”
공생은 설명하기 시작했다.
굳은 단전을 풀기 위하여 배교에서 조련제마공을 익히고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정기를 나누어 받아야 했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동안 우희가 발굴한 현당이라는 자가 지난 반년 동안 남궁적의 역할을 대신한 것 등에 대해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그런 현당이라는 자가 어떻게 조련제마공을 익혔는지는 나도 금시초문이오. 하지만 당신과 사랑을 나눈 상대는 남궁적이 아니라 현당이고, 그때까지만 해도 남궁적은 이곳으로 돌아오는 중이었소.”
“그러니까…….”
서문장미는 공생의 말을 도중에서 끊었다.
“그러니까 내가 흠모하는 남자가 남궁세가의 소가주가 아니라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는 출생도 알 수 없는 도둑놈이고, 그놈한테 채정당했다는 말인가요? 지금 나보고 그 말을 믿으라고요?”
“그렇소!”
“하!”
서문장미는 말 같지도 않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잠시 다른 곳을 바라보던 그녀는 다시 공생을 바라보았다.
공생은 한 점 흔들림 없는 표정을 지으며 확신을 주었다.
“당신…… 당신은 그것을 어떻게 알고 있지요? 아버지도 모르는 일을!”
공생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그곳 출신이기 때문이오.”
제47장 호랑이굴로 들어가야지
단목가의 총관 홍초는 의외의 손님 방문에 깜짝 놀랐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서둘러 가주께 소가주께서 오셨다고 전하겠습니다.”
현당은 느긋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홍초의 손을 잡았다.
“그럼 부탁하네.”
순간, 홍초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의 수중에 묵직한 무언가가 쥐여졌던 것이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생김새가 분명 배 모양을 한 틀림없는 원보였다. 금원보든 은원보든 상관없이 이 정도의 무게면 적어도 열 냥은 넘을 듯했다.
‘역시 남경 제일의 세가로세!’
절로 감탄성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하마터면 입 밖으로까지 튀어나올 뻔했다.
“허헛. 저, 기다리시는 동안 차라도 한 잔 내올까요?”
“거, 좋지…….”
현당이 안면 가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차는 뭘로?”
“맹물만으로도 감지덕지할 지경인데 무슨 차라고 가릴 처지가 되나, 내가!”
현당의 말에 홍초는 짐짓 느긋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남궁세가의 소가주! 저런 여유는 역시 있는 집 자식이니까 나오는 거야!’
불현듯 자신이 모시고 있는 단목기에게 생각이 이르렀다.
마치 목석으로 만든 사람 모양 언제나 엄하기만 한 얼굴에 기복이 하나도 없는 단목기였다. 홍초는 그가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유복한 환경에서 지낸 남궁세가의 소가주가 부럽기만 했다. 그리고 남궁세가의 총관을 맡고 있는 동가륜 왕람도 부러웠다.
“소식은 안 전할 텐가?”
현당의 말에 실태를 깨달은 홍초는 깜짝 놀랐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내 서둘러서…….”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홍초의 모습을 보면서 현당은 생각했다.
‘저놈은 배교에서 나온 놈이 아니로군. 그랬으면 저 정도로 당황하지는 않았을 거야.’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현당은 은원보를 소비했고, 확인한 이상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총관이 아니라면 적어도 단목가에는 단목 형제 외에는 배교에서 나온 사람이 없었다.
잠시 후에 돌아온 홍초는 현당을 단목기의 방으로 안내했다.
“오랜만이로군.”
단목기가 손으로 가리키며 현당에게 의자를 내밀었다.
“뭐가?”
앉으면서 현당이 되물었다.
“오랜만이라고. 아까 비무장에서 보고도 인사도 못 했지. 네가 출전한다는 소식을 미리 받지도 못해서 말이야. 한…… 일 년도 넘은 것 같은데?”
현당은 특유의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아, 그때 그건 내가 아니고…… 아직 두 달까지는 안 된 것 같은데? 우리가 다시 마주 보는 게!”
순간, 단목기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내 무슨 지시라도 있을까 싶어 대기하고 있던 총관 홍초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더 시킬 일이 없으니 자리를 피해달라는 소리였다.
홍초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끝까지 눈으로 좇아서 확인한 후에야 단목기가 속삭이듯 말했다. 두 눈으로 확인했음에도 조심하는 것이 중한 이야기임이 분명했다.
“현당이로군, 적 아우가 아니라…….”
현당이 두 손의 손가락 끝을 서도 맞대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한동안 말없이 단목기가 현당을 노려보았다.
“정말 대범하군. 아무도 자네가 나를 찾아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거야.”
이번에 현당은 손가락 끝으로 두들기듯이 양손의 손가락을 붙였다 떼었다를 반복했다.
“응.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도 여기 올 생각을 못 했었지.”
단목기가 의자 뒤로 깊숙이 등을 묻고 손으로는 입술을 쓰다듬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현당의 내심을 읽으려는 듯 눈으로는 현당의 일거수일투족을 좇고 있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단목기는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현당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데 왜 왔나? 행여 내가 아랫사람들을 풀어서 자네를 잡기라도 하면 큰일 아닌가?”
“그럴 일은 절대 없지!”
“없다고?”
“그래. 첫째로 자네는 동원할 아랫사람들이 없고, 아! 동생이 하나 있군. 둘째로 자네는 나를 잡을 생각이 없네.”
다시 침묵이 흘렀다. 이번에는 단목기가 현당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지만 현당은 여전히 싱그러운 미소만 그리고 있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왜긴! 그래 봤자 자네가 얻을 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지. 비록 자네가 그곳에서 많은 것을 얻었다 하더라도 자네는 그곳 태생이 아니지 않나? 자네는 뼛속까지 단목가의 사람이지, 그곳의 꼭두각시가 아니라는 말이네.”
순간적으로 단목기의 눈빛이 흔들렸다.
“들게.”
현당에게 차를 권한 후 단목기는 잔을 잡아갔다. 그것으로 둘 사이에 흐르던 어색한 침묵은 깨졌다. 냉랭한 기운이 사라지고 둘은 다정하게 마주 앉아서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래,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나?”
목을 축인 단목기가 현당을 바라보았다.
“맛있군. 자네에게 길을 알려주기 위해서네.”
현당이 잔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길이라? 무슨 길?”
“그거야 당연한 것 아닌가? 자네도 슬슬 독립을 해야겠지. 언제까지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할 수는 없지 않나?”
현당이 잔을 내려놓으면서 입술을 닦았다.
다시 잔을 잡으려던 단목기가 멈칫거렸다. 설마 불쑥 찾아온 현당이 그 이야기를 꺼낼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현당이 찾아오리라는 것 자체를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자네는 지금 나보고 그들을 배신하라는 건가?”
“아니지!”
현당이 검지를 치켜들고 좌우로 흔들면서 고개도 같이 흔들었다.
“배신은 그들이 먼저 했네. 자네를 놔두고 다시 남궁적을 살려내지 않았나? 문사, 무사를 모두 자기네 사람으로 임명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하나뿐일세. 바로 맹주를 자기편 사람을 앉히는 것 말일세.”
순간, 단목기의 눈이 부릅떠졌다.
“뭐라? 그건 우희가…….”
당연하다는 듯이 현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건 우희의 계획이 아니지. 그러나 지금까지만 우희의 계획대로일세. 남궁적과 이삼의 등장을 제외하고. 아마 내가 알기로는 이삼도 그곳에서는 자네보다 상급자인 것으로 아는데…… 안 그런가? 그런데 남궁적은 또 이삼에게 하대를 하더란 말이지. 우희와 자네가 다 차려놓은 밥상에 누가 앉을지 어찌 아나?”
단목기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럴 일은 없을 것일세. 우희는…….”
현당이 맞장구를 쳤다.
“맞아. 우희가 있는 동안에는 그런 일은 없을 거야. 하지만 그곳에서 우희에게 돌아오라고 한다면? 아니면 자네보고 돌아오라고 명령한다면? 만약 자네 대신 새로 그곳에서 맹주를 보낸다면? 그럼 어떻게 되지? 단목가는? 그리고 자네가 맹주로 있는 남부맹은?”
순간, 단목기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설마 그럴 리가…….”
“그래. 물론 그런 일은 없겠지. 자네가 있는 동안에는 말이야. 하지만 자네가 있는 동안이야. 자네가 없다면…… 그때는 능히 가능할 일이지. 그런 생각은 안 드나?”
단목기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이제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현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지금이 정말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드네.”
“좋은 기회라니?”
“자네가 그들과 확실한 선을 그을 수 있는 기회.”
“선을 그을 수 있는 기회?”
“그래. 난 더 이상 너희들의 괴뢰(傀儡 : 꼭두각시)가 아니다, 나는 단목가의 가주이다, 언제나 너희들이 바라는 대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선언을 할 수 있는 기회.”
“어떻게?”
“어떻게는? 유혹이 아무리 클지라도 자신의 의지로 그 유혹을 꺾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
심각한 표정으로 단목기가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나보고…….”
“그래. 바로 그거야!”
현당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심각한 얼굴로 굳어버린 단목기가 허리를 앞으로 숙였다. 그리고는 속삭이듯 물었다.
“그러면?”
그 정도 질문은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현당은 여전히 느긋한 표정으로 미소만 짓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네가 잃는 것이 없어야겠지. 그 다음은…….”
굳은 표정으로 단목기가 현당의 다음 말을 재촉했다.
“그 다음은?”
현당이 슬쩍 눈웃음을 쳤다. 마치 네 속마음을 나는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자네 생각에는 어떤가? 자네가 보기에 과연 그가 맹주로서의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길게 내뱉는 단목기의 호흡이 한숨처럼 들렸다.
* * *
현당은 단목가를 나와서도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고, 적어도 청군 ․ 홍군이 있어야 시합도 가능한 법이었다. 단목기를 설득하는 데 성공한 이상 서문휘를 설득할 일만 남았다.
서문휘는 대청 입구에서부터 남궁적이라고 알고 있는 현당을 맞았다. 안으로 한 발도 들여놓지 못하게 하려는 심산에서였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현당을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았다.
현당에게 할 말이 많았지만 서문장미의 일로 말 섞는 것 자체가 싫었다. 마음 같아서는 족쳐서라도 서문장미를 원래대로 돌려놓으라고 협박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불문에 붙이는 조건으로 맹주 선발 대회를 치루고 있고 서문세가의 장녀가 외간 남자와 정을 통하다가 채정을 당했다는 것은 가문의 수치이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서문휘는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있었다.
“네놈이 무슨 할 말이 있어서 나를 찾아온 게냐? 대승을 위해서 나보고 져달라고 하러 왔나?”
현당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그 반대입니다. 대승을 위해서 이기실 것이라고 말씀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현당의 입에서 튀어나와 순간, 서문휘는 눈을 크게 떴다.
“들어오게, 남궁세가의 소가주.”
그제야 서문휘는 현당을 가주의 집무실이 있고 서문세가의 대소사가 결정되는 본당으로 맞았다.
현당은 천천히 안으로 들어가면서 아무런 압력도 느끼지 못하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문휘는 그의 방문에 그 이상의 의미를 두고 있지 않았다.
현당이 서문휘와 마주하자 차가 나오고 다과가 마련되었다.
“자네는 양선을 좋아한다고 했던가?”
“그렇게들 알고 있지요.”
“그렇게라니?”
현당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서문휘는 현당의 존재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배교의 존재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으리라.
“그냥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건 그렇고…….”
서문휘가 현당에게 차를 내밀었다.
“대승을 위해서라? 자네의 생각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