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
<148화>
아직도 남궁진은 현당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생각에 어때? 가장 맹주 자리에 가까운 사람이 누굴 것 같아?”
“그거야 당연히…….”
남궁진은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찬이라고 말하려다 말았다. 그럴 기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남궁세가의 세력이 더 확장되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까? 오히려 막을 수 있다면 더 좋은 일 아닌가?”
“그, 그렇군.”
맞는 말 같았다. 다른 세가에서 남궁진이 남궁세가에 합류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면 막으려고 할 터였다.
“그런데 삼촌이 독자 세력으로 참가하는 것을 막으려 할까? 만약 막으면 분명히 남궁세가의 세력으로 흡수될 것이 뻔한데…….”
남궁진은 할 말을 잃었다.
처음에는 불가능해 보였지만 듣고 보니 가능할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수긍할 수 없었다. 헛물켜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누가 그것을 진행하겠나? 내가 할 수도 없고, 그럼 네가 할 것이냐?”
어느새 남궁진의 어투가 달라져 있었다. 말하는 품새가 벌써 조심스러워져 있었다.
“대회를 준비하는 문사 우희께서 그렇게 한다는데 누가 말리겠나? 오히려 환영할 일이지. 물론 남궁가주만 빼고 말이야.”
남궁진은 현당의 말에 이미 구 할 이상 넘어간 상태였다. 그렇게만 된다면 조카에게 무릎이라도 꿇고 매달리고 싶었다. 남궁적이 주화입마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뭐라도 있을 줄 알고 돌아온 남경이었지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덕분에 현당이 생부를 남의 집 가장처럼 말하고 있다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할 일이, 하고 싶은 일이 생긴 감격에 빠져 놓치고 있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내 모든 힘을 다 짜내볼 것이네.”
현당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럼 결정된 거야. 일정과 대진표가 나오면 문당에서 사람이 올 거야. 그러니까 준비하라고.”
전과 달리 남궁진은 현당-본인은 조카, 남궁적이라고 알고 있지만-을 멀리 문밖까지 배웅하고 나섰다.
* * *
천인장은 남궁적의 방문을 받고 한층 더 분주해졌다.
남궁적은 망설이지 않고 천인신수를 만나러 들어갔다. 지금 그의 상태가 어떠한지 확인할 생각도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천인혈을 다시 가져가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안으로 들어갔다.
“밥 내놔!”
천인신수가 다짜고짜 남궁적을 향해 소리쳤다.
“에?”
“밥 내놓으라니까…….”
서둘러 달려온 천인신수가 남궁적의 소지품을 뒤졌다. 당황한 남궁적이 그의 손을 뿌리쳤지만, 어찌 된 늙은이의 손아귀 힘이 그리도 센지 제대로 뿌리치지도 못했다.
“놔, 놓으라고…….”
소리치다가 결국은 천인신수를 밀쳤다.
쿠당.
그리고 한 사람이 바닥에 엎어졌다. 그런데 엎어진 사람은 천인신수가 아니라 오히려 남궁적이었다.
“어?”
남궁적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상대는 늙어서 허리가 꼬부라진 꼬장꼬장한 대장간 늙은이에 불과했다. 남궁세가의 무공뿐만 아니라 그곳의 흡정마공까지 익힌 남궁적은 이런 늙은이 하나 처리하지 못하랴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오히려 당한 것은 남궁적이었다.
순간, 천인장이 남부맹과 정무련 사이에서도 건재할 수 있는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천인장은 천하를 호령할 만한 힘이 감추어져 있는 대장간이었다.
천인장주가 자신을 눈 아래로 보고 기어오르는 자신에게 분노를 느끼는 것도 다 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자신이 딱 그 꼴이었다.
남궁적은 당황한 눈으로 망령이 든 늙은이를 올려다보았지만, 보이는 것은 초점이 잡히지 않는 흐릿한 눈빛뿐이었다.
“뭐야? 먹을 게 하나도 없잖아.”
구시렁거리면서 천인신수가 멀어져갔다.
“어? 이, 이봐요.”
남궁적은 소리쳐 천인신수를 불렀다. 그가 남궁적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호패를 채가고 있었다.
“어서 내 호패 돌려주시오.”
남궁적이 천인신수의 소매를 잡았다.
“안 돼. 내 거야.”
천인신수는 몸을 돌렸다.
“내 거라니깐.”
“아니야. 내 거야, 내 거. 내 거라고!”
천인신수가 장난감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 소년처럼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때마침 문이 열리고 천인장주가 들어왔다. 천인신수가 천인장주를 보더니 쪼르르 달려갔다.
“아빠…… 저 형이 내 장난감을 빼앗아가려고 해!”
천인장주가 천인신수를 안았다. 마치 아버지가 자식을 보듬는 것처럼 보였다.
“공자도 털리셨구려. 들어오려거든 미리 이야기를 하고 들어올 것이지, 왜 허락도 없이 들어왔다가 이 지경을 만드시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천인장주가 씁쓸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전부터 어른들이 말씀하셨소. 내가 선조부(先祖父)와 판박이처럼 흡사하다고 말이오. 아마도 엄군께서 의식을 놓으시면서 어릴 적의 순간으로 돌아가시나 보오.”
어린아이로 돌아간 천인신수를 보며 남궁적은 할 말이 없었다.
“아, 이놈아 어른을 봤으면 인사를 해야 할 것 아니야, 이놈아.”
이번에 천인신수는 대뜸 천인장주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예, 아버지. 좀 기력을 차리셨습니까?”
“누가 나보고 인사를 하라고 했느냐, 이놈아. 저기 와 계신 손님이 안 보이느냐?”
천인신수가 이번에는 남궁적을 가리켰다.
“예, 아버지. 저 손님이 들어오실 때 벌써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냐? 그럼 그렇다고 진즉에 이야기를 할 것이지. 그럼 어여 나가서 술상부터 챙겨오너라. 저기 손님과 오랜만에 대작을 해야겠다. 왔으면 앉지 뭐 하나, 이 검에 미친 바보 놈아!”
천인신수의 말에 남궁적은 또 한 번 놀랐다.
검에 미친 바보란 바로 검맹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검맹 남궁덕, 바로 남궁적의 할아버지를 가리키고 있었다. 천인신수의 아들이 그의 할아버지를 닮았듯이 남궁적도 남궁덕을 닮았다. 천인신수는 지금 한창 때의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아랫것들을 시켜서 지금 즉시 상을 봐 올리겠습니다, 아버지.”
천인신수가 남궁적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자기 옆자리를 가리켰다.
“뭐 하나, 와 앉지 않고!”
남궁적은 머뭇거렸다. 언제 또 사람이 바뀔지 모를 일이었다.
천인장주가 눈짓으로 남궁적에게 신호를 보냈다.
“네놈은 가서 술상이나 가져오고. 남을 시켜서 언제 상이 들어오냐?”
“예. 당장 대령하겠습니다, 아버지.”
천인장주가 남궁적에게 눈인사를 하고 나갔다. 다시 돌아올 때까지 아버지를 잘 부탁한다는 눈짓이었다.
“아참! 이제 생각났네. 자네, 나보고 검을 한 쌍 만들어 달라 하지 않았나? 내 준비해 놓았네.”
천인신수가 몸을 돌렸다.
“자네도 보면 알겠지만 내가 지금까지 만든 물건 중 최고의 물건이 만들어졌네. 자네가 지금 창안한 무공이 용봉쌍련이라 했지? 그것 한 번 대단하더군. 아니 어떻게 검가의 사람이 권장을 만들 생각을 다 했나? 역시 자네는 내가 본 사람 중에 제일가는 천재가 분명하이. 그런데 그것을 다시 검법으로 바꾸겠다고? 그래서 그에 적당한 놈으로 내가 만들었지. 내 생각에는 이게 딱 거기에 맞는 놈일세. 내가 어디에 두었더라?”
남궁적은 깜짝 놀랐다.
그의 할아버지 검맹 남궁덕이 용봉쌍련이라는 무공을 창시한 것도 모르고 있었다. 나름대로 남궁세가의 모든 무공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용봉쌍련이라니!
생각해 보니 그의 조부 검맹 남궁덕은 당대의 제일가는 검법가였다. 그런데 그런 사람의 무공의 족적이 남궁세가에는 없었다.
그제야 남궁적은 용봉쌍련이라는 무공이 일부러 매장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싫어 하셨지.’
“그런데 내가 어디다 두었더라. 분명히 여기다 두었는데. 응? 이건 또 뭔가?”
천인신수가 도 한 자루를 들고 몸을 돌렸다.
순간, 남궁적이 눈을 빛냈다.
바로 천인혈이었다. 장도가 도실에 얌전히 꽂혀서 천인신수의 손에 놓여 있었다.
“이, 이건 내가 만든 도가 아닌데? 아니 누가 이런 도를 만들었단 말인가?”
천인신수가 고개를 들었다.
흠칫!
탐욕 어린 눈으로 천인혈을 내려다보던 남궁적은 깜짝 놀랐다. 어느새 형형한 안광으로 돌아온 천인신수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때 한 번 혼이 났으면 되었지, 이게 네 것도 아니거늘 무슨 미련이 있어서 또 왔느냐?”
바뀐 게 눈빛만이 아니었다. 조그만 키에 잔뜩 쪼그라든 체구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전성기 시절의 천인신수가 지금은 또 현재로 돌아와 있었다.
“응?”
당황한 남궁적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천인신수는 몸을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해는 완전히 넘어가고 바깥은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 * *
역시 예상대로였다.
남궁적은 현당의 예상대로 천인장으로 향했다. 이제 곧 있을 맹주 선발 대회에 천인혈이라는 신병은 남궁세가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중요한 열쇠이기도 했다.
이미 천인혈에 대한 소문은 천인신수가 만들었다는 남경 천하 삼대 신검의 이름을 뛰어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남궁세가로서는, 그리고 남궁찬이나 남궁적으로서는 천인혈을 갖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상대에게 주는 위압감은 대단한 것이었다. 때문에 천인혈은 반드시 있어야 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이른 현당은 마음이 조급했다. 남궁진의 집에서 한달음에 여기까지 달려왔다. 하지만 천인장에 도착한 현당은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남궁진을 만나러 갈 때는 남궁적보다 늦어도 상관없었지만 천인신수를 만나러 갈 때는 그보다 빨라야 했다.
‘생각을 잘못했군. 먼저 천인신수를 만났다가 남궁진을 만나러 가는 거였는데…….’
현당은 땅을 치며 후회를 했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었다. 그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나 귀를 기울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마음이 조급해진 현당은 땅만 바라보며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생각할 것이 있는 탓에 함께 데려온 수하들도 저만치 떨어져 있게 했다.
‘천인혈의 보수 작업은 다 끝났을까? 그럼 천인신수는 도를 찾으러 온 남궁적에게 천인혈을 넘겨주고 있을까?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 남궁적이 가만있을까? 만약 천인신수가 천인혈을 주지 않는다면 남궁적은 어떻게 천인혈을 찾아갈까?’
그때였다.
현당은 자신을 노려보는 눈초리를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정면에서 평범한 황색 마의를 입은 젊은 남자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깜짝 놀라 현당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자신을 노리는 눈은 그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황색 마의를 따라 보이지 않는 감시의 눈초리가 하나 둘씩 늘어나고 있었다. 마치 황색 마의의 명령에 따라 그들의 행동도 달라진다는 듯이 보이지 않는 감시의 눈초리는 현당을 포위한 채 대기하고 있었다.
‘젠장. 방심하고 있다가 당했군.’
현당이 남궁세가의 호위로 변장시킨 일행을 한 발 떨어져 있게 한 이유는 바로 여기 담장 너머에 남궁적과 진짜 남궁세가 호위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마주치지만 않는다면 그들과 현당은 완벽하게 남궁세가 사람으로 위장할 수 있지만, 마주치는 순간, 허사가 된다.
현당은 그것만은 피해야 했다. 때문에 데리고 온 무사들을 한 발 멀리 대기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실수였다. 자신도 여기에 오면 안 되었다.
현당은 상황을 가늠해 보았다.
‘들켰나?’
긴장한 현당의 등줄기로 땀이 흘렀다.
현당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도움을 청하기에는 일행과 거리가 너무 멀었다. 장 행자가 자신을 노려보는 동안 현당을 감시하는 눈은 조금씩 늘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완전히 에워싸고 있었다.
어느 것이 진짜이고 어느 것이 가짜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두 개의 남궁적 일행……. 남경 거리를 활보하던 일행은 때마침 둘 다 천인장으로 향했다.
이런 기회가 어디 있을까!
그 소문이 벌써 놈들에게 들어갔던 것이다.
결국 두 무리가 향한 곳이 천인장이기에 놈들은 모든 힘을 이 주변에 집결시키고 있으리라. 어떤 것이 가짜인지 모르지만 둘 중 하나는 분명히 가짜니까. 진짜가 누구인지 가려내기만 한다면 나머지 가짜는 이 기회에 소탕해버릴 수 있었다.
‘그냥 달아날까?’
혼자였다면 가능했다. 남경 시내의 거리는 누구보다 더 잘 아니까. 하지만 그렇게 되면 뒤에 남은 무리들이 문제였다.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남궁세가의 복장을 갖추고 무작정 현당을 따라나선 그들이 염려스러웠다.
사냥감을 놓친 사냥개 떼의 화풀이 상대가 될 게 뻔했다. 만약 남궁적이 직접 손을 쓰려 든다면 그들은 뼈도 추리지 못하게 될 게 분명했다.
‘젠장. 완전히 당했군.’
정면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사람이 누구인지 현당도 알고 있었다.
‘장 행자!’
현당이 통평사로 정무련에 파견될 때 남궁찬이 함께 보낸 남궁세가의 인자 무사, 남궁가주의 그림자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어릴 때부터 남궁적을 봐온 장 행자만은 현당과 남궁적을 구분할 수 있었다.
양상군자 출신인 현당이 잠입, 은신, 탐색, 탈출이 전문이라면 장 행자는 은닉, 수색, 추적, 제거 등이 전문이었다. 그렇게 훈련된 사람이 바로 장 행자였다. 결국 현당의 극성인 자가 바로 정면의 장 행자였다.
몇 초의 시간이 흘렀을까?
현당과 장 행자의 주위를 에워싸는 눈초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마치 사냥꾼의 휘파람 소리를 기다리고 있는 사냥개 무리와도 같았다. 현당은 고개를 들어 정면의 장 행자를 바라보았다. 그가 바로 휘파람을 불 사냥꾼이었다.
싱긋.
이미 상황은 결정이 나 있는 상태였다. 현당은 끝까지 여유를 잃지 않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순간, 장 행자가 주변으로 눈길을 왼쪽으로 한 번, 오른쪽으로 한 번 돌렸다.
오랜만이라고 인사를 하려는 찰나 현당은 깜짝 놀랐다.
“놈이 언제 나올지 모릅니다, 소가주.”
“응?”
장 행자가 현당을 제지하며 주의를 주었다.
“옛정을 생각해서 기회는 한 번뿐이니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현당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맙네. 내 그 충고는 잊지 않도록 하지.”
남들은 몰라도 현당은 알 수 있었다.
현당은 이미 한 번 그의 목숨을 살려주었다. 뿐만 아니라 남궁찬이 그에게 복용시키고 있는 것이 독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더 이상의 중독을 예방시켜 주었을 뿐 아니라, 남궁세가가 자랑하는 보천환을 주면서 치료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지금 장 행자는 그 은혜를 갚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기회는 이번 한 번뿐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현당은 자신을 에워싸고 언제라도 발동할 수 있는 포위망이 빠른 속도로 해체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 장개, 다시 임무에 임하오.”
현당의 곁을 장 행자가 스치며 지나갔다.
“장개.”
현당이 다시 그를 불렀다.
장개가 현당을 돌아보았다.
“조심하게.”
장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가던 길을 다시 갔다. 행여 현당이 나타날 것을 대비하여 천인장 주위를 수색하는 그의 임무로 돌아갔다.
* * *
“내 칼이오.”
남궁적은 화가 났다.
“이게 어찌 네 도더냐?”
“내가 가져오지 않았소?”
“그거야 자격도 없는 네놈이 쓸 줄 몰라서 들고 온 것이지. 그럼 이놈아, 내가 딛고 있으니 이 세상이 내 것이더냐? 네가 들어온 천인장이 네놈 것이더냐?”
“이…… 썅!”
남궁적은 힘으로 강탈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없었다. 좀 전에는 방심하고 있다가 당했다 치더라도 아직까지 정신 나간 천인신수가 가져간 호패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저기, 어르신. 제가 바로 남궁세가의 장자, 적입니다.”
“누가 뭐래? 네놈이 태어났을 적에 내가 친히 네놈의 사주팔자를 뽑아 주었느니!”
“그러니까 그 천인혈은 제 도라는 말입니다.”
“이런, 미련한 것 같으니. 네놈 도라면 한번 뽑아봐라.”
천인신수가 도파 쪽을 내밀었다. 칼집의 끄트머리는 천인신수가 잡고 있었다.
‘누가 뽑으라면 못 뽑을 줄 알!’
남궁적은 망설였다.
전에 뽑히지 않았던 도가 이번에는 정말로 뽑힐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때문에 천인장에 온 것이 아닌가! 혹시 또 전처럼 뽑히지 않을지도!
남궁적은 조심스럽게 천인혈을 잡아갔다.
‘젠장…….’
이마에 핏줄이 돋으면서 얼굴이 시뻘게졌다. 아무리 잡아당겨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젠장, 젠장, 젠장!’
남궁적은 천인혈의 손잡이를 내팽개쳤다.
“안 뽑히지?”
얄밉게도 천인신수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스르릉.
그때까지 요지부동이었던 천인혈이 소리 없이 도실을 빠져나왔다. 조명을 받은 붉은빛의 천인혈이 요요한 광채를 뿌리며 실내를 환하게 비추었다.
“봐라. 이런 멋진 숙녀를 그렇게 다루면 되겠느냐?”
천인신수가 감탄 어린 눈으로 천인혈을 바라보았다.
“익!”
천인혈을 본 남궁적의 눈이 뒤집혔다.
다짜고짜 천인신수에게 달려들었다. 천인혈에 정신이 팔려 얼이 빠져 있는 늙은이 하나쯤은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놈!”
슈아악.
허공에 방패막이 쳐졌다.
콰하앙.
그리고 들리는 바위로 절벽을 들이받는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남궁적이 저만치 튕겨나가고 있었다.
안 되었다. 실력으로도 안 되고 있었다.
둘의 충돌로 바깥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미련한 놈…….”
천인신수가 바닥을 구르고 있는 남궁적을 향해 혀를 찼다.
“그런 심보로 이 아이를 다룰 수 있으리라 생각했더냐?”
“으아아.”
비명을 지르며 남궁적은 조련제마공을 끌어 올렸다. 방법은 늙은이를 죽이고 천인혈을 가져가는 것 하나였다!
꾸구구.
남궁적과 천인신수 사이에 공간이 접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버티고 있는 천인신수가 조금씩 그에게 끌려오고 있었다.
“놈!”
천인신수는 더 이상 끌려가지 않기 위해 바닥에 도를 꽂았다. 그것으로 천인신수는 버틸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움직이는 것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 천인신수가 오지 않자 이번에는 남궁적이 천천히 다가갔다.
“늙…… 은…… 이! 이제는 도를 내놓으실까?”
남궁적이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손을 내밀었다. 이제 조금만 더 뻗으면 천인신수의 정수리에 그의 장심이 닿을 찰나였다.
“그렇게 가져가고 싶으면 네놈이 뽑아가라.”
푸우욱.
천인신수가 천인혈을 자신의 가슴에 박았다.
와장창!
“사, 살인이다!”
남궁적은 놀라 고개를 돌렸다.
술상을 들고 오던 시비가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달아났다.
“남궁 공자가 태장주를 살해했다.”
우선은 달아나기로 했다. 그가 살인을 저지른 것은 아니지만 천인신수와 단둘이 있었고 눈앞에서 천인신수가 죽어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냥 갈 수도 없었다. 어쨌거나 천인혈은 가져가야 했다.
“익!”
당황한 남궁적이 천인혈의 손잡이를 잡고 잡아당겼다. 하지만 이번에도 뽑히지 않았다.
“익!”
순간, 남궁적과 천인신수의 눈이 마주쳤다. 빙긋이 웃고 있는 천인신수의 두 손이 천인혈을 잡고 있었다.
“제기랄!”
“넌…… 이 도를 빼지 못해. 넌 길에서 객사할 놈이야.”
밖이 더 소란스러워지고 있었다.
“젠장!”
소리치며 남궁적이 일어났다. 달아날 수 있는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정문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남궁적은 담을 넘었다.
* * *
“사, 살인이다!”
비명 소리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일몰의 광경을 어지럽혔다.
천인장 주위를 배회하던 현당은 깜짝 놀랐다.
‘누가 누구를?’
안에서는 진짜 남궁적이 노망든 천인신수를 만나고 있었다. 그 외에는 모두가 천인장의 형제들과 식솔들이었다.
‘한솥밥을 먹는 식구들끼리 피를 볼 일은 없잖아!’
현당은 깨달았다.
“기어코 일을 저지르고 말았군!”
현당은 신형을 솟구쳐 즉시 담장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