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무사-140화 (140/175)

# 140

<140화>

미리 파견 보냈던 장정으로부터 새로운 소식을 들은 이건용은 바로 내당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검은 장삼을 머리끝까지 눌러쓴 현당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놈이 움직였네.”

현당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디로 향하던가?”

“모용세가.”

일어나던 현당이 멈칫거렸다.

“모용세가? 정말인가?”

이건용도 현당의 질문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래. 가면서 콧노래까지 불렀다더군!”

어이가 없는지 현당은 한동안 멍하니 입만 벌리고 서 있었다.

“뭐 하는 놈인가, 남궁적이라는 놈은!”

적인데도 현당은 남궁적이 하는 행동에 화가 났다.

지금이 얼마나 복잡한 상황이고 할 일이 많은 때인데 인지하지 못하고 놀러만 다니고 있었다. 그것이 오히려 자신에게는 유리할 테지만 화가 나는 것은 현당도 어쩔 수 없었다.

현당은 지금이라도 당장 나갈 태세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어디를 가려나?”

“모용세가.”

“아니 거긴 또 왜?”

“남궁적이 익힌 무공이 뭔지 몰라서 그러나? 놈이 또 다른 살인을 저지르는 것을 막으려면 다른 방도가 없으이.”

“젠장. 걱정도 팔자군.”

이건용이 혀를 찼다.

“뭐 하나? 빨리 준비하지 않고?”

현당의 예상치 못한 말에 이건용이 놀라 소리쳤다.

“나도? 내가 왜?”

현당이 소리쳤다.

“그럼? 나 혼자 어떻게 가나? 난 지금 챙겨야 할 것도 많은데!”

얼떨결에 이건용은 현당을 따라나섰다.

“이번에는 자네가 끌게.”

이번에는 현당이 인력거에 올랐다.

“내가?”

놀란 이건용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내가 끄나?”

“젠장…….”

혀를 차며 이건용은 밖을 향해 소리쳤다.

“옷을 가져와라. 가마꾼 복장으로…….”

*  *  *

남궁적이 모용세가로 간다는 소식은 우희에게도 들어갔다.

“도대체 남궁가주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아무리 귀한 아들이고 오랫동안 병치레를 하다가 간만에 집으로 돌아온 자식이라지만 해도 너무 했다.

남궁적이 모용세가로 간다면 그 목적은 하나뿐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약혼녀와 놀러 간다는 생각을 어찌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희의 걱정은 오래 가지 못했다. 때마침 남궁찬이 우희를 방문했던 것이다.

“모용세가와 서문세가의 가주들이 찾아왔었네.”

모용곽에게 익히 들은 터라 우희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우희가 정작 궁금한 것은 문당으로는 한 번도 찾아오지 않던 남궁찬이 무슨 목적으로 이곳까지 왕림했는가 하는 점이었다.

“그들이 나를 몰아세우더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앞에서 기도 제대로 펴지 못하던 사람들이…….”

남궁찬이 혀를 찼다.

“분명히 그들이 문사에게도 찾아왔겠지?”

우희는 순순히 대답했다. 부정한다고 해서 감추어질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감추어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뭐라던가? 그들도 요구하는 게 있겠지?”

우희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굳이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남궁찬이 말없이 우희만 바라보았다. 우희가 모용곽이 대변한 그들의 희망을 알려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깨닫자 이내 오늘 이곳에 온 목적을 꺼냈다.

“아나? 그들이 어떤 식으로 나를 협박했는지.”

이번에는 고개를 저었다. 우희도 거기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나도 확인해 본 것은 아니지만 들리는 말에 의하면 서문세가의 여식이 남궁적이라는 자에게 채음을 당했다는군.”

순간, 우희는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 같았다.

‘채음이라니? 누가 서문장미를 채정한단 말인가? 서문장미가 남궁적을 만났다고?’

남궁적은 통평사단이 귀향하는 길에 합류를 했고 서문장미는 그보다 먼저 통평사단을 떠났다. 그렇다면 진짜 남궁적과 서문장미는 어릴 적을 제외하면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남궁적이 서문장미를 채음했다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현당이다!’

순간, 우희는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서문장미가 왜 통보도 없이 서둘러서 정무련을 떠났는지도 알 것 같았다. 현당에게 채음당했기 때문이었다.

우희가 현당을 살리기 위해 조련제마공을 전수한 것이 남경으로 돌아오기 바로 이틀 전이었다. 그런데 현당의 수준이 그 정도로 향상되어 있었단 말인가?

순간적으로 어제 남궁적의 행세를 하며 찾아왔던 현당이 생각났다. 유난히 조련제마공의 부작용에 대해 탐문하던 그 모습이 우희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래, 그래서였어!’

그런 속사정도 모르고 무심하게 남의 일처럼 이야기를 했던 순간이 바보 같았고, 그런 자신이 한스러웠다. 좀 더 붙잡고 이야기를 나누어볼걸 하고 후회가 밀려들었다.

“이보게, 문사.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나?”

“아!”

남궁찬의 말이 우희를 다시 현실로 불러들였다.

“뭐라 하셨죠?”

“우리 적아는 극구 부인하네만 녀석이 지병을 치료한 방법이 혹시 문제의 그 무공이 아닌가?”

남궁찬은 절대로 흡정마공, 흡혈대법, 또는 조련제마공이라는 표현을 꺼내지 않았다.

과연 남부맹에서 가장 큰 세력을 이끌던 남궁찬이었다. 남궁찬이 그 표현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는 말은 곧 그것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단지 남궁찬이 알고 싶은 것은 입 밖에 내놓아서는 안 되는 진실이었다.

우희는 진실을 알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과 진실을 은폐해서라도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려는 한 세가의 가주 입장에서 갈등하고 있는 남궁찬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아이가 익힌 게 과연 그것인가?”

우희가 대답을 하지 않자 남궁찬이 다시 한 번 채근했다.

우희는 망설여졌다. 그의 말대로라면 남궁적은 끝까지 부인한 게 틀림없었다.

‘나도 부인하는 게 옳은 것일까? 과연 그게 나을까? 그럼 그게 사실이라고 이야기하면 어떤 파장을 불러올까?’

우희는 조용히 생각해 보았다. 우선 무공의 출처에 대해 추궁할 것이었다. 그리고 주화입마에 빠진 남궁적을 데려다 치료를 해서 정상으로 돌려놓은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물을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우희는 온갖 수모를 버티면서 십여 년을 참아온 그들의 노력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존재를 드러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남궁찬이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도 의문이었다.

우희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보다 자식 사랑이 지극한 사람이 바로 남궁찬이었다. 우희가 보기에 남부맹의 세 가주 중에서 남궁찬의 부성애가 가장 컸다. 그런데 그런 남궁찬이 주화입마에서 돌아온 남궁적을 버리면서까지 그것을 밝혀낼까?

우희는 아니라고 보았다.

남궁세가와 남궁적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남궁찬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을 선택할 것이 틀림없었다.

우희는 도박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맞습니다.”

남궁찬이 창백한 표정으로 의자 손잡이를 잡고 자리에 앉았다. 너무나 충격적인 대답에 서 있을 힘조차 없었다.

“맞다고?”

우희는 초점을 잃어가는 남궁찬의 눈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남부맹에서 가장 거대한 세력, 남궁세가의 가주다웠다. 금세 회복하고 있었다.

“내 문사의 말을 전적으로 믿는 것은 아니지만 그 말만은 믿고 싶지 않군. 정말인가?”

우희는 남궁찬의 가슴에 쐐기를 박았다.

“정황 증거가 그렇지 않습니까?”

“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우희는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기다렸다는 듯이 주근혜가 차를 가져왔다. 차라도 마시면서 정신을 차리라는 의미였다.

“방법이 없었습니다. 굳어버린 진기를 녹일 수 있는 영약이나 선단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남궁 공자를 위해 자신의 내공을 희생할 수 있는 절세 고수가 대기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건 가주께서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남궁찬이 산송장이 되어버린 아들을 우희에게 맡긴 것 또한 바로 그 때문이었다. 천하의 남궁세가일지라도 사지가 뒤틀린 남궁적을 살릴 수 있는 방도가 없었다. 아니 방법은 알지만 할 수 없었다. 그저 멍하니 두 눈 뜨고 죽어가는 아들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그랬을 것입니다. 너무 자책하지 마시지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우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남궁찬에게 내밀었다. 무의식중에 찻잔을 받은 남궁찬은 차마 마실 생각은 못하고 있었다.

“정파와 연합해서 배교를 멸문시킨 후 전 맹주와 선대 총사께서는 배교의 잔해를 조사하셨나 봅니다. 그때 두 분은 큰 수확을 얻으셨지요. 하지만 너무 큰 수확이기 때문에 그것을 은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건 바로…….”

남궁찬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바로 그것이로군.”

우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천하의 남궁찬도 어쩔 수 없는 일이군.’

어쩌면 누가 보더라도 뻔한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궁찬은 그 말을 믿고 싶었을 것이다. 때문에 이렇게 순순히 수긍하고 넘어가는지도 모른다.

“총사께서는 이런 일을 미리 예견하고 있었습니다. 정파의 무공과 달리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전수되던 사대 세가의 무공, 저쪽은 수백 명이 수백 년에 걸쳐서 수련하고 발견하는 문제를 수정해 왔지만, 이쪽은 많아야 십여 명에 불과한 전수자들이 손질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언젠가는 그런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고 생각을 한 것이지요. 그래서 준비를 해놓으셨습니다.”

멍한 시선으로 남궁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미리 대역을 맡을 사람을 골라놓았던 것처럼?”

우희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남궁찬은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뜨거울 텐데도 남궁찬은 아랑곳하지 않고 한꺼번에 입에 털어 넣었다. 그만큼 갈증을 느끼고 있다는 소리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나?”

남궁찬은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했다.

“비밀은 지켜져야 합니다.”

우희는 강조하듯 힘 있게 대답하며 이제는 남궁찬도 낚았다고 확신했다. 이제 남궁찬도 공범인 셈이었다. 남궁적의 비밀을 공유한 이상 남궁가주라 할지라도 배교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우희는 남궁찬을 마주 보고 그 앞에 앉았다. 그리고 다정하게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모용세가, 서문세가에서도 이 일은 그냥 덮어주기로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남궁찬이 멍한 표정으로 우희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서문세가의 장녀는 행실이 바르지 못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녀가 채음당했다는 것은 발뺌하면 그만입니다. 남궁 공자가 행동만 조심한다면 그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희가 제시하는 해법에 남궁찬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비밀을 폭로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 셈입니다. 하지만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모용가주, 서문가주와 한 약속은 지키셔야 할 것입니다.”

“아!”

남궁찬이 신음을 흘렸다. 이제야 남부맹 맹주를 뽑는 데 동의하기로 한 것을 기억한 그가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맹주 선발 준비는 잘 되어가나?”

우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떻게?”

우희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실력보다는 지휘자로서의 인덕과 지휘 능력 등을 더 고려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과연 그가 남부맹의 맹주로서 필요한 능력을 갖추었는가가 가장 중요하겠지요. 하지만 반드시 뽑혀야 할 사람이 뽑히도록 준비를 하겠습니다.”

남궁찬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뽑혀야 할 사람이라면…….”

우희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설레게 만들기에 충분한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충분히 남부맹을 이끌 능력이 있는 사람!”

남궁찬은 우희가 가리키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직 깨닫지 못했다.

“남부맹을 이끌 능력을 가진 사람?”

“예. 압도적인 힘으로 다른 세력을 흡수하고, 그 모든 것을 하나로 아우를 수 있는 사람! 그래서 사분오열되어 있는 남부맹의 힘을 한곳으로 결집시켜서 정무련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

그 말을 듣는 순간, 남궁찬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지금 현재 남부맹의 힘의 주축은 결국 사대 세가이고, 사대 세가 중에 가장 큰 힘은 남궁세가였다. 이변이 없는 한 다른 힘을 흡수할 수 있는 세력이라면 결국 남궁세가밖에 없는 셈이고, 그렇게 생각한다면 남부맹을 이끌 능력이 있는 사람은 결국 자신뿐이었다.

남궁찬은 우희의 손을 덥석 잡았다.

“역시 문사로세. 전 맹주와 선대 총사가 사람 하나는 잘 뽑았군.”

우희는 고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남궁찬은 무슨 말이라도 들어줄 사람처럼 호인(好人) 같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무슨 일인가?”

“세 분의 가주 간에 표 대결을 하게 된다면 힘이 부족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맹주 선발 대회에는 독고세가, 그리고 단목가도 참석해야 합니다.”

남궁찬이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독고세가랑 단목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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