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
<137화>
모용미가 독고진에게서 떨어졌다.
“내가 이리 오겠다고 했어. 가봐야 해.”
독고진은 내심 아쉬웠지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사람이 데리러 온 이상 보낼 수밖에 없었다.
“갈게.”
그저 멍하니 모용미가 돌아가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모용미는 그렇게 돌아갔다.
독고진은 모용미가 방을 나가자 주먹으로 다탁을 내리쳤다.
“젠장!”
그동안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다.
자신의 굳건한 위치와 사대 세가 중 모용세가와의 연수. 그것이 독고진의 복안이었다. 한데 뜻대로 된 게 하나도 없었다.
남부맹의 대표 선발에 자신이 한몫을 할 자신이 있었지만 결과는 단목기와 남궁적이었다. 게다가 모용미를 가로채는 것으로 모용세가와 연합을 하려던 계획도 물 건너간 게 확실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쉬운 방법은 자신이 남부맹의 대표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지위와 모용미와의 관계를 이용하여 모용세가를 압박하면 손쉽게 이루어질 줄 알았다. 한데 첫 번째 방법은 이미 물 건너간 셈이었다.
그래도 모용미가 자신에게 연정이라도 품고 있으면 어찌 될 것 같기도 한데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오늘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가 모용미를 이용하려는 생각과 마찬가지로 모용미 역시 독고진을 유희의 대상으로만 생각할 뿐 그 이상으로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힐끗.
고개를 돌려보니 안쓰러운 표정을 짓고 자신을 바라보는 총관 이문진이 보였다.
“나가보게.”
수하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기는 싫었다.
한마디 하려던 이문진은 한숨을 내쉬면서 밖으로 나갔다.
“이 총관.”
나가려던 이문진을 독고진이 다시 불러 세웠다.
“모용세가에 무슨 일이 있나 한번 알아보게.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어. 아니, 어쩌면 모용세가에서 벌어진 것이 아닌지도 몰라. 서문세가에도 사람을 보내보고. 아닐세. 이건 내가 알아보는 게 더 빠르겠군. 아니야, 만사 불여튼튼이라고 우리가 직접 뛰는 것도 괜찮겠지. 좀 수고 하게.”
이문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세가와 서문세가 말씀입니까?”
“세 가문 모두, 남궁세가까지.”
독고진은 지시하며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문당을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우희는 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독고진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 상황에서 독고세가가 붙잡을 수 있는 곳은 문당밖에 없었다. 문당이 이미 단목가와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이 불쾌했지만 문당과 동맹을 맺지 않는다면, 독고세가는 외톨이가 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고 있었다.
* * *
돌아가던 남궁적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그를 쫓는 사람이 느껴졌다. 남궁세가로 돌아가는 길에 행여나 현당의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일부러 돌아가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한 사람뿐이더니 한 사람, 두 사람씩 늘어나 이제는 적어도 십여 명은 되는 것 같았다.
히죽.
남궁적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피를 흘리며 달아나는 먹잇감을 생각하고 침을 흘리는 승냥이 같은 웃음이었다. 혼자서 능히 상대할 수 있는 자신감에서 비롯되는 웃음이었다. 이것으로 현당의 끄나풀을 일망타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 오랜만에 몸 좀 풀어볼까?’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남궁적은 달리기 시작했다. 그를 포위하고 서서히 좁혀오고 있던 놈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남궁적을 쫓아 뛰기 시작했다. 예상대로였다.
남궁적은 막다른 골목으로 달아났다. 상대를 몰아넣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했는지 놈들이 정면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바보들!’
히죽.
남궁적은 다시 한 번 웃어 보였다.
놈들 중에 수뇌라고 생각되는 놈이 앞으로 나섰다.
“현당!”
‘응?’
남궁적은 깜짝 놀랐다. 행여나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하고 귀를 의심했다.
“왜? 더 달아나 보지 그러나? 설마 벌써 다 달아난 것은 아니겠지? 이제 완전히 제 발로 그물 속으로 뛰어든 꼴이로군!”
남궁적은 황급히 그들의 말을 잘랐다.
“자, 잠깐. 누구라고?”
“현당. 네놈인 줄 다 알고 있어. 더 이상 남궁적 행세는 그만하지 그래!”
남궁적은 어이가 없었다.
“이봐, 내가 남궁적이야. 내가 남궁세가의 공자라고.”
수뇌인 듯한 놈이 남궁적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거짓말해도 소용없어. 남궁 공자라면 천인혈을 가지고 있을 게 틀림없으니까.”
그의 말대로 자신과 현당을 구분 짓는 가장 큰 차이가 바로 그 도 하나였고, 그것이 쉽게 구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행동거지는 훈련을 받았고 옷차림새는 똑같이 입으면 그만이었다. 게다가 강호 활동이 없었던 남궁적을 그 누가 알 것인가!
“젠장. 지금 내가 어디에서 오는 줄 알아? 천인장에서 오는 길이야. 지금 천인혈의 수리를 맡기고 오는 길이라고.”
수뇌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변명을 늘어놓아도 소용없어. 네놈이 천인장에서 나오는 것을 봤다는 놈이 있으니까.”
남궁적은 속이 탔다.
“아, 그게 나라니까!”
“남궁 공자는 네놈이 나오기 이전에 벌써 세가로 돌아가셨다. 얘들아!”
순간, 남궁적은 깨달았다.
‘현당이다!’
자신이 천인장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현당이 다시 들어갔던 것이다. 놈은 자신을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젠장!’
방법이 없었다.
진짜 남궁적이라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 이상 이자들은 자신을 현당이라고 믿을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자신을 현당이 아니라 남궁적이라고 믿게 할 것인가?
외모? 똑같다.
행동? 두 사람의 차이를 아는 사람이 아예 없다.
무공? 둘 다 남궁세가의 무공을 쓰고 있다.
있다!
남궁적은 자신을 향해 몰려드는 공격을 이리저리 피하면서 드디어 자신과 현당의 차이를 발견하는 데 성공했다.
망설임 없이 독수리 발톱 같은 손으로 지척으로 달려드는 놈의 정수리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얼떨결에 머리채가 붙잡힌 놈이 딸려왔다.
“멈춰라.”
심공을 끌어 올리면서 남궁적이 소리쳤다.
“끄아아.”
정수리를 잡힌 놈이 몸서리를 치면서 비명을 흘렸다. 고통에 신음하는 것처럼 비명이 낮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듣고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소름이 돋게 하기에 충분한 소성(小聲)이었다.
그때까지 칼날을 번뜩이며 남궁적을 공격하던 놈들이 머뭇거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남궁적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명 소리가 잦아들었다.
후두둑.
남궁적이 손을 떼자 정수리를 붙잡혔던 장한이 장작 무너지듯 자리에 엎어졌다.
남궁적의 손에서 쏟아져 내린 것은 사람이 아니라, 목내이(木乃伊 : 미라)였다.
남궁적에게 정수리를 붙잡혔던 장한은 그에게 정기를 다 빨리고 목내이처럼 비쩍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그리고는 나무토막처럼 바닥으로 쓰러졌다. 말라붙은 피부는 완전히 탈수되어 탄력을 잃었고, 굳어버린 뼈마디는 유연성마저 잃어 무릎이나 팔꿈치 같은 관절은 마디마디가 끊어지며 바닥에 쏟아졌다. 그나마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허리 위쪽뿐이고, 엉덩이 아래쪽은 마른 장작이나 매한가지였다.
“흐으읍.”
남궁적이 입맛을 다셨다. 아직도 뭔가 부족한 것 같았다.
히죽.
남궁적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소름이 돋게 하는 웃음이었다.
“내가 누구라고?”
남궁적을 마주한 사람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나, 남궁 공자…….”
“그래. 내가 누구라고?”
“남궁 공자이십니다.”
이제 그들도 남궁적을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눈앞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마공이 펼쳐졌는데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들에게서 전수받은 무공을 보여주는 것! 남궁적이 그들에게 자신이 그들과 같은 편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히죽.
“어서 빨리 보이지 않게 치워라. 괜히 강호인들 눈에 띄어서 꼬투리 잡히지 말고. 알고 있겠지? 아직 본교가 활동할 때가 안 되어 있다는 것을 말이다.”
수뇌가 서둘러 지휘를 하면서 답했다.
“잘 알고 있습니다, 공자.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희도 현당이 활보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기 때문에 거리를 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궁적은 짜증이 났다.
하필이면 자신이 놈을 찾으러 나왔을 때 이런 일이 벌어진 게 화를 돋웠다.
“나와 놈을 어찌 구분하려 했나?”
“문사 우희께서 방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남궁적은 둘일지 몰라도 천하에 천인혈은 하나라고 말입니다.”
그제야 남궁적도 좀 알 것 같았다. 다음부터는 돌아다닐 때 반드시 천인혈을 휴대하고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흥!”
남궁적은 그들이 일을 마무리할 때까지 기다리지도 않고 자리를 떴다. 마치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것처럼.
* * *
돌아가던 길에 현당은 일단의 사람들과 마주쳤다. 개중에 한 명은 자루까지 등에 짊어지고 가고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지 모두 표정이 침울했다.
그들과 마주치는 순간, 현당도 당황했지만 눈에 띌 정도로 내색할 만큼 어수룩하지 않았다. 머뭇거리는 그들을 오히려 호기롭게 노려보았다.
선두에 서 있던 자가 수뇌인 듯싶었다. 손을 들어 함께 가던 일행을 제지하고 나섰다. 현당을 바라보더니 오히려 현당보다 그들이 더 망설이고 있었다. 갈등하는 것이 분명했다.
“현…… 당?”
‘역시 놈들도 나와 남궁적을 구분 못하고 있는 게 분명하군!’
현당은 자신할 수 있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저렇게 조심스럽게 물을 리 없었다.
현당은 다시 한 번 호기를 부렸다.
“내가 누구라고?”
현당의 말에 수뇌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차려 자세를 취했다.
“아닙니다, 남궁 공자.”
“그래. 그런 눈으로 어떻게 놈을 잡을 수 있겠어?”
수뇌가 목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희가 꼭 잡겠습니다.”
현당은 수뇌의 어깨를 두들기며 지나갔다.
“그래. 잘 찾아봐. 그래서 꼭 잡아야 해. 놈을 잡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고 있겠지?”
“그렇습니다.”
힐끗.
“저건 뭔가?”
현당은 등에 짊어지고 있는 자루를 턱으로 가리켰다. 움직일 때마다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게 저어…….”
마땅히 설명할 방법이 없던 수뇌는 대답을 망설였다.
“왜?”
결심한 듯 수뇌가 말했다.
“좀 전에 공자께서 손봐주신 놈입니다. 다른 사람들 눈에 띄기 전에 빨리 처리해야 할 것 같아 데려가는 중입니다.”
현당은 놀란 표정을 감추기 위해 애써야만 했다. 정황상 사람인 듯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자루가 너무 작아 보였다. 봇짐 정도의 크기로 아이조차 들어가기 힘들어 보였다.
“내려놔 봐.”
현당은 떨리는 마음이 목소리에 묻어나지 않을까 우려하며 잔뜩 긴장한 채 명령했다. 마지못한 듯 짊어지고 가던 수하가 수뇌를 바라보았다. 수하는 수뇌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자루를 내려놓았다.
자루라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 장삼이었다. 장삼을 벗어서 위아래를 묶고 소매와 허리띠로 자루를 만든 것이었다.
장삼을 벌리자 그 안에 담겨 있던 물건이 우루루 쏟아졌다.
유골이라고 해도 상관없을 정도로 바짝 마른 시체였다. 팔다리와 손발이 마디마디 부러져 모습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머리카락이 고스란히 붙어 있는 해골만이 사람의 시체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었다. 인피가 말라비틀어진 채 두개골에 달라붙어 있었고, 벌어진 입술 사이로 허연 치열이 드러나 있었다.
현당은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시선을 들어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다들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장삼을 벗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모두가 옷을 제대로 챙겨 입고 있었다.
죽은 자의 장삼으로 자루를 만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자 역시 이들과 같은 일행이었을 것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굳이 고개를 돌리고 있을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