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무사-136화 (136/175)

# 136

<136화>

우희의 독촉을 받은 독고진은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해 보세요. 선대인(先大人 : 돌아가신 남의 아버지)이 운명하신 후 독고세가의 가세가 어찌 되었는지를 말입니다.”

우희는 지금 독고진에게 연합을 제안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시지요? 단목가가 어찌 되었는지를!”

남부맹의 맹주이자 독고세가의 가주인 독룡 독고룡이 사망한 후, 지금까지는 느긋할 수 있었다. 나머지 세 세가의 가주들이 서로를 견제하지 않았다면 독고세가도 단목가 꼴이 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제 다시 남부맹의 맹주가 등극하게 되면 독고세가의 영역을 세 조각, 네 조각으로 갈라서 가져갈 게 뻔했다. 한때는 사대 세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단목가가 그런 꼴을 당했다는 것은 남경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독고세가의 적자로서, 장자이자 외아들로서 독고진은 그런 일만은 막아야 했다.

독고진이 패를 꺼냈다.

“내가 당신들과 손을 잡을 경우 당신들은 내게 무엇을 주겠소? 설마 남부맹의 맹주 자리를 준다는 것은 아닐 테고.”

우희가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독고세가.”

독고진은 우희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독고세가는 내가 쥐고 있는데?”

우희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세 세가 중 한 가주가 맹주가 될 경우 독고세가는 조각날 게 뻔해요. 설마 그것을 모르지는 않겠지요?”

독고진은 허리를 앞으로 숙였다. 세 가주 모두 맹주 자리에 오르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우희의 말뜻을 감지하고 되물었다.

“그럼 누가?”

우희는 우아하게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남부맹에는 가주가 없는 독고세가와 가주가 있는 세 세가만 있는 게 아니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독고진은 깜짝 놀랐다.

“단목가?”

“곧 단목세가로 불릴 것입니다. 그것도 나머지 세 세가 위에 우뚝 서 있는!”

*  *  *

남궁적이 나갔다는 소리를 듣자 현당은 천인신수를 만나기 위해 천인장의 담을 넘었다.

우선은 남궁적이 온 이유를 알아야 했다. 천인장에 흑산벽의 정보통이 없는 관계로 천인장과 사대 세가 사이에 벌어지는 일은 현당이 직접 알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현당은 조용히 천인신수의 방으로 잠입했다.

“자네는 왜 또 왔나?”

천인신수가 고개를 들고 현당을 바라보았다.

“아, 두고 간 게 있어서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현당을 천인신수는 빤히 쳐다보았다. 마치 현당의 내면을 꿰뚫어보는 것처럼 한시도 눈을 돌리지 않고 그를 응시했다. 오히려 현당이 무안해질 지경이었다.

막상 들어오기는 했지만 현당은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천인신수가 노망이 났다는 이건용의 말은 틀린 것 같았다. 지금 들리는 천인신수의 목소리는 헌앙하기 그지없었다.

“가만, 자네는 좀 전에 왔던 놈이 아닐세?”

현당은 깜짝 놀랐다. 모용미도 알아보지 못하는 자신을 잠깐 보았던 천인신수가 명확하게 남궁적과 현당을 구분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일 줄은 예전에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한 눈에 알아볼 줄은 정말 몰랐다.

“자네 쌍둥이인가? 아니야, 아니야. 쌍둥이라면 생시가 같고, 생시가 같으니, 사주가 다를 수 없지. 어찌 되었거나 자네가 저 계집의 주인이지?”

현당은 천인신수가 말하는 계집이 누구인지 미처 깨닫지 못하다가, 겨우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고서야 알았다.

“아!”

천인혈이 보였다.

실내의 조명을 받아 붉은빛을 뿌리며 도실에서 빠져나온 천인혈이 빛나고 있었다. 마치 첫날밤을 보낸 새색시가 신방에 들어온 신랑을 보고 얼굴을 붉히는 것처럼 단아하면서도 요요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현당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건 그렇고 도를 찾으러 왔나?”

현당은 남궁적이 도를 고치기 위해 천인장에 온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현당은 남궁적이 도를 가져가지 못한 이유를 알기 위해 조심스럽게 답했다.

“주실 수 있겠습니까?”

천인신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리고 더 할 말이 없다는 것처럼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못 줘.”

현당은 줄 것처럼 이야기하다가 못 준다고 딱 잘라 말하는 천인신수의 말에 다소 실망했다.

“제 도입니다만…….”

현당은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것이 어떤 도인가! 바로 천인혈이었다. 천인신수가 새로 도를 만들어주기보다 다듬는 것이 낫다 했던 도가 바로 천인혈이 아니었던가!

“정말 기구한 팔자의 년이로고. 기껏 주인이라고 선택한 놈이 네년을 그렇게 다루더냐?”

천인신수가 안타깝다는 듯이 칼등을 쓰다듬었다. 마치 잘 키운 딸아이 머리를 쓰다듬는 것 같았다.

현당은 천인신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무슨 문제가 있었습니까?”

“자네는 이년이 피를 싫어한다는 것을 아나, 모르나?”

천인신수는 거친 음색으로 현당을 다그쳤다.

몰랐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천 명의 사람 피라고 이름을 지을 정도로 천인혈은 너무나 많은 피를 묻힌 도였다. 천인혈이 현당에게 직접 가르쳐 준 이름이었다. 그래서 새로 붙인 이름이 바로 천 번 달궈 날을 세운다 해서 천인혈로 바꾸었던 것이다.

새삼 기억이 떠올랐다. 서러움에 겨워 눈물을 흘리던 그녀가 생각났고, 천인혈에 얽힌 사연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런데 도를 쓰고 이 미녀를 그냥 가두어두었더냐?”

현당은 무슨 일로 천인신수가 화가 났는지 알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자신 잘못은 아니었지만 현당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남궁적에게 도를 넘긴 것은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그냥 돌아가게.”

현당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천인신수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귀신들린 도라는 것을 한 번 보는 것만으로 알아차린 천인신수였다. 또한 현당과 남궁적을 겨우 한 번 본 것만으로 구분하는 사람 또한 천인신수였다.

다행히도 천인신수는 현당에게 왜 오늘 그냥 돌아가야 하는지 설명을 해주었다.

“오늘은 때만 벗겼네. 내일은 날을 벼르고 다시 다음 날, 옷을 입힐 게야. 그래야 기름이 제대로 스며들지. 아무리 빨라도 내일도 안 되네. 알겠나?”

현당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인신수가 저렇게 말하는데 그냥 조용히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  *  *

“아니, 언제 또 들어오셨습니까?”

천인장에서 잡일을 하는 십대 소년이 현당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놀라기는 현당도 마찬가지였다.

실수였다. 들어올 때와 달리 나갈 때는 무의식적으로 정문으로 나갔던 것이다.

“아아, 내 어른께 묻지 않은 게 있어서…….”

답하며 현당은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다른 사람이 보기 전에 나가야 했다. 하지만 현당은 느낄 수 있었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다는 것을 말이다. 벌써 많은 사람들이 소년의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 현당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보 같으니라고!’

자신에게 하는 욕이 현당의 입 안 가득 맴돌고 있었다.

*  *  *

독고진과의 회담은 성공적이었다. 결국은 독고세가의 영역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그의 협력을 약속받았다.

회담을 끝내고 그의 방에서 나오던 우희는 깜짝 놀랐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사람과 마주쳤던 것이다.

모용미였다. 우희야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하기 위해 밤늦은 시간에 독고세가를 찾았지만, 시집도 안 간 처녀가 이 시간에 남의 집을 찾는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놀라기는 모용미도 마찬가지였다. 우희는 독고진의 방에서 나오고 있었고, 모용미는 들어가고 있던 차였다.

“문사께서는 이 시간에 무슨 일이신지요, 여기까지…….”

모용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질문을 하는 그녀의 눈에서는 질투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우희는 너무 놀라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설마 모용미가 이 시간에 이곳을 찾아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당황해서 모용미와 배웅을 나오는 독고진을 번갈아 쳐다볼 뿐이었다.

당황하기는 독고진도 마찬가지였다.

“엉뚱한 오해는 하지 마라, 미매. 문사께서는 곧 있을 남부맹의 맹주 선발을 위한 회담 준비에 대해 상의를 하러 오셨을 뿐이다.”

가장 먼저 정상을 회복한 사람은 독고진이었다. 단호한 어조로 모용미에게 언질을 주었다.

독고진의 말에 우희도 진정이 되었다.

“그래요. 그 일 때문에 은밀히 상의드릴 것이 있어서 온 것뿐. 괜한 오해 말아요.”

그제야 모용미의 얼굴색이 풀렸다.

“아아, 그러시군요. 난 또…….”

괜한 오해를 했다고 말을 돌리려던 모용미의 얼굴색이 붉어졌다. 자기야 오해를 했다고 하지만 자신의 방문은 뭐라고 변명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우희가 아무 말 없이 서둘러 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럼 나중에 뵙지요.”

예상대로 만사가 척척 진행된다고 생각하고 있던 우희는 의외의 장소에서 모용미에게 들켰다는 생각에 침착성을 잃고 있었다. 예상치 못했던 변고였다. 어서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막상 독고세가를 나가는 순간, 우희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모용미가 독고린을 만나러 왔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독고세가에서 모용미를 보는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남경제일미로 손꼽히는 모용미가 늦은 밤 시간에 독고세가를 방문하는 목적을 단순하게 치부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세간의 눈을 피해 찾아온 이유는 한 가지!

‘모용미가?’

그 의미를 깨달은 우희는 놀란 눈을 더욱 크게 떴다.

벌써 모용미와 독고진은 안으로 들어가고 보이지 않았다.

‘그, 그러니까 독고진과 모용미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모용세가의 무남독녀인 그녀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남녀 간의 문제는 전혀 알 길 없는 우희 나연희였지만, 그녀의 생각에 이건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남궁적의 약혼녀였던 모용미가 독고세가의 가주나 마찬가지인 독고진과 그런 사이였다니!

우희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독고진의 이해할 수 없는 자신감이 어느 정도 설명이 되는 듯했지만 그뿐이었다.

우희는 머리를 흔들었다. 계산할 수 없는 문제는 깨끗이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는 자신을 어쩔 수가 없었다.

*  *  *

“정말이야?”

독고진의 방으로 들어온 모용미는 그를 추궁하고 나섰다.

“차만 준비되어 있는 게 안 보여?”

“차를 마시면 그걸 할 수 없다는 법이라도 있어?”

“이봐…….”

독고진은 모용미를 설득하려 들었다. 이럴 때는 무엇보다 말보다는 몸짓이 더 효과적이었다.

“놔아!”

모용미가 독고진의 손길을 뿌리쳤다.

독고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큼 모용미의 말하는 품이 단호했기 때문이다. 확실하게 설득을 하지 못한다면 만지지도 말라는 뜻이 분명했다.

“지금 이 방에서 나가는 것 봤지? 어때? 네가 둘러봐. 우리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아?”

독고진은 그렇게밖에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모용미에게 그와 그녀 사이의 계약에 대해서 말할 수는 없었다.

독고진의 말이 아니라도 모용미는 벌써부터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하지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잘 정리된 침상이나 독고진의 옷차림 등, 두 사람의 말을 증명하는 증거들뿐이었다.

“정말이지?”

독고진은 모용미의 질투를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자기 왜 그래?”

“내가 왜 이러는지 나도 모르겠어.”

모용미가 머리를 흔들었다. 정말 자신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모용곽이 더 이상 남궁적을 만나지 말라고 한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이렇게 마음이 싱숭생숭한 것 같았다.

아버지 말이라고 곧이곧대로 따를 모용미가 아니었지만, 오늘 내린 엄명을 어기고 바로 쪼르르 달려갈 정도로 미련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전에 없이 남궁적이 보고만 싶었다. 울고만 싶었다. 그녀가 보고 싶은 사람은 독고진이 아니라 남궁적이었다.

울적한 마음을 달래려고 독고진을 만나러 왔건만 오히려 그녀의 마음은 더욱 흔들리기만 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모용미는 울음을 터뜨렸다.

“이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독고진이 모용미를 다독거렸다. 하지만 모용미는 울면서 도리질만 칠 뿐 무슨 일인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무슨 일이냐?”

독고진이 밖을 향해 물었다.

“총관 이문진입니다. 모용세가에서 아가씨를 찾아서 사람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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