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무사-134화 (134/175)

# 134

<134화>

마치 탐문하는 듯한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근혜가 물었다.

우희는 느낌으로 현당과 남궁적을 구분할 수 있다는 애매한 대답은 할 수 없었다. 자신이 현당에게 관심—어쩌면 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자백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우희는 궁리 끝에 대답을 생각해냈다.

“몰랐어? 간단해. 지금 남경에 남궁적은 두 명이지만 천인혈은 하나뿐이거든.”

“아!”

우희의 말에 주근혜가 신음을 토했다.

잊고 있었다.

천인장이 인정한 왜도(倭刀), 천인혈!

한 번도 본 적은 없어도 천인혈의 소문은 주근혜도 들어서 익히 알고 있었다.

잔을 들고 일어나며 주근혜가 물었다.

“보고를 해야겠죠? 현당이 나타났다는 것을.”

“아!”

대답하는 우희의 목소리에는 기운이 빠져 있었다.

“그래. 해야겠지. 그리고 남궁적과 현당을 구분할 수 있는 방법도!”

주근혜가 우희의 책상에 쌓인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래요. 보고해야 할 겁니다. 우리는 배교도니까. 그리고 남부맹을 감시하고 포섭하는 것이 문사나 우리가 맡은 역할인 이상 현당의 존재를 확인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현당을 추격하거나 잡거나 죽일 필요가 없어요. 그렇죠?”

“그래. 맞아, 우리가 직접 현당을 쫓을 필요는 없어. 문당은 할 일도 많으니까!”

대답하며 우희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현당을 더 이상 도와주지 못하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  *  *

남궁적은 실내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그를 에워싸는 냄새에 인상이 절로 찡그려졌다. 텁텁한 무거운 공기에 잔뜩 짓눌리는 느낌이었다.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몸이 썩을 것 같은 역겨운 냄새였다.

잊고 있었다. 자신의 몸에서도 그런 냄새가 났던 적이 있었다. 그랬기에 지금 역겨운 이 냄새가 죽음의 냄새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반년 전, 자신도 이 역겨운 냄새를 풍기며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쳇. 그까짓 모기 때문에…….’

생각할수록 울화가 치밀었다. 그 때문에 반년이나 요상을 해야만 했고, 현당이라는 도둑놈이 자신의 대역을 하면서 온갖 단물이라는 단물은 다 빨아먹었다.

실소가 흘러나왔다.

그 기간 동안 얻은 것 하나 없이 잃은 것만은 아니었다. 굳어버린 자하기를 녹이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진기가 필요했다. 어릴 때 이미 벌모세수를 한 만큼 그의 몸에 축적된 내공의 양 또한 상당했다. 따라서 치료하기 위해 들어간 내공의 양도 그에 못지않았다. 지금 남궁적의 체내에는 그만한 양의 내공이 축적되어 있었다.

‘뭐, 복불복(福不福)인가?’

남궁적은 중얼거리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제야 한쪽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노인이 눈에 들어왔다. 자그마한 키에 비쩍 마르고 꾀죄죄한 용모의 노인이었다.

“이봐.”

노인이 남궁적을 가리켰다.

“나?”

남궁적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래. 여기 자네 말고 누가 또 있나?”

남궁적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노인밖에 없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저 노인이 남궁찬이 경원해 마지않는 천인신수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게다가 제정신이라고 한 천인장주의 말과는 달리 천인신수는 노망이 들어도 한창 들어 있을 사람처럼 보였다.

히죽.

“자네, 이게 뭔지 아나?”

노인이 웃으면서 들고 있는 것을 들이댔다. 남궁적은 인상을 찡그리며 노인에게 다가갔다. 노인이 주물럭거리는 것에서부터 불쾌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변이었다. 그것도 시커멓게 변색되어 있는 변이었다.

남궁적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알아? 저놈들이 나를 굶겨 죽이려는지 밥도 안 주는 거야. 그래서 내 준비했지. 놈들이 다시 들어오면 냅다 이걸 뿌려줄 거야. 싸가지 없는 것들. 배고프다고 아무리 소리쳐도 밥 들고 오는 놈 하나 없어. 우리 엄마는 내가 배고프다고 하면 언제나 수수밥을 해줬는데.”

히죽.

“너, 수수밥을 알아? 그때 우리는 쌀이 없어서 수수로 밥을 해먹었지. 그게 얼마나 맛있는지 말이야…….”

천인신수가 입맛을 다셨다. 그러다가 바로 눈앞에 남궁적이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눈을 부라렸다.

“네놈은 또 웬 놈이냐?”

깜짝 놀라 남궁적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남궁적은 뭐라고 답해야 할지 난감하여 망설였다.

“이런! 길 가다 사지가 뒤틀려 죽을 놈이 여기는 왜 와 있어?”

천인신수가 갑자기 허리를 펴면서 팔짱을 끼고 몸을 돌렸다.

“졸라봐야 소용없느니! 난 네깟 놈에게 줄 게 아무것도 없어! 줘봤자 제대로 간수하지도 못할 놈인데…….”

남궁적은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몰랐다.

“이런 썅!”

뽑히지 않는 도를 해결해 보겠다고 망령이 난 노인을 만나러 온 자신에게 화가 났다. 또한 이런 늙은이한테 보낸 남궁찬에게도 화가 났다.

생각 같아서는 단칼에 베어버리고 싶었다. 이것저것 다 때려치우고 그냥 쓸어버리고 싶었다. 워낙 마른 몸의 늙은이는 쉽게 잘릴 것 같았다.

“그놈의 자식 생각하는 것 하고는…… 제 몸속에 자라고 있는 살기 하나 다스리지 못하고 무슨 호걸 행세를 하느뇨? 망조로다, 망조로다. 피는 귀한가본데 품은 생각이 썩었어. 제 집안 거덜 낼 놈이 바로 이놈일세.”

남궁적은 깜짝 놀랐다.

자신도 조금씩 느끼고 있던 문제였다. 요 근래 들어 더욱 화가 자주 나고, 화가 날 때마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게 살심이었다. 전과는 달리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생각이 불쑥불쑥 들곤 했다.

자신도 이제야 느끼는 것을 천인신수는 처음 보는데도 불구하고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천인신수에 대한 경계심이 싹텄다. 요주의 인물이었다.

남궁적을 노려보던 천인신수가 고개를 돌렸다.

“없어!”

“예?”

“없다니깐.”

남궁적은 천인신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없다는 말씀은…….”

천인신수가 남궁적을 노려보았다.

“젊은 사람이 그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어? 네놈 줄 건 없다고!”

“아!”

그제야 남궁적은 천인신수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

천인신수는 남궁적이 그에게 병기를 만들어달라고 온 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 이것을 봐달라고 온 겁니다.”

남궁적이 말했다.

“뭘?”

갑자기 천인신수가 눈을 빛내며 다가섰다. 순간적으로 역한 냄새가 확 풍겼다. 아직까지 천인신수는 손에 변을 묻힌 상태 그대로였다.

망설이던 끝에 남궁적은 허리춤에서 천인혈을 꺼냈다. 어차피 그에게 도를 뽑는 방도를 배워가야 할 터였다.

“오오…….”

천인혈을 보자 천인신수가 빨려드는 것처럼 바짝 다가섰다. 반대로 남궁적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손을 뻗던 천인신수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런…… 하는 짓 하고는!”

천인신수가 남궁적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를 본 남궁적은 멈칫거릴 수밖에 없었다. 전혀 미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미안하군. 내가 또 추태를 보였나보네. 행여 내가 실수를 한 것은 없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남궁적은 천인신수를 돌아보았다. 제정신으로 돌아온 듯싶었다. 범접하기 힘든 기운을 품고 있는 노인이 거기 있었다.

“밖에 게 누구 없느냐?”

헌앙한 목소리로 천인신수가 소리쳤다.

남궁적은 다시 놀랐다. 다 죽어가는 늙은이의 망령된 목소리는 사라지고 천하를 호령하는 호걸의 음색이 들려왔던 것이다.

“예…….”

멀리서 대답 소리가 들렸다.

“물을 떠 오너라. 정한수로!”

대야에 담긴 물이 들어오자 천인신수는 손을 깨끗이 씻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물이 담긴 대야가 줄을 이어서 들어왔다.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닌 듯 천인신수가 처음 대야에서 손을 씻자 바로 다음 대야가 대령했고, 천인신수는 같은 동작을 다섯 차례 반복했다. 그리고는 깨끗한 백건(白巾)에 물기를 닦았다.

“천인혈이 아닌가!”

맑고 카랑카랑한 목소리, 망치로 붉게 달궈진 쇠를 두들기는 것 같은 느낌의 목소리로 천인신수가 말했다.

감탄 어린 표정으로 천인신수가 남궁적으로부터 도를 받았다. 떨리는 눈빛으로 천인신수는 도파와 도실을 쓰다듬었다. 마치 깨지기 쉬운 골동품을 다루는 것처럼 매우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빠지지 않습니다.”

남궁적도 조심스럽게 자신이 온 목적을 말했다.

“빠지지 않는다니?”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천인신수가 도파를 잡아갔다.

스르릉.

천인신수가 매끄럽게 도실에서 도를 뽑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궁적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도 해보고, 그와 함께 나왔던 배교도들도 뽑지 못했었다. 남궁찬조차 뽑지 못했던 도를 천인신수는 아무렇지도 않게 천인혈을 뽑았다.

붉은 기운이 도는 천인혈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이런…… 도에 피를 묻히고도 손질을 하지 않았군.”

도를 바라보던 천인신수는 손에 들고 있던 백건으로 칼날을 문질렀다. 붉은 기운이 백건에 묻어나기 시작했다.

“애가 화가 많이 나 있어. 함부로 다루었다고 불만이 대단하군!”

천인신수는 아이를 달래듯이 중얼거리며 도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남궁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니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범접하기 힘든 기운이 그에게서 느껴졌다.

한창 손질을 하던 천인신수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그런데 네놈은 누군고?”

제42장 내가 누구라고?

우희는 오랜만에 모용곽의 방문을 받았다.

“들었나?”

“무슨 말씀이신지…….”

우희는 모용곽의 질문 의도를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자칫 문당의 세력이 사대 세가 안까지 뻗쳐 있음이 발각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희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만큼 모용곽도 바보가 아니었다.

“하긴 들었어도 안다고 할 수는 없겠지. 맹주를 뽑기로 나와 서문세가, 그리고 남궁세가가 동의했네.”

우희는 처음 듣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떻게 모두 동의를 하셨죠?”

“어렵사리 끌어낼 수 있었지.”

모용곽은 자랑스럽다는 듯이 답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아무래도 문당에서 맹주 선발에 대한 준비를 해주었으면 하네.”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남부맹에서 형평성 운운하지 않고 그 일을 도맡아할 수 있는 곳은 오로지 문당뿐이었다.

“언제가 좋을까요?”

“아무래도 정무련과의 연맹지회 이전에 결론을 내야겠지. 물론 누가 될지는 뻔하지만 말이야. 안 그런가? 하하핫!”

모용곽은 호기롭게 웃었다. 마치 자신이 모든 사람의 추천을 받아서 맹주 자리에 오를 것을 확신하는 듯한 웃음이었다.

우희는 그 모습을 보며 그저 가볍게 미소만 짓고 있었다.

*  *  *

서문휘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서문장미는 그를 방문했다.

“뭐래요?”

서문휘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서문장미가 붙잡고 늘어졌다. 그녀를 본 서문휘가 인상을 찡그렸다.

“뭐라긴? 뭐라 할 것 같으냐? 꼴도 보기 싫은 년…….”

“아버지께서 보기 싫은 것은 보기 싫은 것이고, 그쪽에서 뭐라고 하느냔 말이에요.”

“당연한 것 아니냐? 그런 적 없다고 말하더구나.”

서문장미의 하얀 얼굴이 더욱 하얗게 변했다.

“어찌 책임질 것인지 이야기도 없단 말인가요?”

“증명할 방도가 없는데…….”

“증명을 왜 못 해요? 내가 그 증거잖아요.”

서문휘의 목소리가 굵어졌다.

“그 증거라는 게 오로지 너 한 사람의 증언뿐이 아니더냐? 네가 다른 놈과 살을 비비고 뒤집어씌운다 하면 어찌 하겠느냐?”

서문장미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단호하게 답했다.

“또 있어요.”

“뭐가?”

“그날, 놈이 찾아온 것을 본 사람이 있어요.”

순간, 서문휘가 눈을 빛냈다.

“미련한 년! 그 말을 왜 여태 하지 않고 이제 꺼낸 것이냐? 뭐 하고 있는 게야.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을 데려오지 않고! 그게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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