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
<133화>
금질 이건용이 현당을 찾아왔다. 예상하고 있던 방문이었다. 현당이 먼저 청했기 때문이었다.
“자네 말이 맞았네.”
자리에 앉자마자 이건용이 준비한 말을 꺼냈다.
“아직은 서문세가에서 쉬쉬하고 있지만 서문장미가 채음당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더군.”
이건용의 말에 현당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범인이라는 이야기는 없던가?”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서문세가의 집사가 자기 생각을 말하더군. 통평사단으로 정무련에 파견 나갔을 때 당한 것 같다고 말이야. 아무래도 남궁적이 범인일 것 같다고 하던데…….”
이건용이 조심스럽게 현당의 안색을 살폈다. 남궁적을 가장했던 현당 네가 진범이 아니냐고 묻는 눈빛이었다.
현당은 천연덕스럽게 되물었다.
“그렇겠지. 그렇게 추측할 수 있겠지. 그에 대해서 남궁세가의 반응은 어떻던가?”
이건용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그래. 아무것도. 공식적으로 서문세가에서는 서문장미가 외부인과 통정을 하다가 채음당한 사실이 없고, 남궁세가에서는 서문세가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입장이지. 굳이 들춰서 좋을 일 하나 없는 것 아닌가?”
“그렇군.”
현당이 팔짱을 끼며 심드렁한 표정으로 읊조렸다.
“남부맹 입장에서는 밝힐 수 없는 이야기지. 나름대로 토속 정파라는 자부심이 있을 텐데, 그 자식이라는 것들이 하나는 외간 남자와 잤다거나 유부녀와 간통했다고 할 수 없겠지. 결국 수면 아래로 묻힐 수밖에 없는 일이로군. 하지만 그 일을 덮는 조건으로 분명히 거래가 있었을 텐데, 그건 모르나?”
이건용이 입맛을 다셨다.
“아직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던데. 대신에 자네가 관심을 가질 만한 일이 하나 있네!”
이건용의 말에 현당이 눈을 빛냈다.
“남궁적이 천인장으로 갔네.”
“천인장에는 왜?”
“아직 그것까지는 모르고 있네. 남궁적이 천인장에서 나와야 알 수 있겠지.”
현당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현당의 표정에 오히려 궁금해진 쪽은 이건용이었다.
“세가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은 알 수 있어도 수뇌부에서 오가는 일을 파악하는 것은 어쩌면 흑산벽의 능력으로는 벅찬 일일 수도!”
이건용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가? 그렇군.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그늘 뒤에 숨는 게 우리의 존재 방식이라서 말이야. 내부자 정보를 이용하는 게 우리의 한계라고 할 수 있겠지. 그나저나 뭐 짐작 가는 일 없나? 남궁적이 왜 천인장으로 갔는지 말이야.”
현당이 고개를 저었다.
“글쎄. 그것까지는 모르겠는걸!”
“알았으면 좋겠는데…….”
지금까지와는 달리 이건용이 서둘렀다.
“그 이야기는 천인장에 심어놓은 정보통이 없다고 간접적으로 말하는 셈인가? 그래서 나에게 부탁하려는 거겠지?”
현당이 특유의 싱그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현당의 표정에 이건용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 미소를 본 이건용으로서는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이건용은 할 수 없다는 투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당했군. 사실이네. 남부맹 내에 이상 기류를 포착하고 그쪽에 영역을 넓히기 시작한 것도 얼마 안 되었거든. 강호 세력 다툼과는 거리가 먼 천인장에까지 손을 뻗을 생각은 미처 못하고 있었지.”
“흐음. 천인장이라! 천인신수가 그렇게 녹록한 사람이 아닐 텐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천인신수라면 나와 남궁적을 구분할 수 있을 게야.”
이건용이 흠칫 놀랐다.
“자네도 천인신수를 만난 적이 한 번밖에 없지 않은가?”
“그랬지. 하지만 천인신수는 범인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어. 그건 내가 확신하네.”
현당은 처음 천인혈을 갖게 되었을 때 겪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천인신수가 천인혈을 놓고 현당을 시험하던 일부터 남궁찬이 천인혈을 탐내다가 며칠 만에 도로 가지고 온 일, 자신에게 돌아온 천인혈이 자신을 주인으로 인정하기까지 현당이 어떤 시험을 거쳐야 했는지 빠짐없이 말해주었다. 여기에 천인신수가 어린 남궁적을 보고 객사할 상이라고 한 말과 현당을 보고 한 말까지.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이건용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 말대로라면 천인신수야말로 가장 경계해야 할 사람이로군.”
현당이 고개를 저었다.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경계할 사람이라는 등식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지. 자네 말대로라면 나는 흑산벽도 경계해야 하는 것 아닌가?”
현당의 말에 자신의 실언을 깨달은 이건용은 당황했다. 이건용이야 흑산벽의 사람이지만 현당은 최근에 흑산벽이 끌어들인 사람이 아닌가! 따라서 흑산벽에 대한 느낌이나 신용도도 다를 것이다. 흑산벽이 없는 삶을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자신의 경우일 뿐이고 현당의 입장은 또 다를 것이었다.
이건용이 천인장을 경계하는 것처럼 현당도 흑산벽을 경계하고 있음을 배제할 수 없었다.
“미안하군. 우리가 자네에게 전적인 신뢰를 심어주지 못해서…….”
불쾌한 표정으로 내뱉듯이 중얼거리는 이건용의 말을 현당은 시원한 미소를 지으면서 받았다.
“난 내가 상대를 신뢰할 수 있는 힘이 있을 때에만 믿는다네.”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한 이건용이 눈만 끔벅거렸다.
“누구든 마찬가지 아닐까? 상대가 누구든 그를 신뢰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면 믿지 않게 되는 법이야. 그 가치는 곧 능력이기도 하고. 결국 흑산벽이 나를 신뢰하는 것은 내 능력을 인정하기 때문이라는 말이고, 나에 대한 신뢰도는 정확히 내 능력만큼이라는 소리지. 흑산벽이 나를 믿는 정도가 그만큼이라면 나는 또 어떻게 될까? 내가 그보다 더 많이 흑산벽을 믿고 의지한다면 종국에는 바보가 되겠지. 또 흑산벽이 제공하는 신뢰를 내가 믿지 못한다면 그 또한 바보겠지. 따라서 내가 갖는 흑산벽에 대한 신뢰도는 내 능력만큼이라는 말이 성립되네. 정확히 내 능력과 내 가치, 그리고 내 용도만큼 흑산벽은 나를 믿고 지원할 것이며, 마찬가지로 나는 내 능력만큼 흑산벽으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셈이지.”
이건용은 멍하니 입만 벌린 채 현당을 바라보았다. 이내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벽주께서 왜 자네를 그렇게 탐했는지 이제야 알겠군. 아나?”
이건용의 질문이 무슨 뜻인지 몰라 현당은 눈만 말똥거렸다.
“세상에서 나를 놀랜 두 번째 사람이 바로 자네일세.”
현당이 흥미롭다는 듯이 이건용을 바라보았다.
“그럼 첫 번째 사람은 누군가?”
“벽주!”
현당은 싱긋 미소만 지어 보였다.
“사람을 치켜세워도 너무 높이 세우는군. 자네야 남경 총관도 보았을 테고, 남부맹의 독고룡이나 정무련의 웅진도 보았을 것 아닌가?”
“아암. 봤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지.”
현당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신음 같은 말을 조용히 읊조렸다.
“그러니까 자네는 그들보다 흑산벽의 벽주가 더 뛰어나다는 말이 아닌가?”
이건용은 벽주를 모시는 자신이 자랑스럽다는 듯 통쾌하게 웃어 보였다.
“그런가? 그렇게 되는군. 하하핫…….”
현당도 마주 보며 웃는 낯으로 말했다.
“어쨌거나 천인장에 한번 가볼까?”
현당의 말에 이건용도 웃는 낯으로 물었다.
“어떻게?”
“몰랐나? 내가 바로 남궁 공자가 아닌가?”
현당의 말에 이건용의 얼굴색이 달라졌다.
“아나?”
현당은 말없이 이건용만 바라보았다.
“자네는 정말 무서운 놈이라는 것을 말이네. 자네랑 한 번도 적이 된 적이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감사하게 되는군.”
* * *
내당(內堂)으로 들어가기 전에 천인장주는 다시 한 번 남궁적에게 주의를 주었다.
“명심하시오. 요 근래 엄군께서는 북망산(北邙山)을 바라보는 때가 잦다는 것을 말이오.”
남궁적은 그제야 왜 천인장주가 남궁적을 천인신수에게 데리고 오지 않았는지를 알 것 같았다.
북망산은 역대 제왕과 귀인, 명사들의 무덤이 많은 곳으로, 결국은 죽어서 가는 곳을 일컫는 말이다. 즉, 천인신수가 북망산을 자주 바라본다는 말은 죽을 날이 멀지 않았다는 뜻으로, 결국 그가 망령이 들었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가리키는 것이었다.
“마침 좀 전에 뵈었을 때는 맑은 정신이었으니…….”
천인장주가 잠시 기다리게 한 이유도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천인신수에게 허락을 받으러 갔던 것이 아니라 그의 상태를 확인하러 갔었던 것이다.
천인장주가 문을 열었다.
“들어가시오.”
남궁적은 깜짝 놀랐다. 설마 천인신수 그 노인을 혼자 보라고 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혼자 뵙고자 하지 않았소?”
“그렇기는 합니다만…….”
“큭!”
천인장주가 남궁적을 비웃는 것처럼 코웃음 쳤다.
“남궁세가의 소가주 솜씨로 무엇을 할 수 있다 생각하시오? 그런 걱정 마시구려. 정무련과 남부맹의 다툼 속에서도 왜 천인장이 균형을 잡고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왜 어느 쪽에서도 이 천인장을 거두지 못하고 손만 벌리고 있다고 생각하시오?”
남궁적은 깜짝 놀랐다.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는 문제였다.
듣고 보니 그러했다.
남경 천하 삼대 신검이든 남경 무사 칠품 병기이든 정무련과 남부맹에 걸쳐서 두루 퍼져 있었다. 결국 정무련과 남부맹은 자신에게 해가 될 수도 있는 병기를 상대편에게도 공급하는 천인장을 인정하는 셈이었다.
“아!”
자신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알 것 같았다. 정무련이든 남부맹이든 천인장을 휘하에 두기 위해서는 출혈을 감수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출혈을 겪고 나면 정작 상대해야 할 큰 적은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의미였다.
천인장이 다시 보였다.
바로 눈앞에 있는 천인장주도! 그러고 보니 남궁찬보다 젊어 보임에도 안광은 그 못지않게 안으로 갈무리되어 있었다.
순간, 자신의 추태가 생각났다. 바로 눈앞의 고수를 몰라보고 하룻강아지가 겁을 상실한 것처럼 천인장주를 협박하고 나섰던 것이다.
“쉿!”
바보 같은 자신의 행동을 생각하니 낯이 뜨거워져 입에서 절로 쉿 소리가 새어 나왔다. 남궁적은 자신을 탓하는 소리였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꼭 조롱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는 소리였다.
순간, 또 한 번의 실책을 깨닫고 남궁적은 변명을 하고 싶었지만, 이미 딱딱하게 굳은 천인장주의 표정을 보고는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젠장, 그래서 뭐?’
남궁세가의 적자라는 자존심이 다시 고개를 치켜들었다.
‘기껏해야 대장장이지, 뭐!’
코웃음을 치면서 천인장주 곁을 스쳐 지나갔다. 이번에는 속으로만 비웃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천인장주에게 주눅이 들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 * *
주근혜가 한 뭉치의 서류를 들고 우희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그나저나 남궁적이 조용히 나간 게 신기하군요.”
우희가 가볍게 미소로 답했다.
“정신이 오락가락한다더니 이번에는 또 혜선을 다 마시고 갔네요.”
현당이 마셨던 찻잔을 치우며 주근혜는 혜선을 들고 오다가 남궁적과 마주쳤던 순간을 떠올렸다.
“언제는 지겹다며 쟁반을 뒤집던 사람이…….”
주근혜가 치가 떨린다는 듯이 몸서리를 쳤다.
우희는 갑자기 참을 수 없을 만큼 우스워졌다. 세상 사람 모두가 남궁적과 현당을 구분하지 못하고 갈피를 잡지 못하는 행동을 보며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현당이 자신을 만나러 왔다는 사실이 즐거운 것인지도 몰랐다.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줄까?”
우희는 즐거웠다.
“두 번째 찾아온 사람은 남궁적이 아니었어.”
우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주근혜는 멍하니 그녀만 바라보았다.
“네? 그럼…….”
“그래. 남궁적이 아니라 소패 현당!”
주근혜는 너무 놀란 나머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세상에…….”
우희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래. 나도 지금쯤이면 남경을 뒤로 하고 어디 서장이나 천축 쪽으로 달아나고 있을 줄 알았어. 그런데 버젓이 남경을 활보하면서 이곳, 문당을 들를 줄 누가 알았겠어!”
마치 전장에 나갔다가 죽은 줄 알았던 임이라도 돌아온 것처럼 우희의 표정은 밝기만 했다. 우희는 지금 자신이 현당의 방문으로 흥분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주근혜가 머뭇거렸다.
“그런데 현당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아시나요?”
그제야 우희는 자신의 실태를 깨달았다. 현당은 이곳에 오면 안 되는 인물이었고, 만약 왔다 하더라도 잡아야 하는 인물이었다.
우희는 현당이 큰 부상 없이 위기를 잘 넘겼다는 것이 기뻐서, 그리고 자신을 만나기 위해 왔다 갔다는 사실이 너무 기쁜 나머지 그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현당과 남궁적을 구분할 수 있는 무슨 방법이라도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