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무사-132화 (132/175)

# 132

<132화>

우희는 잔뜩 인상을 찡그린 채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상대의 마음속을 읽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현…… 당!”

싱긋.

남궁적, 아니 사실은 현당이 특유의 시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눈썰미는 정말 여전하군. 지금까지는 다행히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우희는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애써야만 했다. 하마터면 자리에서 일어나 정면에 앉아 있는 현당을 끌어안을 뻔했다.

몇 차례 심호흡을 하고서야 겨우 평정심을 회복할 수 있었다.

“대담하군요. 멀쩡한 모습으로 이렇게 돌아다니다니!”

현당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남궁적의 강호 활동을 누가 가로막겠나? 내가 바로 천하의 패왕 남궁적인데 말이야.”

우희는 현당의 대담함에 혀를 내둘렀다.

“그러다 들키면 어떻게 하려고?”

“나를? 누가?”

우희는 현당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 현당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우희였다. 그런 우희마저도 남궁적과 현당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데, 세상에 어느 누가 이 둘을 분간할 수 있을까! 게다가 현당의 존재를 아는 사람도 손에 꼽을 일인데 말이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지? 아무 일 없이 여기까지 왔을 사람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는데!”

싱긋.

현당이 특유의 싱그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자가 사부를 찾아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나? 아, 차가 나오는군.”

현당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리고 주근혜가 차를 가져왔다.

“혜선입니다.”

주근혜는 당연하다는 듯이 현당 앞에 차를 내놓았다. 현당이 다른 차를 주문하든 말든 상관없이 내놓을 수 있는 차는 이것뿐이라고 항의하는 듯했다.

“오, 혜선이라! 정말 명차(明茶)가 아닐 수 없더군. 내 요즘 혜선의 매력에 푹 빠져 있다는 것 아나?”

너무도 편한 모습으로 차를 입에 가져가는 현당의 모습에 주근혜는 깜짝 놀랐다.

그런 주근혜에게 우희가 눈짓을 했다. 한차례 현당을 노려보던 주근혜가 마지못한 표정을 짓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면서도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기별하라고 우희에게 눈짓으로 신호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우희는 안심하라는 듯이 미소로 답했다.

문이 닫히자 현당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남궁 공자에 대한 적의가 대단하군!”

현당의 말에 우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일이 있어요. 남들은 알 수 없는!”

이번에는 현당이 짐작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놈이 그곳에서 몹쓸 짓을 많이 했나보군.”

우희가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알았어?”

현당은 혜선이 담긴 찻잔을 내려놓았다.

“뻔한 것 아냐? 당신이나 저 사람들이나 모두 그곳에서 나왔잖아. 그리고 남궁적이 그곳에서 요상(療傷)하고 있을 동안 내가 남궁세가에서 대역을 하고 있었으니, 저 사람들은 남궁적과 같은 장소에 같은 시간에 있었던 게지. 결국 저 사람이 남궁적에게 적의를 띠고 있다는 것은 그때 그곳에서 남궁적이 못할 짓을 했다는 소리!”

우희는 현당의 말에 미소로 답했다.

현당도 말없이 우희를 바라보았다. 새삼 자신이 그녀의 부드러운 미소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많이 상했군, 못 본 사이.”

현당의 한마디에 우희는 왈칵 울음을 쏟을 뻔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난감했다. 현당에게 눈물을 보일 수가 없어서 묵묵히 잔을 들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야?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온 것을 보면 분명히 중요한 일인데…….”

“아!”

현당의 감상도 현실로 돌아왔다.

“조련제마공 때문에!”

“조련제마공이 왜?”

현당은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으로부터 채음을 하더군. 이대로 놔둔다면 강호의 공적이 될 게 뻔하다니까! 물론 공적이 되는 사람이야 내가 아니라 남궁적이겠지만.”

고소해하며 입을 연 현당과는 달리 우희는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쉬운 문제가 아니에요. 조련제마공과 제련현마강은 우리 배교 내에서도 함부로 전수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말 그대로 마공이기 때문이지요.”

현당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니까 마공이라는 말의 뜻은…….”

현당은 대충 알 것 같았다.

운기행공을 하지 않아도 조련제마공은 모용미로부터 토하기를 훔쳐왔다. 현당이 알고 있는 토하기였기에 망정이지 서문장미로부터 서문세가의 내공을 훔쳤을 때는 현당마저도 그것을 깨닫지도 못하고 있었다. 마공은 바로 그런 효능 때문에 붙은 이름이었다. 자신이 의식하지 않아도 조련제마공이 발동하여 다른 사람으로부터 내공을 훔쳐왔다.

현당은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그나마 깨달았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무슨 낭패를 당했을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채음마라고 소문이 나서 강호의 공적으로 몰려 도망치다가 객사할 것이 뻔했다.

“그게 마냥 좋아하고 있을 일이 아니로군.”

또한 현당은 그런 식으로 남의 것을 훔쳐오다가는 언제 자신의 몸이 남의 내공으로 가득 찰지 모를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현당이 설명 대신 한 손 위에 다른 손을 얹어놓고 또 다른 손을 그 위에 포갰다. 다시 포개고 또 포개는 행동을 반복했다.

우희가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덕였다.

조련제마공의 문제는 바로 그것이었다. 가져온 것을 소화하거나 소비하지 않는 이상 그의 체내에 축적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쌓이기만 한다면 결국 언젠가는 현당의 하단전은 자신의 정순한 한 가지 내공 대신 잡다한 쓰레기 같은 남의 내공으로 가득 찰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곧 운기행공도 제대로 안 될 지경에 이를 것이다. 좀 더 지나면 가득 찬 기로 인해 오히려 기가 통하지 않아 현당은 자멸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뻥?”

현당이 포갰던 손을 풍선 터지는 것처럼 활짝 펴면서 양팔을 벌렸다. 이번에도 우희는 고개만 끄덕였다. 현당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마치 혈관 안에 이물질이 가득 차면 혈관이 터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어떻게 해야만 하지?”

우희가 현당의 말에 이번에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몰라.”

“몰라? 안 가르쳐주는 게 아니고?”

순간, 우희의 두 눈에 쌍심지가 켜졌다. 자신의 진담을 믿지 않는 현당의 능글맞은 표정에 기분이 상했다.

싱긋.

좀 전의 말은 장난이라는 것처럼 현당이 싱그럽게 미소 지었다.

“당신의 진심을 믿을 수밖에. 당신이 모른다면 정말 모르는 거지.”

말은 그렇게 했어도 현당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우희는 현당의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의 것을 가져다가 내 것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대단한 신공임에도 불구하고 조련제마공이 제일의 신공이 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거야. 부작용 때문에 그것을 극성으로 익힌 사람이 없다는 것이지요.”

우희의 말이 끝나자, 오늘 볼일은 끝났다는 듯 현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려고?”

“응. 천하의 문사 우희라면 무언가 해답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네. 당신도 모르는 게 있었어! 하긴, 그것만으로도 큰 소득 아닌가? 완전 헛걸음은 아니었어.”

“그게 다야?”

우희는 현당과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잡을 수 없었다. 잡기는커녕 서둘러 보내야 했다. 오히려 다시는 오지 말라고 해야만 했다. 그래서 배교의 존재를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 현당은 그곳의 가장 큰 적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희는 더더욱 현당을 보내야만 했다.

“꼭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야.”

우희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래?”

현당은 선 채로 물었다.

“응. 항상 조련제마공이 발동하지 않도록 경계를 하고, 흡수한 진기들이 쌓이기도 전에 서둘러서 자신의 것으로 전환하는 것을 미뤄서는 안 돼.”

현당이 손가락을 펴고 좌우로 흔들었다.

“이런, 이런! 그 정도는 누구나 생각하는 것 아니야?”

피식.

우희는 현당의 능청스러움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세상에는 만병통치약도 없고 절대적인 강자도 없듯이 속성 무공은 그만큼 약점이 있는 법이에요. 언제나 정석이 정답이죠.”

현당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희의 말이 정답이었다. 자신도 생각할 수 있었던 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이 정답이리라.

“속성 무공은 그만큼 약점이 있다! 정말 멋진 말이군.”

미소를 지으면서 현당이 손가락을 눈썹 끝에 붙였다가 떼었다.

“고마워. 그럼…….”

그것을 끝으로 현당이 문으로 향했다.

“조심하라고. 또 볼 때까지.”

문을 열자 언제라도 안에서 부르면 들어갈 수 있도록 대기하고 있던 주근혜와 마주쳤다.

“굳이 내가 걱정할 일이 없겠어. 이렇게 당신을 걱정하는 충신들이 있으니 말이야.”

현당이 문을 열고 나서자, 바로 문 밖에는 주근혜가 당황한 모습으로 입구에서 머뭇거렸다.

싱긋.

현당은 주근혜에게도 한 번 미소 지어보이면서 밖으로 나갔다.

이윽고 현당의 모습이 완전히 입구에서 사라졌을 때, 우희는 밖을 향해 속삭였다. 마치 현당이 들을 수 있다는 듯이.

“당신도요.”

*  *  *

천인장으로 들어서는 순간, 남궁적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인장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는 것 같았다.

“어서 오십시오, 남궁 공자.”

굳이 자신을 소개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남궁적을 맞이했다. 하지만 천인장을 방문한 남궁적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천인장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본다는 것은 자신 때문이 아니라 현당 때문이라는 소리였다.

천인장 안에 가득한 쇠 달구는 냄새와 망치 소리, 담금질 소리, 그리고 풍로 소리, 사방에서 들리는 소리가 그의 신경을 긁고 있었다.

“미리 약속을 했는데.”

“예.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어렵지 않게 남궁적은 천인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남궁적이 왔다는 이야기에 천인장의 사람들은 발 벗고 뛰어나오다시피 했다.

“어서 오시지요. 오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남궁적으로서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천인신수의 아들이자 현재 천인장을 맡고 있는 천인장주가 분명했다. 게다가 본인은 아니지만 반년 전에 현당이 방문했으니 이들은 초면이 아니리라.

“오랜만에 뵙습니다, 장주.”

예상은 들어맞았다. 천인장주가 인사를 받았다.

“천인혈에 문제가 있다면서요?”

남궁적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래서 천인신수를 뵐까 합니다.”

남궁적은 서서히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땀 냄새와 화덕 냄새가 진동하는 이곳에서 한시라도 빨리 나가고만 싶었다. 하지만 천인장주가 머뭇거렸다.

“그게 쉽지만은 않군요.”

“쉽지 않다는 말은…….”

남부맹 남궁세가의 적손이 대장장이 한 명을 보자고 하는데, 무슨 절차가 이렇게 복잡한지 남궁적은 울컥 치솟는 화를 겨우 눌렀다.

하지만 천인장주도 남궁적의 얼굴에서 그의 기분을 읽을 수 있었다. 남경 제일인 천인장주의 자리를 거저 얻은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신분이 남궁세가의 소가주라고 하더라도 나이가 아들뻘밖에 되지 않는 놈에게 무시를 당하면 기분이 좋을 리 만무했다.

“엄군(嚴君)께서는 더 이상 외부인의 방문을 받지 않고 있소이다.”

순간, 남궁적의 짙은 눈썹이 송충이처럼 꿈틀거렸다.

“방문을 받지 않는다라!”

신음 소리를 내뱉듯 남궁적이 중얼거렸다.

“무슨 배짱으로 내 청을 거절하시는지 알 수 없소만…….”

이번에는 천인장주의 인상이 구겨졌다.

“그러는 남궁세가의 소가주는 무슨 배포로 대 천인장에 와서 큰소리를 치는지 모르겠소만…….”

천인장주의 말에 남궁적은 이를 드러내며 히죽거렸다.

“내 배포요? 바로 이거외다.”

남궁적은 허리에 찬 천인혈을 풀어서 들어 올렸다. 덕분에 천인장주는 얼결에 남궁적으로부터 천인혈을 받아 들었다.

애초에 남궁적의 의도야 도파에 새겨진 남궁세가의 상징인 사자상을 들이대려는 것이었지만, 천인장주는 천인혈이라는 신병(神兵)의 문제로 인식했다.

순간, 남궁적은 궁금한 것이 생겼다. 자신은 물론 남궁찬마저 뽑지 못한 천인혈이었다. 그런 칼을 과연 천인장주는 뽑을 수 있을지 궁금했던 것이다.

“한번 뽑아보시구려.”

천인장주가 코웃음을 쳤다.

“남궁 공자. 내가 대장장이라고 무시를 하나본데 이곳은 천하의 천인장이오. 아무리 남궁세가라도 쉽게 무시할 곳이 못 된다는 정도는 아실 터!”

“뽑을 수 있는가 어디 한번 보시라구요.”

천인장주는 머뭇거렸다. 뽑지 못하면 망신이요, 뽑아야 본전이었다.

“한 번 보고 싶군요. 천하의 천인장주께서 천인신수도 인정한 천인혈을 다룰 수 있는지 말입니다.”

주변에서 들리던 망치 소리가 잦아들었다.

장주와 남궁세가의 소가주에게 시선이 집중되고 있었다. 이쯤 되자 뽑지 않고 버티고만 있을 수 없었다.

천인장주가 드디어 천인혈의 도파에 손을 가져갔다.

“흥! 응?”

가볍게 생각하던 천인장주의 얼굴에 놀라는 표정이 담겼다. 조금 지나자 천인장주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이제는 완전히 망치질 소리가 멎어 있었다.

“엄친께 모시겠소. 잠시 기다리시오.”

잠시 시간이 지나서 천인장주는 천인혈 뽑기를 포기했는지 천인혈을 남궁적에게 돌려주었다.

남궁적이 능글맞게 미소를 지었다. 야비한 표정의 남궁적 특유의 미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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