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
<131화>
그건 아니었다. 그가 지금까지 연성한 적이 없던 것이라 이질적으로 느낄 뿐, 그것 역시 진기였다.
‘언제, 어디서?’
현당은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지금 그의 몸속에 들어와 순환하고 있는 진기는 자하기와 토하기로, 익히 현당이 심공을 알고 있기에 전혀 이질적일 수가 없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현당의 몸속에 격리되어 있는 독기였다. 워낙 장기간에 걸쳐서 조금씩 복용한 탓에 독기도 이제는 현당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중독과는 달랐다. 마치 오랜 기간 단련되다보니 서서히 내성이 생기면서 이제는 조금씩 현당의 진기에 녹아내려 흡수되고 있었다. 다시 말해 독기마저도 힘으로 전환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네 번째 것이 들어와 있었다.
현당이 자하기와 토하기의 조화를 꾀한 때가 통평사로 정무련을 방문했을 때였다.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이런 게 없었지…….’
조련제마공을 수련한 이후였다. 조련제마공이 현당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외부에서 진기를 흡수했다는 이야기였다.
현당은 우희로부터 조련제마공을 연성한 이후의 행적을 더듬었다.
‘먼저 정무련 행사에 참석했고, 다음에 바로 남궁적이 돌아온다는 소리를 들었지. 그리고 어떻게 되었더라?’
대충 짐작이 되면서 출처가 밝혀졌다.
서문장미였다.
지금 현당의 몸속에 있는 정체 모를 기운은 바로 서문장미로부터 얻은 서문세가의 심공이 분명했다. 그리고 모용미를 만나 즐거운 시간을 갖는 동안에도 조련제마공이 활동을 해서 그녀로부터 토하기를 빼앗아왔다.
그 과정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었다. 현당이 모용미와 함께했던 시간이 반 시진 정도에 불과하다면, 서문장미와 보낸 시간은 무려 반나절, 날이 밝기 전까지였다.
순간, 서문장미가 서둘러 돌아갔던 일이 기억났다.
‘그렇군!’
모용미도 모발에 변화가 있었고, 피부도 피로한 사람처럼 푸석해졌다. 반 시진을 함께 한 모용미가 그러할진대 반나절을 함께 보낸 서문장미는 오죽할까!
짐작할 수 있었다.
‘젠장. 이러다가 강호의 공적으로 몰리는 것 아냐?’
생각하니 우스웠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현당인데 범인으로 몰릴 사람은 남궁적이었다. 공식적으로 현당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요, 이미 죽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현당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던가!
“후훗. 하하하…… 하하핫. 하하하…….”
현당은 남궁적의 난감한 입장에 대해 생각하자 대소가 터져 나왔다. 현당의 과오까지 책임져야 하는 남궁적이었다.
불현듯 남궁적의 이름으로 일을 저지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래서는 안 되지. 아암. 내가 할 일은 그게 아니니까!”
현당은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현당의 목적은 수하들에 대한 복수였고, 현당의 목표는 남부맹이 아니라 그 배후에서 그들을 조절하는 배교였다. 그 목표 속에 남궁적도 포함되어 있었다. 남궁적은 표적의 일부일 뿐이었다.
또한 현당의 미래는 남궁적의 제거 이후에 가능한 일이었다. 공적으로는 현당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고, 그렇기 때문에 현당이 활동하기 위해서는 남궁적이 없어져야만 한다. 지금의 남궁적이 현당의 과오를 뒤집어써야 하는 운명처럼 남궁적이 제거된 이후의 현당은 남궁적의 과거를 끌어안아야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현당 자신이 저지른 일까지 포함해서!
그것을 생각하면 결코 저질러서는 안 되었다.
“재미있군, 재미있어!”
현당은 미소를 지으며 상체를 뒤로 뒤집었다. 깍지 낀 손으로 뒤통수를 받치면서 상념에 빠져들었다.
“자, 이제 어떻게 한다? 우선 조련제마공의 숨은 기능부터 알아봐야겠군!”
현당은 그녀를 만날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흡족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그 특유의 시원한 미소가!
* * *
남궁적이 왔다 갔다는 소리에 모용곽은 펄쩍 뛰었다.
서문장미를 채음한 남궁적이 자신의 딸이라고 그냥 놔둘 리가 없었던 것이다.
“젠장. 어느 놈이 어느 놈이야!”
모용곽은 서문장미를 채음한 놈이 현당인지 남궁적인지 알 수 없었다. 우선 시급한 것은 시집도 가지 않은 모용미가 다 늙은 할머니가 된 것은 아닌지 그것부터 확인해야 했다.
“아이야, 괜찮으냐?”
문밖에서 부르는 소리에 모용미는 단잠을 깼다. 귀찮았다.
“으응…… 나 자요. 나중에 이야기해.”
“아가? 일어나 봐라, 아가. 아비다. 아비가 할 말이 있어.”
“나 졸려…… 나중에 이야기하자구요.”
짜증이 났다. 모용미도 단잠을 깨우는 아빠한테 짜증이 났고, 모용곽도 부모의 걱정을 알아주지 않는 딸아이한테 짜증이 났다.
“일어나라니깐! 지금 봐야 해, 이년아!”
모용곽의 거친 언사에 모용미는 울컥했다. 결국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며 소리를 질러댔다.
“아잇! 왜 그래요? 나중에 보자니까…….”
벌컥.
참지 못하고 모용곽이 방문을 열었다.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고 당황해하며 서로 몸을 돌렸다. 모용미의 벗은 몸이 모용곽의 시선에 잡혔기 때문이다.
“커험. 흠흠…….”
헛기침을 하며 모용곽이 몸을 돌렸다.
“아빠는…… 못 배운 사람처럼 교양 없게 왜 그래!”
소리치며 모용미는 이불을 끌어당겼다. 아무리 부녀 사이더라도 모용미는 성인이었다.
모용곽도 화가 났다.
“너, 무슨 짓을 한 게냐?”
아직 대낮이었다. 이 시간에 벗은 채로 자고 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뻔했다.
모용미의 대답이 앙칼졌다.
“아빠는! 내가 아직 애인 줄 알우?”
“그럼? 애가 아니면 뭐라고?”
모용곽도 마주 소리쳤다. 등을 돌린 채로 화를 내려니 더욱 화가 났다. 몸을 돌리려는 찰나 모용미의 앙칼진 목소리에 다시 몸을 돌렸다.
“아빠!”
큰일 날 뻔했다.
“아빠는 내가 언제 어른이 되었는지 알기나 해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모용곽은 뜨끔했다.
모르고 있었다. 모용미가 언제 월경을 시작했는지, 언제부터 가리개를 착용하기 시작했는지, 그래서 누구를 사귀었는지 제대로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토착 세력, 즉 사대 세가—당시는 단목가까지 포함해서 오대 세가였지만— 간의 세력 싸움에 정신이 팔려 있다 보니 집안일은 뒷전이었고, 어느새 남경에는 정파 세력들이 들어와 있었다. 어제의 적들과 동맹을 맺고 정무련을 상대하다 보니 세가 안의 일은 완전히 내팽개치다시피 했다.
모용미의 생모도 그 시기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임종을 지켜주지도 못했다. 어린 모용미 혼자 엄마의 죽음을 지켜봐야만 했다.
모용미와는 그때부터 대화가 없었다.
“아, 아가…….”
“아가라고 부르지 말아요. 이제 다 컸으니까.”
모용미가 자리에서 일어나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그래. 미아야…….”
“왜요? 이제 와서 아빠 노릇을 하려구요?”
아직도 화가 나 있는지 모용미의 목소리에 가시가 돋아 있었다.
모용곽은 숨을 돌이켰다. 지금같이 화를 낸다고 해서 풀릴 일이 아니었다. 둘 중 하나라도 흥분을 가라앉혀야 했다. 지금은 과거의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남궁적……이 왔다더구나.”
화장대 앞에 앉아서 머리를 빗질하던 모용미가 거울을 통해 아빠를 바라보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빗질을 했다.
“네.”
“별일 없느냐?”
모용곽의 질문에 모용미는 실소를 흘렸다.
그동안 모용미에게 현당이 찾아왔던 것, 그래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었다는 것도 모르는 모용곽이었다. 그런 사람이 이제 와서 남궁적이 왔었다는 것을 묻는 저의가 의심스러웠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아아무 일도!”
그때까지 모용곽은 차마 몸을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 얼떨결에 봐버린 딸아이의 성숙한 육체와 또 한 번 실수로 돌아보려다 호되게 혼이 난 경험이 모용미를 향해 몸을 돌리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 그럼 되었다.”
“왜요? 무슨 일이 있어야 정상인가요?”
모용곽은 머뭇거렸다.
“아니, 그런 것은 아니다만…… 아니다. 단지 남궁적이 찾아오면 조심하라는 말이다.”
“조심하라고요? 왜요?”
모용곽은 사실대로 이야기를 할까 망설였다. 하지만 곧 포기했다. 사실대로 이야기를 하자면 지금 나타나는 남궁적이 진짜 남궁적이고, 지금까지의 남궁적은 자신과 남궁찬이 만들어낸 가짜라는 것도 이야기해야 했다. 그리고 남궁적이 가짜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영달을 위해 딸아이를 이용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이야기를 차마 자신의 입으로 하기 어려웠다.
“놈이 이상한 것을 익히고 있다는 소문이 있어서 그런다.”
빗질을 하던 모용미가 동작을 멈추고 거울로 모용곽을 바라보면서 턱짓으로 항의하듯 물었다.
“이상한 거, 뭐?”
“아니다. 여하튼 조심하거라.”
모용곽으로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서문장미는 당했을지 몰라도 자신의 딸은 아니라고 철썩 같이 믿었다.
‘그럼! 누구 자식인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모용곽은 발길을 돌렸다.
‘어쩌면 채음보양을 한 것이 남궁적이 아닐지도 몰라. 다른 놈에게 당하고 서문휘 놈이 남궁세가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은 아닐까?’
모용곽은 진위를 확인하기까지 섣불리 판단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벌어진 일이고, 곧 문당에서 연락이 올 것이었다.
이제는 세 가주들이 모여 실력을 겨루는 일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 * *
모용미는 발길을 옮기는 모용곽을 끝까지 노려보았다.
“갑자기 웬 걱정? 흥. 이제 와서 아빠 행세를 하려고 해?”
신경질적으로 빗질을 해댔다. 순간, 모용미의 시선에 하얗게 빛나고 있는 머리카락이 들어왔다.
‘응?’
빗질을 하다 말고 거울을 보면서 흰머리를 골라냈다.
‘갑자기 웬 새치? 언제 이렇게 자란 거지?’
전에 없던 흰머리였다. 그것도 하루 이틀 사이에 생긴 것이 아닌 길고 긴 모발이었다. 그 머리카락만 골라서 뽑는 순간, 또 다른 흰머리도 눈에 띄었다.
“어머, 이게 웬일이래?”
호들갑을 떨며 흰머리를 골라냈다.
하나 둘이 아니었다. 모용미는 거울 속의 자신 모습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보았다.
눈 밑의 검은 주름은 단순한 기미 주근깨가 아니었다. 잠깐 사이에 주름이 하나 늘어 있었다.
“뭐야? 내 나이가 몇인데, 벌써 늙다니!”
모용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과로했나봐. 여하튼 가가는 정말, 아아아!”
모용미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달콤했던 지난 시간을 생각하자 생각만으로도 벌써 흥분되고 있었다.
“헉!”
순간, 모용미는 깜짝 놀랐다.
그녀가 앉았던 자리에 수북하게 쌓여 있는 긴 머리카락들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 그녀의 것들이었다.
* * *
우희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온 주근혜가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지 망설였다.
“저어…….”
그때까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던 우희였지만 하루 종일 그러고 있을 수는 없었던지라 밝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무슨 일이지?”
결심한 듯 주근혜가 입을 열었다.
“남궁 공자가 다시 왔습니다.”
벌써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저녁나절이 다 되어서 찾아왔다면 그 목적은 뻔했다. 주근혜 역시 그 때문에 망설이고 있었으리라.
“피곤하시니 그냥 돌아가라고 할까요?”
우희의 마음을 아는지 주근혜가 먼저 말을 꺼냈다.
우희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남에게 미룰 수는 없었다. 그것도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수하에게 말이다.
“아니. 내가 만나보지.”
우희는 지금 자신이 아랫입술을 이로 뜯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무언가 한마디 하려던 주근혜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숙였다.
“존명!”
주근혜가 나가기도 전에 남궁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문사. 나를 이렇게 문전박대해도 되는 거야?”
평소와 똑같은 어투에 행동거지였다.
가까스로 가라앉혔던 우희의 긴장이 다시 전신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앉으세요. 또 오실 줄은 몰라서 그런 것이니까.”
사무적인 어투로 우희는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서로 동급이라는 것처럼 우희 역시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또 무슨 일이지요? 현당에 대해서 할 만한 이야기는 다 했다고 생각하는데…….”
남궁적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 내 기억에는 하나도 제대로 이야기한 게 없는 것 같은데…… 다시 한 번 이야기해 보지.”
이번에는 우희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는 바가 없다고 했잖아요. 그동안 당신을 대신했으니 무공이야 남궁세가의 무공일 테니 오히려 당신이 더 잘 알겠지요. 내공 역시 남궁세가의 것, 현당이 당신을 대신해서 강호 활동을 한 기간도 겨우 한 달이 안 되었고 그중 절반 이상이 비무 대회와 통평사 행사였으니까 당신이 알아보는 게 더 빠를 것 같은데요.”
우희는 은근히 짜증이 났다. 문초하는 듯한 상대의 어투가 더욱 그녀를 화나게 했다.
“이런 불유쾌한 질문이라면 사양하고 싶군요. 우리는 서로 맡은 역할이 다르니까.”
남궁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맡은 역할이라! 당신이 맡은 역할은 무엇이고, 내 역할은 무엇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