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
<130화>
다시 남궁찬의 눈에서 불이 뿜어졌다.
“그게 다 네놈 뒤치다꺼리 때문이라는 것을 모르느냐?”
남궁찬의 한마디에 남궁적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남궁적은 그제야 알아차렸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나머지 세가의 가주들이 찾아와 아버지를 협박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아버지로 하여금 차기 맹주 선발을 위한 대회에 협력하기로 동의를 얻은 게 확실했다.
“내, 이 가주들을…….”
“가주들을 어찌하겠다고?”
“예?”
남궁찬의 지적에 남궁적은 주춤거렸다.
괜한 객기라는 것을 자신도 알고 있었다. 상대는 한 가문의 가주들이었다. 새로운 무공을 익혀 진짜 실력이 어찌 될지 모르지만 남궁적 혼자서 한 가문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괜히 허튼소리 해서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지 않도록 자중하거라. 지금 네놈이 해야 할 일은 바로 그것이니!”
“예!”
남궁찬의 말을 수긍하는지 남궁적은 힘 있게 대답했다.
“보자.”
남궁찬이 손을 내밀었다.
“예?”
“도 말이다.”
그제야 남궁적은 현실로 돌아왔다. 지금 남궁찬은 아들에게 도를 빌려달라던 중이었다.
남궁적은 마지못한 표정으로 허리춤에서 도를 풀었다. 현당에게서 빼앗은 천인혈이었다.
“용장검(龍腸劍)으로는 안 되겠습니까?”
“용장검이야 천인신수가 만든 남경 무가 칠품 병기 중 하나가 아니더냐? 같은 칠품 병기로 서문세가는 현황기(玄黃旗)를 갖고 있고, 모용세가는 화련채를 갖고 있다. 그런데 지난 비무 대회에서 보니까 모용탄이 단목가의 귀면갑마저 갖고 있더구나. 결국 모용세가는 화련채에 귀면갑까지 가진 셈이지. 어찌 같은 칠품 병기로 다른 것을 이길 수 있느냐?”
남궁찬은 남궁적은 쳐다보지도 않고 천인혈을 바라보더니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다루어보았느냐?”
남궁적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아직…….”
“왜?”
남궁찬은 잊고 있었던 지난 기억이 생각났다. 현당에게서 천인혈을 빼앗았을 적에 악몽에 시달리던 일주일이!
동시에 남궁적도 다른 상념에 빠져 있었다. 천인혈을 처음 잡던 날의 광경이 떠올랐다. 당시 현당은 천인혈을 뽑아 자유자재로 휘두르면서 자신들을 위협했었다. 하지만 남궁적의 수중에 들어온 이후 천인혈은 도실(刀室 : 칼집)에서 빠져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마치 정혼자 앞이 아니라면 옷을 벗지 않겠다는 정숙한 규수처럼 말이지!’
그렇다고 사용하지도 못하는 천인혈을 두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남궁세가의 남궁적을 세간에 널리 알려준 병기가 바로 천인혈이었기 때문이다.
천인신수가 만든 병기들 중에 으뜸은 역시 남경 천하 삼대 신검(南京天下三代神劍)이고 그 다음이 남경 무가 칠품 병기였다. 하지만 신의 손, 천인신수는 천인혈을 보고 손질만 했을 뿐 새로 가공하기를 거부했다지 않은가!
남경 천하 삼대 신검보다 더 뛰어난 병기가 바로 천인혈임을 입증하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 때문에 남궁찬 역시 천인혈의 힘을 빌려 다른 세가 가주들을 상대할 생각이었다.
남궁적은 고개를 들어 남궁찬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을 거부한 천인혈이 남궁찬의 말은 곱게 들을 것인지 궁금했다.
“한번 뽑아보시지요.”
천인혈에 넋이 빠져 있던 남궁찬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응?”
남궁찬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반대로 남궁적은 희색이 만면에 가득 찼다. 이내 남궁찬이 인상 쓰는 표정을 보고 안색을 바로 해야 했다.
‘그렇지!’
천인혈은 남궁적의 기대를 충족시키고 있었다.
남궁찬은 몇 차례 반복해서 도를 뽑으려다가 포기하고 다시 남궁적에게 넘겨주었다.
“네가 뽑아보아라.”
받기는 했지만 남궁적도 고개를 저었다. 시도해 보았자 소용없는 일인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저도 못합니다.”
“못한다? 그럼 그 도가 확실한지 확인해 보기는 했느냐?”
남궁찬의 질문에 남궁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도를 쓰던 놈에게서 직접 빼앗았습니다.”
“그런데?”
“하지만 뽑히질 않습니다.”
남궁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큰일이로구나.”
남궁찬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내 미리 기별을 할 터이니 천인장에 들러라. 가서 대사를 치르기 전에 먼저 도를 손보고자 한다 전하거라. 그곳에서는 무슨 수가 있겠지.”
별다른 방법이 없었던 남궁적은 그의 말에 그저 공손히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 * *
현당은 조심스럽게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모용미는 현당의 방문 전에 가졌던 불만족을 해소했기 때문인지 만족스런 얼굴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이대로라면 건드려도 쉽게 일어날 것 같지 않았다. 정말 사랑스러운 표정이었다. 순간, 현당은 다른 사람이 떠올랐다. 마치 모용미의 얼굴이 다른 사람의 얼굴로 바뀌는 것처럼 새로운 영상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우희 나연희…….’
떠오른 사람은 의외로 남부맹 문당의 문사, 우희 나연희였다. 현당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으응.”
현당의 손길을 느낀 모용미가 꿈틀거렸다.
순간, 현당은 깜짝 놀랐다.
현당의 손에 걸리는 탐스러운 모용미의 머리카락 중에 흰머리가 눈에 띄었던 것이다. 처음에 현당은 새치라 생각하고 무심히 넘겼다.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뭐, 뭐야?’
달라져 있었다. 모용미의 변화는 몇 가닥의 새치에 불과했지만 현당 자신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우선 기운이 넘쳤다. 단순히 기운이 펄펄 넘치는 것이 아니라 내공이 증가해 있었다. 작은 양이었지만 현당은 감지할 수 있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자하기가 아닌 토하기가 증가해 있었다. 운기행공을 하지 않았는데도 토하기가 증가해 있었던 것이다. 놀란 눈을 하고 현당은 자신의 상태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일주천, 이주천, 다시 삼주천…….
확실했다. 그것은 토하기였다. 운기행공을 함에 따라 새로 증가한 내공이 확실하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마치 새로 퍼 온 모래가 예전부터 쌓여 있던 모래성과 뒤섞이면서 구분이 되지 않는 것처럼 토하기는 그렇게 뭉쳐지고 있었다.
‘어디서 온 거지?’
현당의 의문은 오래 가지 않았다. 더불어 조련제마공과 제련현마강이 하나로 합쳐지게 되면 왜 흡정마공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지도 알 수 있었다.
‘모용미…….’
그녀의 얼굴이 푸석푸석해 보였다. 젊음의 기운을 잃은 것처럼, 그게 아니라면 과로에 지친 것처럼 피부가 까칠해 보였고 눈 밑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어져 있었다.
현당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 현상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을 찾아가야 했다.
‘우희…….’
현당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갈 때도 소리 없이 조심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그 새끼에 대해서 빠짐없이 모조리 말해봐.”
단목기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남궁적이 우희를 방문했다.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잔뜩 성난 목소리로 물어왔다.
“뭐를요?”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낱낱이 모두 다! 네 년도 그놈과 살을 섞었을 거 아냐? 그러니까 빨리 말해. 놈의 신체적인 특징은 물론이고, 놈이 익힌 무공, 놈의 수준, 놈이 어떤 체위를 좋아하고, 놈의 거시기 털이 어떻게 생겼으며, 또 전희는 얼마나 어떻게 하는지 말이야. 그래, 놈이 건드린 여자와 안 건드린 여자의 명단을 작성해 봐.”
사람의 인격을 완전히 무시하는 남궁적의 언사에 우희는 치욕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까지 이런 대접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는 우희였다.
“당신이 직접 알아보세요. 나는 아는 바가 없으니!”
“큭!”
우희의 싸늘한 냉소에도 불구하고 남궁적은 코웃음을 쳤다.
“아는 바가 없다? 오호, 그러셔? 그럼 누가 놈을 만들었지?”
남궁적이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미소를 지었다. 비열한 웃음이었다. 눈빛부터가 그러했다. 끈끈하면서도 느끼한 빛을 발하면서 우희의 속을 뒤집고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남궁적의 표정이 사악하게만 느껴졌다.
‘사람이 일순간에 저렇게 바뀔 수도 있구나.’
한 번 남궁적의 변한 모습에 실망을 하기 시작하니 미소 짓는 그의 얼굴마저도 역겹게 느껴졌다.
순간, 우희는 깨달았다. 현당과 남궁적의 커다란 차이가 섬뜩할 만큼 커다랗게 확대되었다. 지난번 남궁적의 방문 때 어렴풋이 느꼈었지만 이제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우희만의 착각인지도 모르겠지만 둘은 분명 미소가 서로 달랐다. 현당의 미소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싱그러운 느낌을 주고 마음을 편하게 하고 만들었다면 남궁적의 표정은 보고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발가벗겨지는 것처럼 역겹게 느껴졌다. 표정이 아닌 미소 그 자체에서 느낄 수 있었다.
덕분에 우희는 쉽게 냉정을 되찾았다. 다시 남궁적을 바라보는 우희의 눈빛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은 수정 모양 냉랭하게 빛나기만 했다.
“선발은 내가 했지만 만들어지기는 남궁세가에서 만들어졌으니 그곳에 가서 알아보시지요.”
우희의 말에 남궁적은 멈칫거렸다.
현당이 남궁적을 대신한 기간은 고작해야 반년이었다. 그중에서도 실제로 강호 활동을 한 시기는 비무 대회 기간과 통평사로 정무련에 갔던 기간으로 모두 합쳐봐야 한 달 남짓한 기간이 전부였다.
우희의 말처럼 현당의 활동은 대부분이 남궁세가 안에서, 그것도 수련동 안에서 이루어졌다. 우희에게 물어보는 것보다 현당이 수련동에서 무엇을 익혔는가를 찾는 것이 더 정확하리라.
하지만 그냥 그렇게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얻는 것 없이 돌아간다면 남궁적으로서 체면이 서지 않았다. 따지려고 문당으로 왔는데, 우희의 기세에 밀려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돌아서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젠장. 그래도 네가 아는 게 있을 거 아냐? 놈이 무엇을 좋아한다거나, 어느 집 계집이랑 자주 어울린다거나…….”
싸늘한 어조로 우희가 답했다.
“그건 나보다 당신의 약혼녀가 더 잘 알겠군요.”
순간, 남궁적은 발바닥에 송곳이 찔린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머뭇거렸다.
그의 가장 큰 약점이 바로 모용미였던 것이다. 지금까지는 몰랐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단 한 번 본 것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었다.
모용미는 더 이상 남궁적이 상상하고 있던 양갓집의 요조숙녀도 아니었고, 남궁적만을 바라보는 망부석도 아니었다.
남궁적이 여자를 알기 전부터 남자를 알고 있는지도 몰랐고, 남궁적이 해보지 못한 성적인 경험 또한 풍부한 것 같았다. 어떻게 하면 흥분시킬 수 있는지 아는 것을 보면 남자를 제대로 다룰 줄 아는 것 같았다. 게다가 모용미는 남궁세가의 남궁적을 아는 것이 아니라 현당의 남궁적에 길들어져 있지 않던가!
“이 썅!”
소리를 지르며 남궁적은 밖으로 뛰쳐나갔다.
남궁적이 나가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주근혜가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언제라도 대접할 수 있도록 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만약 우희의 집무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기라도 하면 바로 들어오려던 것이 분명했다.
“차를 마실 사람이 갔군요.”
주근혜가 찻잔을 가져가며 중얼거렸다. 그제야 우희는 심호흡을 할 수 있었다.
‘긴장, 경계, 분노, 게다가 공포까지!’
한두 차례 숨을 몰아쉬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흥분된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마치 지금까지 무언가가 기도를 막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우희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한동안 뜸을 들인 후에야 우희는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고마워…….”
우희의 말에 주근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병상련일까? 두 사람의 시선 속에 교감이 흘렀다.
* * *
현당은 우선 서둘러서 새로운 안가로 돌아왔다. 우희를 찾아가기 전에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새로운 안가는 금질 이건용이 준비해 놓았다. 현당이 만든 안가는 우희에게 들켰기 때문에 소용없었다. 그 외에 준비해 놓은 것은 일회용이라 다시 쓸 수도 없었다. 이건용이나 흑산벽에게 신세를 지는 것이 싫었지만 우선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혼자 방에 들어온 현당은 조용히 운기행공에 몰두했다. 먼저 끌어 올린 것은 자하기였다. 가장 익숙한 내공인 만큼 쉽게 올라와서 빠르게 순환하기 시작했다. 뒤이어 토하기까지 무리 없이 진행되었다. 자하기에서 토하기로의 전환도 이상 없었다. 새로 흡수된 토하기 역시 빠르게 자하기로 전환되었다.
문제는 그 다음에 있었다.
‘이건 또 뭔가?’
알 수 없는 것이 현당의 몸속에 들어와 있었다.
언제 들어와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운기행공을 하지 않았다면 평생 모르고 지나쳤을지도 몰랐다.
마치 얌전한 새색시가 신방에 들어와 한쪽 구석에서 새신랑의 하명을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새로 흡수된 기운은 조용히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현당은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진기를 순환시킬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마음이었다. 남궁적도 단 한순간, 평상심(平常心)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주화입마에 빠졌던 것이 아닌가!
현당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체내의 독기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서 역류하는 바람에 위기를 맞았었다. 그런 경험이 그를 더욱 조심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우선 들어온 놈의 정체부터 다시 확인했다.
‘혹시 독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