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
<128화>
늙은이가 달고 있던 흰 수염과 지팡이가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 남궁찬, 그리고 삼촌 남궁진, 마지막으로 현당 그놈만이 익히고 있을 자하기가 분명했다.
역시 현당 그놈이었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일각조차 되지 않는 숨 한 번 돌린 그 짧은 순간에 사라질 만한 곳은 없었다. 그 사이에 남궁적의 시야를 피해 달아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적어도 남궁적의 생각에는 그랬다.
‘그렇다면!’
남궁적은 인력거꾼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인력거꾼이 서둘러서 달려가고 있었다. 그는 인력거꾼이 현당이 아니라면 인력거에 몸을 실은 손님이 현당이라고 확신했다.
남궁적은 망설이지 않고 인력거 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휘장을 소리가 나도록 젖혔다.
“무슨 짓인가, 젊은이?”
인력거에 앉아 있는 풍만한 체격의 중년인이 거친 음성을 토했다. 화려한 비단 옷에 기름진 피부. 좀 전의 늙은이와는 사람이 완전히 달랐다.
그래도 남궁적은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의 눈보다는 자신의 분석을 더욱 신뢰했다.
“현당, 네놈이지?”
사아아.
소리 없이 뽑힌 남궁적의 검이 중년인의 가슴을 헤집었다.
“허억!”
놀란 중년인이 신음 소리를 흘렸고, 드러난 피부 위로 살짝 피가 맺혔다.
“응?”
남궁적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과 달리 중년인의 피부와 살은 진짜였다.
“허억!”
이번에는 남궁적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풍만한 중년인이 현당이라고 확신했던 남궁적은 당황했다. 마른 사람이 뚱뚱한 체격으로 변장할 수는 있어도 뚱뚱한 사람이 마른 사람으로 변장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풍만한 중년인은 절대로 현당이 아니라고 남궁적의 예상을 보기 좋게 뒤엎었던 것이다.
“이런 젠장!”
또다시 현당을 놓쳤다.
“자네가 쥐고 있는 검병(劍柄 : 칼자루)에 새겨진 사자상이 자네가 누군지 말하고 있구먼. 내 가만있지 않겠네. 이 수모에 대한 보상은 확실히 받아내겠어!”
남궁적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멍청함으로 인해 가문의 이름에 먹칠할 상황에 처하게 된 셈이었다.
낭패였다. 시작부터 일진이 사납더니 갈수록 일이 꼬이는 것만 같았다.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지체하다가는 더 험한 꼴을 당할지 모를 일이었다.
“저,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불한당을 쫓고 있던 중이라, 그만!”
품을 뒤지던 남궁적은 깜짝 놀랐다.
당연히 있어야 할 것들이 없었다. 그곳에서 나올 때 얻어온 비밀 병기는 물론 오늘 필요할지 몰라 준비했던 춘약까지 몽땅 사라지고 없었다. 이번에도 당한 것이 분명했다.
“젠장. 젠장. 젠장!”
정말로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제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 날이었다.
“망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이 사이에도 현당, 그자는 저 멀리 달아나고 있을 터였다.
“가자.”
중년인의 명령이 들림과 동시에 인력거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다시 섰다.
“자네!”
인력거 휘장이 걷히고 중년인이 얼굴을 밖으로 내밀었다.
무슨 말일지 모르겠지만 남궁적은 듣고 싶지 않았다.
“사자상을 안다면 제가 어디 살고 있는지도 아실 것이오. 찾아오시면 그때 정중히 모시리다. 오늘은 제가 급한 일이 있어 이만…….”
남궁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더 이상 이 재수 없는 곳에서 낭패를 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등 뒤로 멀어지는 모용세가가 보일 뿐이었다.
* * *
발바닥에 불이 붙은 듯한 모습으로 남궁적은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망할 놈의 새끼. 그래서 명가의 자식이라는 놈들은 다 지랄 같다니까!”
인력거에 타고 있던 중년인, 금질 이건용이 투덜거렸다.
“그래도 검술 실력이 좋아서 살짝 베이기만 했군. 어찌 알았나, 이리 될 것을?”
인력거꾼이 인피면구를 벗으며 시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정도도 모른다면 어찌 천하의 현당이라 할 수 있겠나?”
이건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럴 만도 하군. 그나저나, 이건 또 왜?”
“아직 확인해야 할 게 또 있거든!”
현당이 자신 있게 말하며 금질이 내미는 옷을 받아 들었다. 남궁적이 입고 있던 것과 똑같은 옷이었다.
모용세가의 높은 담장을 바라보는 현당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확인할 일이 말이야!”
* * *
같은 시각.
남궁찬은 의외의 손님들을 맞이하며 당황하고 있었다. 모용곽이야 현당을 지도하느라 가끔 찾아오기는 했지만 서문휘의 방문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통평사가 돌아온 지 겨우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다. 아직 문당을 통해서 통평사단의 업무가 보고되지도 않은 이 시점에 직접 찾아올 사람들이 아니었다. 분명 무슨 사단이 벌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통평사단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지요?”
서문휘가 애써 평정을 유지하며 물었다.
표정으로 보아 의례적인 방문은 아닌 듯했다. 서문휘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것을 모용곽이 겨우 말리고 있었다.
“일이라니요? 무슨…….”
남궁찬이 모용곽을 돌아보았다.
그도 알 것이었다. 통평사로 참가한 남궁적이 진짜 남궁적이 아니라 현당이었다는 것을. 하지만 아직 기별을 하지 않은 까닭에 진짜 남궁적이 돌아왔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남궁세가의 적자가 한때 주화입마에 빠졌다가 일어났다는 것은 이미 비밀 아닌 비밀! 커어험, 험.”
큰기침을 하면서 서문휘가 얼굴을 돌렸다.
남궁찬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게 조심했건만 남부맹 일에는 한 발 물러서 있던 서문휘까지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 비밀은 없다더니 지금이 딱 그 꼴이었다.
“아, 그렇습니까? 그럼 주화입마에 빠졌던 적아가 완치를 하고 다시 멀쩡해졌다는 소문은 안 도나봅니다?”
서문휘가 다시 말을 받았다.
“오호오! 그렇군요. 주화입마에 빠졌다가 다시 내상을 치료했다! 그런데 무슨 수를 썼기에 병상에서 완전히 털고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우리도 그 수 좀 배워봅시다.”
순간, 남궁찬은 자신이 서문휘의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남궁적이 주화입마에 빠졌었다는 것을 자백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보다 남궁적이 주화입마에 빠진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어떻게 치료했는지, 그런 것을 밝혀야 할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남궁찬은 지금이라도 발뺌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남궁세가의 가주인 자신에게 그 누가 자복(自服 : 자수)하라고 강요할 수 있단 말인가!
남궁찬은 표정 관리를 위해서라도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시구려. 주화입마라면 그것이 보통 내상이오? 그런 아이가 비무 대회에 나가서 그런 무공을 보이겠소? 하물며 사절로 정무련에 가서 펼친 신위는 또 어찌 설명하겠소?”
더 할 이야기가 없다는 듯이 남궁찬은 몸을 돌렸다.
“보통의 방법으로 치료한다면 그렇지요. 보통의 방법이라면!”
지금까지 가만있던 모용곽이 한마디 거들었다.
꾸중하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더니, 지금 모용곽이 딱 그 꼴이었다.
진짜 남궁적이 어떤 상태였는지, 그래서 누굴 데려다가 그 위기를 넘겼는지 그 과정을 누구보다 잘 알 뿐만 아니라 같이 도모한 공범인 모용곽이 이제는 남궁찬을 추궁하려 들고 있었다.
남궁찬은 미간에 잔뜩 주름을 잡고 모용곽을 돌아보았다.
“그렇지요. 보통의 방법이었다면 애초에 치료가 불가능했을 일. 결국 특단의 비법을 사용했을 터…….”
“무슨 소리요, 특단의 비법이라니?”
남궁찬이 언성을 높였다.
뜻이 있어 작당을 하고 온 두 사람에게 더 이상 물러나서는 안 될 일이었다. 여기에서 물러나면 계속해서 물고 늘어질 것이 분명했다.
모용곽이야 공범이니 남궁찬과 서문휘 두 사람 중 우세한 쪽에 손을 들어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서문휘와 같이 온 모용곽은 이미 서문휘의 손을 들어주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지금 남궁찬이 물러나면 패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남궁찬은 물러날 수가 없었다. 어렵게 얻은 자리인 것은 둘째 치고서라도 그동안 세 세가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버텨온 자리였다. 게다가 남부맹의 맹주 자리가 바로 코앞에 와 있는 중요한 시점에 서문휘에게 물릴 수는 없었다.
서문휘가 동의를 구하듯 모용곽을 쳐다보았다.
“예. 특단의 비법. 설마 정무련 측에서 소림의 신단 같은 영약을 주지는 않았을 터! 사라진 배교의 비법 정도라야 가능한 일 아니겠소?”
대답 대신 모용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남궁찬은 멈칫거렸다. 섬뜩한 냉기가 꼬리뼈에서부터 척추를 타고 올라와 머리털을 곧추세우는 느낌이 들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남궁적이 성한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에 기뻐하느라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땅히 생각했어야 할 일이었다. 팔다리가 완전히 뒤틀리고 얼굴도 돌아갔던 남궁적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두 다리로 걷고 뛰고 날게 된 이상 어찌 된 영문인지 확인했어야 했다. 무작정 좋아만 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남궁찬은 이성을 찾고 침착하게 대응하기로 했다. 남궁적을 만나서 해결해도 될 일이었다. 우선은 이 위기를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다.
“증거가 있소이까? 설마 심증만으로 이러지는 않을 터!”
서문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하지만 섣불리 말하기 힘든 증거라도 있는 것처럼.
이와는 대조적으로 남궁찬의 얼굴에서는 서서히 핏기가 사라졌다.
“내 입으로 말하기 창피한 일이지만…… 내 딸이 채음을 당했소. 당신의 아들한테 말이오.”
남궁찬은 뒤통수에 망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 * *
“남궁적은 무엇으로 다시 일어날 수 있었나?”
의외의 방문에 우희는 당황했다.
단목기였다. 같은 곳에서 나온 사람들이기에 비밀은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곳을 나온 후 남부맹에서 활동한 기간이 다르기에 모르고 있을 수 있는 일이 있었다.
가장 최근에 그곳에서 나온 사람은 남궁적이었다. 특히나 단목기는 남궁적이 그곳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도 그가 돌아오고 나서야 최근에 알게 되었다. 상대적인 소외감이 그를 조급하게 만들고 있었다.
“나도 아직 몰라요.”
우희 역시 남궁적의 주화입마 치료 방법과 그가 무엇을 수련하고 연마했는지 모르고 있었다.
“당신이 모른다면 누가 아나?”
“내가 아오. 하지만 단목가주는 알 필요 없으니 굳이 알려고 하지 마시오.”
갑자기 들리는 소리에 단목기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이삼이었다.
그가 오는 것은 기척을 통해서 알고 있었지만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단목기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은 우희였지 이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알려고 들지 마라…… 크큭.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 그러니까 이것으로 내 역할은 다 끝났으니 이제는 버리겠다는 소리인가?”
단목기의 웃음소리가 신음처럼 들렸다.
이삼은 단목기의 기세에 밀리지 않으려는 듯 어깨를 펴며 허세를 부렸다.
“이 모든 것이 다 교의 지령. 그 깊은 뜻을 어찌 우리 같은 범부가 헤아리려 하오? 단목가주에게도 따로 지령이 있을 것이외다.”
단목기가 씁쓸하게 웃었다.
“지령이라! 지령을 받을 때까지 계속 대기하란 말인가? 지령은 누가 전하지?”
이삼이 더욱 거들먹거렸다.
“내가 전해드리리다. 내가 아니라면 우희가 전할 것이오. 나나 문사가 전하지 못하면 책사라도 나설 것이외다. 단목가주께서는 걱정하실 일이 아니, 커헉!”
허공에서 이삼의 두 다리가 건들거렸다.
“한때는 세가 소리를 들었지만 이제는 몰락한 단목가의 가주가 나다. 무너진 집안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판 사람이 바로 나다. 그런 내게 허수아비처럼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며 서 있다가 용도 폐기가 되어도 그 모든 것을 순순히 받아들이란 말이더냐? 가서 전해라. 나는 내가 필요로 해서 당신들과 손을 잡은 것이지 당신들이 나를 필요로 한 게 아니라고 말이다. 나를 없애고 싶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야.”
쿠당탕.
공중에 떠 있던 이삼의 신형이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이삼이 가까스로 정신을 추슬렀을 때는 벌써 발을 구르면서 단목기가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끙!”
신음 소리를 흘리며 이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가 우습나?”
이삼은 고소하다는 듯이 미소를 짓고 있는 우희를 향하여 고함을 질렀다.
“모르나요? 나는 언제나 이곳, 문당을 방문하는 사람에게 미소로 맞이하고 미소로 배웅한다는 것을! 우아하게 말이지요.”
“킁!”
이삼 역시 단목기와 마찬가지로 발을 구르며 나갔다. 그러나 묵직한 도리깨가 구르는 것 같은 단목기의 소리와는 달리 이삼은 작은 손 망치로 못질하는 듯한 소리였다.
우희의 얼굴에 경멸이 가득 담긴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나 우희는 이 상황을 즐기고만 있을 수 없었다.
“용도폐기라…….”
단목기의 고민을 남의 일로만 치부할 수 없었다. 어쩌면 자신도 그런 신세일지 모른다는 근거 없는 불안감이 우희의 마음속에도 조금씩 번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