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
<127화>
그건 일찌감치 눈치챈 사실이었다. 비록 단 한 차례였지만 남궁적과 충돌하는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남궁적의 초식은 남궁세가의 검법인지 모르겠지만 내공은 아니었다. 절대로 남궁세가의 자하기가 아니었다. 자하기와는 그 느낌이 전혀 달랐다. 그렇다고 모용세가의 토하기도 아니었다. 이전에는 경험한 적 없는 새로운 이질적인 것으로 단순 명료하게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이것저것 수십 가지가 한 그릇에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는 듯한 그런 내공이었다.
‘뭘까? 그곳에서 나왔으니 흡정대법이나 규화신공 중 하나일 텐데…….’
하지만 자신이 갖고 있는 흡정대법과는 다른 것 같았다.
‘흡정대법은 아닐 테고, 그럼 규화신공인가?’
아닐 것 같았다.
‘나라도 그렇게는 안 하지, 아암. 그렇고말고!’
남궁적이 확실히 자기편이라는 보장이 없는 한 그들이 자신의 밑천이나 다름없는 규화신공을 남궁적에게 전수할 리는 만무했다.
‘그렇다면 정말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전수한다는 말이 되는데, 그런 사람이 있을까?’
그것도 조사해 봐야 했다. 할 일이 너무 많았다.
현당은 손가락으로 양쪽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젠장. 생각할 게 너무 많으니까 골치가 아프군!’
현당은 차근차근 생각하기로 했다. 그들이 움직이기 전까지 움직일 필요도 없고 움직여서도 안 되었다. 어둠 속에 숨어 있는 그들을 밝은 곳으로 끄집어내는 순간, 숨통을 조여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당 역시 숨을 죽이고 때를 기다려야 했다.
‘무공은 나중에 생각하고, 우리 둘이 다른 점은 또 뭐지? 쳇, 내가 알 수는 없을 것 같군. 누가 알까?’
현당과 남궁적을 잘 알고 있는 사람만이 그 차이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거의 모든 사람이 현당이라는 존재를 모르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 그런 사람은 손에 꼽을 수 있었다.
‘우희, 남궁찬 그리고 모용곽. 이 셋은 알 테고. 아, 장 행자가 있군. 금질이나 흑산벽은 나를 알아도 남궁적을 모르니 해당이 안 되는 것 같고, 또 누가 있지?’
더 없을 것 같았다. 설령 배교 사람 중에 있다손 치더라도 현당의 존재만 알 뿐 직접 만난 적이 없는 이상 모르는 것이나 매한가지였다.
‘우희, 우희라! 모든 열쇠는 우희가 쥐고 있는 셈이로군. 그건 그렇고, 우선은!’
현당은 당장 처한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작전 계획의 가능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모용미의 반응이 중요했다. 현당은 시선을 다시 모용세가의 정문으로 던졌다.
조금 있으면 기별을 받은 금질이 준비물을 갖추고 도착할 것이었다.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 * *
남궁적은 무릎 사이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그의 사지를 결박했던 화련채는 모용미의 수중으로 돌아간 지 오래였다. 하지만 묶였던 팔다리가 해방되었어도 그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지랄…… 도대체 내가 왜 이렇게 된 거지? 모용미의 뇌쇄적인 미모 때문일까? 아니면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던 상황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그녀의 기도에 압도당했기 때문일까?’
알 수가 없었다. 분명한 것은 자신이, 천하의 남궁세가의 적손인 남궁적이 모용미 앞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여자의 손길 몇 번 만에 사정하고 고개를 숙였다는 것이었다.
‘젠장, 젠장, 젠장…….’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사지도 멀쩡하고 생각도 바뀌었다. 성(姓)에 대한 경험도 숫총각이던 반년 전과 비교하면 천양지차였다. 그런데 아무것도 못하고 고개를 숙여야 했다. 마치 처음 경험하는 어린아이처럼!
곁눈질로 모용미를 바라보았다. 실망이 가득한 표정으로 혼자 다탁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찬은 물론 대작하는 상대도 없었다. 자신이 해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녀 앞에서 추한 꼴을 보였다는 생각에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녀가 먼저 말이라도 걸어준다면 모를까……. 하지만 그럴 것 같진 않아 보였다. 냉기가 마치 잘 벼려진 칼날처럼 보였다.
‘젠장. 내가 왜 이렇게 움츠려 든 거야!’
한숨만 흘러나왔다.
탁.
모용미가 빈 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마치 판사가 판결을 내리기 위해 망치로 두들기는 소리처럼 들렸다.
“오늘은 왜 그래?”
모용미의 한 마디에 화들짝 놀란 남궁적이 엄마 앞에서 꾸중 듣는 아이처럼 고개를 바짝 치켜들었다.
“으, 응?”
“오늘은 왜 이러냐고? 이전과 너무 다르잖아요!”
남궁적은 깜짝 놀랐다.
‘저, 전과 다르다고?’
반년 만에 처음인 자신에게 전과 다르다고 말하는 모용미를 남궁적은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놀란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게다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오늘은 정문으로 들어온 거죠?”
모르고 있는 사실이 또 하나 있었다. 잊고 있었다. 그녀의 방으로 들어서는 순간, 생각해 냈지만, 금방 잊혔던 기억이 다시금 떠오르고 있었다.
지금껏 모용미가 자신에게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가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용미와 남궁적, 이 두 사람이 그만큼 가깝다고 입증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와 그럴 정도로 가깝다고? 우리가?’
그제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금 모용미는 자신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순간, 남궁적은 경련을 일으켰다. 좀 전에는 사정하는 쾌감을 이기지 못해 경련을 했다면, 지금은 현당에 대한 분노 때문에 일으키는 경련이었다.
‘현당, 이놈의 자식이!’
남궁적이 손끝 한 번 잡아본 적 없는 모용미를 현당 그 자식은 이리저리 요리하고 있었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닐 터였다. 모용미가 자신을 기다리며 하고 있던 준비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저건 이런 방식, 저런 체위, 그런 상황 연출 등등 모든 것을 다 거친 후에나 할 수 있는, 그런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무슨 바람이 불어 정문으로 들어왔냐고? 크큭. 크크큭. 그래, 그래! 출신이 도둑놈이었으니, 오죽 하겠어? 놈의 장기를 십분 활용했겠지. 명성이 자자했던 도둑 출신인 만큼 놈에게 월장은 식은 죽 먹기 아니었을 텐가! 당연히 놈은 정문 대신 담을 넘어 들어왔을 것이다. 게다가 이년이 두 다리를 쩌억 벌리며 반겨주었으니, 보부도 당당하게 들어왔을 테고. 이런 썅!’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참을 수 없었다.
“그, 그럼 오늘 복장도…….”
“지난번에 약속하기를 오늘은 반대로 해보기로 했잖아요. 그래서 기별을 받자마자 이렇게 준비하고 있었건만…… 정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다른 사람에게 들키는 줄 알고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알아?”
이제 좀 화가 풀렸는지 모용미가 눈을 흘겼다.
“어, 언제?”
모용미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언제냐고?”
순간, 남궁적은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 모용미는 남궁적과 현당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언제 왔었지? 직전에 말이야.”
모용미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며칠이나 되었다고. 그러니까, 음…… 정무련에 다녀온 바로 다음 날 아니었어요? 탄이 오빠가 그날 오전에 잘 다녀왔다고 인사하고 돌아갔으니까.”
이제는 정말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남궁적이 다시 남경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현당은 버젓이 모용세가에 들어와 남궁적 행세를 했던 것이다. 그것도 남궁적의 약혼녀인 모용미와 뜨거운 시간을 보내면서 남궁적을 희롱할 계획을 세웠고, 남궁적은 보기 좋게 현당의 손에 놀아난 꼴이다. 지금도 어디선가 현당은 남궁적의 행세를 하면서 돌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런 썅!”
화가 난 남궁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놀란 모용미가 눈만 동그랗게 뜬 채 남궁적을 바라보았다.
“몇 번 했어?”
“뭘?”
“놈이랑 몇 번이나 했냐고?”
“놈? 누구?”
순간, 남궁적은 실언을 깨달았다.
모용미에게 현당은 남궁적이었을 뿐이다. 현당이 남궁적 행세를 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오로지 남궁찬과 모용곽, 그리고 우희 세 사람뿐이었다.
모용미에게 현당과 몇 번이나 잤냐고 묻고 싶은데, 캐자니, 자신과 몇 번이나 관계를 가졌냐고 묻는 꼴이다. 그것을 자신이 모른다는 게 말이 되나!
“정말 엿 같은 상황이로군.”
화가 난 남궁적은 씩씩거리며 방을 나갔다. 그의 등 뒤로 거칠게 닫히는 방문 소리가 울렸다.
“자기가 제대로 못 해놓고 왜 애꿎은 문에 대고 화풀이야, 화풀이는!”
남궁적을 향하여 모용미의 성난 화살이 날아왔다.
“씨이!”
화가 나 밖으로 나오기는 했지만 막상 할 게 없었다.
“썅. 썅. 썅!”
이게 다 그놈 때문이었다. 육 개월만 기다렸으면 되었을 것을, 괜한 그놈을 끌어들여 일을 이따위로 만들어놓았다고 남궁적은 생각했다.
‘누가 놈을 끌어들였지?’
“이게 다 그년 농간이야! 어쩌면 내가 주화입마에 빠졌던 것도 혹시 그년 흉계였는지도 몰라!”
차를 들고 들어오는 하녀가 보였다.
“비켜!”
남궁적이 거칠게 밀치며 뛰어나가는 바람에 애꿎은 시녀만 자빠졌다.
“아악!”
뜨거운 찻물이 그녀를 덮쳤다.
* * *
현당의 예상대로였다. 정문으로 들어간 남궁적이 다시 모용세가의 정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서둘러 문당으로 향하던 남궁적과 마른 체격을 한 초로의 노인이 부딪혔다. 지팡이를 의지한 채 겨우 걸음을 옮기던 노인은 뒤로 밀리다가 결국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어흑. 아이구, 허리야. 이 사람아! 젊은 사람이 잘 좀 보고 다니지, 갑자기 튀어나오면 어떻게 하나?”
백발 수염의 노인은 지팡이를 짚으며 일어나려고 애쓰면서 한마디 던졌다.
“이봐, 늙은이는 눈도 없어? 왜 나만 잘못했다고 시비야!”
남궁적의 거친 목소리에 백발 노인은 기가 죽었다.
“아니, 내 말은 그게 그렇다는 것이지, 뭐 딴 뜻이 있는 것은 아니고…….”
“그래서 뭐?”
남궁적은 눈을 부라렸다.
“아, 아닐세, 아니야.”
겨우 몸을 일으킨 노인은 발길을 돌렸다. 괜히 더 있다가는 성질 더러운 놈 만나서 해를 입게 될까 저어하는 게 분명했다.
“에잉, 이 늙은이가 잘못했구먼. 가만, 여기가 남부맹의 모용세가지? 모용세가가 예의는 깍듯한데 젊은 사람이 왜 그러시나. 응, 내 잘못이 크니 누굴 탓하겠나. 에구, 허리야. 그러게 늙으면 죽어야 한다니까!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지금껏 살고 있는지 원! 에구, 허리야.”
남궁적은 그런 식으로 자신을 피하는 늙은이가 보기 싫었다. 하지만 자신은 남궁세가의 적손이었다. 이런 식으로 소문이 나봤자 좋을 리 하나 없었다. 어떻게든 저 늙은이의 기분을 풀어줘야 했다.
“영감.”
남궁적은 인상을 찡그리며 품을 뒤졌다. 전낭이 잡혔다.
“가서 약이라도 한 첩 해 드시구려. 그렇게 부실해서 어디 쓰겠소?”
전낭을 내밀며 늙은이를 붙잡아 세웠다.
“응? 뭘 또 이런 것을 주나? 자네도 여기 모용세가 사람인가? 가만, 젊은 사람인 것을 보니 모용탄 공자가 바로 자네로구먼?”
남궁적은 인상을 찡그렸다. 자신을 몰라보는 데 더 화가 났다.
“난 남궁세가의 적이라 하오.”
“아아, 남궁적 공자시구먼. 어이구, 후하시기도 하지. 다음에 또 보자고. 거 젊은 사람이 몸 하나는 튼실하네그려. 꼭 돌부처를 들이받은 것 같구먼!”
전낭을 받은 늙은이는 중얼거리며 멀어져갔다.
“이봐요, 영감.”
순간, 늙은이가 멈춰 섰다.
“응? 왜 그러나?”
남궁적이 반대쪽을 가리켰다.
“영감, 이쪽으로 가려던 거 아니었소?”
고개를 든 늙은이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아, 그렇지, 그렇지. 내 그쪽으로 가려던 것을 이쪽으로 갈 뻔했네. 고맙네, 젊은이. 자네가 누구라고?”
남궁적은 짜증이 났다.
“남궁세가의 적이요!”
“아, 그래. 남궁적이라 했었어!”
늙은이가 남궁적의 어깨를 몇 번 두들기고는 지나갔다. 화가 난 남궁적은 늙은이의 뒤통수에 대고 나직하게 욕을 했다.
“영감! 가는 길에 뒤를 조심하시오.”
“고맙네, 고마워!”
그 뜻을 알아채지 못했는지 늙은이는 지팡이를 흔들며 답했다. 기어가듯이 조금씩 멀어지는 늙은이를 보면서 남궁적은 조금이나마 화가 풀린 것을 느꼈다.
“미련한 늙은이 같으니라고. 무슨 말인지도 모르……!”
중얼거리던 남궁적의 얼굴색이 변했다. 늙은이에게서 뭔가 익숙한 기운이 전해졌었던 것이다.
“혹시 이건?”
자하기였다. 틀림없는 자하기였다. 남궁세가의 무공인 자하기의 냄새가 늙은이가 지나간 자리를 따라 자취가 남아 있었다.
남궁적은 소리가 나도록 고개를 돌렸다. 길목에서 아직 어정거리고 있어야 할 늙은이가 보이지 않았다.
후닥닥.
길목의 사거리로 서둘러 달려갔다.
“어이쿠!”
때마침 골목에서 튀어나오던 인력거와 남궁적은 부딪힐 뻔했다. 인력거꾼의 몸에서 땀에 전 쉰내가 진동을 했다.
“그렇게 갑자기 뛰어오면 어떻게 하오?”
인력거꾼이 놀라 소리를 쳤다.
“혹시 지금 이쪽으로 가는 늙은이 못 봤소?”
“늙은이? 뭔 늙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