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무사-124화 (124/175)

# 124

<124화>

남궁찬의 입이 찢어졌다. 죽은 줄 알았던 외아들이 살아서 돌아왔다. 그것도 멀쩡하게!

문사 우희가 남궁적을 살릴 수 있다고 이야기할 때에도 믿지 않았다. 단지 지푸라기라도 짚는 심정으로, 그리고 천천히 사지가 뒤틀리고 근골이 마비되면서 죽어가는 아들을 볼 수 없어서 그녀에게 맡겼을 뿐이었다.

그런데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남궁적이 성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으니 기분이 안 좋으려야 안 좋을 수 없었다. 하늘을 날 것 같은 심정이란 게 이런 것이구나 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하지만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그동안 남궁적의 행세를 했던 현당이 아직 살아 있었다.

남궁적의 귀가를 환영하는 잔치를 벌일 수도 없었다. 공식적으로 남궁적은 아픈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주화입마에 빠진 적도 없고, 남궁세가를 떠난 것도 이번 통평사단의 업무 외에는 전무했다.

처음에는 진짜 남궁적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하지만 남궁적이 허리에서 자신의 검을 풀어 남궁찬에게 넘기는 순간, 남궁찬은 그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었다.

“제가 다섯 살 때 직접 제 허리에 채워주셨습니다.”

“놈…….”

그 말을 듣는 순간, 남궁찬은 감정이 벅차올랐다.

칼만 봐도 남궁적이 분명한데, 그때 세상 사람들은 다 잊어버린 일들을 기억하는 것을 보니, 남궁적이라는 것을 의심할 수가 없었다.

남궁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디 아직 불편한 곳은 없는지 팔다리를 주물러보았다. 잘 돌아왔다고 어깨를 두들겨도 보았다.

남궁적이 틀림없었다. 남궁적이었다. 그가 지금 남궁찬의 앞에 두 발로 서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 일행은 어디 두고 혼자 왔느냐?”

“아!”

순간, 남궁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잊고 있었다. 현당에게 홀려서 통평사단에 합류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혼자 남궁세가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보다도 아버지…….”

남궁적은 못된 짓을 들킬까 가슴 죄는 어린아이마냥 남궁찬의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놈에게서 이것을 빼앗아왔습니다.”

남궁적은 천인혈을 들어 보였다.

*  *  *

“정말 이 아비에게도 말할 수 없겠느냐?”

문 밖에서 외치는 친아버지의 말에도 서문장미는 거울 앞에서 떠나지를 못하고 있었다. 서문세가의 가주, 서문휘의 옆에 그녀의 남편이 있으리라는 것도 알지만 서문장미는 문을 열 수가 없었다. 문을 열어서 백발에 한 십 년은 폭삭 늙어 보이는 자신의 모습을 보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서문세가의 여식이었다. 그런 그녀가, 결혼까지 한 아낙이 외간 남자에게 채음당해서 하룻밤 사이에 십 년은 늙어 보이게 되었다고 그들에게 보여줄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서문세가의 장녀, 서문장미였다. 할 일이 없어 놀고 있었지 결코 녹록한 처자가 아니었다.

“이건 분명히 채음이야. 그렇다면 남궁적이 나를 채음했다는 소리. 그가 어떻게 채음술을 익혔지? 분명해…… 그의 방중술은 내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것! 봐봐…… 다시 그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내 몸은 놈을 원하잖아? 그래! 그랬었지. 사람들이 쉬쉬 했지만, 결국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잖아. 잠깐이지만 놈이 주화입마에 빠졌다는 소문이 돌았었어. 그런데 놈은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으로 버젓이 나타났잖아?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게 틀림없어. 주화입마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이겠어? 전보다 더 강한 내공을 주입시켜서 굳어버린 혈도를 뚫는 것 아니겠어? 남궁적은 금기된 무공을 익히다가 주화입마에 빠졌거나 주화입마에 빠지자 그것을 풀기 위해 금기된 무공을 익힌 거야. 결국 그런 무공을 수련한 것이 틀림없어. 내가 느끼지도 못하게 채음할 수 있는 무공은…….”

서문장미의 머릿속으로 그녀가 알고 있는 채정의 무공 목록이 쫙 펼쳐졌다.

“설마…… 설마…….”

그녀의 머리처럼 얼굴색도 하얘졌다.

“아버지…….”

서문장미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문 밖을 향해 소리쳤다.

“그래. 아비다. 아비야…….”

“그이, 거기 있어요?”

“여보. 나 여기 있소. 왔으니 우리 얼굴 보고 이야기합시다.”

“안 돼. 당신은 멀리 가 있어.”

“여, 여보…….”

“당신은 가 있으래도?”

서문장미의 목소리에 신경질에 화에 분노에 온갖 격앙된 감정이 모두 묻어났다.

“자네는 좀 저쪽으로 가 있게. 아무래도 지금 자네한테는 말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는 듯하이. 그렇지 않으면 자네를 멀리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예…….”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혜타원(惠朶院)의 원주 회화타(回花朶) 공생(孔笙)은 썩 내키지가 않았다.

서문휘의 제자로 들어와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서문장미를 어릴 때부터 봐왔기 때문에 그녀의 성격을 잘 알고, 그녀가 어떤 시선으로 그를 보고 있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절대로 공생을 위해서 저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분명히 정무련에 가서 무슨 일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멀리 한다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공생은 자리에서 물러났다.

잠시 후에 서문장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그래. 아비다. 공 서방은 갔다.”

“놀라지 마세요.”

침착한 어조로 서문장미가 먼저 주의를 주었다.

드르륵.

순간, 하얗게 화장을 해서 가리려 했지만 가려지지 않는 주름살과 백발이 서문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허억…….”

잠시 서문휘는 숨을 쉬지 못했다. 그것도 잠깐 서문세가의 가주로서 강호사에 정통할 수밖에 없는 서문휘는 바로 정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누구냐?”

“그의 폭력을 저는 당해낼 수가 없었어요…….”

“누구냐니까? 정무련이더냐?”

서문장미는 고개를 저었다.

“남궁적이요.”

대답을 하면서 서문장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다 해결되었다.

세상에는 남궁적이 그녀를 강제적으로 범한 것이 진상으로 알려질 것이고, 그렇게 사건은 시작될 것이었다. 주화입마에 빠졌던 남궁적은 채정 무공을 익혔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사대 세가에서 축출되는 것으로 결말지어질 것이었다.

*  *  *

사람들이 초조한 마음으로 남궁적을 기다리고 있던 그 시각, 우희는 점소이로부터 봉서를 받았다. 당연히 사람들의 시선이 어서 빨리 뜯어보라고 그녀를 독촉하고 있었다.

우희는 잠시 망설여졌다. 만약 이 봉서가 그곳에서 온 것이라면 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봉서를 열 수는 없었다.

생각 끝에 우희는 봉서를 열기로 했다. 만약 그곳에서 온 봉서라면, 이렇게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봉서로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곳으로부터의 지령은 항상 구두(口頭)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봉서를 뜯어본 우희는 인상이 절로 구겨졌다.

“무슨 내용입니까?”

우희는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그녀의 설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우희는 말을 정정했다.

“통평사께서는 지금 우리보다 먼저 남궁세가로 돌아가셨답니다.”

당장 반응이 나타났다.

“오라버니가요?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독고린이었다.

“젠장…… 한 번 사람들이 치켜세우니까 눈에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단 말이야?”

모용탄이었다.

“진정하십시오. 분명히 공자께서 그냥 돌아가셔야 할 무슨 사연이 있었을 것입니다.”

현당의 호법 역할에 최선을 다한 태구의 목소리였다.

“뭐 다른 이야기는 없소?”

이건 또 항상 정보에 목말라하는 선기의 목소리였다.

“없어요.”

증명이라도 하듯이 우희는 사람들에게 봉서를 흔들어서 보여주었다. 사람들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지는 것과는 달리 우희의 얼굴에서는 근심이 차츰 사라지고 있었다.

이곳으로 오기로 한 남궁적이 도중에 길을 돌려 남궁세가로 갔다는 말만 적혀 있을 뿐, 현당에 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었다. 기대대로 현당은 달아나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잘했어. 다행이야…….’

자신도 모르게 우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미매…… 나요.”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모용미는 깜짝 놀랐다. 고수였다. 인기척도 없이 이렇게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고수가 틀림없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그였다.

“벌써 돌아오신 겁니까?”

들어오라는 말도 없었는데 문이 열리며 남궁세가의 소가주가 들어섰다. 마치 제 집인 양 거리낌 없이 들어오고 있었다.

“아니. 나 혼자 왔소.”

그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모용미의 침상으로 올라갔다.

“가가…….”

모용미가 말리는 것처럼 목소리를 떨었다. 오히려 그게 더 유혹적이었다.

“미매를 보고 싶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그의 손이 모용미의 허벅지를 더듬었다.

“아아, 가가…….”

벌써 흥분한 모용미는 애써 그의 손을 뿌리쳤다.

갑자기 생각난 듯이 그가 물었다.

“우리, 오늘은 다르게 해볼까?”

“다르게? 어떻게?”

쫘아악. 쫘아악.

그가 갑자기 비단금침을 찢기 시작했다. 기대에 찬 시선으로 모용미는 그가 하는 행동을 구경만 하고 있었다.

탁탁탁.

잠시 후 그는 준비가 끝났는지 준비된 비단 끈을 잡아당겨서 소리를 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벌써 모용미는 그가 하고자 하는 것에 흥분이 되고 있었다.

사지가 결박당한 채 모용미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옴짝달싹 못 하고 현당이 하는 대로 희롱당했다. 그리고 그녀는…….

“하아아아…… 가가아아…….”

전에 경험하지 못한 절정에 올랐다.

흐뭇한 표정을 지으면서 모용미는 엎드려 있었다. 그리고 찢어진 이불이 좀 전의 충격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의 바로 옆에는 남궁세가의 소가주가 승자의 표정으로 느긋하게 앉아서 체력을 보충하고 있었다.

“어때, 미매?”

“좋았어.”

준비 동작도 없이 이렇게 짧은 순간에 절정에 오를 수 있다고는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사지를 결박당했다는 사실이, 그리고 일방적으로 상대에게 희롱당할 수밖에 없다는 위기감이 그녀를 서두르게 만들었는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좋았을 뿐이다. 기회가 된다면 한 번 더 하고 싶었다. 너무 빨리 끝나 아쉬웠다.

남궁세가의 소가주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다음에는…….”

그가 말끝을 흐렸다. 그래서 더욱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에는?”

“반대로 해볼까?”

“반대?”

상상만으로 벌써 모용미는 흥분되고 있었다.

‘그래, 다음에는 남궁세가의 소가주를 내가 묶어서 희롱하는 거야.’ 그것도 좋을 것 같았다. 벌써 기대가 되었다.

*  *  *

날이 밝을 무렵, 통평사가 빠진 통평사단이 남부맹에 도착했다. 해단식이라도 있어야 했지만 통평사가 먼저 집으로 간데다가 부통평사도 일행에서 이탈해서 무리를 이끌 사람이 없었다.

그저 흐지부지 사람들은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오라버니, 너무 못되었어!”

독고린이 화가 나서 소리쳤다.

“그냥 가실 거요?”

모용탄이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우희에게 물었다.

“그럼요?”

우희가 되물었다. 정작 결정을 내려야 할 사람은 우희가 아니라 모용탄이나 독고린이었다. 직책상 이 둘이 그녀보다 상급자였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그런 것은 생각지도 않고 있는 듯했다.

“이제 가면 언제 또 뵐 수 있나 생각해 보았소.”

모용탄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런 모용탄을 독고린이 신기한 듯이 바라보다가 이내 모용탄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 아니 오히려 이제야 알아차렸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만큼 독고린은 남궁세가의 소가주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리라.

우희는 모용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잠시 후에 답했다.

“아시지요? 난 사람과 결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용탄이 대답했다.

“알고 있소. 문사가 당신의 모든 것이라는 것도.”

문사란 말은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문당의 수좌라는 자리가 될 수도 있고,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이라는 말도 될 수 있고, 또 그 사람이 맡은 역할이라는 뜻이 될 수도 있었다. 모용탄의 말은 그 모든 것을 담고 있는 함축된 말이었다.

우희는 애써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주어진 임무에 충실하다 보면 또 뵙겠지요.”

모용탄이 애써 얼굴을 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요. 주어진 임무에 충실하다 보면…… 그리고 때가 되면 내게도 임무가 주어질 것이오. 당신 앞에 떳떳이 나타날 수 있는 임무가…….”

순간, 우희의 눈이 커다랗게 확대되었다. 가뜩이나 사슴처럼 커다란 그녀의 눈이 더욱 크게 벌어졌다.

헤어져서 멀어져 가는 모용탄의 축 처진 뒷모습을 우희가 시선으로 계속 좇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뇌리에는 ‘당신 앞에 떳떳이 나타날 수 임무’라는 말이 계속 맴돌고 있었다.

‘그, 그럼 당신이 바로 책사?’

이제야 풀리지 않던 수수께끼가 풀렸다.

왜 그곳에서 보낸 세 사람이 현당을 감시하는 데 관심을 가지지 않았는지, 그리고 왜 모용탄은 사사건건 현당에게 시비를 붙였는지 말이다.

어릴 적부터 우희를 쫓아다니던 모용탄은 우희 곁에 있기 위해서 가문을 버리고 그곳에 몸을 담았던 것이다.

우희가 사부인 죽심거사에게 발탁될 때, 확실하고 안정된 길을 버리고 죽심거사를 따라온 사람이 모용탄이었다. 그런 모용탄이기에, 모용탄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희를 지켜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숨어서 우희를 지키기 위해 모용탄은 책사가 되는 길을 택했고, 책사라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도 모용탄은 자신의 진신 실력을 숨겨야 했고, 남경 삼탕아 소리를 듣는 수모를 감당해야만 했다.

우희는 또 한 번 눈물이 왈칵 솟을 것만 같았다.

“바보. 제 앞가림이나 열심히 할 것이지 누가 나를 지켜달라고 했어?”

저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다. 정말 바보 같았다.

분명 모용탄은 알고 있으리라. 그녀가 다른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도 알고 있었을 테고, 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는 것도 보고 있었으리라. 그래서 현당에게 시비를 걸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런데도 모용탄은 그녀 곁에 있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바보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알잖아! 당신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그녀의 마음속에는 새 사람이 자리 잡고 있었다. 더 이상 모용탄이 들어설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음에 괴로웠다. 그녀 역시 그처럼 표현하지 못하고 바라보며 가슴앓이를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에게 사랑보다는 연민의 정이 느껴질 뿐이었다. 그래서 우희는 가슴이 더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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