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
<122화>
순간, 남궁적의 신형이 날았다. 눈앞에서 사라졌다 싶은 순간, 비표를 날리던 자의 바로 코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그의 양손에는 그자의 머리가 쥐여져 있었다.
퍼석!
남궁적의 얼굴로 피와 뇌수가 튀었다.
“왜 바보 같은 짓을 했냐고? 네놈을 믿어서 그랬다. 그 상황에서 네놈이 실수를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그래서 네놈을 믿은 끝에 이런 바보짓을 하게 되었다? 틀리냐?”
쿠웅.
그제야 수급을 잃은 비표를 날리던 자의 신형이 바닥에 쓰러졌다. 마치 나무등걸이 넘어가는 소리가 울렸다.
“쫓아!”
남궁적의 찢어지는 목소리가 숲에 울렸다.
* * *
현당이 숲으로 들어간 후 유운신법이 드디어 빛을 발했다. 나무 사이를 뛰고 방향을 틀기에는 표행신보다 유운신법이 좋았다.
커다란 아름드리 노목(老木)이 앞을 가로막아도, 바람이 나무 등걸을 맴돌면서 빠져나가듯 현당의 신형은 숲속을 종횡무진으로 누비고 다녔다.
현당은 직선으로 뛰지도 않았다.
부채꼴 모양으로 이리저리 뛰면서 흔적을 남겨놓았다. 생가지를 부러뜨리고, 돌부리를 발로 차서 흙을 뒤집어엎고, 바닥에는 길게 발자국을 남겨놓았다. 그것도 모자라 때로는 허공에서 신형을 뒤집어 중간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고 방향을 틀기까지 했다.
부드럽게 물 흐르듯 움직이는 동작이 유운신법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 속에서 거칠게 뛰노는 동작은 단지 유운신법이라고 말하기에는 무언가가 부족했다. 그 힘은 바로 토하기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바로 모용세가의 탕하번천보(蕩河翻天步)였다. 그것은 유운신법 속에 토하기를 운용한 탕하번천보가 섞여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느새 현당은 내공뿐만 아니라 무공마저 섞는 경지에 이르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기를 대략 오십……. 남궁적이 말한 대로 백까지 셀 리 만무했다. 오십도 후하게 쳐서 오십이었다. 지금쯤이면 남궁적이 숲으로 들어올 때가 되었다고 현당은 생각했다. 때마침 현당은 계곡에 도착했다. 절벽 꼭대기가 아닌 계곡이었다. 현당이 있는 숲은 계곡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곳에서 현당은 소리도 없이 신형을 하늘로 솟구치더니 계곡 낭떠러지 중간에 나 있는 소나무 가지 위로 날아 내렸다. 그곳에서 현당은 숨을 죽인 채 발밑을 바라보고 있었다. 현당의 위치는 평지에 만들어진 숲에서 가장 높은 가지 끝. 결국 현당은 그 위에서 아래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관조할 수 있는 셈이었다.
그리고……. 한 마리 학처럼 현당은 고고한 모습으로 발아래에서 벌어지는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인 양…….
그들이 여기까지 올라오려면 적어도 한 시진 이상이 소비되리라. 그러면 저녁이 될 것이고 산이나 숲, 계곡은 다른 곳보다 더욱 빨리 어두워진다.
벌써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 * *
“종잡을 수 없군요. 놈의 흔적을 말입니다.”
“종잡을 수 없다니?”
한 명이 지팡이로 땅을 쿡쿡 찍으면서 대답했다.
“달아난 방향이 일정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냥 쫓으면 되잖아!”
또 다른 한 명이 고개를 저었다.
“그게…… 마치 수십 명이 한꺼번에 달아난 것처럼 여기저기에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세 번째 사람, 철권을 휘두르다 손에 상처를 입은 자가 말했다.
“놈이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옷을 찢어서 주먹에 붕대처럼 두르고 있었다.
뿌드득.
남궁적이 이를 갈았다.
“쥐새끼 같은 놈…… 그래도 어서 찾아! 어두워지기 전에 찾아야 한다.”
한 명이 조심스럽게 남궁적에게 다가왔다.
“보고를 해야 하지 않습니까?”
“뭐라고? 현당을 잡았다가 놓쳤다고?”
“그래도 비표행이 죽었는데…….”
“그렇군. 그가 죽었구나. 흐음…… 별수 없다. 우리가 현당의 흔적을 발견하고 쫓다가 놈에게 죽었다고 해야겠군.”
“헉! 어떻게 그런 말을? 그, 그럼 비표행의 실력이 현당보다 하수라고 인정을 하는 꼴이 됩니다.”
파사학.
또 한 명의 머리가 깨졌다. 마치 잘 익은 수박이 주먹 한 방에 으스러지는 것처럼 파편이 흩어지면서 피와 뇌수, 그리고 골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이러면 되겠지. 놈이 자신의 진짜 실력을 감추고 있었다고. 그래서 비표행뿐만 아니라 오구행(吳鉤行)마저도 당했다고 하면 말이야. 어때?”
남궁적의 말에 다른 두 사람이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남궁적은 분노를 가라앉히듯이 호흡을 조절했다.
“좋아. 놈의 흔적이 없다면…… 밖에서부터 놈을 찾는다.”
히죽.
남궁적이 다시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도 오른쪽 얼굴만 웃고 있었다.
지팡이를 든 놈이 낸 신음 소리에 불만이 묻어 나왔다. 참다못한 다른 한 명이 남궁적의 말에 토를 달았다.
“공자. 이 숲이 얼마나 큰지 아시오?”
“몰라. 하지만, 아는 게 있지. 놈은 멀리 가지 못했다. 이곳에 흔적이 산재해 있다는 것은 놈이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하여 일부러 발자국을 남겼다는 말이야. 결국 놈은 자국을 남기느라 멀리 벗어날 수가 없었다는 뜻이 된다.”
남궁적의 말에 다른 두 사람이 입을 다물었다.
남궁적은 한 손을 벌렸다가 수박을 집어서 으스러뜨리는 것처럼 양손을 다시 포갰다. 천천히, 손가락 마디마다 힘을 주면서…….
까다닥.
손가락 마디의 뼈들이 뒤틀리면서 소리를 냈다.
“이렇게…… 놈을 몰아서 잡아 죽인다. 출발!”
대답도 들을 것 없이 남궁적이 먼저 신형을 날렸다. 방향은 숲의 끝 쪽이었다. 다른 두 사람도 한숨을 내쉬더니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이제 밖에서부터 현당을 안으로 몰 것이 틀림없었다.
* * *
그들이 사라지는 것까지 확인한 현당은 고개를 들어 숲 전체를 내려다보았다. 서서히 숲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에 길이 있고, 어디에 바위가 있으며, 어디 가면 물이 있는지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숲은 대나무로 이루어져 있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대나무 외에는 다른 나무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좋을 수도 있지!”
현당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싱그러워 보였다.
대나무는 뿌리가 촘촘하게 땅에 박히면서도 그 층이 두꺼워 대숲을 이루면, 다른 수종이 함부로 그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기 힘들다. 즉 대숲은 대나무만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군락을 이루 게 된다.
모든 것을 확인한 현당은 다시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이제는 현당이 그들을 쫓을 차례였다.
노련한 사냥꾼은 사냥감을 추격하지 않는다.
노루, 사슴, 범이 다니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일격에 잡거나 덫을 놓고 기다린다. 마치 목 좋은 곳에 거미줄 치고 기다리는 왕거미나 다름없다.
현당은 작업을 시작했다.
천인혈은 남궁적에게 빼앗겼지만 현당에게는 아직 천인혈과 짝을 이루는 단도가 있었다. 그리고 십자 모양에 둥글게 날이 서 있는 비표도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먼저 땅을 팠다. 얼마 파지도 않았는데 바로 대나무 뿌리가 걸렸다. 드러난 뿌리를 지면 밖으로 끌어냈다. 그런 작업을 몇 차례 반복했다.
이번에는 어린 가지들을 잘랐다. 한두 개가 아니라 열 개, 스무 개씩 다발로 잘라서 묶었다. 수평으로 자르는 대신 대각선으로 비스듬히 잘라냈다. 잘라낸 가지의 단면에 다시 십자 모양의 칼질을 하고, 그 틈에 또 돌쩌귀를 박아놓았다. 그렇게 하자 대나무 가지의 잘린 끝이 네 조각으로 벌어져서 이를 드러내놓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음으로 잘라낸 가지를 대나무 뿌리를 지면 밖으로 끌어낸 근처에 세 치 정도만 밖으로 나오게 박았다. 그리고 그 주변을 마른 나뭇잎으로 덮었다. 물론 그것도 댓잎이었다. 이렇게 해서 또 몇 개의 함정이 만들어졌다.
이것으로 첫 번째 함정은 결정되었다.
이번에는 왼손을 대나무 중턱에 문질렀다. 일부러 비표를 이용해서 상처를 냈던 손이다. 당연히 나무 중턱에 현당의 손자국이 남았다.
그곳에서 대충 열 자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대나무를 중턱에서부터 부러뜨렸다. 그리고는 다시 나무 위로 올라갔다.
댓잎과 가지를 잘라서 그물을 만들었다. 튼튼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대충 만든 후에 그 위에 댓잎과 날카롭게 잘라낸 대나무 줄기를 대충 섞어서 걸쳐놓았다. 다시 엮은 줄을 길게 늘어뜨려서 원하는 지점까지 연결했다.
이것으로 두 번째 함정이 완성되었다.
두 번째 함정에서부터 연결된 줄이 끝나는 지점 바로 뒤로 현당은 세 번째 함정의 제작에 들어갔다. 먼저 대나무 줄기를 가른 후, 그것을 옆으로 휘어놓았다. 다른 대나무 기둥과 엮은 후에 횡으로 걸쳐진 대나무 줄기에 촘촘히 송곳 같은 가지를 박아놓았다. 깊이 박을 필요도 없었다. 어떤 놈은 깊이 박기도 하고, 어떤 놈은 흔들면 떨어질 정도로만 대충 박았다.
이것으로 세 번째 함정도 완성되었다.
현당은 그곳에서 직선으로 최단거리 지역으로 이동했다. 거기에서 한 번 꺾여서 다른 곳으로 적당한 곳을 찾았다. 정면을 제외하면 사방이 막혀 있었다. 이곳이 네 번째 장소로 적당했다. 세 번째 만든 장애물과 같은 장애물을 좌우에 설치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았다. 우선 대나무를 한 그루 자르고 그것을 둘로 쪼갰다. 다음에는 근처에 마음에 드는 나무 위로 올라갔다. 역시 대나무였다. 올라간 나무 등걸에 잘라온 대나무 줄기를 엮었다. 이번에는 절대 빠지지 않도록 튼튼하게 묶었다. 그리고 다시 내려왔다. 두 개의 나무가 서로 달라붙은 꼴이었다. 하나는 뿌리를 땅에 박고, 다른 하나는 밑동이 잘린 채 갈라져서. 갈라진 놈의 아래쪽에 적당한 놈으로 튼튼한 바위 하나를 단단히 붙잡아 맸다. 절대로 떨어지면 안 되었다. 길이를 재보았다. 너무 높았다.
“오히려 잘 된 거 아냐?”
줄을 길게 늘여서 딱 적당한 높이로 만들었다. 잘린 나무는 사람의 머리에서 조금 못 미치고, 머리통만한 돌은 허리 어림에 이르렀다. 마음에 들었다.
다시 돌을 잡고 다른 나무를 타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대나무였다. 팽팽하게 당겨서 허공에 붙잡아 맸다. 그 줄은 다시 네 번째 함정 좌우에 횡으로 걸쳐놓은 대나무와 연결해 놓았다. 두 개 다 묶은 것이 아니라 하나에만 묶어놓았다.
이제 네 번째 함정이 완성되었다.
“다섯이었지…….”
현당은 놈들의 숫자를 헤아려보았다. 현당이 보는 앞에서 한 놈이 죽어나갔지만, 나머지 한 놈은 보이지 않았다. 숲의 바깥에서 현당이 나오는 것을 대비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면 남궁적까지 포함해서 넷이라는 소리!
하지만 함정이 넷이라고 해서 한 곳에서 한 놈씩 처리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현당은 다음 수단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되었지?”
시간이 없었다. 지금쯤이면 그들이 이 자리로 올 때가 되었다.
“젠장…….”
적당한 굵기로 대나무를 하나 잘랐다. 그보다 조금 더 길게 하나 더 잘랐다. 작은 놈을 휘어 줄을 엮었다. 순식간에 활 하나가 만들어졌다. 큰 놈도 휘고 역시 줄을 엮었다. 두 번째 활이 완성되었다. 이때 엮은 첫 번째와 두 번째 활줄의 길이는 똑같게 만들었다. 다음으로 첫 번째와 두 번째를 겹쳤다. 그리고 두 활의 활줄은 포개지도록 했다.
현당은 일전에 석궁을 본 적 있었다. 여러 개의 활줄을 겹쳐놓아서 화살의 날아가는 힘을 강하게 만들어놓았었다. 지금 현당이 만든 것 역시 활을 겹쳐서 강도를 세게 하는 것이었다.
이제 화살을 만들 차례였다.
“젠장…….”
순간, 현당은 자신이 바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화살을 만들 재료가 없었다. 무엇보다 화살촉이 필요했다.
현당은 허리를 더듬어 비표를 꺼냈다. 둥그런 원판에 홈을 파서 네 개의 날이 서 있는 십자표였다. 잘하면 이것으로 화살촉을 대신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서둘러서 화살대로 쓸 재료를 구했다. 그리고 그 끝 부위에 칼집을 내고 십자표를 꽂았다. 그리고 다시 묶기를 반복했다. 막상 화살촉을 달고 보니 화살에 날개가 없었다.
“젠장. 젠장, 젠장…….”
땅을 구르다가 현당은 생각을 고쳤다. 하는 데까지 해보야 했다.
고민 끝에 현당은 자른 대나무를 반으로 쪼개서 활 바로 밑에 활대 한가운데에 갖다 붙였다. 이것으로 화살이 날아가는 활주로가 만들어진 셈이다. 그곳에 화살을 거치(据置)하고 활에 걸어서 쏘면 화살은 곧장 날아갈 것이었다.
화살을 마련하기는 했지만 안타깝게도 화살은 이것 하나뿐이었다! 일격에 끝내야 했다.
현당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막혀 있는 네 번째 함정과 직선으로 뚫려 있지만 장애물이 많았다. 직접 이곳으로 날아올 수는 없으리라. 하지만 현당은 그곳에서 화살을 쏠 수는 있었다. 그곳을 마지막 격전지로 정했다.
모든 준비를 끝낸 현당은 복장을 확인했다. 갯벌에서 묻은 흙을 털지 않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바닥에 드러누우면 어디가 흙이고 어디가 옷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위장이 잘 되었다.
게다가 잘라놓은 대나무 가지를 옷자락과 옷소매 여기저기에 꽂아놓았다. 옷 색이 퍼렇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날이 차츰 어두워지고 있었다. 안광만 감추면 사람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터였다. 만족스러웠다. 현당은 언제라도 그들 중에 누구라도 다가오면 손에 쥐고 있는 비표를 날릴 요량으로 팔을 풀었다.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없습니다.”
“잘 찾아봐. 놈은 분명히 이 안에 있다.”
“이쪽도 없습니다.”
“잘 찾아보라니까!”
놈들이 근처로 오고 있었다. 놈들은 세 곳으로 흩어져서 곳곳을 뒤지면서 현당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천천히 오고 있었다.
현당은 서둘러 첫 번째 장소로 이동했다. 시체가 있는 바로 그곳이었다.
* * *
“놈이닷.”
충분히 쉬고 있던 현당은 그 소리가 들리기가 무섭게 바닥을 차고 날아올랐다. 한 걸음에 한 장씩, 마치 숲을 제 집처럼 허공을 가르며 사라졌다.
“쫓아!”
놈들의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현당은 속도를 늦추었다.
“네 저놈을…….”
드디어 놈들이 현당이 쉬던 곳에 이르렀다.
그곳은 놈들의 동료였던 자의 머리 없는 시체가 있던 자리였다. 그들을 기다리는 동안 현당은 그 시체의 옷을 헤집고 배를 갈라서 내장을 끄집어냈다.
그것을 본 놈들의 눈이 뒤집어질 것은 자명했다. 물 불 가리지 않고 현당을 추격할 것이었다.
현당은 어쩌면 그보다 실력이 뛰어난 놈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놈들의 속을 긁어놓을 필요가 있었다.
“헉. 발밑을 조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