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무사-121화 (121/175)

# 121

<121화>

현당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거절하오.”

“거절? 아니 왜? 굳이 살려주겠다는 것을 거절할 이유라도 있단 말인가?”

현당은 침착하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조금 전의 공격을 나무라는 것으로 보아 남궁적이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이상, 등 뒤의 적들은 현당을 공격할 것 같지 않았다. 잠깐 사이에 현당의 생각은 정리되었다.

“먼저 당신이 이야기하는 진 행자라는 자는 한 줌의 혈수로 녹아내렸소. 그게 남궁세가의 그림자의 운명이라면 언제든 죽을 것이 뻔한 것. 나는 남의 그림자로 살다가 그렇게 비명횡사하느니, 내가 원하는 시기에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죽고 싶소. 그리고 나는 당신이 나를 살려둔다는 말 자체를 신뢰할 수 없소.”

현당은 이미 남궁적의 약혼녀, 모용미를 취했다. 그리고 남궁적의 행세를 하면서 여러 가지 일을 벌여놓았다. 단목기와 겨루었고 남궁진을 몰아냈다. 독고린은 현당을 남궁적으로 알고 자신의 연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정말로 남궁적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남궁적의 모든 것을 고스란히 가로채도 남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할 존재가 바로 현당이었다.

그런 현당이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이제는 무공 실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때문에 더더욱 살려두어서는 안 되었다.

남궁적이 그것까지는 생각지 못했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쩝. 듣고 보니 자네 말이 맞군. 정말로 살려두어서는 안 될 사람이야, 자네라는 사람은…….”

남궁적이 아쉽다는 듯이 현당의 위아래를 훑었다. 다시 남궁적의 시선이 현당의 도에 이르렀다.

“그럼 내가 다른 제안을 하나 하겠네. 그 도는 아버지가 자네에게 준 것인가, 나에게 준 것인가?”

현당은 말문이 막혔다. 너무나 당연한 말 아닌가? 천인혈은 남궁세가의 병기고에서 버려진 것을 현당이 집어온 것이다. 현당을 병기고까지 안내한 사람 또한 남궁찬이고.

“결국 자네 것이라는 말이군…….”

남궁적이 아쉽다는 듯이 턱을 쓰다듬었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 어차피 자네는 우리 다섯을 모두 상대하기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것이야. 하지만 자네가 그 도를 들고 있는 이상 우리 역시 피를 안 볼 수가 없겠군. 그러니까…… 내가 자네에게 살 길을 열어주겠네.”

자기 생각에도 기특하다는 듯이 남궁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도를 내게 넘겨주면 우리는 자네를 추격하지 않겠네.”

현당은 눈이 번쩍 뜨였다. 정말로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현당은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았다. 남궁적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한 번 속인 사람은 두 번, 세 번 속일 수도 있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소? 당신들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나 하나뿐인데…….”

현당의 존재 의미는 바로 그것에 있었다.

현당만 없어진다면 남부맹에서, 아니 어쩌면 남부맹뿐만 아니라 정무련을 포함하여 남경에서 그의 존재를 알 수 있는 사람이 없는 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현당을 없애야 했다.

“그것까지는 알 수 없지. 하지만 내 장담하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 다섯은 자네를 쫓지 않겠네. 어떤가? 우리야 자네를 제거하는 게 아니라 내 위치로 돌아가는 게 목적이니 그냥 자네를 못 본 척하면 되는 것이고, 자네는 갈 길을 가면 되는 것 아닌가? 어때, 내 제안이?”

현당은 심사숙고 끝에 대답했다.

“좋소.”

하지만 그렇다고 남궁적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당신들로부터 십 보 떨어진 후 칼을 땅에 꽂아두겠소. 그리고 나는 달아날 거요. 당신들은 그냥 가던 길을 가면 되는 것이고, 나는 내 갈 길만 가면 되오.”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그것과 동시에 현당의 뒤를 막고 있던 두 사람이 순순히 길을 터주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말 이들이 이렇게 쉽게 길을 열어줄 줄은 몰랐다.

현당은 정확하게 열 걸음 물러났다. 그때까지 남궁적의 일행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푸우욱.

현당은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도갑에 꽂혀 있는 천인혈을 조심스럽게 바닥에 꽂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조금이라도 허튼짓을 할 경우 즉시 천인혈을 뽑을 수 있도록 했다.

다행히도 그때까지 그들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빙긋이 미소를 지으면서 현당을 배웅하는 듯했다.

현당의 손이 드디어 천인혈에서 떨어졌다. 떨어지기 직전까지 현당은 망설이는 것처럼 천인혈의 도병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뺐다를 반복했지만 결국은 놓았다. 하지만 아직도 여차하면 바로 도를 뽑을 수 있는 자세였다. 현당의 시선은 그들 다섯 사람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현당은 천천히 허리를 폈다.

그때였다.

현당의 손이 천인혈의 도병에서 한 자 이상 떨어지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한 놈의 손아귀에서 무언가가 번쩍거렸다. 좀 전에 현당에게 비표를 날린 자였다.

퍼헉.

현당의 신형이 뒤로 넘어갔다.

“이런, 이런…… 자네, 왜 그랬나?”

당황한 듯이 남궁적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잘했네. 어쩜 그리 내 생각을 잘 읽나, 그래?”

“으으으…….”

바닥에 드러누운 현당이 신음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나를 쫓지 않는다 하지 않았소?”

“그랬지.”

“한데 왜?”

“그러면? 자네는 그 말을 믿었단 말인가? 설마?”

현당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복부를 움켜쥔 손에 피가 묻어났다.

“중상이 꽤나 심하구먼? 쯔쯔쯔. 왜 그런 바보짓을 했나? 불쌍하구먼!”

남궁적이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다들 현당을 비웃고 있었다. 비표를 날렸던 자는 어느새 다른 비표를 들고 현당을 노리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현당이 허튼짓을 하면 바로 비표를 날릴 태세였다. 덕분에 현당은 바로 눈앞에 천인혈을 두고도 손을 뻗어 잡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뒤로 달아나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하세. 아무리 자네가 내가 파놓은 함정에 빠졌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자네 잘못이라기보다는 나를 너무 믿었기 때문 아닌가? 쌍둥이 형제와도 같은 자네를 죽일 생각을 하니 내 마음이 편치 않네. 대신에 자네에게 백(百)을 헤아릴 만한 시간을 주겠네. 그 다음에 자네를 쫓도록 하지. 그동안에 우리를 피해 달아난다면 자네가 훌륭한 것이고, 우리에게 잡힌다면 애초에 자네 운명이 그리 된 것이니 누구를 탓하겠나? 다 하늘이 내려주신 자네의 천운이 여기까지인 것을. 어떤가, 제군들? 그게 더 공평하고, 또 재미있을 것 같지 않은가?”

남궁적이 자신의 말에 동의를 구하기라도 하는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머지 네 사람이 비웃음을 흘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뒤로 물러났다. 부상이 심한 탓인지 걷는 걸음이 비틀거리기까지 했다. 다시 한차례 쓰러졌다가 일어나 발을 놀렸다. 이러다가는 백을 헤아리기도 전에 쓰러질 것만 같았다.

“저런, 저런…… 이제 세기로 하지. 하나, 둘, 셋…….”

비표를 날리던 자가 말했다.

“차라리 목을 따서 괴로움을 덜어주는 것이 낫지 않겠소?”

“그러면 우리가 재미없지. 열하나, 열둘, 열셋…….”

또 다른 사람이 물었다.

“좀 전에는 셋까지 세지 않았습니까?”

남궁적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이번에도 왼쪽 얼굴은 굳어 있고 오른쪽 얼굴만 웃고 있었다.

“그랬나? 그럼 다시 세기로 하지. 스물하나, 스물둘, 스물셋…….”

“하하하.”

그제야 사람들은 남궁적의 생각을 읽고 웃음을 터뜨렸다.

다행인지 현당은 신형을 숲으로 숨겼다. 두 발로는 달아날 기운이 없어 바닥을 기어가고 있었다. 이제는 더 달아날 기운이 없는지 숨을 곳을 찾느라 여기저기 뒤지고 있었다.

“하하하.”

이제는 수를 세던 남궁적마저 웃음을 터뜨렸다.

드디어 현당이 완전히 숲속으로 몸을 감추었다.

“마흔하나, 마흔둘, 마흔셋…… 가만 들어갔군. 너무 달아나다 지치면 재미가 없으니까, 그만 배애액! 자, 이제 추격하기로 할까?”

“푸하핫. 하하하…….”

남궁적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현당을 추격하기 위해 걸음을 옮긴 것이 아니라 천인혈을 집으러 가고 있었다.

그리고…….

“오오! 그래, 그래…….”

드디어 현당의 천인혈이 남궁적의 수중에 들어갔다. 땅에 박혔던 천인혈을 잡은 남궁적의 동작은 신중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왕릉 속에 묻혔던 진귀한 보물을 꺼내는 것처럼 조심스러웠다.

도갑도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몇 차례 철권과 비표 등에 맞기까지 했는데 흠집 하나 없이 멀쩡했다.

만족스러웠다.

“좋은 도이외다…….”

다른 사람들이 곁으로 다가와 남궁적이 들고 있는 천인혈을 들여다보았다. 그들도 목울대가 꿈틀거리도록 마른침을 삼키는 게 틀림없었다.

“흠이라면…….”

남궁적이 말끝을 흐렸다.

정말 흠이라면 천인혈의 칼자루에 현당이 흘린 땀으로 손때가 묻어 있다는 점이었다.

“흠이라면…….”

남궁적은 중얼거리면서 도파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손바닥을 타고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오히려 남궁적에게는 그것이 쾌감처럼 느껴졌다.

“쌍수도구려? 공자께서는 그동안 편수검을 익히지 않으셨소?”

“오히려 좋지 않은가? 어차피 남궁세가의 무공을 버리고 새 무공을 익혀야 하는 터인데…….”

중얼거리며 남궁적은 도병을 잡은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음?”

남궁적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왜 그러오?”

“아닐세, 아니야…….”

남궁적은 중얼거리며 도병 바로 밑 부분, 즉 도갑의 주둥이 부분을 왼손으로 감싸 안았다. 그리고 왼손 엄지로 도파(刀把), 즉 칼 코댕이를 밀었다. 동시에 오른손에 힘을 주며 도를 뽑았다.

“응?”

그제야 나머지 사람들도 남궁적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도가 뽑히지 않았다. 현당은 아무렇지도 않게 뽑아서 휘두르던 천인혈이 남궁적의 손아귀 안에서는 도갑에 들어간 이후 꿈쩍도 않고 있었다.

“이리 줘보시오. 내가 한번 해보리다.”

비표를 날리던 사람이 남궁적에게 손을 내밀었다.

주기 아깝다는 듯이 남궁적은 몸을 옆으로 틀었다. 그리고 천인혈을 품 안에 감추고 다시 용을 쓰고 있었다.

“아, 이리 줘보래도?”

비표를 날리던 사람이 다시 손을 내밀었다.

몇 차례 더 해보던 남궁적도 하는 수 없이 천인혈을 그에게 넘겼다.

“한 번 해보시게…….”

“힘 하면 또 나 아니오? 허허헉?”

호기롭게 웃던 그의 얼굴 표 정도 일그러졌다. 칼이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천인혈이 다시 다른 사람의 손으로 옮겨지기를 몇 차례, 결국 천인혈은 도갑 쪽으로 두 사람, 도파 쪽으로 두 사람이 매달려서 잡아당기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런데도 한 번 도갑에 들어간 천인혈은 다시는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마치 전장에 나간 낭군을 기다리는 여염집 규수가 안방 문을 걸어 잠그고 두문불출하는 것처럼…….

*  *  *

한참을 씨름하던 그들은 결국 한 명이 포기 선언을 하는 것으로 천인혈과의 대결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만 두십시다. 그놈을 잡으면 어찌 된 일인지 알겠지요.”

그제야 사람들은 현당이 달아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놈이 가봤자 얼마나 갔겠소? 내 십자표를 맞았으니 채 백 보도 가지 못했을 것이외다.”

비표를 날리던 자의 말에 사람들은 현당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그들이 간 곳은 현당이 서 있던 자리였다. 즉 현당이 천인혈을 땅에 박았던 바로 그 위치였다.

핏자국이 보였다.

“그러게 내가 뭐랬소? 응?”

비표를 던지던 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바닥에 떨어진 핏자국이 너무 작았기 때문이다. 복부에 칼을 맞았으면, 아무리 상처가 작을지라도 분명히 바닥은 피로 흥건해야 했다. 그런데 그곳에는 몇 방울의 핏자국밖에 보이지 않았다. 흥건하지는 않아도 바닥에는 점점이 핏자국이 남아 있어야 했다. 한데 그것마저 찾으려야 찾을 수 없었다.

순간, 사람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럼…… 놈이?”

현당은 비표에 당한 것이 아니었다. 이 몇 방울의 핏자국으로 현당이 부상을 입었다고 단정할 수 없었다. 비표를 손으로 받았다면 비표 날에 일부러 손바닥에 상처를 내서 핏자국을 남길 수도 있는 일이고, 일부러 목청을 터뜨려서 토한 피를 손에 받아서 흔적을 남길 수도 있었다.

바닥에 쓰러졌던 현당이 어떻게든 핏자국을 만드는 것은 쉬웠다. 단 몇 방울이면 되었다. 그것으로 복부에 비표를 맞았다고 그들을 감쪽같이 속였던 것이다.

“뭣들 하고 있소? 당장 놈을 찾지 않고…….”

사람들이 서둘러 현당이 들어간 숲으로 달려갔다.

또 다른 흔적이 보였다. 바닥에 피로 쓴 글씨였다.

“물(勿)…… 산(算)…… 자(者), 마록(馬鹿)?”

글씨를 읽는 사람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물산자는 계산도 못 하는 놈이라는 뜻이었고, 마록은 바보를 말하는 것이었다.

옛날 진시황(秦始皇)이 붕어(崩御)한 후, 그 뒤를 호해(胡亥)가 이었다. 당시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던 환관, 조고(趙高)는 어느 날, 황궁으로 사슴[鹿]을 끌고 와서 이것이 무엇이냐고 이 대 황제 호해에게 물었다. 호해는 대답하기를 사슴이라 하였고, 조고는 끝까지 그것을 말[馬]이라고 우겼다. 둘의 의견 대립이 심해지자 조고는 문무백관을 불러 모아 그것이 사슴인지 말인지를 맞추게 했다. 그러자 백관들은 모두 조고의 힘이 두려워 그것을 말이라고 답했다.

그 후로 마록이라 하면 말과 사슴도 구분 못 하는 자, 또는 주변의 힘에 이끌려 제대로 말도 못 하는 바보를 일컫는 말로 쓰였다.

즉, ‘물산자, 마록’이라는 글귀는 백까지 제대로 세지도 않은 남궁적을 가리키며 바보라고 손가락질 하는 말이었다.

“내 이놈을…….”

뿌드드.

남궁적이 이가는 소리가 울렸다.

그 모양을 보고 비표를 날리던 자가 혀를 찼다.

“아니,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하시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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