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
<119화>
아직도 장 행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장 행자가 해독제인 줄 알고 먹는 약도 역시 독이라는 것을 현당이 알려주고 난 이후부터 계속 침묵하고 있었다.
현당은 다른 말은 하지 않고 바로 앞에 놓인 잔을 들었다.
“세 분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현당의 선창에 모든 사람들이 잔을 비웠다. 현당은 지그시 우희를 바라보았다.
“그동안 고마웠소, 문사…….”
우희는 현당을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말하는 사람은 현당밖에 없었다. 다른 식탁에 앉은 사람들도 현당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스으윽.
조용히 반점 안을 둘러본 우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위기가 왜 이래요? 금방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우리 모두 일을 잘 끝내고 돌아가는 것 아닌가요? 이제 남부맹의 신성(新星)으로 거듭나실 남궁 소가주를 위해 우리 축배를 들어요!”
우희가 소리치자 사람들이 저마다 소리치면서 분위기가 다시 살아났다. 저마다 앞사람과 지난 사흘간의 일을 떠들며 즐거워하기 시작했다.
우희의 말에 현당도 들고 나섰다.
“그래. 원 없이 먹자고. 오늘 점심은 내가 낼 테니 드시고 싶으신 것이 있으면 다 주문하시구려.”
“와아아…….”
실내에 환호성이 울려 퍼지고 다시 왁자지껄한 소리가 밖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현당은…….
“물, 물, 물…….”
지금 아니면 먹을 기회가 없는 사람마냥 음식을 입 속에 처넣다가 목이 멨는지 물을 찾았다.
* * *
소란스러운 실내를 뒤로 하고 현당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밖으로 나가면서 다시 한 번 안을 둘러보았다.
우희는 모르는 척하며 출구를 향하여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우희는 알고 있었다. 지금 나간 현당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알면서도 일부러 시침을 떼고 쳐다보지 않고 있었다.
딱 한 번만 우희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애써 우희가 현당을 위해 마련해 놓은 탈출 기회였다.
“가십니까?”
현당은 멈칫거렸다. 생각지 못한 기습이었다. 천천히 몸을 돌렸다. 소리가 난 방향에 장 행자가 서 있었다.
“알고 있었소?”
“말소리를 낮추십시오.”
현당은 장 행자의 말에 고개만 끄덕였다.
“이래 봬도 남궁세가의 그림자였습니다. 소가주는 저를 몰라도 저는 소가주를 여러 번 봐왔었지요.”
현당이 혀를 찼다.
“모두 다 속았는데…….”
이번에는 장 행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영민하신 소가주였습니다. 아무리 한동안 못 봤다고 해도 어릴 적 비무 상대를 해준 저를 몰라볼 바보가 아니었지요. 처음 소가주와 수인사를 하는 순간, 알 수 있었습니다. 왜 가주께서 소가주를 감시하라 하였는지 말입니다.”
다시 현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군.”
“그리고 아랫사람을 그렇게 살갑게 챙기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진짜 소가주는…….”
장 행자가 현당의 곁을 스치며 안으로 들어갔다.
“옥체 보중하시길!”
잠깐 열린 문틈으로 실내의 소란스러움이 흘러나왔다.
현당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아직도 독수리들이 허공을 선회하고 있었다. 아까보다 더 많은 독수리들이 몰려와 있었다.
“젠장…… 벌써 피 냄새를 맡고 왔군.”
심호흡을 한 현당은 느긋한 걸음을 반점의 뒤쪽으로 옮겼다.
반점 내의 사람들의 시선이 잠깐 현당을 향했지만 금방 원위치로 돌아갔다. 여유로운 그의 표정에 아무런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현당은 태연한 모습으로 모방(茅房 : 변소)으로 들어섰다. 어느 누구도 볼일을 보러 나가는 현당에게 신경 쓸 사람은 없었다.
모방으로 들어선 현당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우희였다.
이용하는 사람이 많은 반점의 모방은 일일이 모방의 변통을 치우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모방의 변통을 흐르는 강물과 연결시킨다.
현당은 망설이지 않고 변통 속으로 들어갔다.
행여나 밥값을 내지 않고 이쪽으로 달아나는 사람이 있을까 우려하여 쇠창살로 막아놓았지만 현당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아악.
천인혈이 엉뚱한 곳에서 빛을 발했고 소리도 없이 쇠창살이 잘려나갔다. 현당은 미끄러지듯이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작은 소리조차 나지 않았지만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퍼지는 파장은 한 사람이 물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 * *
한창 식사를 하고 있던 일행에게 점소이가 우희에게 익명의 서찰을 전했다.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우희는 조용히 봉서를 뜯었다.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현당이 사라졌다는 것과 남궁적이 올 때까지 모두 그 자리에서 대기하라는 것이었다.
“통평사께서 갑자기 일이 있으시다는군요.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곧 오실 것이라고 합니다.”
우희는 서찰을 다시 봉하면서 사람들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일이요? 갑자기 무슨 일?”
우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그분의 깊은 뜻을 우리가 어찌 알겠습니까!”
* * *
쐐애액. 퍼허엉.
반점이 있는 방향에서 불꽃이 하늘로 치솟았다.
“발각되었군. 쓰읍!”
그때까지 소리를 죽이면서 움직이던 현당도 더 이상 느긋할 수 없었다.
쐐애액. 퍼버벙.
화답이라도 하듯이 곳곳에서 불꽃이 치솟더니 하늘에 물감 칠을 해 댔다.
현당은 불꽃이 터진 방향을 가늠해 보았다. 불꽃 하나당 같은 수의 인원이 모여 있다고 가정할 때, 불꽃이 많이 솟구친 방향일수록 추격자가 많다는 뜻이었다.
정면, 즉 남부맹 방향에서 가장 많은 불꽃이 치솟았고, 후미 즉 정무련 방향에서 가장 적게 날아올랐다. 좌우로는 고르게 분포되어 있었다.
“큭. 토끼몰이를 하려고 드는군.”
쉽게 알 수 있었다.
앞쪽에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한쪽 방향으로 서서히 조이면서 밀고 온다. 뒤는 그냥 가만히 앉아서 먹잇감이 그곳으로 도망쳐오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말 그대로 토끼몰이다.
현당은 가장 만만한 곳이 어디일까 하고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정면이었다.
여러 조가 한꺼번에 수색할 경우, 각 조는 비슷한 규모의 영역을 할당받는다. 인원이 많다면 할당받은 구역에 있어서 수색의 강도가 높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이 조와 저 조의 경계선이다. 누구의 영역인지 불분명한 경계선 부근은 다른 곳보다 경계가 소홀할 수밖에 없게 되고 서로 상대방에게 일을 떠넘기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정작 그가 가고자 하는 방향은 저잣거리의 동쪽이었지만, 지금 당장은 남쪽, 남부맹이 있는 곳으로 방향을 잡았다. 우선은 포위망을 뚫어야 했다.
삭. 사사삭. 사사사사. 사아사아사아. 쉬이익.
흑산벽에서 현당에게 전해준 표행신이 드디어 가치를 드러내고 있었다. 가속도가 붙기 시작한 현당의 신형은 곧 쏜 화살처럼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 * *
강둑을 따라 내려간 현당은 드디어 적당한 곳을 발견했다. 습지였다. 주변에 갈대도 무성했다.
되도록 갈대는 건드리지 않으면서 땅 밑을 파기 시작했다. 습지의 특성상 흙을 파면 물이 들어왔다. 또한 젖어 있어 땅을 파기도 한결 수월했다.
갈대밭에 사람이 지나간 흔적이 있다면 최소한 그곳의 갈대는 좌우로 쓰러져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쓰러진 흔적 없이 무성하다면 사람의 발길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할 터였다. 그런 곳을 애써 수색할 리도 없고 수색을 하지 않는 경우도 허다했다.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땅을 파던 현당은 비록 갈대 뿌리가 억세다 할지라도 천인혈이 있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불꽃이 치솟은 지 대략 한 시진 정도? 아직 시간은 충분했다.
입에는 갈대 줄기를 물고 습지의 흙을 파고 땅속으로 들어간 현당은 느긋한 마음으로 다음을 기다렸다.
흐르는 강물은 그가 걸어온 흔적을, 멀쩡하게 서 있는 갈대들은 그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감출 것이다.
이제는 수색대가 그냥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 * *
말소리가 들리고 발자국의 진동이 전해질 때, 천하의 현당일지라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 외로 수색대가 빨리 도착했다.
“있나?”
강 건너의 사람과 대화를 하는 듯 소리를 질렀다. 상대방도 대꾸하는지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땅속에 숨어 있는 현당에게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궁금하지도 않았다. 대답은 뻔했다. 게다가 현당은 건너 강둑으로는 가지도 않았다.
‘너무 조급했군.’
아쉬웠다.
이렇게 시간이 많이 남을 줄 알았다면 강 건너에 흔적이라도 남겨둘 것을 그랬다. 그러면 그쪽을 집중적으로 수색할 것 아닌가!
수색대의 말소리가 들렸다.
“벌써 여기까지 왔을 리는 없습니다. 아무리 빠르다 해도 지금쯤이면 겨우 재 너머일 것입니다.”
“만사 불여튼튼이라. 아무리 그렇다 해도 할 일은 확실히 해라.”
아는 목소리였다. 바로 이삼이었다.
투덜거리는 목소리와 여기저기를 뒤지는 소리도 들렸다. 죽창이나 꼬챙이로 갯벌을 쑤시고 다니는 것이리라.
저 정도는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 현당은 조용히 제련현마강을 끌어 올렸다.
갯벌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물속으로 들어와야 하고, 그러다 보면 옷이 더러워지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그런 일은 하급 무사의 몫이었고 그만큼 대충하고 넘어갈 것이 틀림없었다.
탁탁.
현당의 몸을 꼬챙이가 몇 차례 두들겼다. 돌 부딪는 소리가 나자 꼬챙이는 다른 곳으로 이동해갔다.
모든 것이 현당의 생각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굳이 이렇게 뒤지고 올라가야 합니까?”
이번에 대답하는 목소리는 장이였다.
“그건 자네들이 현당 그자의 무서움을 몰라서 하는 소리네. 우리도 까딱 잘못했다가는 현당 그자에게 정체가 탄로 날 뻔했다니까…….”
“그럼 뭍을 뒤져라. 행여 숲 쪽에 이상 징후가 있는지 예의 주시해야 하느니!”
이삼이 사람들을 이동시켰다.
십여 명이 자리를 뜨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이곳의 수색은 끝이 났지만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우희가 현당 놈을 탈출시킨 것은 아닐까?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그렇게 생각되는데…….”
이삼이었다.
“에이.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런 낌새는 못 찾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희 낭자의 신심(信心)을 직접 보셨지 않습니까?”
장이가 대답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래도 너무 오래 밖에 나가 있었어. 너무 오래! 자네도 봤지 않나? 이제는 위아래도 모르는 그 언행을 말이야.”
“우희가 밖으로 나간 지 몇 년입니까? 한두 해가 아니라 자그마치…… 그만큼 신심이 깊다는 뜻이겠지요.”
“하지만 너무 오래 밖에 나가 있었어. 이제는 다시 불러들여야 할 때가 되었어.”
“그러자면 대안이 있어야…….”
“어허! 불러들여야 한다니깐! 자네도 보고를 올릴 때, 그런 의사를 적도록 하게. 객지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상하 기강도 해이해졌고, 충심(忠心)에 의심이 간다고 말일세. 누가 뭐래도 그년을 불러들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이.”
“저쪽 수색도 끝이 났나 봅니다.”
“천천히 가도 되네. 어차피 놈은 그물 속에 갇힌 물고기야…….”
발소리가 사라졌어도 한동안 현당은 꼼짝하지 않았다.
어차피 시간은 현당 편이었다. 느긋한 마음으로 해가 저물기를 기다렸다.
* * *
발소리가 멀어지고도 현당은 바로 일어나지 않았다. 한 시진을 그렇게 꼼짝 않고 누워 있다가 일어났다.
보통 포위망은 원을 그리며 이루어진다. 추격하는 사람의 수가 적으면 그 원이 작아지지만, 수가 많아지면 커지는 법이다. 인원의 수는 사건의 중대성과도 밀접하다.
현당의 탈출은 이들에게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으리라. 당연히 적지 않은 수가 나왔다고 생각하기에 현당은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더 이상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이 없다는 확신이 든 후, 현당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씻을 생각도 하지 않고 우선 강둑으로 올라갔다.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강물은 조금 더 내려가면 장강 줄기와 만나리라. 그러면 자유롭게 대양을 달리겠지. 현당은 이제 자신도 자유를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위망은 이미 현당을 지나갔다. 그들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고, 그동안 현당은 벌써 남경을 벗어났을지도 모른다.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먼저 현당의 수하들을 만나기로 했다. 우선 그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킨 후, 진언사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급할 것 하나 없었다. 현당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디 적당한 곳에서 옷부터 갈아입을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전방에서 한 무리의 인영이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 수는 겨우 다섯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들이 내뿜는 기도가 범상치 않았다. 다섯 사람이 무리지어 오는 모습이 마치 수백의 장병들이 대오를 형성하고 달리는 것 같았다.
기도(氣道)! 기도였다.
그들의 신형에서 은연중에 뿜어지는 기도가 그런 압박감을 주고 있었다. 한마디로 고수만으로 이루어진 무리였다.
현당의 신경이라는 신경은 모두 팽팽하게 당겨지면서 경계 신호를 전달하고 있었다. 대뇌는 바로 대피 경계령을 내렸지만 땅에 박힌 두 발은 움직일 줄 모르고 있었다.
걸어오고 있음에도 그들이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마다 한 걸음에 한 장씩 쭉쭉 늘어나면서 신형이 빠르게 확대되었다. 더불어 그들의 모습이 커지면 커질수록 현당은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여러 명의 남궁가주가 무리를 짓고 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이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게 되자 그쪽에서 먼저 현당을 알아보고 아는 체를 했다.
“여어! 이게 누구신가? 천하의 현당이 아니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