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
<117화>
체내에 흡수된 독은 기로 바뀐다. 독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이 복용하는 모든 것은 인체 내에서 기로 전환된다.
결국 인간은 음식과 약을 통해서 그 속의 기를 빨아들이고 나머지를 배출하는 셈이다. 독 역시 마찬가지다. 복용한 내용물이 기로 전환되면서 인체와 거부 반응을 일으키면 그것이 독이고, 순화(純化) 과정을 거쳐 흡수되면 그것은 음식이나 약인 셈이다.
약과 독도 그 종류가 천양지차다. 때에 따라서는 약이 되고 반대로 약이 독이 되기도 하니, 일률적으로 약과 독을 구분하는 것도 무의미하다.
생독진언에서 바라보는 독에 대한 관점은 바로 그것이었다. 독도 용도와 과정에 따라 잘만 순화시키고 받아들일 수 있으면 그것을 자신의 기로 전환할 수 있었다.
다른 음식물이나 마찬가지로 체내로 들어와 기로 전환된 독은 인체와 반응을 일으킨다. 독기를 자신의 것으로 용해하는가, 아니면 자신이 독기에 지배되는가에 따라 그 처리 방법이 바뀐다. 전자, 즉 체내에 흡수된 독기를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면 독을 기로 전환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 즉 독기를 통제할 수 없는 경우는 체외로 배출시켜야 한다. 가장 심각한 경우가 바로 독기에 자신이 지배되는 경우다.
현당이 장 행자를 염려하는 경우는 바로 세 번째였다.
남궁찬은 천천히 이들을 중독시켰다. 자각증세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치밀하게 말이다. 그것도 정확히 그들이 현장으로 투입될 시기를 맞춰서!
마찬가지로 남궁찬에 의해서 현당도 독을 복용했다. 그리고 현당이 복용한 독과 같은 독을 장 행자 역시 복용하고 있었다.
현당은 차근차근 생각을 정리했다.
장 행자의 경우는 분명히 중독에 의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리라. 중독이란 그런 것이다. 현재의 상태에 의해 자각증세가 나타나고, 그 자각증세를 잊기 위해 좀 더 강한 독을 복용한다. 더 강한 독성이 발작을 일으키면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더, 더 강한 독을 필요로 한다. 결국은 독성을 이기지 못할 때까지 알면서도 서서히 죽음으로 다가가는 게 바로 중독이다.
“해독제를 복용하지 않으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드나?”
현당의 말에 장 행자는 고개를 저었다.
다행이었다. 아직은 장 행자의 상태가 자각증상은 나타나지만, 금단증상을 일으킬 정도로 심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직은 중독에서 벗어날 희망이 있었다.
문제는 해독제였다. 현당도 해독제의 존재 여부를 모르는데 이제 막 독임으로 임무를 시작한 장 행자가 알 리 없었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더 이상 현당은 남궁찬을 신뢰할 수가 없었다. 장 행자에게도 해독제라고 하면서 더 강한 독약을 복용시키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어쩌면…….’
어쩌면 해독제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니 현당으로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게 편했다. 그쪽으로 판단하고 대응 방법을 찾는 게 나을 터였다.
그렇다면 방법은 생독진언의 내용대로 독을 진기화시키거나 체외로 배출하는 것뿐이었다.
“심각한 문제요?”
대뜸 묻는 장 행자의 질문이 현당의 상념을 현실로 옮겨놓았다.
“아아. 우선…….”
그건 나중 문제였다. 자신의 상태와 해결 방법을 찾는 것은 천천히 해도 되었다. 우선은 장 행자에게 공급된 약을 통해서 그의 상태를 진단하고, 해결방법을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약은 얼마나 자주 복용하나?”
“사흘에 한 번이오.”
“복용하는 동안 부작용은 없던가?”
“부작용이라니?”
“뭐…… 떨림이라든가 어지럼증 같은 것 말일세.”
“그런 것을 예방하기 위해 먹는 것 아니었소?”
“그렇지…….”
장 행자는 모르고 있었다.
“내가 하나 복용해 봐도 되겠나?”
“왜 그러오?”
“아, 더 좋은 약을 만들 수 있을까 해서 말이네.”
장 행자가 코웃음 쳤다.
“좋으실 대로. 한 달분의 여유는 있으니까 말이오.”
“한 달분이라고?”
“그렇소. 가주께서는 약에 유통기한이 있다 하셨소. 그러니 기한 안에 모두 소화하는 것이 낫다 하였소.”
“기한 안이라…… 한 달분의 여유를 두고 약을 만들어 주었군.”
현당은 남궁찬의 처방이 참으로 사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보다 더 할 수 없으리라. 철저히 해독제라고 믿고 있으니, 필요량 이상으로 약을 복용했을 장 행자는 남궁찬의 말만 믿고 제 발로 점점 더 중독되고 있었다.
현당은 약을 몇 알 챙겼다.
“약이 남더라도 먹지 않는 게 좋을 듯하군.”
현당을 바라보는 장 행자의 눈빛에 비웃음이 가득했다.
“그럼 약을 그냥 버리라고?”
“그러니까…… 장 행자. 내 말은 이 약이 어쩌면 해독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지.”
순간, 장 행자의 안색이 변했다.
“해독제가 아니라고? 그럼 뭐란 말이오?”
“잠시 중독 증상을 늦추는 정도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말이지.”
장 행자가 현당을 빤히 쳐다보았다. 마치 현당의 말이 진심인지를 의심하는 듯했다. 그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아시오? 당신은 지금 나에게 당신 아버지가 나를 속이고 있다고 말하고 있소. 지금 나보고 그 말을 믿으라는 거요?”
현당은 장 행자에게 자신의 말을 증명해 보이기로 결심했다.
“보시게.”
손을 뻗어 창밖에서 울고 있는 새를 잡았다. 그리고 억지로 새의 입을 벌려 환을 집어넣었다. 잠시 후 반응이 나타났다. 경련을 일으키던 새의 날개와 발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즉사였다.
그것을 지켜보던 장 행자의 얼굴 역시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리고는 말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방을 나갔다.
“장 행자!”
현당이 그를 불렀다.
“아무 말도 마시오. 아무 말도…….”
잔뜩 화가 난 장 행자가 현당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내게 아무 말도 말란 말이오.”
콰항.
장 행자가 문을 닫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휴우우.”
현당은 자신이 잘한 일인가 생각해 보았다.
이제 장 행자는 더 이상 약을 복용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장 행자가 환을 복용하지 않으면서 참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휴우우. 이젠 장 행자를 믿을 수밖에! 그만한 자제력이 없다면 내가 도와도 소용이 없는 짓이지…….”
말은 그렇게 해도 현당은 자신의 무능력을 탓하고 있었다. 그의 내공과 해독 능력이 충분했다면 장 행자의 독을 빨아들일 수도 있었다.
한숨만 내쉬었다.
“자…… 이제 다음 일을 할까?”
현당은 장 행자가 준 약을 한 알 복용했다. 그리고 몸속에서 일어나는 반응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공복이라 약은 쉽게 소화되었고 바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외부로부터 동종의 독이 들어오자 즉각 반응이 나타났다.
뜨끔.
명치 부위에서 칼로 쑤시는 통증이 느껴졌다.
원군이 들어오자 체내에 갇혀 농성을 벌이던 독기들이 일제히 궐기를 하고 나섰다.
‘이 느낌은…….’
기억하고 있었다. 벌써 두 번째였다. 그것도 바로 어제 있었던 경험이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한 번은 고철과 비무를 벌이려는 순간, 일어난 반응과 똑같았다. 어제는 새로운 차원의 내공에 적응하느라 그런 반응을 보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어제는 일시적으로 일어난 현상이었지만 오늘은 지속적으로 발작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게 바로 독기의 발작이라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젠장. 그보다 내가 더 심각한 문제로군.’
지금은 남 걱정을 할 때가 아니었다. 그의 내공 수위가 높기 때문에 자각하지 못할 뿐, 그의 중독 상태도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과 같은 내공이 없었다면 그가 먼저 독에 녹아내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현당은 체내의 독기들이 일으키는 반응의 강도를 측정해 보았다. 그것으로 해독제라고 알려져 있는 단환의 독성의 강약을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용히 눈을 감고 운기에 몰두했다. 자하기와 토하기에 의해 억눌려 있던 독 기운이 원군을 발견하고 한층 성을 내고 있었다.
‘젠장! 내가 바보짓을 했군.’
현당은 내공을 끌어 올려 체내에 주입된 독기를 한 곳으로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체외로 배출할 수 없는 이상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 새로 들어온 원군을 농성군에 합류시켜서 계속 농성하도록 하는 것뿐이었다.
* * *
서문장미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아침이었다.
상체를 일으키기 위해 침상을 딛는 팔이 떨렸다. 역시 온몸에 힘이라곤 한 조각도 남아 있지 않는 것 같았다.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흐흐흥. 흐흐흥…….”
간밤에 남궁세가의 소가주도 대단했지만 그 공격을 다 받아낸 자신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갖은 용을 다 짜낸 후에 겨우 거울 앞에 설 수 있었다. 이제 돌아갈 준비를 해야 했다.
“아아악!”
순간, 서문장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탐스럽던 흑발은 온데간데없이 백발로 변한 데다 십 대가 부럽지 않을 만큼 탱탱하던 피부도 십 년은 더 늙게 변한 것을 보고는 그대로 혼절해 버렸다.
* * *
돌아갈 때에도 절차에 따라야 했다.
정무련에서는 조반을 겸해서 간단한 송별회를 마련했다. 그 자리에서 송사와 답사 그리고 정무련과 남부맹의 돈독한 관계(?)를 강조하는 자리라는 형식을 갖추었다.
출발 준비를 끝내고 현당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출발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빠져 있었다.
“문당은?”
우희 외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세 사람 다 사라진 것이었다.
“먼저 갔어요. 할 일이 많으니까요.”
현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할 일이라는 게 무엇인지 현당도 알고 있었다. 굳이 확인할 필요 없었다. 우희 정도의 실력이라면 장 행자의 족적을 발견했을 것이고, 아무도 모르게 그 후속 조처를 취해야 할 것이었다.
현당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듯 몸을 돌렸다.
이번에는 서문장미의 일행이 눈에 들어왔다. 한데 정작 서문장미가 보이지 않았다.
“부통평사께서는…….”
“피곤하시다고 아침 행사에는 참석 못 하시겠다고 합니다.”
끄덕.
‘어제 내가 너무 과했나?’
그녀에게도 무슨 일이 있는 듯싶었다.
“자리를 보중하라 전하시게.”
현당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걸렸다.
빠진 인원이 문당이나 서문장미 쪽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선기와 장 행자도 보이지 않았다. 선기야 현당의 명령에 따라 자리를 비웠지만 장 행자는 근무 이탈이었다. 하지만 그를 추궁하고 싶은 생각이 현당에게는 없었다.
“준비가 다 되었군.”
현당의 말에 다른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행사에 참석해야 할 때였다.
“가지…….”
현당의 말에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조찬을 갖는 내내 현당은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에 신경이 곤두섰다. 행사에 참가한 사람 중 정무련 소속이라면 신분의 고하(高下)에 상관없이 모두 현당을 힐끔거리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해답은 쉽게 나왔다.
‘그렇군. 역시 신동!’
현당과 우희가 정무련의 반응을 분석하고 회의를 하는 동안 정무련도 놀고만 있던 게 아니었다. 현당이 직접 정무련의 금룡 선발 대회를 참관했다는 것을 파악한 무제갈 신동이라면 그 대책을 마련하는 게 수순이었다.
현당은 정무련의 무제갈 신동 또한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희를 상대하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싱긋.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생각한 현당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애초에 현당이 의도한 바대로 되었다.
현당이 남부맹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희의 도움이 필요했다. 하지만 우희의 협조 아래 남부맹을 벗어난다 해도 우희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는 없을 터였다. 게다가 우희 뒤에 다른 조직이 있다는 것은 예전부터 감지하고 있었던 일. 이번 통평사 행차에서 확증한 것뿐이었다.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제 현당은 남부맹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희를 이용하고 우희에게서 빠져나가기 위해서 정무련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정무련은 다시 흑산벽을 통해 거리를 둘 수 있을 것이었다. 중원 오대 정파의 속가들이 모여 만든 정무련이 흑도 세력인 흑산벽과 어깨를 나란히 할 일은 없으니까!
무제갈 신동은 현당에게 정무련은 그럴 만한 힘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제 우희와 신동, 두 사람에게 싸움을 붙이는 일만 남았군.’
그 생각만으로도 현당은 흥이 나고 있었다.
* * *
처발랐다고 하는 말이 지금 이 상황에 적절했다. 서문장미는 면경을 들여다보면서 정신없이 분을 발랐다.
“안 돼. 안 돼. 안 돼…….”
하지만 아무리 바르고 발라도 분가루는 피부에 달라붙지 않고 고스란히 화장대 위로 떨어졌다. 벌써 뿌린 분의 양이 얼마나 많은지 화장대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면 지나간 자국이 남을 정도였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느냔 말이야…….”
소리치며 서문장미는 분을 집어던졌다. 그리고는 화장대에 머리를 처박고 울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그렇게 울고 난 후 서문장미는 눈물 자국을 닦으면서 고개를 들었다. 화장대의 면경을 통해 탄력을 잃은 피부가 주름져 보였다. 하룻밤 사이 열 살은 넘게 늙어 보이는 서문장미의 모습이 거울에 비쳤다. 행여나 하는 마음에 조심스럽게 머리를 가리고 있던 두건을 잡아당겼다. 그녀의 기대와는 달리 탐스럽게 흘러내려야 할 흑발은 자취를 감추고 완전히 탈색된 백발만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서문장미는 신경질적으로 두발을 잡아당겼다. 아직 이십 대 후반인 자신에게 그런 머리카락은 상상조차 할 수도 없었다. 뽑고 뜯고 또 할퀴었다. 그래도 드러나는 것은 모두 푸석푸석한 백발뿐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된 거냐고…….”
참지 못하고 서문장미는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도대체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다시 눈물을 흘리던 서문장미는 겨우 울음을 삼키면서 간밤에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보았다.
심호흡을 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어제…… 그러니까 어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