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무사-113화 (113/175)

# 113

<113화>

“구구구…… 얘들아 어디 있니? 밥 먹자…… 너희들도 이런 요기는 못 했을 거다. 어디 있니?”

비상식량을 흔들면서 중얼거렸다.

푸드득.

한쪽 구석에서 날갯짓 소리가 났다.

장 행자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들어온 입구에서부터 방향을 따져보았다. 침상이 있는 자리였다.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푸드득.

다시 들려왔다. 장 행자는 보폭을 계산하면서 다가갔다. 그리고 침상 앞에서 멈췄다. 손을 뻗어 확인했다.

“구구구…….”

푸드득. 푸드득.

장 행자의 소리에 새들이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그 반응이 여느 새와 남달랐다. 무슨 훈련을 받았는지 새들은 푸드득거릴 뿐 소리를 내지 않았다.

장 행자는 또 다른 소지품, 갓이 씌워진 화섭자를 꺼냈다. 다른 곳으로 빛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하지만 조심한다고 해도 빛은 새기 마련이라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잘 사용하지 않았다.

작을 불빛이 피어올랐고 조명으로 쓰기에는 충분했다.

소리는 침상 밑에서 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침상을 들춘 장 행자는 벌어진 입을 겨우 다물었다. 왜 새들이 울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입이 벌어진 것은 아니었다.

비둘기였다. 비둘기들이 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주둥이를 묶어놓았기 때문에 소리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한데 둥그런 머리에 솟은 주둥이…….

“이, 이 비둘기들은…….”

전서구가 아니었다. 전서구라면 콧등에서 콧날, 코끝까지 일직선으로 뻗어 있어야 했다.

‘역시 소가주…….’

그의 말이 맞았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일이었다. 이들이 전서구를 보낸다는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소가주는 이들이 다른 꿍꿍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서류는 다 무엇일까?’

분명히 이들은 많은 서류를 준비해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확인해야 했다.

장 행자는 만약 자신이라면 서류를 어디에 둘 것인가 생각해 보았다. 하나 증거는 절대로 남기지 않는 훈련을 받은 그로서는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없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이라…….’

장 행자는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자리를 찾기 위해 화섭자를 들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침상에 이불, 서탁에 책자와 지필묵(紙筆墨), 다탁에 차와 주전자, 옷장에 옷들…… 이상한 게 하나도 없…… 잠깐!’

있었다.

분명히 이곳은 문당 사람들의 숙소. 문사 우희는 여자이고, 나머지 세 사람은 남자였다. 그런데 네 사람의 옷이 한데 섞여 있었다. 이곳이 누구의 방이든 상관없이 문사는 세 사람과 방을 같이 쓸 리 없었고, 셋 중 어느 누구도 여자일 리 없었다. 그런데 옷장에는 남녀의 옷이 한꺼번에 섞여 걸려 있었다.

‘이거야말로 어색한 일이 아닌가!’

장 행자는 점점 더 남궁세가의 소가주에게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했다.

천천히 옷을 걷어보았다. 남자 옷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하지만 여자 옷에도 이상이 없었다.

‘이상했어. 분명히 이상했다고…….’

그냥 옷을 다시 옷장 속에 걸려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여기 외에는 이상한 곳이 없었다. 이상한 만큼 좀 더 꼼꼼히 살펴보기로 했다.

눈에 들어왔다.

여기는 중원에서도 가장 더운 세 곳 중 하나로 알려져 있는 남경이었다. 그런데 남경에서 입을 옷으로 겹옷을 고른다는 것은 무언가 좀 이상했다. 문사의 것으로 생각되는 여자 옷이 겹옷이었다. 그것도 두꺼운.

‘가만…… 그러고 보니 문사는 또 항상 백의만 입었었잖아?’

그런데 들고 있는 옷은 붉은색이었다. 겉감만 붉은색이 아니라 안감까지 모두 붉은색이었다.

‘이 옷에 비밀이 있군.’

조용히 겹옷의 실밥을 뜯었다. 그러자 안쪽으로 수많은 기호들이 깨알같이 쓰여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것들도 있었다.

‘이건…….’

초상화였다. 그것도 정무련을 구성하고 있는 오대 문파 문주들과 장로들의 것이었다.

*  *  *

현당은 마주하고 있는 사내를 쳐다보았다.

‘검이라…….’

실전에서 상대를 마주하고 있는 것이 얼마 만인지 새롭게 느껴졌다.

‘내가 무뎌졌나?’

예전 같으면 칼을 든 사람과 마주하고 있으면 조금이라도 위기감을 느끼거나 겁났었는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다만 증상이 무뎌졌다고밖에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냥 비무니까 그렇겠지…….’

상대의 검에서 살기가 느껴지지도 않았다. 현당은 무엇을 펼칠까 생각했다. 지명을 당한 이상 선공을 해야 했다.

‘도원문 출신이니 화산검법이겠지? 지난번에 포송과 비무할 때 매화검을 펼쳤던가?’

당시 모습이 생각났다.

고철의 검끝에서 피어나는 십여 송이의 매화꽃들을 포송은 단 일 권에 짓밟듯이 부수고 검마저 부러뜨렸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고철을 비무대 밖으로 날리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래. 단 일 권이었어…….’

현당이 일초에서 끝을 내지 못하고 이초 이상 고철을 상대한다면, 사람들은 현당이 포송만 못하다고 판단할 것이다. 현당이 포송과 겨룰만한 실력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일초 안에 승부를 내야 했다.

‘어떻게 할까?’

현당은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알고 있는 모든 무공의 목록을 뒤지기 시작했다. 삼재검, 낙성검법(落星劍法), 철검십이식(鐵劍十二式), 염왕검(閻王劍)……. 이것들은 남궁세가의 검법이 아니었다. 결국 현당에게는 익숙지 않은 검법이었다. 단칼에 승부를 내야 하는 상황에서 제대로 검리를 깨우치지도 못한 검법을 꺼낸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 결국 현당은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남궁세가의 검법으로 한정지었다.

다시 자하기를 바탕으로 하는 남궁세가의 검법은 화련검, 유운검, 용봉쌍련, 비폭연 등이 있었다. 이 중에 검맹 남궁덕이 만든 용봉쌍련은 남궁찬이 쳐다보지도 않는 검법이므로 펼쳐서는 안 되었다. 나중에 남궁찬과 겨루게 될 일이 있을 때까지 감추고 있어야 했다.

‘포송처럼 일격에 끝을 내기 위해서는 비폭연이어야 하는가?’

그것도 아니었다.

남궁찬이 비록 현당에게 비폭연을 가르쳐주기는 했지만 현당이 알고 있는 비폭연과 남궁찬이 가르쳐준 비폭연은 그 형이 달랐다. 초식도 마지막 한 초식이 더 있었고, 그 세기도 달랐다. 남궁찬이 현당에게 비폭연의 절반만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이것도 배제되어야 했다.

‘그럼 유운검과 화련검만 남는데…….’

현당은 남궁덕이 쓴 화련검주해를 떠올렸다.

검맹 남궁덕은 그 책에서 화련검이야말로 남궁세가의 절초라고 선언했었다. 오죽하면 남궁세가의 모든 검법은 화련검으로 시작해서 화련검으로 끝난다고 하지 않았는가!

‘쓰읍. 결국은 아무리 많은 것을 배웠어도 기지일보만 남는 셈이로군.’

현당은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기지일보로 시작하기로 했다.

‘암담하군.’

시작과 동시에 끝을 맺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지일보는 화련검의 발초임과 동시에 기수식이었기에 그것으로 끝을 내기가 쉽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남궁세가의 사대 무공이 떠올랐다. 자하기, 유운검법, 일지선, 비폭연이 바로 그것이었다.

‘일수에 모든 것을 거는 남궁세가의 무공은 바로 일지선인데…… 하는 수 없지. 섞는 거야.’

현당으로서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가장 익숙한 화련검 제일 식 기지일보를 펼치되 그 속에 일지선을 담기로 했다. 자하기와 토하기도 섞었는데, 자하기를 바탕으로 하는 화련검과 일지선을 섞지 못할 것도 없지 않은가!

현당은 애써 할 수 있다고 호기를 부렸다.

하지만 자하기와 토하기를 섞는 것은 내공의 문제이고, 일지선과 화련검을 섞는 것은 무공의 문제였기에 생각처럼 될지 모를 일이었다.

현당은 자하기를 끌어 올렸다. 부드럽고도 따듯한 기운이 하단전에서부터 차올랐다. 마치 뜨거운 물이 담긴 욕조에 몸을 담그듯 긴장했던 신경들이 이완되자 굳었던 근육들도 부드럽게 풀어졌다.

현당은 주먹을 한 번 쥐었다 폈다. 뻣뻣했던 손가락 마디가 유연해지면서 천인혈의 우피를 감은 도병(刀柄 : 칼자루)이 손바닥 안으로 휘감겼다. 힘이 솟았다. 언제나 천인혈을 잡으면 기운이 솟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싱긋.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피어올랐다.

‘두 칼 거리.’

지금 현당에게 필요한 간격은 두 칼 거리였다.

한칼 거리란 칼과 칼을 맞대고 있는 정도의 간격, 즉 두 사람이 병장기로 서로를 공격할 수 있는 정도의 거리를 말한다. 두 칼 거리는 한 칼 거리에서 일 폭 또는 한칼만큼 더 먼 거리. 결국 지금은 칼을 맞대고 있지는 않지만,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상대를 공격할 수 있는 정도의 폭을 가리킨다. 지금 딱 그만큼의 거리다. 한 칼 거리가 공격권, 전투가 이루어지는 공간이라면, 두 칼 거리는 상대가 사정거리 안에 들어 있다는 소리다.

스으으.

체중을 싣고 있던 왼발을 앞으로 당겨 보폭을 좁혔다. 그것으로 도약 준비는 다 되었다.

‘이제 충분한가? 이런!’

순간, 현당은 자신이 크게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게 뭐냐? 바보잖아.’

현당과 고철 사이의 거리는 두 칼 거리 이상. 두 칼이 뭔가! 대략 네댓 배는 되어 보였다. 그런 거리라면 단 한 번의 도약만으로는 칼끝이 닿지도 못할 것이었다. 적어도 두 번 도약을 해야만 겨우 칼끝이 스칠 수 있을까? 그런 간격을 한 번의 도약으로 일도양단하겠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현당은 잡념을 버렸다. 지금은 오로지 고철과의 비무에 모든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지금 자신의 실력을 정무련과 남부맹 모두에게 입증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시 시선을 집중하고 고철을 바라보았다. 다시 또 고철의 신형이 확대되었다. 현당을 짓누를 것처럼 위압적으로 확대되는 것이 아니라 거리가 좁혀지면서 표적이 확대되었던 것이다. 또 다시 단 한 번의 도약으로 닿을 것처럼 말이다. 아까 같은 착각이 아니라, 이번에는 그럴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후우웁. 후우우.”

현당은 심호흡을 하면서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래도 자꾸만 흥분하는 자신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분명히 두 칼 거리보다 멀리 떨어져 있는데, 한 번의 도약만으로 닿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천인혈의 도병을 잡은 손이 근질거렸다. 어서 빨리 뽑아서 상대에게 기지일보로 찔러 넣고 싶어졌다. 현당의 대뇌에서 명령만 떨어지면 신경계가 그 명령을 전달할 필요도 없이 칼집을 잡고 있는 왼손 엄지는 도파(刀把 : 칼자루, 또는 칼자루의 호수구)를 쳐내고, 천인혈의 도병(刀柄)은 현당의 오른 손아귀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이었다.

현당은 마지막으로 일지선을 떠올렸다. 권법도, 장법도, 지법도 아니면서 경풍권록상에 실려 있는 유일한 수공(手功)이 바로 일지선이었다. 단 일초에 수도로 상대를 찌르는 수법.

‘이런…….’

순간, 현당은 눈앞이 환하게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일지선과 기지일보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검을 들고 있으면 기지일보요, 검을 버리고 맨손이면 일지선이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경풍권록상의 단 일초의 수공이 왜 남궁세가 사대 무공 중 하나인지를 말이다. 일지선을 깨닫는다면 남궁세가의 모든 검법을 수도로, 그리고 권장으로 변환시킬 수 있었다.

‘아냐, 아냐! 지금은…….’

현당은 생각을 접었다. 지금은 오로지 고철과의 일전에 모든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그러나 막상 일지선을 떠올리자 현당은 망설여졌다. 도대체 고철의 어디를 공격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빈틈이 너무 많았다. 그가 비켜서서 검을 사선으로 세워 막고 있었지만, 어디 한 군데 제대로 막고 있는 곳이 보이지 않았다. 가슴 한가운데 명치도 비어 있었고, 목울대의 염천혈(廉泉穴)은 물론 인당, 백회, 하단전까지 허점투성이였다.

허허실실(虛虛實實)이라고, 느긋한 표정으로 일부러 허점을 노출하고 있는 듯했지만, 현당 눈에는 고철의 모든 게 진짜로 빈틈으로 보였다.

도대체 어디를 공격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디든 찔러 넣으면 그냥 무너질 것만 같았다.

꿀꺽.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아닌데?’

현당은 깜짝 놀랐다.

지금 침을 삼킨 것은 자신이 아니었다.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당황했다. 침을 삼키고 있느라 위아래로 꿈틀거리는 고철의 목울대의 울대뼈가 눈에 들어왔다.

‘저기다.’

현당은 표적을 정했다. 이제 더 이상의 망설임은 없었다. 남은 것은 섬즉쾌(閃卽快)요, 쾌즉섬(快卽閃)이다. 단 한 번의 칼질로 끝내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쩔그렁.

“져, 져, 졌습니다.”

갑자기 들려오는 대사에 현당은 깜짝 놀라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황급히 끌어 올렸던 내공을 거두느라 가슴이 뜨끔거렸다. 순간적으로 신경을 타고 흐르는 전류가 섬뜩하게 느껴졌다.

새파랗게 질린 고철이 검을 떨어뜨린 채 떨고 있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싸며 가리고 있었다.

*  *  *

현당과 고철의 비무를 끝으로 연회는 싱겁게 끝이 났다.

제대로 칼도 겨누지 못하고 끝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하물며 현당이나 우희마저도…….

고철은 포송과의 비무에서는 그래도 검을 휘두르기라도 했다. 하지만 현당과 겨룰 때에는 제대로 겨누지도 못하고 살기에 질려 검을 떨어뜨렸다. 이것만으로도 현당이 포송보다 한 수 위라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었다.

현당 대 고철의 비무가 미치는 영향은 지대했다.

현당이 자리로 돌아오는 동안 정무련 측에서는 찬물을 끼얹은 듯한 냉기가 자리 잡았고, 통평사단 측에서는 연맹지회에서 이미 이긴 것 같은 승기가 이미 한 자리 차지하고 있었다. 더욱이 현당이 남부맹의 후기지수 선발 대회에서 우승이 아닌 준우승자라는 사실이 정무련 측에게 안겨주는 충격은 더욱 컸다.

아무도 현당에게 다음 비무 상대를 지목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침묵만 흘렀다.

분위기도 분위기인지라 연회를 계속 진행할 수도 없었다. 대충 남은 잔이나 비우고 하나 둘씩 자리를 뜨기 시작하더니, 결국 정무련의 련주를 맡고 있는 현도장(玄道場) 장주 웅진(雄鎭)이 파회를 선언했다.

파회가 선언되기 전에 먼저 나가는 고철을 포송이 쫓아갔고, 포송이 고철을 잡기 전에 도원문 문주 홍건 고경이 먼저 붙잡았다.

“이놈. 네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아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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