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
<112화>
우희는 커다란 백지 위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좌우로 정무전(正武展)과 신무전(新武展)이 있습니다. 여기로 가는 대로는 좌우 폭이 한 장이나 되면서 어디에도 은신할 데가 없습니다. 그리고…… 정무련의 오대 문파가 모여 대소사를 결정하는 곳이 여기 정무전입니다만, 정작 정무련의 중추는 이곳, 신무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대 세가 가주의 권한이 큰 남부맹과 달리 정무련은 련 자체의 힘이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그것은 이곳, 열성전에서 볼 수 있습니다.”
장이가 질문했다.
“뭐 하는 곳입니까?”
“이곳은 각 문파의 장로급 인사들이 문파를 가리지 않고 후학을 지도하는 곳입니다.”
이삼이 콧방귀를 뀌었다.
“문파를 가리지 않고 후학을 지도하는 곳이라? 지금 그것을 말이라고 하나? 강호에 어느 문파가 그렇게 한단 말인가?”
우희는 이삼을 빤히 쳐다보았다.
“믿고 안 믿고는 당신의 결정이지요. 하지만 나는 내가 알아낸 것을 분명히 전했어요.”
그림을 그렸던 종이에 우희가 불을 붙이자 이삼이 당황했다.
“그것을 왜 태우나?”
자신도 모르게 우희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런 것을 그냥 남겨둔단 말인가요? 당연히 없애야지요!”
이삼이 인상을 구기다가 공일과 장이를 향해 돌아섰다.
“좋아. 오늘 밤에 연회가 열리면 나는 정무전을 뒤진다. 공일은 신무전, 그리고 장이는 열성전을 확인하도록!”
우희가 깜짝 놀랐다.
“잠깐. 오늘 들어가겠다는 소리인가요?”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 이삼이 인상을 구겼다.
“내일 남부맹으로 돌아가는 것 아닌가? 오늘이 아니면 언제 또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나?”
“왜 제게 오늘 정무련을 구경시켜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나요? 함정일 가능성이 큽니다. 게다가 내일이면 우리는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오늘은 가장 경계가 심할 텐데요.”
“우리 실력을 무시하는 겐가?”
우희는 더 이상 말릴 생각을 포기했다. 처음 출발할 때부터 그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부맹에서 자신은 확실히 자리를 잡았지만, 정무련을 맡은 이들은 아직도 정무련의 구조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니, 우희에게 경계심을 갖는 것은 당연할지도 몰랐다. 그래도 무작정 뛰어들려는 이들이 걱정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럼 어떻게 들어가려구요? 열성전이야 그렇다 쳐도, 정무전이나 신무전에는 숨어서 접근할 수도 없을 텐데…….”
이삼이 손가락을 위로 치켜들었다.
“큭…… 하늘이 있지 않은가?”
우희의 걱정이 기우라는 듯 이삼이 코웃음을 쳤다. 이내 이삼은 우희는 그대로 두고 장이, 공일과 머리를 맞대기 시작했다. 더 이상 이 일에 참견하지 말라는 뜻이 분명했다.
우희는 방을 나서면서 그들에게 차가운 눈길을 보냈다.
* * *
장 행자는 눈을 뜨면서 안광을 안으로 갈무리했다. 가장 먼저 보이는 사람이 책상에 앉아 책을 보고 있는 현당이었다. 현당의 말대로 운기행공을 끝내자 보천환의 약효는 소문 이상이었다. 한 며칠 푹 쉬고 난 것처럼 몸과 기분이 상쾌했다.
하지만 막상 눈을 뜨자 장 행자는 현당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갈등하고 있었다.
“아아, 고맙다는 인사는 나중에 해도 되고…… 오늘 밤에 우리 통평사단을 송별하는 연회가 열릴 것이네. 그때 누군가 할 일이 있는데, 자네가 할 수 있겠나?”
장 행자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좋아. 별것 아니고 문당 숙소에 들어가서 찾는 것일세.”
장 행자는 멈칫거렸다.
“무엇을 찾습니까?”
“뭐든지.”
“뭐든지?”
“그래. 무엇이든지. 가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네. 있어야 할 자리에 없는 것이라든가 부적당한 자리에 있는 것들…… 그런 것들을 보면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거야.”
장 행자는 설마 현당이 그를 다시 그곳으로 보내리라고는 생각지 않고 있었다. 문 밖에 있다가도 들켜서 중상을 입지 않았던가!
“발각될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네. 오늘 연회 때에 맞춰 그 세 사람이 움직일 테니까 말이야. 그러니까 자네는 그곳이 비게 되면, 들어가서 이상 유무를 확인하고 나오라는 이야기야. 생각 같아서는 내가 하고 싶건만 그 시간에 나는 내 자리를 지켜야 하거든.”
통평사를 송별하는 자리인 만큼 통평사가 빠질 수는 없었다. 장 행자는 현당의 말을 믿기로 했다. 자기 사람을 챙기는 사람은 절대로 준비 없이 위험한 곳으로 보낼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장 행자는 현당의 말이라면 꼭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 * *
통평사단의 송별연이 열릴 때까지 현당은 하루 온종일 숙소에 틀어박혀 있었다.
이 박 삼 일의 일정이 이렇게 간단히 끝나가고 있었다.
현당이 아파서 자리를 펴고 누운 덕분에 정작 중요한 것은 문사 우희가 다 한 셈이었다.
그렇다고 불만도 없었다. 정무련 쪽에서도 선발한 세 사람을 모두 연맹지회에서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남부맹에서도 추가로 두 사람을 선발해야 하는 상황이니, 사대 세가에게 기회가 남아 있는 셈이었다.
아침 일찍 우희는 그런 내용을 문당으로 보냈고 그 소식을 전해들은 사대 세가의 가주들은 모두 우희의 결정에 동의를 표했다. 그들로서도 오대 세가에서 퇴출된 단목가가 사대 세가의 대표가 되는 것이 못마땅하기는 마찬가지였으리라.
‘이제 돌아가면 후보 선발만 남았군…….’
현당은 잔을 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우희는 이미 복안을 세우고 있을지도 몰랐다. 불현듯 우희가 화제를 돌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분명히 이 일과 관련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누가 될 것 같습니까?”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현당이 얼굴을 돌렸다. 무제갈 신동이었다.
싱긋.
“가주들께서 알아서 정하시겠지요.”
현당은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고개를 돌렸다. 신동은 그런 현당의 행동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현당 바로 옆자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무사 단목기 외에 누가 선발될지 모르지만, 어떤 기준으로 선발될 것인지는 뻔한 것 아니겠소이까? 연맹지회의 본질은 결국 정무련과 남부맹 사이의 이권을 놓고 벌이는 비무입니다. 그렇다면 남궁 공자가 빠질 리가 없지요.”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렇게 보십니까?”
“아닐 수도 있겠지요. 그 결정은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요.”
현당은 별일 아니라는 듯 대수롭게 넘겼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지 않을 텐데요…….”
현당은 대답 대신 잔을 들어 보였다.
“그럴 수 있다면 저 역시 좋은 일이지요.”
현당은 무제갈 신동이 찾고자 하는 정보가 무엇인지 짐작되었다. 그는 단목기 외에 나머지 두 사람이 누구인가를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누군지 길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나는 독고진이 분명했다. 단목기가 그를 상대하지 않았다면 분명히 결승까지 올라갔을 사람이 바로 독고진이었다.
‘이길 수 있을까?’
현당이 상대할 때 과연 독고진을 이길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현당이 가진 모든 것을 다해야 한다는 것뿐.
독고진이 한 자리 차지하면 남은 것은 단 한 자리.
피식.
‘결국 나라는 소리 아닌가!’
현당을 제외하면 사강에 오른 나머지 사람은 단목기, 남궁진, 모용미였다. 모용미의 실력은 누구보다 현당이 잘 알고 있었다. 운이 좋아서 사강이지 정말 사강의 실력이라고는 절대 할 수 없으리라. 그렇다면 남는 자는 남궁진. 하나 자신의 배다른 동생 남궁진이 남부맹 대표로 선발되는 것을 남궁찬이 가만 보고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남는 사람은 현당뿐이었다.
현당이 아닐 경우 후보를 팔강까지 확대하면, 현당에게 패한 모용탄, 독고린 그리고 서문장천이 있었다. 하지만 독고진이 나오는데 독고린이 또 나올 수도 없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현당에게 패한 모용탄을 추대할 리도 없었다. 그렇다고 모용미에게도 패한 서문장천을 누가 믿는다는 말인가!
팔강까지 후보자를 넓혀도 남는 사람은 현당뿐이었다.
웃음이 나왔다. 어쩌다가 자신이 남부맹을 대표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는지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누가 옆에서 현당을 건드려서야 현당은 상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통평사. 모두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쉬지 않고 현당 곁을 지키고 있던 태구였다.
“응?”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사람들이 모두 숨을 죽인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현당이 무언가 보여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눈치였다.
그제야 생각났다. 여흥을 위해서 정무련과 통평사단 양쪽에서 번갈아가며 검무나 시범을 보여주고 있었고, 다음 차례로 현당이 지목되었던 것이다. 그것도 혼자 나와서 시범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비무로 말이다.
정무련의 수십여 명이 보는 앞에서 남궁세가의 소가주 실력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겠다는 심산이었다.
현당은 되도록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면에 서 있는 사람이 보였다. 현당이 아는 얼굴이었다. 정무련 금룡 선발 대회에서 포송과 겨루었던 도원문의 혈매랑(血梅郞) 고철(高喆)이었다. 신동과 같은 도원문 소속이었다. 신동이 고철에게 다음 상대로 현당을 지목하라고 시킨 것이 틀림없었다.
현당이 한쪽 구석에 느긋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무제갈 신동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만이 현당을 보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전혀 관심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 표정을 보고서야 현당은 처음부터 이 모든 것이 신동의 술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연회에서 비무를 통해 여흥을 돋우자는 생각도 신동의 머리에서 나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현당은 신동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신동이 생각하는 대로 정무련의 금룡 선발 대회에서 남경 총관으로 변장을 하고 왔던 사람이 현당인지를 확인하려는 심산이었다. 현당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혈매랑 고철이 도원문, 나아가서 화산파 출신이라는 것을 알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모를 것이라는 뜻이었다. 고철은 포송과 겨루었던 자로 정무련 후기지수 중 서열상 육 위 안에 들어가는 고수였다.
현당이 고철을 어떻게 상대하는가에 따라서 남부맹의 출전자의 실력을 대충 짐작할 수 있고 더불어 정무련의 무인들에게 그것을 자각시킬 수도 있었다.
현당은 어떻게 상대할까 생각했다.
‘콱, 그냥 져줘 버려?’
생각 같아서는 그러고 싶었다.
현당이 패하면, 그래서 남부맹 대회에서 차석을 차지한 사람이 정무련 대회에서 결승에 오르지도 못한 자에게 패했다고 소문이 난다면, 남부맹 전체에 치욕이 될 것이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속이 다 시원할 것 같았다.
‘그랬다가는 남궁찬이 죽이려 들겠지?’
그럴 수는 없었다. 아직 남궁찬과 겨룰 만큼은 실력이 모자랐다. 좀 더 힘을 키워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고, 시간은 이겨야 벌 수 있었다.
‘그럼 어느 선에서 이겨야 할까?’
그것도 중요했다.
이들은 지금 현당의 실력을 가지고 남부맹 소속의 정상급 무인의 수준을 가늠할 것이었다. 적당히 속지 않는 수준에서 실력을 보여주어야 했다. 게다가 자신의 변화를 감추어야 했다. 하지만 결코 쉬울 것 같지 않았다.
‘잊을 뻔했군…….’
현당은 생각을 바꾸었다.
아직 세 명의 후보가 결정된 것이 아니었다. 정해진 사람은 단목기 한 사람뿐이었다. 행여 어디 가주나 장로가 나온다면 밀릴지도 모른다. 게다가 모용곽과 남궁찬은 현당이 진짜 남궁적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데 현당이 대표로 나가는 것을 꺼려할 지도 모른다.
자신이 남부맹을 대표해서 나갈 만한 실력을 갖추었다는 것을 입증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염장이 따로 있나!’
현당은 오늘 자신의 실력을 검증받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남부맹에게도, 그리고 정무련에게도……. 실전이나 다름없었다. 이럴 수 있는 기회가 자주 있는 것이 아닐 테니까!
* * *
모든 것이 현당의 말 그대로였다. 문당의 숙소에는 아무도 없었다. 마치 오늘 밤, 다 나가 있으라고 명령한 것처럼 숙소는 텅 비어 있었다. 남궁세가 소가주가 어떻게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지 신기하기만 했다. 더욱 그가 대단해 보였다. 자기 사람을 챙기는 것은 물론, 앞으로 일어날 일마저 예견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장 행자는 조심스럽게 문당의 숙소 안으로 들어갔다. 우선 가볍게 훑어보았다. 이상한 점은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남궁세가의 소가주가 직접 지시한 일인 만큼 반드시 무언가 있을 것이었다. 남궁세가의 소가주 말이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아, 나라면 서류를 어디에 감추었을까?’
올 때 있었던 일들부터 생각해 보았다. 세 사람 모두 많은 짐을 휴대하고 있었다. 특히 장이는 전서구까지 데리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라면 훈련을 통해 본능을 이길 수 있겠지만 동물은 아니지. 아무리 훈련이 잘 되어 있더라도 본능이 우선일 테니까…….’
장 행자는 주머니를 뒤적였다. 오래 찾을 필요도 없이 바로 비상식량이 잡혔다. 언제나 휴대하고 다녔다. 원래 있어야 할 자리 그대로 있었다.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도 찾을 수 있도록 언제나 같은 자리에 휴대하고 다녔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용히 비상식량을 꺼냈다.
달그락…….
움직일 때 절대 소리를 내지 않도록 그렇게 훈련을 했건만 이런 잡음을 내다니 실수였다. 순간적으로 긴장해서 전혀 움직이지 못했다. 주변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만약 실내에 누가, 또는 무엇이 있다면 그가 낸 소음에 반응이 있었을 것이다.
다행히 반응이 없었다. 조용했다.
“휴우우.”
장 행자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제는 안심하고 뒤져도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