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
<111화>
“모르나? 남부맹에 세 개의 꽃이 있다는 것을. 일품(一品)이 바로 강남일미 모용미요, 칠품(七品)이 바로 서문 부인이고, 나머지 하나가 천품(天品)인데, 천품이 바로 문사라는 것을 말이네.”
현당은 깜짝 놀랐다.
미모로는 모용미가 으뜸일 것이다. 하지만 모용미는 조각 같은 느낌이 강해 살아 있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요염함은 오히려 서문장미를 따를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우희를 들먹인단 말인가! 알 수 없어 현당이 고개를 저었다.
“에이, 설마…… 누가 그런 소리를 하나!”
“누가 하다니? 강남의 모든 사람들이 다 그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자네만 모른단 말인가?”
기다렸다는 듯이 포송이 현당을 향해 허리를 숙이더니 귀에 대고 속삭였다.
“혹시 자네…… 약혼녀인 모용미 낭자를 놔두고 문사와 사귀는 것은 아니겠지?”
현당은 깜짝 놀랐다.
“그럴 리가 있나!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순간, 현당은 실언했음을 깨달았다. 이야기의 당사자가 바로 곁에 있었던 것이다.
“대충 할 이야기는 끝이 났죠?”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자신과 무관한 것처럼 우희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한데 그녀에게서 차가운 냉기가 풀풀 날리고 있었다.
“두 분께서 나누실 이야기가 많으실 듯하니 저는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아, 저도 저 친구가 멀쩡한 것을 두 눈으로 확인했으니 이젠 할 말도 없는 것 같군요. 이 친구랑 같이 있다 보면 자꾸만 딴생각이 나서요. 하하핫. 행여 두 분이 나누실 이야기가 더 있는데 제가 방해한 것은 아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포송도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섰다.
“통평사. 선기 대협입니다.”
문 밖에서 또 태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쁘네. 또 자네를 찾는군. 일 보시게, 친구. 문사께서는 어디로 가십니까? 혹시 이곳, 정무련을 구경하셨습니까? 가볼 만한 곳도 많은데…….”
현당은 일어나는 우희를 말리지 않았다. 대신에 포송에게 한마디 했다.
“문사가 나 때문에 제대로 쉬지도 못했지. 자네가 정무련 구경이라도 시켜준다면 오히려 내가 고마울 일일세.”
현당의 말에 우희가 싸늘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빛에서 서슬 퍼런 칼날이 솟구치고 있었다. 반대로 포송의 얼굴은 눈에 띄게 환해졌다.
“아, 그러시군요. 제가 안내해드리지요. 저와 함께라면 어딘들 못 가시겠습니까? 어서 오시지요.”
우희는 머뭇거리면서 현당을 바라보았다. 현당은 포송이 보지 못하도록 고개를 살짝 돌리면서 우희를 향해 한쪽 눈을 깜빡거렸다.
현당의 의도를 알아차린 우희가 환하게 웃는 얼굴로 포송을 향해 돌아섰다.
“그래 주신다면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더 이야기할 것도 없지요…… 그럼 문사 걱정일랑 나한테 맡기고 푹 쉬게.”
앞서 나가는 포송을 보며 현당이 우희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럼 구경 잘 하시고, 이것으로 우리 계산은 끝난 것으로 하자고.”
현당의 말에 나가려던 우희가 머뭇거렸다.
“계산이라니?”
“당신이 나를 위기에서 구해준 것처럼 나 역시 당신을 구해주었으니, 비긴 셈으로 치자고. 문사께서 약간은 손해 본 기분이겠지만, 어쩌겠어. 도움은 내가 먼저 주었으니! 게다가 이게 어디인가? 당신 눈으로 직접 정무련을 둘러보니 말이야.”
현당이 무슨 말을 하는지 우희가 못 알아듣는 듯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현당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조련제마공 말이야. 덕분에 문사께서 이 비천한 놈을 살려준 셈이지 뭐야!”
현당의 얼굴을 바로 코앞에 두고 우희가 살짝 도리질했다. 그 바람에 그녀의 콧김이 현당의 얼굴을 간질였다.
“터진 입이라고 말은 잘 해요…… 그것을 내가 그렇게 쉽게 줄 줄 알았어?”
때마침 문이 열리고 밖에서 선기가 대기하고 있었다. 먼저 나간 포송이 어서 나오라고 독촉을 하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아직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나중에 들르겠습니다.”
“아니에요. 들어오세요. 전 막 가려던 참입니다.”
우희가 언제나 똑같이 웃는 낯으로 선기를 대했다. 그리고 현당에게 한쪽 눈을 깜박이고 나가는 것을 잊지 않았다.
“통평사께서는 쉬셔야 하니 너무 괴롭히지 마세요.”
우희가 나가자 선기가 아쉽다는 표정으로 그 뒷모습을 쫓았다.
“멋진 분입니다. 참으로…….”
현당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밀이 많은 게 흠이지만…….”
“비밀이요?”
현당이 화제를 돌렸다.
“나갔던 일은 어찌 되었습니까?”
“아! 전령이 소식을 전하더군요.”
선기가 봉서(封書)를 하나 내밀었다.
“무슨 내용입니까?”
서찰에 적힌 내용이 궁금한 선기가 현당 너머로 목을 뺐다. 현당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선 대협…….”
“예, 통평사.”
“이건 통평사로서 상하관계에서 말하는 게 아닙니다. 선 대협을 좋아하는 강호 후배로서 드리는 말입니다. 세상에는 아는 게 좋은 것이 있는 반면 모르는 것이 좋은 것도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알고자 한다면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도 있지만, 때로는 들어도 못 들은 척, 보고도 못 본 척 하고 넘어가야 하는 일 역시 있습니다. 제가 선 대협께 부탁하고 싶은 것은…….”
선기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그럼 본가에서 온 비밀 전서로군요. 알겠습니다.”
선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뒷걸음쳤다.
“선 대협께서는 제가 이 봉서를 받았다는 것도…….”
“모릅니다. 전 그런 것을 가져다드린 일도 없구요.”
다 안다는 듯 선기가 싱겁게 미소를 지었다. 현당도 선기의 미소에 싱그러운 미소로 답했다. 그것을 끝으로 선기가 나가고 문이 닫혔다. 실내에는 현당만 남았다.
선기가 남궁세가에서 가져왔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은 현당의 수하들이 가져온 것이었다. 분명 흑산벽(黑山壁)에서 현당에게 전할 것이 있을 터였다.
혼자 남은 현당은 봉해진 서찰을 뜯는 순간, 깜짝 놀랐다.
“표행신(飄行迅)!”
서찰에 쓰인 내용은 흑산벽의 벽주만이 알고 있다는 신법이었다. 흑산벽이 현당을 돕겠다는 의사 표시를 이렇게 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현당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현당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신법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남궁세가의 신법도 있었다. 그리고 현당 역시 검맹 남궁덕이 극구 칭찬해 마지않던 유운신법을 익히고 있었다. 하지만 유운신법은 자하기에 바탕을 두고 있는 신법으로, 빠른 이동보다는 유연한 동체 이동에 그 초점을 두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관군이나 포교 등의 추격을 벗어나기 위해 빠르기를 극대화시킨 흑도 흑산벽의 표행신이야말로 현당에게는 더 없이 요긴한 신법이 아닐 수 없었다.
현당은 저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흑산벽의 늙은이는 알고 있었다. 현당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신법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일까?’
하지만 생각은 나중에 하기로 했다. 그보다 먼저 표행신을 익히는 것이 중요했다. 이내 현당은 정신없이 표행신의 구결 속으로 빠져들었다.
* * *
우희는 옆에 포송을 대동하고 마음껏 정무련을 돌아다녔다.
“저 삼 층짜리 건물은 뭐지요? 상당히 웅장하게 지어졌는데…….”
“열성전(列聖展)입니다. 정무련의 원로들이 후학들을 모아놓고 강독을 하는 곳이지요. 정무련 소속이라면 누구나 저곳에 들어갈 수 있지요. 오호, 오늘은 도원문의 홍건 고경 문주의 강독이 있군요!”
포송이 열성전 건물 앞에 세워진 칠판을 보고 말했다. 거기에는 고경의 이름이 걸려 있었다.
“오늘처럼 대가의 강독이 있는 날은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지요. 열성전은 단지 선사(先師)들의 후학 지도만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 덕분에 언제나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무련의 후학들이 한자리에 모여 서로를 사귈 수 있는 공간이 되기도 합니다. 보시겠습니까?”
우희는 포송이 뭐라 하기도 전에 먼저 고개를 끄덕였고 포송보다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일 층 너른 바닥에 수많은 인원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어린 동자에서부터 건장한 청년까지 연령층이 다양했다. 그리고 정면에는 오늘의 강사가 후학들을 마주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들어서자 강의가 중단되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향했다.
우희는 멈칫거렸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강사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입구에서 확인한 간판은 도원문의 고경이었는데, 지금 서 있는 사람은 무제갈 신동이었다.
“포송. 뭐 하는 겐가?”
신동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열성전 안을 가득 채웠다.
당황한 것은 우희만이 아니었다. 포송도 마찬가지였다.
열성전의 출입이 자유로운 만큼 강사는 강의에만 집중했고 사람들의 출입 때문에 강의가 중단되는 일은 없었다.
“저어, 이번에 정무련을 방문한 남부맹 문사에게 정무련을 구경시켜드리고 있습니다만…….”
“송. 나 좀 보게.”
화가 난 목소리로 신동이 포송을 불렀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뒤로 한 채 신동이 문 뒤로 사라지는 게 보였다.
우희가 포송의 소매를 붙잡았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저 때문에 대협이 화를 당할 것만 같군요. 이만 돌아가렵니다.”
“아, 아니!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우희는 한껏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도 머리가 아팠는데 덕분에 많이 편해졌습니다. 그럼 다음에 또 부탁드리겠습니다.”
우희는 다른 소리를 듣기 전에 먼저 빠져나갔다. 오늘은 눈으로 직접 정무련과 남부맹의 구조적 차이를 확인했다. 정보는 이미 얻을 만큼 충분히 얻은 셈이었다. 돌아가는 대로 이 사실을 정리하리라.
* * *
현당은 장 행자를 호출했다.
“몸은 좀 어떤가?”
“염려 덕분에…….”
장 행자가 퉁명스럽게 답했다.
“보중하게. 본인이 아니면 자신의 건강을 누가 책임지겠나!”
현당의 말에 장 행자는 무뚝뚝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하지만 장 행자의 본심은 그렇지 않았다. 남궁세가에 들어온 이후, 남궁가주의 그림자에 숨어서 평생을 살아왔다. 그 와중에 넘긴 죽을 고비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에게 발생한 문제는 혼자서 해결해야만 했다. 그렇게 들어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었다.
한데 그가 마주하고 있는 남궁세가의 소가주는 달랐다. 사람을 불러서 상처를 치료해 주기도 했고, 자신의 침상까지 내주면서 그가 깨어날 때까지 옆에서 지켜주기까지 했다.
왜 태구나 선기가 남궁세가 소가주를 보필하는 데 열과 성을 다하는지 알 것 같았다. 어느새 자신도 알게 모르게 거기에 동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당이 조심스럽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장 행자는 자신과는 상관없는 물건이라는 것처럼 모른 척하고 있었지만 궁금했다.
“받게.”
장 행자는 잠시 머뭇거리다 평범한 동작으로 손을 내밀어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열었다. 순간, 그동안 꽉 막힌 단함 속에서 숨을 쉬지 못하던 물건이 특유의 향을 내뿜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실내에는 청아한 향기가 가득 찼다.
‘허억!’
장 행자는 숨이 막히는 줄 알았다.
너무 크게 떠서 동그래진 눈으로 현당을 바라보았다. 이게 진짜냐고 묻는 눈이었다.
“아버지께서 주신 것이지만 나보다는 자네에게 더 필요할 것 같아서…….”
현당이 겸연쩍은 듯이 뒤통수를 긁으며 설명했다.
장 행자는 들고 있는 물건과 현당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믿기지가 않았다. 그것은 남궁세가가 자랑하는 보천환이었다.
장 행자는 화가 났다. 첫 번째는 남궁세가의 소가주가 이런 것으로 자신의 환심을 사려는 것에 화가 났고, 두 번째는 그것을 받아 들고 흥분하고 있는 자신에게 더욱 화가 났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네보고 쓰라고 주는 게야. 그러니까 지금 내가 보는 앞에서 복용하게. 내가 호법을 서 줄 테니…….”
“이, 이런 건…….”
장 행자가 머뭇거렸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런 선물은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냥 받기에는 과했다.
“그냥 주는 게 아닐세. 하루 빨리 자네가 건강을 회복해야 나랑 손발을 맞출 것이 아닌가? 게다가 오늘 또 자네가 할 일이 있으이. 그러려면 지금 먹는 게 가장 좋아.”
장 행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당의 말에서 진심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현당은 장 행자가 운기행공을 하는 동안 그의 호법을 서 주었다.
* * *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포송을 부른 신동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소리쳤다.
“이보게, 송. 자네가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아는가?”
“왜 그렇게 화를 내고 그러십니까? 고작 계집 하나한테 집 구경을 시켜준 것을 가지고…….”
“계집이라니? 우희 나연희가 그냥 계집이던가? 남부맹의 지낭이 바로 그 계집이 아니더냐? 전 맹주 독고룡과 총사 죽심거사(竹心居士)의 의문의 사망 후, 붕괴할 것 같은 남부맹을 오늘 이날까지 끌고 온 사람이 바로 문사일세. 그런데 고작 계집 하나?”
소리치고 있는 신동과 달리 포송의 얼굴 표정은 느긋하기만 했다.
“그래서 무너질 정무련이라면 애초에 있을 필요도 없습니다.”
순간적으로 신동은 할 말을 잃었다.
“만약 제가 남부맹의 문사라면 오늘 같은 좋은 기회를 그냥 보낼 리 없지요. 그럼 누가 움직이는지도 알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순간, 신동은 포송의 생각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일부러 불러들였다?”
끄덕.
“애초에 그런 생각은 아니었지만…….”
“훗…….”
신동도 포송과 같이 웃기 시작했다.
“무공만 빼어난 무부인 줄 알았더니, 아니로군.”
포송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무련에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시면 오해십니다. 무제갈께서 오시기 전부터 명성을 날리던 정무련입니다.”
포송의 말에 신동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이야기, 내 명심하도록 하지…….”
포송이 웃으면서 먼저 나갔다. 신동 역시 웃는 낯으로 그를 배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