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무사-109화 (109/175)

# 109

<109화>

쿠하아.

천지가 무너지는 소리가 울렸다.

눈앞이 환해졌다. 너무 갑자기 쏟아지는 빛줄기 때문에 눈이 부셨다.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아니 단지 그렇게 하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현당은 깨달았다. 자신은 아직 자신의 의지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을 말이다. 지금도 그는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건…….’

전방으로 환한 세상이 보였다. 지금 그의 눈을 부시게 만드는 빛은 그쪽에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 빛은 다시 지금까지의 그를 둘러싼 어둠을 녹이고 있었다.

전에 없던 빛이었다.

현당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지금까지 어둠에 둘러싸여 그 존재를 알 수 없었던 것들이 이제 확연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여기는…….’

알 수 있었다.

새로운 진기에 의해 한데 뭉쳐서 얼기설기 엉켜 있던 자하기와 토하기가 하나로 융합되고 있었다. 그냥 혼합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하나였던 것처럼 합쳐지고 있었다.

적색의 광망을 뿌리는 자하기가 거친 숨결을 토하고 있는 토하기를 삼키고 있었다. 하지만 토하기를 삼킨 자하기는 더 이상 부드럽고 온유하기만 한 자하기가 아니었다.

부드러우면서도 그 안에 소용돌이치는 힘을 감추고 있는 새로운 진기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자하기이면서도 토하기인 것, 그렇게 새로운 것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이것이…….’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이 모든 새로운 변화의 근원은 우희가 그의 머릿속으로 들어와서 전해준 바로 그 심법 때문이었다.

‘조련제마공!’

서로 다른 두 개의 심법과 진기를 하나로 합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조련제마공의 효능이었다.

변화는 그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자하기와 토하기가 합쳐지는 것 뒤쪽에서 현당이 새로 흡수한 공청석유의 기운이 대하처럼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공청석유 흐름의 중심에는 토하기의 힘이 있었고, 공청석유의 힘이 지배한 곳을 자하기의 부드러움이 새로 닦아져 여린 속살 같은 기혈을 쓰다듬고 있었다. 공청석유의 기운은 그렇게 현당의 것으로 녹아들고 있었다.

현당은 빛이 쏟아지고 있는 곳을 보았다. 마치 차양이 걷히듯 빛을 가로막고 있던 장막이 부서지듯 무너지고 어둠이 사라지고 있었다.

임맥이었다.

지금까지 현당의 모든 것을 가로막고 있던 임맥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현당은 천천히 그쪽으로 방향을 옮겼다. 그와 함께 그의 진기들이 현당을 따라왔다.

쏴아아.

시원한 샘물이 마른 대지를 적시듯 이제 몇 걸음만 더 나아가면 완전히 새로운 광명의 세계로 접어들 것 같았다.

현당은 자신의 의지대로 앞서 달리고 있는 자하기를 둘러보았다.

이제는 적색을 지나 자색을 띠고 있었다. 십이성 대성을 하면 자하기는 완전히 자색을 띤다고 했다. 적색의 단계는 구성의 단계. 어느덧 현당은 적색의 칠성 단계를 건너뛰고 십성 이상의 수준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만족스러웠다.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롭기만 했다. 이대로 간다면 못 가질 것도 없고, 못 할 것도 없어 보였다. 대하처럼 현당의 곳곳을 쓸면서 지나가는 진기 속에 행복이 가득했다.

그때였다.

“무슨 일이에요? 어떻게 되었어요?”

밖에서 우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아, 미안해요. 좀 전에는 너무 놀랐어요. 갑자기 남궁 공자의 상세가 안 좋아지는 줄 알고 사람을 보냈던 것인데, 지금은 반대로 많이 안정되었어요. 아마 위기를 넘긴 것 같아요…….”

이 목소리는 서문장미의 것이었다.

현당은 우희가 갔다가 다시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현당에게 조련제마공을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은 천하에서 우희밖에 없었고 그녀의 목소리가 조련제마공의 구결을 알려주었다. 그렇다면 그때까지는 우희가 곁에 있었다는 이야기!

하지만 지금 서문장미는 우희에게 사람을 보냈다고 했다. 현당이 조련제마공에 빠져 있는 동안 우희는 자리를 피했었다는 것이다.

현당의 변화를 알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우희밖에 없었다. 때문에 현당의 무공 수준이 자하기와 토하기의 충돌에 의한 붕괴를 넘어 이 두 신공의 조화로 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우희밖에 없다는 소리였다.

‘위기?’

피식.

현당은 웃음이 나왔다. 모르는 사람이 현당의 변화를 보고 있었다면 그것은 위기였으리라.

우희 덕분에 조련제마공을 운공 하는 동안 현당에게 위기라고 할 것은 없었다. 오히려 그것은 기회였다. 조련제마공을 이용하여 자하기와 토하기를 하나로 합치는 절호의 기회.

하지만 서문장미에게는 그것이 위기로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당황한 나머지 다시 우희를 불렀던 것이리라.

여기까지 생각한 현당은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지금까지 현당이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세상이었다. 하지만 지금 바로 곁에 우희가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현당의 깨달음을 우희가 본다면 우희는 그에 맞는 단계로 대응법을 준비할 터였다. 현당의 수단과 수위는 끝까지 우희에게, 그리고 우희 뒤에 있는 조직에게 감추어야 했다.

‘자하기야, 자하기야…….’

또 현당은 다른 이유에서도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자하기가 문제였다.

지금 이미 체내에서 십성 이상의 수준으로 내달리고 있는데, 이대로 진행한다면 어느 단계까지 갈지 알 수도 없었다. 곧 있으면 현당 내부의 변화가 밖으로도 나타날 것이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자하기에 대해 듣고 있었을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을 것은 자명했다.

‘감추어야 돼…….’

현당의 수준은 현당 이외의 모든 사람들에게 감추어야만 했다.

남궁찬이 있었고, 우희가 있었고, 모용곽이 있었다. 그들의 눈을 가리기 위해서도 현당은 지금 이 수준에서 멎어야 했다.

‘젠장…….’

현당은 아쉬움에 빛이 쏟아지고 있는 방향을 쳐다만 보았다.

이쯤에서 멈추기로 현당은 결심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현당은 급격히 빠른 속도로 밖으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혼수상태에서 벗어나면서 깨어나고 있었다.

그때였다.

“크아아…….”

순간적으로 현당은 온몸이 갈가리 찢어지는 아픔을 느꼈다. 사지(四肢) 이십지(二十指)의 말단에서부터 대뇌 중추신경까지 모든 것이 경련을 일으키며 비상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목이 터지면서 비명도 함께 터졌다.

“커헉!”

마지막으로 울혈이 터졌다. 그냥 쏟은 것이 아니라 분수처럼 허공을 향해 내뱉었다. 그것을 끝으로 현당은 앞으로 고꾸라졌다.

현당의 입을 통해 밖으로 쏟아진 검은 선지들이 침상 위의 이불로 스며드는 순간,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앗!”

순간, 서문장미가 비명을 질렀다.

황급히 사람들이 물러났고 태구가 현당을 끌어안는 것과 동시에 선기가 달려들었다.

“독! 독이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현당은 깨달았다.

‘이런 바보 같으니…….’

자하기와 토하기를 제외하고 아직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한 기운이 현당의 몸속에 남아 있었다. 남궁찬이 복용시킨 절독이 바로 그것이었다.

현당은 남궁찬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이렇게 놓치고 있었다.

제36장 패왕 남궁적!

“으아아아…… 차찻차!”

현당은 가뿐한 마음으로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간밤의 위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치 오랜만에 단잠을 자고 일어난 것처럼 온몸이 상쾌했다.

벌써 해가 중천으로 솟고 있었다.

현당에게는 몇 날 며칠이 된 것 같은 긴 시간이었지만 사실은 채 두 시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다.

혼수상태에 빠졌던 것은 날이 밝기 직전, 인시(寅時)를 막 지날 때였고, 다시 현당이 깨어난 것은 사시(巳時)가 되기 전이었다. 그리고 약 한 시진여……. 현당은 그 짧은 순간의 단잠만으로도 충분히 체력을 보충할 수 있었다. 그만큼 내공과 수양이 높아졌다.

“깼어, 동생?”

현당을 맞이하는 사람은 짙은 화장을 한 얼굴로 환하게 웃고 있는 서문장미였다. 현당의 방에 자신의 화장용구를 가져다놓고 동행한 시비로 하여금 머리를 만지게 하면서 거울로 현당을 바라보며 눈인사를 하고 있었다.

현당은 가볍게 포권을 취했다.

“어제는 감사했습니다.”

“어제가 아니라 오늘 새벽이지…….”

거울을 통해 한껏 미소를 지으면서 서문장미가 답했다. 이어서 손짓으로 그녀의 머리를 매만지던 시녀를 내보냈다.

“그런데 벌써 깼어? 정말 다행이네……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다고.”

자리에서 일어난 서문장미가 약사발을 들고 나긋나긋한 동작으로 현당에게 다가왔다.

“그나저나 그런 절독은 언제 복용한 거야? 우리도 감쪽같이 모르고 있었네. 여하튼 정무련의 그 속셈은 알고도 모를 일이야. 어떻게 사절로 온 사람을 독살할 생각을 다 했지? 그나마 동생의 내공 수위가 높아서 다행이야. 독기는…….”

서문장미가 손을 뻗어 현당의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이내 관자놀이를 타고 내려와 현당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이제 다 빠져나간 것 같아. 안심해도 돼. 어때, 동생. 내가 먹여줄까? 괜찮아, 사양하지 않아도 돼. 동생은…….”

서문장미가 오로지 검지 끝만으로 현당의 턱을 위로 끌어 올리면서 앞으로 잡아당겼다.

“그럴 만한 자격이 있으니까!”

현당은 그 느낌이 끈끈하다고 생각했다.

왠지 싫었다. 어쩌면 쉽게 딸 수 있는 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지도 몰랐다. 저도 모르게 현당은 허리를 뒤로 젖히며 그녀의 손길을 피했다.

순간, 서문장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주 사소한 동작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현당의 속마음을 알아챘던 것이다. 그리고 무시당한 그녀의 기분이 곧바로 행동으로 드러났다.

주르륵.

약사발이 기울여졌다. 덕분에 안에 들어 있던 내용물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어마! 내가 실수로 약을 쏟았네.”

뻔뻔하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냉랭하기만 했다. 다시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이제는 열도 없고, 맥도 정상이니 정상인 것 같군. 더 이상 간호하기 위해 여기 있을 필요 없겠어.”

쌀쌀하게 말하면서 서문장미가 몸을 돌렸다.

“어디 있는 게야? 어서 짐 싸라. 돌아간다.”

서둘러 들어온 시녀가 서문장미에게 물었다.

“어디로…….”

“어디긴 어디야? 내 방이지.”

소리치는 서문장미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느껴졌다.

나가던 서문장미가 한 번 더 현당을 돌아보았다.

현당은 화장대와 면경까지 챙겨서 나가는 서문장미를 말릴 수 없었다. 아니 말릴 생각조차 없었다.

현당이 움직이지 않고 빤히 쳐다보고만 있자 서문장미는 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흥!”

한차례 콧방귀를 뀌며 소리가 나도록 문을 여닫았다. 그 모습을 현당은 씁쓸한 웃음으로 바라만 보았다.

홀로 남게 되자 현당은 한층 여유가 느껴졌다. 그래도 현당은 정말 실내에 아무도 없는지 한 번 더 확인했다.

‘이제 좀 한가해졌군.’

몸이 좋아지고 마음도 편해지자 시간까지 넉넉하게 느껴졌다. 이 기회에 현당은 자신의 상태를 제대로 확인하기로 했다. 다시 운기행공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먼저 자하기를 끌어 올리고, 천천히 진기를 사지 백해로 흘려보냈다. 도도하게 흐르는 장강 줄기처럼 자하기는 부드럽게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도도하고 부드러운 흐름 속에 힘이 있었다. 아무리 퍼내도 줄어들 것 같지 않은 대양(大洋)처럼 막대한 양과 그 양에서 느껴지는 압력이 고스란히 현당에게 전해졌다.

만족스러웠다. 지금의 자하기는 과거 남궁찬이 현당에게 전수하던 자하기가 아니었다. 토하기의 거칠게 쓸고 지나가는 홍수 같은 성격이 현당의 자하기에 녹아 있었다. 이제는 완벽하게 자하기가 토하기의 성격까지 흡수하고 있었다.

현당은 서서히 끌어 올린 자하기를 혈도를 따라 유도했다. 내공을 극한까지 끌어 올리면서 독맥으로 내달렸다.

십 년 가뭄에 쩍쩍 갈라진 메마른 땅을 삼킬 듯이 가득 채우며 몰려드는 홍수가 보였다. 밀려 올라가는 진기의 홍수는 삽시간에 백회혈을 지나 임맥으로 쏟아졌다.

독맥을 거쳐 임맥을 내달리면서도 자하기의 양은 줄어들 생각을 않고 있었다. 오히려 늘어나는 것 같았다. 임맥으로 밀려드는 진기에 사지로 흩어놓았던 진기들이 합쳐지면서 더 큰 힘을 보여주었다.

현당이 걱정할 정도로 막힘도 없었다. 드디어 독맥을 지나 임맥으로 달리던 진기가 기해혈에 이르렀다. 이즈음 되자 현당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 시진 전까지 막혀 있던 임맥의 관문이었다.

현당이 끌어 올린 자하기는 부드럽게 임맥을 감싸고돌면서 흘러갔다. 마치 밑에서부터 차오르는 물이 장애물을 삼키듯이!

현당은 확신을 가졌다. 그리고 치밀어 오르는 희열에 진저리가 쳐졌다. 드디어 막혔던 임맥을 넘은 자하기는 대주천을 완벽하게 완성하고 있었다.

현당의 변화는 내부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도 발생하고 있었다. 백회혈에서 뿜어지는 하얀 은사가 그의 신형을 감싸고돌았다.

여기까지는 전과 똑같았다.

하지만 그냥 구(球)의 형태로 누에고치처럼 현당의 몸을 감싸던 은사가 지금은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현당의 전신을 감싸는가 싶더니, 여러 개의 띠로 갈라지면서 그의 신형을 맴돌았다. 이전처럼 가만히 현당의 신형을 감싸고 채우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처럼 역동적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게다가 은사의 색깔도 변해 있었다. 홍색의 빛을 내던 은사들이 지금은 적색 사이사이로 은은하게 자색을 띠고 있었다.

자하기의 수준에 만족한 현당은 천천히 토하기를 불러왔다. 오늘 새벽처럼 급하게 끌어 올리다가 기혈이 뒤집힐까 우려되어 토하기를 운기 하는 현당의 심기는 조심스러웠다.

우려와는 달리 토하기도 무리 없이 올라왔다. 하단전에서 시작해서 빠른 속도로 독맥을 타고 달리며 토하기로 가득 채웠다.

‘이건…….’

현당은 깜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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