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
<108화>
서문장미가 우희를 바라보았다.
“알았어요. 그렇게 해요.”
“안 돼요. 문사가 무슨 짓을 할지 어떻게 알아요!”
독고린이 소리쳤다.
“가만있어. 어리다고 봐주는 것도 한도가 있지. 끼어들 때와 피할 때도 구분하지 못하면서 무슨 사랑 타령이야! 정말 저 남자가 다시 일어나기를 바라면 지금은 조용히 물러나 있어.”
서문장미의 한 소리에 독고린은 쏙 들어갔다. 다만 입이 한 자나 튀어나와 있었다.
“들여다봐도 안 되겠지요?”
우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서문장미가 독고린의 손을 잡고 끌어냈다.
“놔요. 내가 나갈 거야…….”
티격태격하면서 두 사람이 나가자 실내에는 우희와 현당 두 사람만 남았다.
우희는 다시 한 번 현당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불쌍한 사람…….”
꼭두각시처럼 남의 손에 놀아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어떻게든 그것을 벗어나려 발버둥 치던 사람……. 현당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희는 정신을 집중해서 전음을 날리기 시작했다.
* * *
「들리세요?」
“우희!”
현당은 묻는 말에 대답했다.
한데 이상했다. 분명히 우희의 목소리인데 어디에서 들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 방향이 아닌 모든 방향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이 마치 자신이 우희의 속에 들어와 있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우희가 속에 있는 자신을 내려다보며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당신이 듣고 있다고 생각하고 이야기할게요. 방법이 없어요. 시간도 우리 편이 아니고…… 그저 나는 당신이 들을 수 있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들려. 어디 있는 거야? 이야기해.”
현당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우희의 목소리가 어디에서부터 들리는지도 몰랐다.
보이는 것 하나 없었다. 바로 앞에 내민 자신의 손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빛 하나 없는 어둠이 천지 사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시죠? 당신은 지금 자하기와 토하기를 한꺼번에 운기(運氣)하다가 기혈이 엉켜버리는 내상을 입었어요. 해결 방법은 복용한 선약을 내공으로 흡수해서 엉킨 기혈을 녹이고, 막힌 혈도를 뚫거나 누가 강력한 내공으로 그것을 직접 뚫는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지금 당신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없군요. 결국 당신 혼자 풀 수밖에…….」
그 소리를 듣는 순간, 현당은 자신의 내부에 새로 들어온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작은 양이 아니었다.
“이건 뭐지?”
알 것 같았다. 일전에도 복용한 적 있는 기운이었다. 함부로 체내의 독기를 제거하려다가 기혈이 응어리졌을 때, 우희가 먹인 기운이었다. 남은 것을 우희가 다시 먹인 모양이었다.
우희의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을 하자 느껴졌고 느꼈다고 싶은 순간, 그는 그곳으로 이동해 있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뛰고 있는 맥박과 터질 듯이 꽉 차 있는 혈이 느껴졌다.
“여기는…….”
기해혈이었다. 기의 바다라고 불리는 기해혈에 서 있었다. 그리고 기해혈 근처에 엉켜 있는 두 개의 서로 다른 기운이 보였다. 임맥을 뚫기 위해 무리하게 자하기를 운공 하다가 자하기가 부족하자 이번에는 토하기를 끌어 올렸다. 자하기도 빠져나가지 못한 상태에서 토하기까지 밀려오자, 두 가지 기운이 한 곳에서 뒤섞이면서 서로 갈 길을 찾지 못하고 한데 뒤엉켜 있었다.
엉킨 기운을 풀 생각부터 해보았다.
뒤죽박죽으로 엉켜 있는 두 개의 기운을 보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내 포기했다. 그냥 엉키기만 한 것이 아니라 달라붙어 있기도 했고, 심한 곳은 두 기운이 하나로 합쳐져서 어떤 성질의 기운인지 알 수 없는 것도 있었다.
「우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부터 시작하지요. 제가 이르는 대로 운기 하세요…….」
현당은 깜짝 놀랐다.
운기였다.
분명히 우희는 운기를 하라고 했다.
자하기와 토하기가 하나로 엉켜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데, 그것을 우희도 알고 있을 텐데, 우희는 운기 하라고 했다.
즉, 다른 심법을 현당에게 가르쳐주겠다는 소리다.
‘조련제마공(造鍊帝魔功)!’
생각나는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아무리 새로 복용한 약의 기운이 강하다 해도 자하기와 토하기가 한꺼번에 엉킨 것을 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현당에게는 체내의 기운으로 그것을 소화시킬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두 기운을 둘로 나눌 수도 없었다.
해결 방법은 한 가지. 엉켜 있는 것을 풀어서 자하기와 토하기를 다시 각각의 것으로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이 둘을 하나로 녹이는 것뿐이었다.
「딴생각 말아요. 지금은 무조건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세요.」
현당은 우희가 하는 말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체내로 흡수되는 기운이 빠른 속도로 하단전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모으는 기운 앞으로 다른 무언가가 달리고 있었다. 자신의 것이 아닌 무언가가……. 그것이 먼저 혈도를 따라 앞서 달리면서 길을 열고 있었다. 좁아지던 혈도가 열리면서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열린 혈도를 따라 공청석유의 기운이 속속 밀려들고 있었다.
* * *
비틀…….
자리에서 일어나던 우희는 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너무 과도한 힘을 쓴 것 같았다. 혼수상태의 사람에게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이 수밖에 없었다. 불가의 이심전심(以心傳心), 심심상인(心心相印)의 수법으로 심즉통(心卽通)이 있다면, 그녀에게는 비슷한 방법으로 진언전(眞言傳)이라는 수법이 있었다. 상대의 의식 속에 직접 자신의 생각을 전해주는 방법이었다.
전음은 천리통(千里通)을 펼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들을 수 있지만, 심즉통이나 진언전은 바로 옆에 있어도 알아차릴 수 없는 수법이었다.
우희 역시 진언전을 익히기만 했지 정말로 그것을 쓸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힐끗.
우희가 앉혀놓은 대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현당의 모습이 보였다. 파리하던 얼굴에 조금씩 혈색이 돌아오고 있었다.
일단은 성공으로 보였다. 현당은 우희가 전하는 대로 심법을 운결 하면서 서문장미가 복용시킨 공청석유를 자신의 것으로 녹이고 있었다. 제대로만 된다면 그 기운을 이용하여 뒤엉켜 있는 자하기와 토하기를 하나로 녹일 수 있을 것이다.
우희가 한 일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내공을 현당에게 집어넣어서 그의 기혈을 자극시켰다. 즉 현당이 공청석유를 체내에 흡수할 수 있도록 촉매 역할을 해주었다.
하지만 내공이 높지 않은 우희가 현당의 체내의 진기를 도인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너무 무리를 한 탓에 물 먹은 솜처럼 팔다리가 무겁게 느껴지는 게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이럴 필요가 있을까?’
없을지도 모르지만 이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그가 알아들었든 못 알아들었든 나머지는 현당의 몫이었다.
비틀.
문을 열려던 우희는 쓰러질 뻔했다. 문고리를 잡은 손이 떨렸다. 그 소리를 듣고 밖에서 다른 사람이 문을 열었다.
서문장미였다. 그녀뿐만 아니라 태구나 선기, 장 행자까지 그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한쪽에서는 독고린이 울고 있었고 그녀 일행이 그녀를 달래고 있었다.
“어찌 되었어요?”
서문장미의 물음에 우희는 애써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소가주는…….”
태구와 선기가 모여들었다. 독고린도 눈물을 닦으면서 얼굴을 들었다. 우희는 그들을 향해 별일 아니라는 듯 웃어 보였다.
“조식 중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통평사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
우희는 목소리에 힘을 주며 사실대로 말했다.
서문장미가 우희의 등 뒤로 실내를 들여다보았다.
“뭐야? 아무 일 없었잖아?”
서문장미의 말에 우희는 깜짝 놀랐다.
“아무 일이라니요?”
서문장미의 말에 독고린도 달려왔다.
“정말? 정말 아무 일 없어요?”
독고린도 사람들을 밀치면서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멀쩡하게 옷 다 입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현당이 보였다.
“정말이야! 아무 일 없었어. 오오, 감사합니다. 우리 오라버니에게 아무 일 없었어요.”
순간, 우희는 이들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뭐예요. 그러니까, 내가…….”
그녀들의 생각을 읽은 우희는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었다.
서문장미는 동정녀(童貞女 : 이성과 성관계가 없는 여자), 순백지신(純白之身)인 우희가 동정을 현당에게 전하고, 그것을 통해서 현당의 내력을 촉발시켜 내상을 치료하는 방법을 사용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독고린에게 이야기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력이 약한 사람이 더 높은 내공의 사람이 의식을 잃었을 때 동정을 희생하며 치료하는 방법도 있어 그렇게 의심할 만도 했다.
“잘 되었어. 아니라서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독고린이 기도하듯이 두 손을 깍지 끼고 미소 지었다. 연신 다행이라고 주문을 외우듯 중얼거렸다.
어이없는 표정으로 우희는 멍하니 독고린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독고린은 현당의 상세가 완화되고 있어서라기보다는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던 대로 우희가 순음지기를 상실하면서 현당을 치료하는 방법, 즉 두 사람의 성관계를 통해 치료하는 방법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의미였다.
우희는 너무 어이없어 화가 나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었군요.”
그제야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 독고린이 고개를 숙였다.
“수고하셨어요. 문사. 아니, 참찬. 피곤하실 텐데 이제 가서 쉬세요.”
처음 수고했다고 이야기할 때까지만 해도 독고린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참찬’이라고 우희에게 호칭을 붙이는 순간에는 어느새 새치름히 고개를 바짝 쳐들고 우희는 쳐다보지도 않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마치 이제 더 이상 여기 있을 필요가 없다는 투였다.
우희가 눈을 부릅떴지만 이내 눈빛을 달래면서 몸을 돌렸다.
“그럼 통평사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우희는 마지막 한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서문 부인.”
순간, 서문장미의 얼굴이 밝아졌다.
우희가 현당의 간호를 그녀에게 부탁한다고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즉 현당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서문장미의 지휘와 통솔을 받으라는 말이었다.
“고생했어요, 문사.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처리하지요.”
서문장미가 승리의 표정을 지으면서 독고린을 흘겨보았다. 독고린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 * *
현당은 혈도를 따라 내달리는 진기를 잡느라 진땀을 흘렸다.
마치 살아 있는 야생마처럼 길이 나 있으면 나 있는 대로 마구 달리려는 새로운 기운이었다. 채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지도 못했는데 새로운 진기는 알아서 사지 백해로 뻗어가고 있었다.
평소라면 진기를 자연스럽게 기혈을 따라 흘려보내고 전신을 가득 채운 후에는 다시 불러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우선은 새로 받아들인 진기를 새로운 심법에 따라 도인하면서 엉키고 붙어버려서 한 덩어리로 뭉치고 있는 자하기와 토하기를 녹이는 것이 급선무였다.
진기도 새 것이고 심법도 새 심법이었다. 새 진기는 기운이 넘치고 있었고, 새 심법은 그 진기를 다루는 데 더 없이 훌륭했다. 마치 수세미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빠른 속도로 야생의 기운은 현당의 것으로 녹아들었다.
이제는 자신 있었다. 공청석유를 통해 흡수한 이 기운이면 막힌 임맥도 뚫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드디어 끝이 났다. 이제 새 기운을 다스리는 데 성공했다. 좀 전까지 날뛰던 기운이 지금은 현당의 의지대로 얌전하게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현당은 진기가 흐르고 있는 앞쪽을 내다보았다. 하나도 보이지 않는 짙은 어둠 속에서도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알 수 있었다.
현당은 이제 길들이기 시작한 그것들에게 하단전부터 시작해서 독맥을 따라 올라가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가 명령을 내리는 순간, 현당은 이미 진기에 몸을 싣고 기혈을 따라 내달리고 있었다. 천지가 개벽하는 소리가 울렸다. 현당의 몸속에서 이제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있었다.
* * *
“다녀오셨습니까?”
들어오는 우희를 보자 이삼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밖에서 같이 서성이고 있던 공일, 장이도 허리를 들었다.
우희는 도도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잠시 안으로 드시지요.”
순간, 우희의 눈에 갈등의 빛이 스쳤다. 하지만 우희는 피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공일과 이삼도 따라 들어갔다. 장이의 앞에서 문이 닫혔다. 장이가 세 사람이 들어간 입구를 가로막고 섰다.
문 앞에는 공일이 지키고 있었고 우희가 중앙에 섰다. 보고를 드리겠다던 이삼이 우희 앞으로 다가왔다.
짜악.
갑자기 날아오는 손바닥에 우희는 속수무책으로 나가 떨어졌다.
“분명히 하지 말라 하지 않았느냐?”
바닥에 쓰러진 우희는 일어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건 당신의 영역이 아니에요. 그리고 아직은 그가 죽도록 내버려둘 수 없어요.”
“그게 누구의 명령이더냐?”
“누구의 명령이 아니라 내 판단이에요.”
“네 판단? 큭. 네가 오랜 시간 밖에 나가 있더니 간이 부었구나. 명령도 없었는데 결정을 네 판단에 의해 내린다?”
“남궁세가뿐만 아니라 남부맹의 일은 우리 삼사(三師)의 소관.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되는데요.”
이삼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제 그가 곧 교체될 텐데도?”
우희가 일어나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때 일은 그때 일이고 지금은 지금이에요. 그리고 지금 시체가 되어 있다가 며칠 후에 갑자기 멀쩡한 모습으로 나온다면 그것 또한 이상한 일이고…….”
“어차피 없애야 될 놈인데도?”
우희는 순간적으로 멈칫거렸지만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때까지는 필요한 사람…….”
한 번 우희를 물고 늘어진 이삼은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설마 그놈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겠지, 나연희?”
우희의 얼굴이 휙 소리가 나도록 이삼을 향해 돌아갔다.
표독스러운 그녀의 눈빛이 지금껏 볼 수 없었던 그녀의 표정을 만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