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무사-103화 (103/175)

# 103

<103화>

“물론!”

현당이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장 행자의 얼굴에 긴장감이 어렸다.

“정말…… 정말 내가 누군지 안단 말씀이오?”

“당연하지. 자네는 아버지께서 내게 보낸 통평사의 행수, 장 행자가 아닌가?”

어이없는 현당의 대답에 한동안 장 행자는 말을 하지 못했다.

대신에 현당이 장 행자를 추궁했다.

“네놈이 장씨든 왕씨든 내겐 중요치 않아.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나를 따라서 통평사단의 일을 안전하고 성공적으로 끝을 맺는 것이고, 그래서 나머지 사람이 내 수족이 되어 맡은 일을 잘하는 것뿐이다. 네놈이 내 말을 따를 수 없다면 나는 네놈을 없애고, 다른 사람을 불러올 것이다.”

현당의 말에 장 행자가 코웃음을 쳤다.

“큭. 말이면 다인가? 누군가를 협박하려면 당연히 그럴 능력이 있어야…… 컥.”

장 행자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현당은 장 행자의 상판대기 바로 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아버지께서 네놈에게 무슨 일을 시켰는지 그것은 내게 중요치 않아. 난 알 필요도 없고 관심도 없어. 다만 네놈이 말을 안 들으면 네 목을 친 후, 돌아가서 네놈이 나를 위협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면 그뿐이라고.”

장 행자는 놀란 눈을 하고 바로 앞에 커다랗게 확대되어 있는 현당의 얼굴만 쳐다볼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언제 현당이 칼을 뽑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뛰어들면서 자신의 목을 찌르고 있는지 장 행자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칼은 보지 못했는데 분명히 날카로운 칼끝이 그의 목을 찌르고 있었다. 소름이 돋았다. 숨이라도 크게 쉬면 튀어나온 울대뼈가 찢어질 것만 같았다. 어쩌면 지금도 핏줄기가 흐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피부 깊숙이 전해지는 살기에 장 행자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마른침만 삼킬 뿐이었다.

“아버지가 네게 내린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내 말을 따라라. 그게 싫으면 당장 내 곁을 떠나거나.”

정말 죽일 것 같았다. 그가 그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끄덕.

말로 대답할 용기가 나지 않아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목소리가 떨려 나올 것 같았다.

다행히도 현당이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순간, 장 행자의 두 눈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부릅떠졌다. 얌전하게 현당의 허리에 꽂혀 있는 두 개의 칼자루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현당은 칼을 뽑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 그럼 뭐란 말인가? 분명히 놈은 칼끝으로 나를 위협했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현당은 장 행자에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그 셋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라. 그리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가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현당은 명령을 내렸다.

빠드득.

장 행자의 입에서 이가는 소리가 들렸다. 무방비 상태에서 당했지만 그가 얕잡아보고 있던 상대에게 목숨을 위협받았다는 사실에 화가 난 것이었다.

장 행자의 입에서 거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존명…….”

콰항.

장 행자는 분한 마음을 문을 닫는 소리로 나타냈다.

“어라? 저 친구는 왜 저럽니까?”

장 행자가 나가자 대신 들어온 선기와 태구가 현당에게 물었다.

‘휴우…… 세상에 쉬운 일이 하나도 없군.’

속으로는 한숨을 쉬면서 현당은 그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방은 어떻든가요? 마음에 드는지요?”

그들과 마주치는 현당의 얼굴은 여느 때처럼 여유가 가득했다.

*  *  *

모든 행사가 그러하듯 방문 환영 행사는 따분하고 지루하기 그지없었다. 전혀 알짜 없는 의식적인 어투로 정무련과 남부맹의 상호 우의를 다진다는 소리나 하는가 하면, 이번 회동의 본질은 일언반구도 없이 쓸데없는 허상만 늘어놓는 연설이 이어졌다.

결국 그런 의전 행사는 맡은 자기 일만 잘하면 되는 것이고, 그것은 현당도 예외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 연설하는 동안 현당은 자리에 참석한 정무련의 고위 인사들을 훑고 있었다. 현당은 지금 그 자리에 있는 사람 중에 연설의 내용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엄숙한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을 불러 지시를 내리기에 여념이 없는 중년인에게 현당의 시선이 꽂혔다. 작달막한 키에 앞 뒤 짱구인 그는 서생원(鼠生員 : 쥐) 같은 수염을 달고 있어 눈에 안 띄려야 안 띌 수가 없었다.

‘무제갈 신동…….’

현당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정무련의 결선일, 현호 웅호를 대신하여 경비와 진행을 책임지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무제갈 신동이 손가락을 한 번 까닥거리자 뒤에서 누가 튀어나오더니 그의 말 몇 마디에 바로 사라졌다. 그런 일이 반복되기를 몇 차례……. 그를 둘러싼 수많은 사람들이 개미처럼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때까지는 아무 일 없었다. 더욱이 지금 이곳은 정무련의 고위 인사들과 남부맹에서 파견을 나온 사람들로 채워진 공식석상이었다. 상황도 상황이려니와 자리도 자리인지라 무슨 일이 일어날 리도 없었고, 일어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싱긋.

그와 현당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현당은 특유의 시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연한 듯 신동도 가벼운 눈인사로 현당의 시선에 답을 보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무표정한 얼굴로 주변인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하던 신동의 얼굴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눈꺼풀이 잠깐 움직인 것을 빼면 안면 근육 하나 바뀌지 않았다. 한데…….

흠칫!

두 번째로 현당과 신동의 시선이 교차되는 순간, 현당을 바라보는 신동의 눈길이 야릇하게 변했다. 지금까지 무표정하게 현당과 눈인사를 주고받던 무제갈 신동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때도 그때부터였다.

‘알았을까?’

현당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하지만 현당이 시선을 돌린 것과는 상관없이 신동은 여전히 현당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아차렸군!’

세 번째로 현당과 눈을 마주칠 때, 무제갈 신동의 얼굴은 완전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신동이 알아차린 것이 확실했다. 정무련의 금룡 선발 대회를 참관했던 남경 총관이 사실은 현당이었다는 것을! 현당의 눈빛만으로 신동은 그것을 알아차렸다. 그 자리에서 그는 현당에게 호위도 딸려주고 직접 설명까지 해주었다.

‘역시 무제갈 신동…….’

현당은 무제갈 신동의 이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순간, 현당은 짜릿한 긴장감을 느꼈다.

현당은 그제야 이곳에 온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목표가 있어야 재미있고, 목표는 확실해야 승산이 있는 법이었다.

싱긋.

현당은 다시 한 번 특유의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마치 승자가 된 듯한 여유로운 미소를 입가에 띤 채.

하지만 현당도 내심 편하지만은 않았다. 무엇보다 무제갈 신동의 실력을 재보려 했던 자신의 치기가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무제갈 신동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꼴밖에 되지 않았는가?

그렇다고 아무런 성과 없이 일을 저지를 만큼 현당은 무모하지 않았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를 끌어들여야 했다. 현당의 목표는 바로 문사 우희 뒤에 있는 조직이었다.

현당을 처형장에서 남부맹으로 끌어들인 것은 사대 세가의 가주가 아니라 우희였고, 우희 역시 현당을 위해서도 아니고 사대 세가 또는 남부맹을 위해 그를 데려온 것이 아니라 우희 뒤에 감추고 있는 조직을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현당이 살고 죽는 것은 남궁세가, 남부맹, 정무련도 아닌 그 조직에 달려 있는지도 몰랐다. 현당은 조직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했다.

첫 단계로 그 조직을 좀 더 밝은 곳으로 끌어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끼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미끼는 자신이 아니라 다른 이가 되어주어야만 했다.

‘그래야 내가 낚을 수 있으니까…… 그렇다고 내가 먼저 싸움을 걸어놓고 도망갈 수는 더더욱 없는 일이지.’

현당은 피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이제는 둘 중 아무도 시선을 피하는 사람이 없었다. 현당의 시선과 마주치면 마주칠수록 신동의 눈빛이 깊숙이 가라앉았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두 사람만의 싸움이 벌어졌다.

이내 신동이 다시 손가락을 까닥거리더니 다가온 사람에게 뭐라 속삭이며 손끝으로 현당을 가리켰다.

끄덕.

현당은 보일 듯 말 듯하게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연설을 귀담아 듣고 동의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현당과 눈을 마주치고 한 번도 눈길을 돌리지 않고 있던 무제갈의 표정은 심각하게 굳어만 갔다.

“적! 이 사람아, 왔으면 나부터 찾아와야지!”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현당의 표정도 밝아졌다.

정무련 선종문의 포송이었다.

“자넨 어떻게 아프다는 소식도 없나? 정말 여전하군…….”

현당이 잔을 들어 보이며 인사를 했다.

“축하하네. 후보로 선발된 것 말이네.”

“뭘 그러나? 그래 봤자 세 명 중 하나인데…… 자네 역시 이 위 자리는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자네는 으뜸인 세 사람이지만 나는 고작 둘째라고. 어떻게 자네와 나를 비교할 수 있겠나…….”

말하면서 현당은 힐끗 신동의 눈치를 살폈다. 아직도 신동은 현당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후훗. 단단히 긴장하고 있군.’

앞으로 더욱 재미있어질 것 같았다. 현당은 더 이상 무제갈 신동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고 연회를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주연이 한창이었다.

*  *  *

“처음부터 모용탄 공자가 모용세가의 뜨거운 감자 취급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촉망받던 기재였지요.”

현당은 선기로부터 모용탄에 대한 정보를 듣고 있었다. 뜨거운 감자란 너무 뜨거워 삼킬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버리기에는 아까워서 뱉을 수도 없는 존재라는 뜻이었다.

현당은 저잣거리에서 모용미와 함께 모용탄과 마주치던 순간이 생각났다. 사람들은 당시 모용탄을 남경 삼탕아 중 한 명이라고 지칭했다. 부모를 잘 만난 덕에 남경에서 파락호 짓을 하고 있는 골칫거리였던 것이다.

“가만! 그럼…….”

불현듯 스치며 지나가는 얼굴들이 있었다.

‘왜 지금껏 몰랐을까…….’

모용탄과 함께 있던 두 사람……. 개중 한 명은 분명히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남경 삼탕아!”

“예?”

“모용탄과 함께 온 그 사람이 남경 삼탕아 중 하나 아닙니까?”

“아, 그렇습니다. 체격 좋은 다른 하나가 바로 남경 삼탕아의 단목기주(端木氣柱) 공자입니다. 작은 키에 까칠하게 수염을 기르고 있는 사람이 단조문(鍛造門)의 오룡(吳龍) 공자이고요.”

현당은 깜짝 놀랐다.

“단목기주라면…….”

당연하다는 듯 선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단목기 공자의 배다른 동생입니다. 바로 단목가의 막내지요.”

왜 처음 그들을 보았을 때 익숙한 얼굴이라고 느꼈는지 그 의문이 이제야 풀렸다.

현당은 양손 엄지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면서 돌렸다. 감각이 많이 둔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과는 달리 많이 무신경해져 있었다.

‘정신 차려야지. 정신 차려야 해!’

생각할 일들, 해야 할 일들이 많아서라고 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했다. 이럴 때일수록 사소한 것 하나도 놓쳐서는 안 되었다. 놓치기 쉬운 것이라면 상대에게도 흘리기 쉬웠다. 흘리는 정보 속에 진실의 꼬리가 숨어 있는 법이었다.

현당은 우선 심호흡을 하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중심부터 찾아야 했다. 너무 많은 정보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그중에서 필요한 것들만 따로 모으고, 정보의 가치에 따라 재분류하고, 또 그 정보들이 포함하고 있는 실제 의미를 가려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심을 잡는 일이 가장 중요하면서도 시급했다. 바로 그것이 현당이 할 일이었다.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에 잠시 적응하지 못했을 뿐, 자신 있었다.

“후우웁. 후우우…….”

짧은 순간에 허파 속으로 신선한 공기를 주입하면서 현당은 이성을 찾았다. 이제 다시 일을 해야 했다.

모용탄은 분명히 ‘현당이 가기 때문이 아니라 우희가 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것은 사대 세가 때문이 아니라 문당 아니면 남부맹, 그것도 아니라면 숨은 조직 때문이라는 말이나 매한가지였다.

결국 모용탄은 가문을 위해 온 것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계속해 보세요.”

현당으로서는 모용탄에 대해 더 알아야 할 것이 있었다.

“촉망받던 기재가 왜 한순간에 탕아로 전락했을까?”

“아시다시피 모용세가는 십팔반병기를 다 다룹니다. 한데 모용탄 공자는 유독 봉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 때문에 모용가주와 잦은 충돌을 일으켰지요.”

현당은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십팔반병기를 다 다룰 줄 안다 하더라도 결국 애용하는 병기가 있을 터였다. 십팔반병기 중 유독 한 가지에 조예가 깊다고 해서 그것이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았다.

“가주와 자주 충돌을 일으키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까?”

“그럼요. 저잣거리에서도 둘이 싸우는 광경을 직접 목격했으니까요.”

“흐음…….”

현당은 있지도 않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대개 사람들은 남들이 보는 앞에서 가정사를 들먹이기 싫어한다. 특히나 명문가일수록 그들의 행적이 세인들의 관심사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하물며 사대 세가 중 한 곳인 모용세가의 가주가 저잣거리에서 수양아들 모용탄과 싸우는 것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때 일을 이야기하지.”

“누구에게나 물어봐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대낮부터 모용탄 공자가 잔뜩 술에 취해 웃통을 벗은 채 저잣거리의 불량배들과 박투를 벌였지요. 그런데 워낙 만취 상태였던지라 제대로 봉법을 펼치지도 못하고 계속 얻어맞기만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마도 보다 못한 누군가가 모용세가에 가서 그 사실을 알렸겠지요. 모용가주가 서둘러 달려왔습니다. 그때는 이미 반쯤 넋이 나간 모용 공자 혼자 남아서 비틀거리며 봉을 흔들고 있었지요. 상대해 주는 놈 하나 없었습니다. 길가에 좌판을 벌여놓았던 상인들도 행여나 불똥이 튈세라 짐을 꾸려놓고 한쪽에 붙어 서서 구경이나 하는 판이었지요. 결국 나타난 모용가주가 일수에 모용탄 공자를 제압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봉을 빼앗긴 모용탄 공자는 마치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겠어요. 아, 그때 모용탄 공자의 추어(鯫魚 : 미꾸라지) 신공이란 정말…… 결국 구경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소리가 튀어나왔습니다. 참다못한 모용가주가 한마디 하시더군요. ‘네놈을 파양하지는 않겠다.’ 하고요. 단지 그뿐이었습니다. 모용가주는 휑하니 등을 돌리고는 바로 사라졌지요. 모용탄 공자의 춤판은 그 뒤에도 한동안 계속되었지요.”

선기는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설명하는 것처럼 상세하게 이야기를 전했다.

“선 대협이 본 게 틀림없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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