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
<102화>
서문장미가 콧방귀를 꼈다.
“흥. 아니, 문사는 우리 서문세가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요. 의(醫), 기(奇), 술(術)에 정통한 우리 서문세가가 함께하고 있건만 따로 건강을 담당할 사람을 데리고 와요?”
서문장미가 우희에게 하는 말에 현당은 정신이 어지러워졌다.
‘제길, 가뜩이나 생각할 것도 많은데…….’
현당은 어이가 없어 한숨이 절로 나왔다. 평소 서문장미의 성품으로 보아 일행 중에 누군가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나서서 치료할 리는 만무했다.
그럴 사람이었다면 시녀 한 사람을 더 데리고 오기 위해 현당의 부탁을 거절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녀는 모용세가에서 현당에게 양보해 준 자리를 가로채기까지 했다. 그런 그녀가 다른 사람을 치료할 기대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문장미의 말에 문사를 두둔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공일이 뭐라 대꾸하려 하자 우희가 말렸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서문장미를 말릴 수가 없었다.
“연락이라는 것도 그래요. 정무련에서 말을 달리면 반나절이면 남부맹에 도착하건만 무슨 연락 담당이 필요하죠?”
현당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가뜩이나 생각할 것도 많은데 짜증 섞인 목소리로 현당의 사고(思考)를 자꾸만 방해하는 서문장미에게 화가 치밀었다.
탕.
한차례 상을 내리친 후 말하는 현당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거칠었다.
“그래서?”
현당의 거친 목소리에 서문장미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래서……라니요?”
서문장미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현당의 기세에 겁먹은 모습이었다.
현당이 따지듯이 물었다.
“서문세가의 뛰어난 의술은 모두가 알고 있소. 한데 서문세가의 의술이 뛰어날지라도 정작 아픈 사람을 돌볼 수 있는 서문세가 사람이 여기 누가 있습니까? 서문 부인께서 돌봐주시겠소? 아니면 부인께서 데려온 시녀 중에 어느 누가 시술할 줄 아오? 하기야 정무련에 오래 머물 것도 아니니, 그건 그렇다 합시다. 그럼, 또 급히 남부맹에 연락을 해야 하는 경우가 생기면 어찌 하겠소? 누구를 보내야 하오? 당신이오? 아니면 당신의 시녀요?”
현당은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식탁 밑에서 우희가 현당의 손을 지그시 잡았던 것이다.
“제가 미처 거기까지 생각지 못했습니다. 서문 부인의 말씀이 맞습니다. 모두가 제 불찰입니다.”
현당의 말에 서문장미는 할 말을 잃었는지 입을 벌리고 있다가 때마침 우희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말에 새침하게 한마디를 쏘아붙이는 것으로 입을 다물 수 있었다.
“알면 되었어요.”
더 이상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우희가 데려온 사람 중에 소개할 사람은 다 소개한 셈이었다. 할 말이 끝났는지 그들이 이번에는 현당의 일행을 바라보았다. 다름 사람의 소개를 기다리는 눈빛이었다.
현당이 대답했다.
“신연당의 당주, 선기 대협과 개합문의 태구 대협이오. 그리고 이 쪽은…… 우리 남궁세가에서 나온 장(張) 행자요.”
“선기입니다.”
“태구입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왕 행자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일어나기 전에 현당에게 날카로운 눈빛으로 한번 노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편하게 그냥 장(張)이라고 불러주십시오.”
‘그럴 줄 알았어…….’
현당은 일부러 왕 행자를 장 행자라고 소개했다. 왕 행자의 반응을 보기 위해서였다. 정말 왕씨라면 현당의 말을 정정할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그냥 넘어갈 것이었다. 역시 현당의 예상대로 왕 행자는 현당이 소개한 대로 장 행자로 자신을 소개했다. 성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이었다.
현당은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다시 의자에 앉는 왕 행자 또는 장 행자를 바라보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그의 신분에 대해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만일 자신이 티를 내면 왕 행자는 더욱 조심할 테고, 그러면 그를 감시하기는 더욱 힘들어질 것이었다.
‘세상에 쉬운 일이 하나도 없군. 이제부터는 왕 행자가 아니라 장 행자다.’
한숨부터 흘러나왔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다른 사람들이 서로 얼굴을 바라보는 게 보였다. 소개를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머뭇거리는 것 같았다. 그때 마침 정무련에서 사자가 찾아와 그 기회가 사라졌다.
“남부맹에서 오셨습니까?”
도인처럼 도복을 걸쳤지만 도관(道冠 : 도사용 건)은 쓰지 않았다. ‘나는 도관(道觀 : 도교 사원)에서 수련하고 속세로 내려왔다.’고 간접적으로 말하는 차림새였다. 허리에 찬 검이 눈에 띄었다.
현당이 아는 얼굴이었다. 물론 그는 현당을 모르겠지만…….
“웅호입니다.”
별호가 무엇이고, 어디 소속에 무슨 직책을 맡고 있다는 설명도 없었다. 그 한마디로 자기소개는 충분하다고 말하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의 어투에서 대단한 자신감이 묻어났다.
웅호는 맞은편에 앉은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대부분이 이십 전후의 젊은이들이었다. 중년쯤 되어 보이는 사람이 몇 있었지만, 복색이 세가 사람이 아닌 가솔의 옷차림이었다. 정작 비단으로 잘 차려입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십 대였다.
“누가 남궁 공자요?”
상대의 나이가 젊다고 생각했는지 웅호의 어투가 일순간 달라졌다. 얕잡아보는 것이 틀림없었다.
현당이 뭐라 하기 전에 우희가 나섰다.
“현호(玄虎), 웅호 진인이시군요!”
순간, 웅호의 얼굴색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남부맹에서도 자신의 위명(威名)이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진 것이었다.
웅호의 수양 깊이가 쉽게 드러났다.
“어허! 나를 아시오? 변변치 않은 실력이거늘…….”
말만 그렇게 할 뿐 한껏 거드름을 피우면서 허리를 젖혔다. 펴도 너무 펴서 뒤로 넘어갈 것만 같았다.
우희가 화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좀 전까지 서문장미에게 먼저 몸을 낮추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현당은 우희의 그 미소에 깜짝 놀랐다. 현기증이 일어날 만큼 화려한 미소였다. 언제나 당당하고 차분해 보이기만 하던 우희에게 저런 요염한 모습이 있었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런데 아실 만한 분이 말씀을 그렇게 하시면 안 되지요. 비록 현호진인에 대한 소문은 저희 남부맹까지 파다합니다만, 저희는 남부맹을 대표해서 온 사람들이니까요. 게다가 여기의 남궁세가 소가주는 바로 남부맹 맹주의 역할을 대행하고 있는 분…… 그렇다면 정무련 련주와 동격이라고 할 수 있지요?”
‘역시 문사 우희! 눈으로 보는 것만 믿어서는 안 된다니까!’
현당은 우희의 화려한 미소 속에 서슬 퍼런 칼날이 숨겨져 있음을 파악했다. 웃음 속에 칼을 감추고 있다는 소리장도(笑裏藏刀)라는 말이 실감났다.
일순간에 웅호의 얼굴 표정이 달라졌다.
“험…… 실례했소. 어느 분이 통평사이신지?”
현당은 정무련의 금룡 선발 대회가 있은 이후로 웅호가 변한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약자에게는 강하고 강자에게는 비굴한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무시해서는 안 되지. 저런 사람일수록 대접해 주면 좋아 하잖아!’
우희가 일침을 놓았으니 이제는 현당이 어를 차례였다.
“무당에서 하산하신 지 얼마 안 되셔서 현도장에 일도 많으실 텐데, 현호 진인께서 직접 나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남궁세가의 적이라는 사람이 저올시다.”
현당은 한껏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취했다. 전혀 품위를 잃지 않는 동작이었다.
웅호의 두 눈이 벌어졌다. 눈이 커진 사람은 웅호만이 아니었다. 우희도 두 눈을 크게 뜨고 현당을 바라보았다.
지금 현당은 ‘무당에서 하산한 지 얼마 안 되었다’는 말을 내뱉었다. 우희는 현당이 거기까지 알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바보…… 나한테 그 정도쯤은 알고 있다고 자랑하는 거야? 오히려 내 경계만 키운 셈이잖아! 아니지. 그걸 모를 현당이 아닌데, 이 남자가 노리는 게 그럼 뭐지?’
우희는 조심스럽게 표정을 감추면서 곁눈질로 현당을 주시했다. 언제나 똑같은 모습의 현당이었다. 변함없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정무련의 정보만은 현당보다 많이 알고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는데, 점차 그 부분에 있어서도 현당에게 밀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문당에서 나온 세 사람이 자리를 비키고 다소 긴장한 모습으로 웅호가 그들 사이에 자리를 함께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통평사의 업무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 *
웅호가 할 일은 남부맹에서 예정대로 통평사 일행이 도착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가 일정과 인원, 그리고 준비 상황을 확인하고 물러가자 우희와 함께 온 사람들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먼저 공일이 궤에서 가늘고 긴 종이를 꺼내자 우희는 뼈로 만든 촉으로 그 위에 깨알 같은 글씨로 빽빽이 채웠다.
우희가 글을 다 쓴 것을 확인한 장이가 비둘기 한 마리를 꺼냈다. 다리에 봉서를 매단 비둘기가 남녘으로 날아갔다. 남부맹이 있는 방향이었다.
우희는 뿌듯한 얼굴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이제 문당에서 행사 준비가 끝났다고 각 세가에 알려드릴 것입니다. 환영식이 끝나도 역시 마찬가지겠지요.”
“문사. 내 답사(答辭)도 준비되어 있소?”
우희가 한껏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론입니다.”
우희가 손짓을 하자 공일이 준비된 원고를 그녀에게 넘겼고, 다시 우희 손에서 현당에게 넘어갔다.
“흐음…… 여기 이건 무슨 말이오?”
현당이 손으로 원고의 한 부분을 짚으며 묻자 우희가 확인해 주었다. 머리를 맞대고 서류 한 장을 같이 보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본의 아니게 다정하게 보였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서문장미가 입을 삐죽거렸다. 뭐라 비웃고 싶었지만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서문장미의 표정이 현당의 눈에 거슬렸다. 서문장미는 어느 누구를 통해 서문세가에 소식을 전할 길이 없었다. 그리고 우희처럼 현당을 위해 준비를 해줄 수도 없었다.
‘단지 그 때문만일까?’
그것만은 아닐 것 같았다.
“제 말 듣고 있어요?”
우희의 말에 현당의 생각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미안하오. 잠시 딴생각을 했소. 다시 한 번 설명해 주시겠소?”
우희를 향해 눈을 찡긋거리는 현당을 향해 우희는 다시 한 번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고 차근차근 답사에 담긴 의미를 설명해 주었다.
새삼 통평사 일행 모두가 우희의 준비성에 감탄하는 순간이었다.
우희에게서 충분한 설명을 듣고 원고를 훑어본 현당이 양손으로 힘 있게 식탁을 짚었다. 느긋한 시선으로 그를 둘러싼 통평사단 일행 한 명 한 명을 둘러보았다.
“그럼…… 다 끝났으면 이제 들어가 볼까요? 일을 시작해야지요!”
우희가 한 일이 마치 제가 한 것인 양 현당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본격적으로 통평사의 업무가 시작되고 있었다.
* * *
정무련으로 들어서는 길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남부맹 소속의 인물이 영역이 다른 정무련의 구역까지 함부로 올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정무련 구역의 사람들은 남부맹의 유명인사를 볼 기회가 그동안 없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을 예상이라도 한 듯 서문장미는 마차를 데리고 온 소년에게 몰도록 했고, 자신은 마치 무슨 귀부인이라도 되는 양 나른한 표정으로 앉아서 행로의 사람들에게 야릇한 미소를 선물하고 있었다. 오히려 이런 상황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
이에 반하여 독고린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놀란 눈에 잔뜩 굳은 표정으로 현당 곁에 바짝 붙어 있었다. 마치 어미를 따라 처음 나들이를 나온 새끼가 세상 모든 게 무서운 것처럼 긴장하고 있었다. 어쩌다가 현당과 눈이 마주치면 굳은 얼굴로 어색한 웃음만 흘리고 있었다. 그나마 현당이 곁에 있다는 것에 위안을 삼는 듯했다.
긴장한 것은 모용탄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주 허리에 찬 철권을 쓰다듬는 것이 행여나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지 않을까 잔뜩 긴장하고 있는 눈치였다.
일행 중에 유일하게 평상심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남부맹의 문사 우희뿐이었다. 마상에서 여느 때처럼 똑같은 얼굴로 말의 흔들림에 온몸을 맡기고 있었다. 지금까지와는 하등 다를 것이 없다는 듯했다.
평상시와 똑같은 시선으로 우희 주변을 훑어보는 순간, 현당은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사람이 없어졌다. 분명히 반점에서 나올 때까지만 해도 스물한 명, 모두 다 있다는 것을 확인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몇 번을 다시 세어보아도 열여덟 명이었다. 한 명도 아닌 세 명이 사라졌다. 바로 우희가 데려온 장일, 공이, 이삼이었다.
‘전문가들이다. 분명히 내가 주시하고 있었는데…….’
언제 그들이 모습을 감추었는지 현당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 현당을 제외하고 그 누구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는 듯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희는 태연하게 말을 몰고 있었다.
‘그녀라면 모를 리가 없잖아! 흐음. 그렇군. 결국 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란 말이로군. 결국 나니까 모습을 드러냈었단 말인가? 이곳까지 데리고 온 것에 대한 보답이란 말이지.’
현당은 보이지 않게 소맷자락 안에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할 일이 생겼다. 할 일이 생겼다는 것은 목표가 생겼다는 것이고, 목표가 생기면 성취욕도 생기기 마련이었다.
‘내가 벗겨내고 말겠어. 어떤 년놈들이 모여 만든 조직인지…….’
현당은 알 듯한 미소를 띠면서 우희를 바라보았다.
순간적으로 현당과 눈이 마주친 우희는 긴장감을 느꼈다. 마치 자신을 발가벗기는 듯한 현당의 눈빛에 비밀을 들킨 것처럼 얼굴이 달아올랐다.
* * *
현당은 자신에게 배정된 방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장 행자를 불렀다.
“우희의 세 사람이 사라진 것을 알고 있나?”
앞뒤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묻는 현당의 질문에 장 행자는 머뭇거리다 고갯짓으로 답했다.
현당은 장 행자가 그냥 우연히 그것을 눈치챘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과부 심정은 홀아비가 아는 법이라고 그들과 비슷한 수련을 한 장 행자는 그들이 사라지는 것을 일찌감치 파악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찾아라.”
현당의 말에 장 행자가 콧방귀를 뀌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눈싸움이 벌어졌다. 장 행자는 팔짱을 끼고 매서운 눈빛으로 현당을 바라보고 있었고, 현당은 명령에 불복종을 할 것이라면 떠나라는 의미가 내포된 표정으로 장 행자를 노려보았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것은 장 행자였다.
“내가 누군지 아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