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89화>
수련동 밖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입구에 걸려 있는 종이 울린 것이다. 일순간에 한곳에 집중되었던 이지(理智)가 흩어지면서 현당의 의식은 현실로 돌아왔다.
“젠장…….”
수련동 안에서는 밖에서 일어나는 일을, 밖에서는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남궁찬은 이곳에서 태연히 살인을 저지를 수 있었고, 우희나 현당이 밀담을 나눌 수도 있었던 것이다.
수련동 문 역시 안에서 열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즉 밖에서 열어주지 않으면 나갈 수 없었다. 나가기 위해서는 밖으로 신호를 보내야 했다.
그 신호기로 입구 바로 앞에 빨간색과 파란색의 설렁줄 두 개와 하나의 종이 달려 있었는데, 설렁줄은 각각 밖에 있는 종에 연결되어 있었다. 하나는 문을 열라는 신호이고, 다른 하나는 이쪽으로 와서 이야기를 밖에 들으라는 신호였다.
종은 안쪽에 있는 설렁줄과 마찬가지로 밖에 연결되어 있어 밖에서 안에 신호를 보낼 때 사용했다. 또한 입구 옆에 신언통(信言筒)이라는 구멍이 있어, 평소에는 구멍을 닫아서 안의 일이 밖으로 전해지지 않도록 하고, 필요할 때는 열어서 바깥과 대화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현당은 시간을 생각해 보았다. 이 시간에 그를 찾아올 사람이 없었다. 현당은 입구로 다가갔다.
“무슨 일인가?”
“저어…… 인 낭자가 찾아오셨습니다.”
신언통이라지만 안팎의 대화가 제대로 전달될 리 만무했다. 현당은 더 자세히 듣기 위해 허리를 구부렸다.
“누구?”
“속하 총관, 왕륜입니다.”
“오, 왕 총관!”
현당은 빨간 설렁줄을 당겼다.
총관 왕륜이라면 현당도 함부로 대할 사람이 아니었다. 집안의 대소사뿐만 아니라, 남궁세가에 대한 모든 일이 그의 손을 통해 들어오고 나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왕륜을 특별한 사정없이 신언통으로 대화를 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바람도 쐴 겸 현당은 수련동의 문을 열도록 지시했다.
“여기까지 웬일이오, 왕 총관!”
밖으로 나가던 현당은 멈칫거렸다. 왕륜의 곁에 누가 있었다.
작달막한 키에 동그란 얼굴이 귀여워 보이는 소녀였다. 아니, 소녀라고 하기에는 나이가 있고, 묘령은 안 되어 보였다. 누굴까? 현당은 기억을 더듬었다. 어디서 보기는 본 것 같은데, 생각이 날 듯하면서 떠오르지 않았다.
“이분은…….”
손님을 안내하여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하고 비키려던 왕륜이 당황했다.
“저어, 소가주. 이분은…….”
순간, 소녀가 고개를 바짝 쳐들었다.
“오랜만이에요, 남궁 오라버니.”
순간, 현당은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독고린…….”
소녀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현당이 그녀를 알아본다는 사실에 기뻐서 손뼉을 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맞아요. 오라버니. 저를 기억하시는군요. 기억하실 줄 알았어요. 남궁 오라버니가 저를 비무대에서 밖으로 집어던질 때부터 저를 기억하신다고 믿고 있었어요.”
독고린. 독고세가의 소가주, 맹룡 독고진의 동생인 소련 독고린이었다.
‘젠장, 나랑 알던 사이였던 거야?’
현당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 요, 소저. 우리가 다시 만나는 게 얼마 만이지요?”
“남궁 오라버니, 전에처럼 편하게 대해주세요.”
“그, 그럼 그럴까? 그나저나 우리가 얼마 만에 다시 보는 거지?”
소녀는 자랑스럽게 현당 바로 코앞에 손가락 일곱 개를 쫙 폈다.
“칠 년이요. 알아요? 자그마치 칠 년 만에 만나는 거라구요.”
“칠 년 전?”
현당이 눈동자를 굴렸다. 자신의 나이보다 실제 남궁적의 나이가 약 세 살 어리고, 거기에서 칠 년 전이라면, 남궁적이 그러니까…….
“가가가 열 셋이었고, 난 딱 열 살이었을 때죠.”
“그래. 맞아. 내가 열 셋이었는데, 그때, 그러니까…… 그래, 아버지와 함께 우리가 독고세가로 갔던가?”
“맞아요. 그때 사대 세가의 자식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죠. 그때 내가 말했었죠. 나중에 크면 저는…… 호호호. 그때 일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각나는군요.”
사대 세가가 모두 다 모일 정도라면, 아마도 남부맹의 결맹지회 때일 것이다. 현당은 칠 년 전이라는 것은 생각지도 않고, 그렇게 속단했다.
“그래, 그때 정말 커다란 잔치였지.”
“잔치요?”
현당은 아차 싶었다. 말을 잘못 한 것이었다. 잔치가 아니고, 남부맹의 결맹지회도 아니었다. 칠 년 전이면 남부맹이 결성되기 전이었다. 남부맹의 결성은 오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아아, 내 말은 그냥 축하하는 그런 잔치가 아니라, 그러니까…….”
순간, 독고린의 눈빛이 흔들렸다.
“맙소사. 오라버니께서는 기억을 못 하시는군요?”
소녀의 눈빛이 빛났다. 게다가 눈에 물이 맺히고, 그 물이 빛을 산란시켜서 더욱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아아, 그러니까, 그게 그때…….”
소녀는 지금 금방이라도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릴 것만 같았다.
“정말 기억 못 하시는군요. 그때를…… 우리 모두는 선종문이나 현도장, 도원문 등의 정무련의 공격을 받아서 각 세가들이 정신이 없었죠. 그래서 세가의 무사들이 안심하고 싸울 수 있도록 우리 이세들을 모두 저희 독고세가로 집합시켰어요. 그래서 저희들은 난에서 손끝하나 안 다칠 수 있었죠. 오히려 다쳤다면 우리 독고세가에 놀러 왔다가 벌어진 애들 싸움 때문…….”
여기까지 이야기하던 소녀는 결국 울음을 참지 못하고 울면서 언덕을 뛰어 내려갔다.
‘젠장. 그것을 내가 어찌 알아?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욕이 바가지로 터져 나왔다.
현당을 한번 흘겨보던 왕륜이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다.
“휴우.”
이번에는 현당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 나왔다.
* * *
왕륜으로부터 정무련에 파견될 사절단의 인원 구성에 대해 보고를 받으면서 현당은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우희의 예상대로 독고세가에서는 독고린의 자원으로 그녀가 차출되었다. 무공은 있을지 몰라도, 강호 경험이 전혀 없는 그녀를 데리고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생각만으로도 골치 아팠다.
문제는 또 있었다. 서문세가에서 선기를 합류시킬 생각이면 한 명 더 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선기는 현당이 지목한 사람이지, 서문세가의 가주, 서문휘가 지목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서문세가의 주장이었다.
“선기를 안 보내면 안 보냈지, 남궁세가의 뜻대로 선기만을 보낼 수는 없다는 것이 서문가주의 뜻입니다.”
“서문가주의 뜻이라…….”
현당이 왕륜의 끝말을 따라 읊자 왕륜이 바로 자신의 실언을 정정했다.
“서문가주의 뜻이라고 합니다.”
현당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
“만약 서문세가에서도 한 명 더 가는 것을 허락한다면 또 그것 역시 형평에 어긋나는 일 아니오?”
왕륜은 대답하지 않았다.
판단은 가주나 소가주가 하는 일이지, 총관이 할 일이 아니었다. 절대 월권을 하지 않는 것이 왕륜의 장점이었다.
“역시 내가 총관의 의견을 물어도 답을 할 수 없단 말씀이군요.”
현당은 더 이상 그의 대답을 추궁하지 않았다. 그런다고 해서 들을 수 있는 대답이 아닐 것 같았다. 괜히 남궁세가의 총관이 된 게 아니었다. 당연히 그 정도의 배짱은 기본으로 있어야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모용세가는 어떻게 한다고 합니까?”
“누가 갈지 아직 통보가 없습니다.”
현당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은 모용세가에서 누가 가는가에 따라 서문세가에서 참여하는 사람이 둘이 될 수 있고, 하나가 될 수 있겠군요.”
현당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왕륜도 고개를 끄덕였다.
판단의 기준은 네 가문이 서로 비슷한 수준을 맞춘다는 데 있다. 현당이야 시합에서 준우승을 함으로써 사절단의 수장의 역할을 맡았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각 세가에서 차출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참여하는 정도가 비슷하게 맞아야 할 것이다. 어느 가문에 특히 부담을 줄 수도 없고, 어느 가문의 편의만 봐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런 점에서 현당은 유리한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소가주인 남궁적, 즉 현당이 의무적으로 참가하게 되었고, 독고세가에서도 세가의 혈통인 독고린이 참가하겠다고 자원했으니, 다른 세가도 그 정도의 자발적인 참여는 해주어야 하는 부담을 안은 셈이다.
“서문세가의 문제는 그때 결정해도 되겠군요.”
현당은 그 문제는 뒤로 넘기고 다음 문제를 확인했다.
“문당 쪽에서는 어떻게 준비한답니까? 정작 일은 그쪽에서 해야 할 텐데 말이지요.”
“흐음…….”
현당은 의자 뒤로 등을 젖혔다. 그리고 양손을 포개어 손끝을 맞추고 그 손에 턱을 얹었다.
마치 중요한 일이 있어서 깊이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찌 보면 장고(長考) 중이니, 방해하지 말라고 선언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문당에 가봐야겠구먼…….”
현당이 중얼거리는 어투에서 왕륜은 남궁찬을 떠올렸다.
‘어쩜 저렇게 가주와 똑같을까? 누가 소가주의 기세가 연하다고 그랬어? 저럴 때는 패도적인 게 똑같다니까!’
그 모습을 보면서 왕륜은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피는 못 속인다는 불변의 진리가 떠올랐다.
* * *
남궁적이 찾아왔다는 소리에 우희는 반갑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게 얼마만이야? 여기 온 게 두 번째지요?”
우희가 현당에게 자리를 권했다. 현당을 쫓아 우희의 집무실까지 들어왔던 주근혜는 잠깐 현당을 경멸의 눈초리로 쳐다본 후, 방을 나갔다.
“이해해…….”
우희가 현당에게 수하들의 불충을 사과했다.
“아, 그럼. 이해하고말고. 어차피 문사와는 태생부터 다른 사람들 아닌가!”
현당은 전혀 밖으로 알려지지 않은 일에 대해 모두 알고 있다는 듯 과장된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우희의 행동이 아주 잠깐 멈칫거렸다. 이내 아무 일도 아닌 척 우희는 몸을 돌렸다.
“별 소리를 다 해…….”
“그런가? 내가 잘못 짚었군…….”
현당이 시원한 미소를 우희에게 지어 보였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우희는 현당 앞에서 완전히 발가벗는 느낌이었다.
‘눈치챘어. 더 이상 속여야 소용없겠네.’
우희는 한껏 호기를 부렸다.
“하긴…… 그것을 몰라보면 천하의 소패 현당이 아니지!”
현당이 어쩌다 한번 찔러봤는데 이제 모르던 사실을 깨닫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럼 그게 정말이었군?”
현당은 전부터 우희가 이끌고 있는 문당의 세력이 우희와는 다른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오늘 그것을 확인한 것이었다.
우희는 속일 필요 없다고 판단했는지 순순히 사실을 인정했다.
“그런 가식적인 행동으로 약 올릴 필요까지는 없잖아?”
“하하핫. 들켰군.”
우희의 말에 현당은 통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희한테 한 소리 들은 게 자못 즐거운 것 같았다.
“알아?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 이렇게 머리싸움이 즐거울 줄은 몰랐어. 이건 정말이야.”
현당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칭찬을 하고 있었다. 그것을 우희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현당의 말에 우희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야.”
“자잘한 전투에서는 내가 이겼지만, 결국 전쟁에서는 내가 졌더군. 정말 멋진 한판이었어.”
현당은 철저하게 단목기를 은폐한 우희의 전략을 격찬했다.
“나뿐만 아니라 사대 세가 모두가 속아 넘어갔지.”
우희가 현당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주연이 너무 연기를 잘했어. 어수룩한 가짜였다면 바로 들통 났을 텐데, 현당이 기대 이상으로 실력이 좋았지.”
“뭘 남 좋은 일만 시켜준 셈이지.”
우희가 현당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꼭 손해 본 것처럼 말하네? 자기가 손해 본 것은 하나도 없잖아? 최소한 죽지 않은 것만 해도 어디야!”
현당은 기분이 좋았다. 이렇게 우희와 수 싸움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즐거웠다. 거침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핫. 맞아, 맞아. 누가 뭐래도 난 우희에게 빚을 진 셈이지. 목숨을 구해주었으니까 말이야. 그건 그렇고…… 흐음. 말해봐. 남부맹에 문사가 있다면 정무련에는 누가 있지?”
“무제갈(武諸葛) 신동(申銅)!”
우희는 그것도 모르냐는 듯이 대답했다.
“무제갈 신동이라. 도원문(道元門)의 신임 장로 말인가? 그 화산의 도사 출신이라는…….”
우희의 눈이 찢어질 정도로 커졌다.
“그건 어떻게 알았지?”
이번에는 현당이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야? 그럼 그게 비밀이었단 말이야?”
우희는 실눈을 뜨고 현당을 노려보았다.
“그렇잖아? 남궁가주가 가르쳐 줄 수는 없거든!”
“왜 그렇게 생각하지?”
“왜냐하면…… 왜냐하면, 남궁가주 본인도 모를 테니까. 화산파 ․ 종남파가 주축이 된 연합 세력이 섬서성에서의 배교 잔당 소탕이 끝난 후, 신동이 도원문에 불려온 것은 최근 일이야. 당신이 남궁세가로 들어간 것보다 나중 일이지. 그 직후에 문당의 조직개편이 있었고, 조직개편 후에는 남부맹 사대 세가의 모든 정보망은 우리 문당에 잡히고 있는 게 현실! 아직 사대 세가 중에서는 신동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얻지 못했을 텐데?”
현당이 자못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것이었어?”
우희는 현당의 꾐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부터 현당의 수작이었다. 일 단계로 우희와 문당 소속 무사들의 출신이 다르다는 것을 들추어 우희의 약점을 건드렸다. 이 단계로 그렇게 함으로써 맥이 빠진 우희를 다시 머리싸움의 상대라고 추켜세워서 방심하게 했다. 삼 단계, 떨어뜨렸다가 위로 던졌다가 하면서 쥐고 흔들어서 방심하게 한 우희로 하여금 아무 생각 없이 패를 드러내는 실수를 유도하게 했다. 바로 문당의 정보력! 이것이 현당이 노리던 최종 목표였다.
우희는 몸에서 피가 빠지는 것을 느꼈다.
“졌어요.”
양손을 치켜들고 항복하는 신호를 보냈다.
“이제 말해봐요. 어떻게 신동에 대한 이야기를 누구한테 들었지요?”
현당이 시원한 미소를 지으면서 엄지로 자기 코끝을 툭 건드렸다.
“내가 왜 그것을 이야기해야 하지?”
우희가 이마에 주름을 잡았다.
“원하는 게 뭐죠?”
“불리하니까 존댓말을 쓰는군.”
우희가 소리쳤다.
“말 돌리지 말고 원하는 것을 이야기해 봐요!”
현당이 질겁했다. 하지만 우희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단지 흉내일 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