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무사-88화 (88/175)

# 88

<88화>

벌써 현당을 보지 않고 옆으로 돌아앉았던 노도사가 고개만 돌려 현당을 바라보았다.

“켕. 무슨 말이 그렇게 많은 게야?”

노도사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현당이 물었다.

“여기 왔다간 자가 누구입니까?”

노도사는 현당을 노려보았다. 현당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킁.”

노도사가 콧방귀를 뀌면서 시선을 돌렸다.

“뭐…… 일단은 남궁적이 왔다 갔다고 해야겠지.”

처음으로 현당이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것을 끝으로 현당은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현당의 등에 대고 노도사가 소리를 질렀다.

“언제 어디를 가든 자네를 도울 사람이 있을 것일세. 자네가 원한다면…….”

현당은 발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하지만 이내 다시 걸음을 옮겼다.

현당이 사라지는 것을 쳐다보며 노도사는 만족스러운 고양이처럼 뱃소리를 냈다.

“클클클. 독한 놈이로고! 내가 누구냐고 한 번 묻지도 않다니. 약은 놈인 게지…….”

순간, 노도사의 등 뒤로 비단 장삼을 두른 중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잘 보살펴라, 비단 거머리[錦蛭]야.”

“예, 사부.”

비단 장삼의 중년인이 바로 허리를 숙였다. 노도사의 말을 예상하고 있었던 대답이었다.

현당은 만족스러운 회동이었다고 생각했다. 소패 일당을 위해서든, 남부맹을 위해서든, 남궁세가를 위해서든, 그리고 현당 자신을 위해서든 상관없이……. 모두를 위해서 잘 된 일이었다.

둘이 나눈 이야기는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현당은 노도사가 알려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아마도 현당이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면 살아서 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살아 있더라도 아무것도 얻지 못했을 것이고…….

현당은 우선 노도사가 자신에게 퍼준 밥의 양이 전체 주발에 담긴 양 중에서 얼마인가 생각해 보았다.

거의 절반이었다. 하지만 현당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전체 밥의 양은 처음부터 혼자 먹기에 부족했다. 그중에서 현당에게 노도사는 절반을 양보한 셈이었다.

“그게 바로 남경인 게야. 그래서 혼자 먹기에도 부족한 양이었던 것이지. 사실 남경은 흑산벽 혼자서 차지하기에도 부족하지만, 흑산벽은 내게 그 절반을 양도해준 거야.”

노도사는 손으로 밥을 퍼먹었지만, 현당은 밥알을 젓가락으로 집어서 꼭꼭 씹어 먹었다.

만약 현당이 노도사가 하는 대로 손으로 밥을 먹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노도사가 먹는 방식을 현당이 따라했다면, 현당에게 더 밥을 퍼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노도사는 현당을 줏대가 없는 놈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노도사에게는 노도사의 방식이 있고, 현당에게는 현당의 방식이 있었다. 굳이 노도사가 현당에게 자신의 방식을 강요하지 않는 이상, 현당은 그 방식을 따를 생각이 없었다.

그때부터 노도사와 현당의 길은 갈라진 셈이었다. 현당은 흑산벽은 흑산벽대로 가시오, 나는 내 식대로 가렵니다 하고 선언한 셈이었다.

그리고 그 선언을 흑산벽도 인정했다. 현당이 밥 먹는 방식을 가지고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처음에 노도사가 거의 전부를 가졌었고, 현당은 일 할도 안 되는 양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노도사는 현당에게 이거나 먹고 떨어지라고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었다. 현당도 그것에 만족하고 먹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도사는 다시 현당의 얼굴에 밥알을 튀겼다. 만약 현당이 얼굴에 튄 밥알을 떼서 버렸다면, 오늘의 대화는 말 그대로 식사 한 끼를 한 것으로, 그리고 더 이상의 확대 해석이 불과한 식사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현당은 그 밥이 바로 남경이라는 것을 알았고, 밥알 하나하나가 남경의 일부이고, 세력권이라는 생각에 밥알을 버릴 수가 없었다. 만약 밥알을 버렸다면, 그들의 식사가 곧 남경 재편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러면 두 사람의 만남은 그것으로 끝이다. 노도사는 현당의 그릇을 재보고, 큰 재목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현당은 그것을 눈치챘다. 그래서 얼굴에 튄 밥알을 도로 노도사의 밥그릇에 놓아준 것이다. 그것은 “이건 제 몫이 아닙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이에 만족한 노도사는 다시 현당에게 자기 밥그릇에서 크게 한 주걱 떠서 현당에게 넘겼다. 그만큼을 양도한다는 의미였다.

마지막으로 노도사는 현당에게 말했다.

“언제 어디를 가든 자네를 도울 사람이 있을 것일세. 자네가 원한다면…….”

현당은 그 말을 생각하고 싱긋 미소를 지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드디어 현당은 등에 날개를 단 셈이 되었다. 흑산벽은 이제 전적으로 현당을 도와줄 것이었다.

무슨 징표가 없어도 상관없었다. 남경의 어두운 거리에는 이제 남궁세가의 남궁적 공자와 흑산벽이 함께 식사를 했다는 소문이 돌 테니까 말이다.

“언제 어디를 가든이란 말이지?”

현당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를 않았다. 뜻밖에 대어를 낚은 셈이었다.

*  *  *

현당은 진언사를 나오는 길에 고서점을 방문했다. 그곳이라면 정선된 자료가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서점 주인인 고충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무련 자료를 달라고?”

현당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충은 현당의 손 위에 두툼한 책을 건넸다. 무려 세 권이나 되었다. 각각의 권마다 삼경의 제목이 쓰여 있었지만, 그 내용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다음부터는 이런 것을 달라고 하려면, 미리미리 통보를 해. 무려 세 사람이 달라붙어서 필사했다고.”

현당은 미소 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  *

“대형…….”

현당을 본 수하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제대로 먹고는 있느냐?”

“아, 대형 시합 봤어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역시 정파 무공은 뭐가 달라도 다릅니다. 하지만 결승에서는 정말 안타까웠어요.”

묘령랑 신현이 호들갑을 떨자 생익덕 수구가 그를 노려보았다.

“쓰읍.”

순간, 신현이 기가 죽었다.

“괜찮아. 나도 인정을 하고 천하에 모든 사람들이 이제 단목기라는 사람을 인정할 테니까. 확실히 그는 남부맹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고수가 분명해. 그러니 그에게 졌다고 해서 흉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와 겨루었다는 것이 자랑이라고 해야겠지.”

현당이 미소 지으며 답하자 얼었던 신현의 얼굴이 펴졌다. 추완성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실력이 대단한 것은 정말입니다. 남궁진과 비슷하게 서른 즈음인데 말입니다.”

현당은 생각난 듯이 물었다.

“그런데 남궁진은 뭐 하고 있더냐?”

그렇지 않아도 궁금하던 차였다. 현당에게 패한 후, 거의 남경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여전하더이다. 여기저기 쑤시고 돌아다니는데, 얼마 전에는 탕산파(湯山派)와 붙더니,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들어앉았다고 합니다.”

“탕산파를?”

현당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탕산파는 탕산에 자리 잡고 있던 흑도 세력이었다. 남궁진은 강호를 돌아다니면서 끌어들인 세력들을 끌고 와 흑도를 몰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었다.

탕산은 근처에 온천이 많아 남경에서도 관광지와 휴양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당연히 흘러 들어오는 돈이 많고, 때문에 그곳을 노리는 세력들이 많았다. 돈을 많이 벌 수 있고, 이권(利權)이 개입된 곳을 차지하는 세력은 흑도 중에서도 손꼽히는 큰 세력이었다. 탕산을 차지한 탕산파 역시 남경 흑도 세력 중 큰 세력으로 손꼽히던 곳 중 하나였다. 그런 곳을 남궁진이 몰아내고 차지한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남궁진이 흑도 세력과 세력 다툼을 한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오호! 그래서였군.”

그제야 현당은 왜 흑산벽이 자신을 만나자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일단 현당은 그 생각은 추후에 하기로 하고, 우선은 동생들과의 만남을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자, 한 잔 더 하지!”

우타 추완성의 비어 있는 잔에 술을 부었다. 한 순배 술이 돌고 사람들이 하나 둘씩 지쳐 떨어질 때 즈음 현당이 입을 열었다.

“너희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왼팔과 오른팔이나 마찬가지인 추완성과 수구가 다가왔다.

*  *  *

아침 일찍 수련동으로 향하던 현당은 수련동 입구에서 그를 기다리는 우희를 발견했다.

“오래 기다렸나?”

“아니!”

우희가 환하게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비들이 문을 열자 둘은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경비가 문을 닫자 수련동은 외부로부터 완전하게 차단되었다.

“이번 사절단에 사대 세가에서 한 명씩 참가하자고? 물론 현당이 제안한 것이겠지?”

“물론.”

“좋은 생각이야. 그것을 거절할 세가도 없을 테고…… 그리고 그렇게 되면 나를 감시하면서 활동하기가 수월하겠지.”

현당은 시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때문에 더욱 사대 세가에서 이 좋은 기회를 사양할 수 없겠지.”

우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그런데 누가 갈까? 우선 서문세가에서는…….”

“신연당의 선기가 갈 거야.”

“아아. 그 말 많은 개비연 선기! 서문세가에서 그냥 놔줄까?”

“아니면 내가 안 받을 테니까!”

우희가 혀를 날름거렸다.

“협박이 따로 없네?”

“힘이 있으면, 그게 바로 정도(正道)지.”

우희가 가볍게 도리질했다.

“그건 정도라고 하는 게 아니라, 패도(覇道)라고 하는 거야.”

“어쨌거나!”

“그럼 모용세가에서는 누가 갈까?”

“글쎄…… 그건 모용세가에서 알아서 하겠지.”

“그렇겠지? 그럼 독고세가에서는?”

“그것도 독고세가가…….”

우희가 현당의 말을 중간에서 끊었다.

“독고린.”

“독고 누구?”

현당이 놀라 되물었다. 낯선 이름이었다. 하지만 독고 성씨를 쓰는 것을 보면 독고세가 사람인 것은 분명했다.

되물으면서 현당의 머리는 빠르게 고서점의 고충이 준 남부맹 계보도를 훑었다. 하지만 더 뒤질 필요가 없었다. 우희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기 때문이다.

“소련(小蓮) 독고린(獨孤璘). 그녀가 나에게 당신을 소개시켜 달라고 부탁을 하더군. 당연히 그녀가 찾아올 거야.”

순간, 현당은 멍한 시선으로 우희만 바라보았다. 우희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호호호. 난 그녀가 오지 못하도록 하겠지만, 아마도 그녀는 당신을 찾아올 거야. 잘 해봐. 그녀를 데리고 가고 말고는 당신의 재량이니까.”

더 이상 설명도 없이 우희는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불행히도 우희가 이야기하는 그 순간은 빨리 다가오고 있었다.

제30장 달리기를 한다고?

틈나는 대로 현당은 수련에 집중했다. 우선은 토하기를 운공 하면서 체내에 잠복되어 있는 독기를 분류해냈고, 자하기의 수련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고충을 통해 얻은 생독진언의 도움이 컸다. 임독 양맥이 뚫리면, 그때 되어서 독을 배출시킬 일이었다. 그때까지는 어떻게든 독을 분리해 놓는 것이 급선무였다.

뿐만 아니라 검법 수련에도 정성을 다했다. 수련을 할수록 재미를 느끼는 게 검법이었다. 특히 현당은 용봉쌍련에 흥미를 느꼈다. 그가 배운 다른 모든 검법들이 하나의 검만을 사용하는 것에 반해 남궁덕의 용봉쌍련은 양손을 쓰는 권법이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용봉쌍련은 유운검의 새로운 해석이라고 해도 될 만한 권법이었다. 현당은 그 점에 매력을 느꼈다.

현당은 그제야 병장기는 수족의 연장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용봉쌍련을 수련하다 보면, 쌍검을 다룰 방도가 생각났다. 용봉쌍련을 연무하는 동안 현당의 머릿속에서는 권법이 검법으로 변하고 있었다.

게다가 유운신보 ․ 유운보보와 짝을 이루며 온몸으로 펼치는 권초였고, 용봉쌍련에 몰입하다 보면 자신이 권법을 펼치는지 검법을 펼치는지를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결국 용봉쌍련은 유운검을 발전시킨 검법을 위한 전초 단계라고 볼 수 있었다.

화련검주해를 수회 반복하여 읽은 후에 접하는 화련검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현당에게 다가왔다. 화련검의 시각에서 다른 검법들을 볼 때, 힘의 강약의 차이일 뿐, 그 속에 없는 검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소리를 하자면, 삼재검이 모든 검법의 뿌리라고 해야 되는 것 아닌가?”

중얼거리다 현당은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깨달았다.

어이가 없어 실소했다. 도를 잡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다른 검법이 어떻다느니, 무슨 검법은 어느 검법의 해석을 달리 한 것이라는 소리를 늘어놓는 것인지 스스로가 가소로워 보였다.

순간, 현당은 자신이 안개 속에 감추어진 무언가에 한 발 다가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속에 무언가가 있었다. 아직 깨닫지 못한 무언가가 현당의 바로 앞에 있었다.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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