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무사-86화 (86/175)

# 86

<86화>

현당은 모용미를 만나 함께 차를 마시며 오랜만에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다. 아주 오래된 연인들처럼…….

“그래서 형리아문에서 그 두 여자를 잡아다 취조를 시작하니까, 한 여자가 다른 여자한테 하는 말이 자기 남편이랑 안 떨어진다는 거야. 그러자 두 번째 여자가 하는 말이 첫 번째 여자도 자기 남편과 즐길 만큼 즐겼으니 자기도 그럴 권리가 있다는 거지. 알고 보니, 서로 이웃인 두 집안에서 남자들이 왔다 갔다 한 것이더라는 말이지. 그래서 판결이 어찌 났는지 알아?”

“어떻게 되었는데요?”

“집을 바꿔라.”

“호호호.”

모용미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를 않았다.

“아아, 역시 나오기를 잘했어.”

현당이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완전히 몸을 젖혔다. 그리고는 팔베개를 하고 의자를 앞뒤로 천천히 흔들었다. 천천히 눈을 감고 얼굴 가득히 오후의 따듯한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많이…… 힘드셨나 봐요.”

“그러게…… 나도 모르게 부담이 되었나 봐.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었는데! 그나저나 정말 대단했어. 단목가주의 무공이 그 정도일 줄은…… 어느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단목가주가 어도술을 쓸 정도의 고수라는 것을 말이야.”

모용미가 현당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던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보던 저희도 놀랐어요. 저희 아빠도 놀라시던 걸요!”

“뭣들 하는 게냐?”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모용곽이 딱 그랬다. 갑자기 들이닥치며 현당과 모용미를 노려보았다.

“아버지…….”

당황한 모용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현당은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나 더 느린 동작으로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모용가주.”

현당의 동작에 모용곽의 얼굴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다.

“웬일인가, 남궁 공자.”

모용곽은 극히 사무적인 어투로 현당을 대했다.

“너무 그렇게 박대하지 마십시오, 아버님. 우승은 못 했지만, 그래도 준우승이었잖습니까? 이제 곧 정무련으로 사절로 가야 합니다. 가기 전에 정혼녀 얼굴이라도 보고 싶은 게 제 심정이지요. 그래서 염치 불구하고 찾아왔습니다.”

현당의 말에 모용곽이 코웃음을 쳤다.

“흥! 사절은 무슨 사절…….”

현당은 모용곽의 말을 무시하고 물었다.

“그나저나 단목가주의 실력을 짐작이라도 하고 계셨습니까? 저희는 도저히 상상도 못 했었습니다.”

순간, 모용곽이 움찔거렸다. 이내 표정을 바꾸며 관심 없다는 투로 대답했다.

“상대가 어떻든 상관없이 자신의 실력을 향상시키는 것에 정진하는 것이 강호인이거늘, 어찌 남의 실력을 가늠해서 승패를 재려 하느냐?”

현당은 모용곽의 대답을 짐작한 것처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사절로 간다더니 준비도 안 하나? 그 일만으로도 한창 바쁠 터인데…….”

“당연히 바쁘지요. 하지만 바쁘다고 일에만 매달려 있으면, 사람이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적당히 쉬기도 하면서 일도 해야겠지요. 그래서 오랜만에 정혼녀를 만나러…….”

순간, 모용곽의 입에서 불길이 튀어나왔다.

“갈(喝). 누가 정혼녀라더냐?”

순간, 현당의 얼굴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예? 그럼 남궁세가의 소가주인 저와 모용 낭자가 정혼한 사이가 아니었습니까?”

순간, 모용곽도 자신이 실언한 것을 깨닫고 큰 기침으로 어색함을 무마시켰다.

“흠. 흠. 흠…… 그렇다만 그보다는 지금 바쁜 일이 많을 게 아닌가? 그쪽 일에 신경을 쓰란 말일세. 그러니…… 오늘은 이만 가보게.”

현당이 천천히 일어났다.

“그렇지 않아도 다시 일하러 가려던 차였습니다. 이제 가주까지 뵈었으니 갈 때도 되었지요. 영애 덕분에 차도 잘 마셨고, 모용가주께서 직접 왕림해 주셔서 찾아갈 필요도 없어졌으니 오히려 제가 감사할 일이지요.”

현당이 가볍게 읍(揖)을 하고 모용미를 돌아보았다.

“즐거웠소, 미매.”

모용미가 앉은 채로 웃으며 물었다.

“어디로 가시려고요?”

현당이 멈칫거렸다.

모용미는 왜 그것을 물었을까? 그것을 알면 뭐 하지? 그럼 평소에는 어떻게 인사를 하는 게 적당했을까?

뜻이 있는 질문이라고 현당은 생각했다.

“한동안 오래 침상에 누워 있었소. 오랜만에 밖에 나왔으니, 저잣거리도 좀 구경하고 들어갈까 하오. 전에 함께 갔었던 포목점부터 들러볼까 하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모용미가 대답했다.

“그러시군요. 살펴가세요, 가가…….”

현당은 망설이지 않고 몸을 돌렸다.

오늘 이곳에서 볼일은 다 보았다. 얻은 것도 많았다.

걸어 나오는 동안 자신의 등 뒤를 노려보는 모용곽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지금 한창 계산하고 있겠지? 계산하고 있을 게야. 내가 자기 딸을 건드렸을까, 안 건드렸을까 하고. 그리고 나와 관계를 어디쯤에서 끊어야 할까 하고 말이야.’

현당은 그 생각만 하는 것으로도 즐거웠다.

‘내가 가짜라는 것을 아니까, 끊고 싶겠지. 하지만 대회에서 준우승을 한 남궁적과 파혼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우승을 못 했다고 잘라버렸다고 생각할 테지. 그 소리가 무서워서라도 파혼은 못 할 거야. 그렇다고 마냥 내가 모용세가를 들락거리게 놔둘 수도 없을 테고…… 모용곽, 저 양반 입장에서는 완전히 진퇴양난이겠군.’

단지 현당의 존재만으로도 모용곽이 괴로울 것이라고 생각하니 그것도 즐거웠다.

기운이 났다. 현당은 나오기 직전에 모용미가 물은 질문이 떠올랐다. 의미심장한 질문이었다.

‘자, 즐거운 마음으로 새 일을 하러 가볼까?’

*  *  *

“어서 오십시오, 공자.”

현당이 들어서자 낯익은 점원이 그를 맞았다. 눈썰미가 좋은 놈이었다. 현당이 누구인지 알고 왜 이곳으로 찾아왔는지도 알고 있었다. 점원 한 명이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보였다.

“오셨으니 차라도 마시면서 천천히 물건을 감상하시겠습니까?”

“그게 좋을 듯하오. 여기로 나를 찾아올 사람도 있을 테고…….”

현당은 바로 안쪽으로 안내되었다.

포목점 안쪽 구석에 다탁이 하나 마련되어 있었다.

점원들끼리 소일도 하고, 점주가 앉아서 계산도 하고, 필요할 때는 먹을 것을 가져다 놓고 먹기도 하는 다목적용 다탁이었다. 진열되어 있는 상품이 많기 때문에 클 필요도 없었다. 다탁 위에는 벌써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차를 마시면서 약속하신 분이 오시기를 기다리셔도 되겠습니다.”

“고맙소…….”

현당은 망설이지 않고 그 자리에 가 앉았다.

차를 몇 모금 마셨을까……. 등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지난 시합에 대해 사람들의 이야기가 정말 많더군. 끝난 지가 언제인데 지금도 그 자리에서 본 사람들은 큰 영광이라도 얻은 것처럼 떠들고 다니고 있지.”

“그렇지? 어도술이라니, 나도 놀랐어.”

현당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마치 눈앞에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현당은 대화 상대가 절대 눈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벌써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러게 말이네. 그래도 놀랍군. 그때까지 도는 한 번도 잡아본 적이 없는 자네가 결승까지 올랐다니 말일세.”

현당은 부드러운 동작으로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하나도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는 동작이었다. 차를 마시면서 말하고 있는 자신의 입을 손으로 가릴 수 있었다.

“그건 어디까지 알고 있나? 행여 떠들고 다닌 것은 아니겠지?”

목소리가 바로 대답했다.

“당연하지. 이런 중요한 비밀을 떠든다면, 내 목숨이 열 개라도 제대로 살아 있을 수 없을 걸? 아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고작 사오 명 될까? 아, 자네 패거리를 제외하고 말이야.”

현당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 가득 미소를 담았다.

“걱정 말라고. 그들이야 입에 자물쇠를 매단 친구들이니까.”

“하긴…… 그나저나 여긴 무슨 일인가?”

“아, 남부맹의 후기지수 쪽은 일이 끝났으니 정무련 쪽을 좀 알아보려고.”

“정무련이라…….”

목소리가 고민하는 듯하더니 되물었다.

“정무련 쪽은 또 왜?”

“몰랐나? 준우승을 한 내가 남부맹을 대표해서 사절로 가게 되어 있거든.”

“아하!”

목소리가 알았다는 듯 감탄사를 터뜨렸다.

현당이 잔을 내려놓으면서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덕분에 내 목숨이 더 연장되었지.”

“잘 된 일이군.”

“손님이 왔네. 내 손님이야.”

현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구로 모용미가 들어서고 있었다. 모용미의 질문의 요지를 현당도 알고 있었고, 모용미도 현당의 대답을 이해하고 있었다. 현당이 나가자마자 모용미는 준비를 하고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현당의 등 뒤로 대답이 들려왔다.

“젠장. 자네는 남의 사업장을 자기 연애 장소로 쓰고 있는 겐가? 과하게 하지 말라고. 손님도 오고 있으니…….”

멀어지는 목소리에 현당이 한마디 더 했다.

“그럼 방이라도 빌려주면 고맙지!”

두 사람의 대화는 그 순간에 끊겼다.

“가가…….”

모용미가 현당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말릴 사이도 없이 현당의 입을 덮쳤다. 눈썰미 좋은 점원이 두 사람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휘장을 가렸다. 그것으로 상품이 진열된 점포와 다탁을 앞에 두고 서 있는 두 사람의 공간이 차단되었다.

“허어억.”

모용미가 현당의 입술을 물어뜯었다.

*  *  *

모용미가 옷감을 고르는 것을 바라보며 현당은 느긋하게 등을 벽에 기댔다.

“끝났나?”

“끝났군.”

현당은 다시 벽 뒤에 나타난 목소리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때? 만족할 만한 시간을 가졌나?”

“방이라도 내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휘장이 뭔가, 휘장이!”

“그래도 할 것은 다 하더군.”

“뭐, 이것도 나쁘지는 않더군. 서서 하는 맛이 또 있지.”

“그건 그렇고, 언제 모용세가의 여식을 그렇게 녹여놓았나? 알기로는 남궁세가의 소가주는 손도 안 댔다고 하던데…….”

“글쎄…… 언제 저렇게 녹았더라?”

현당은 어디까지 이야기할까 망설여졌다. 자신이 그녀를 만지기 전에 이미 모용미는 남자 맛을 알고 있더라고 사실대로 이야기할까, 그 이야기를 하면 믿을까, 믿으면 또 이 남자가 상대가 누굴까 쑤시고 다니지는 않을까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현당은 입을 다물기로 마음먹었다.

“감추어진 본능을 내가 일깨운 것이겠지.”

“아나?”

벽 뒤의 목소리가 질문했다.

“내가 자네의 재능 중에 가장 부러워하는 것이 무언지?”

현당이 모용미를 향해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뭔데?”

끄덕이는 고개는 모용미를 향했고 목소리는 등 뒤의 사람에게 향했다.

“크크크…… 그 여자 후리는 재능이지.”

“자, 다시 일 이야기로 돌아갈까?”

“좋아. 정무련에 대해서는 무엇이 알고 싶은가?”

“모두 다.”

“모두 다? 모두 다라니? 그렇게 막연하게 말하지 말고, 좀 자세히 이야기해 보게.”

“그래. 말 그대로 모두 다일세. 정무련에 대한 모든 정보를 알고 싶네.”

“흐음. 어려운 일이로군.”

“어렵다니?”

“정무련에 대한 정보가 너무 방대해서 말이지.”

“그렇게 정무련의 규모가 크단 말인가?”

“아니. 정무련이나 남부맹이나 사대 세가 연합, 정파의 다섯 개 속가 제자 집단인 것은 똑같네. 하지만 그냥 사대 세가의 연합에 불과한 남부맹과 달리 정무련은 상당히 조직화되어 있다는 것이지. 때문에 인물에 대한 분석도 많고, 조직체계도 남부맹과 다르네. 쉽게 말하자면 분업이 잘 되어 있다고 할까?”

현당이 심드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군. 이거 난감한 문제로군…….”

잠시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옷감을 꺼내들고 몸에 감고 미소 지으며 현당을 바라보던 모용미가 다시 옷감을 점원에게 건네고 다른 감을 찾기 시작했다. 특히 원하는 것이 있는지 점원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좋아. 그럼 우선 후기지수부터 알아볼까? 그 선종문(禪宗門)의 죽림백호(竹林白虎) 포송(蒲松)인가? 그 친구도 대단한 것 같던데…….”

현당이 더욱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정무련도 아직 안 뽑았네.”

“안 뽑았어?”

되묻는 현당의 목소리가 커졌다.

모용미가 놀라 현당을 바라보았다. 현당이 애써 표정을 지우며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별일 아니니 신경 쓰지 말고 계속 골라보라고 행동으로 재촉했다. 모용미가 몸을 돌렸다.

“조심하게…….”

등 뒤의 목소리가 현당에게 경고했다.

“그러지…….”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다시 목소리가 대답했다.

“곧 정무련에서도 대표 선발 대회를 열 거야.”

“흐음…….”

현당이 턱을 문질렀다.

“그걸 볼 수는 없을까?”

“봐? 본다고?”

“그래…… 사실 직접 겨뤄보는 것 다음으로 상대의 실력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가서 보는 것이지. 안 그런가?”

“하긴……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도 있지. 하지만 쉽지 않을 걸세. 아니 불가능하다고 봐야겠지.”

“왜?”

“자네가 생각해 보게. 앞으로 나와 싸울 상대가 지금 그 자리에 와서 구경하도록 놔둘 성싶은가?”

“반드시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겠지.”

“그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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