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무사-84화 (84/175)

# 84

<84화>

하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빠른 속도로 홍초의 머리가 회전했다. 그동안 단목가를 들른 사대 세가 사람이나 그에 준하는 강호인들의 명단이 차례로 지나갔다.

“허어…… 그것 참…….”

순간,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그녀다. 최근에 왔고, 그래서 내가 얼굴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그녀밖에 없다.’

홍초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사대 세가의 여식일 뿐만 아니라 뛰어난 미모로 정평이 나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자주 오게 되면 정분도 들 수 있고, 단목가가 세가로 거듭 나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다. 잘하면 결혼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승낙하는 이유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알았다. 내 나중에 모시겠다 전하여라.”

하녀를 돌려보내면서 홍초는 이야기하던 손님에게 자세를 바로 했다. 하지만 속마음은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 내당에 있는 손님을 맞이하고 싶었다.

*  *  *

현당은 능숙하게 독기(毒氣)만을 추출하여 따로 모으기 시작했다. 한두 번 하기 시작하자 의외로 간단했다.

운공 하다가 다른 기운이 느껴지면 그 기운을 자하기에 실어서 하단전 안에 한쪽으로 옮기고, 이질적인 기운만을 남겨두고 다시 운공을 계속하면 되었다. 단순한 운공을 쉬지 않고 계속하느라 피로할 뿐, 아직까지는 독기만을 추리는 데에 어려운 점은 없었다.

한데 문제가 발생했다. 이질적인 기운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모두 옮기다 보니 상상 외로 그 양이 많았다.

‘뭐가 이렇게 많은 거야?’

생각해 보니 그중에는 토하기도 있었다. 토하기는 자하기와 달라 다른 성질과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현당은 생독진언에 담긴 내용을 되새겨보았다.

생독진언에는 독에 대한 일반적인 이론과 함께 독을 내공과 분류하는 방법, 그리고 그것을 체외로 배출하는 방법, 나아가서 그것을 다시 내공으로 순화하는 방법까지 상세히 서술되어 있었다. 문제는 그렇게 하기 위해서 높은 내공이 필요했다.

현당은 독과 내공을 분류하는 방법에 대해 기억을 더듬었다. 몇 가지 방법이 있었지만, 가장 손쉬운 방법은 경혈과 반응하여 부작용이 일어나면 독이었다.

하지만 말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또한 생각만큼 수월한 일도 아니었다. 과거에는 완전히 기로 전환하지 않은 독성 자체였기 때문에 소화하지 않고 뭉쳐둘 수 있었지만, 이제는 엎어진 물처럼 형체도 없이 스며들었기 때문에 그것만 모아서 추리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겠지?’

현당은 독기를 발작시키기로 결심했다. 한쪽으로 밀어 보낸 이질적인 기운을 내공으로 건드렸다. 그래서 잠자고 있는 그 기운이 혈도를 타고 움직이도록 놓아버렸다.

‘허어억!’

순간, 현당은 눈이 뒤집어졌다. 사지 백해로 흩어졌을 때에는 농도가 약했고, 희석되어 있어 큰 문제가 없었지만, 한곳에 모아놓자 그 양이 적지 않다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양이 한꺼번에 움직이기 시작하자, 가뜩이나 뚫린 지 얼마 안 되기 때문에 불안한 현당의 독맥은 소금을 뒤집어쓴 지렁이 마냥 날뛰기 시작했다.

현당은 자신이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할 틈도 없었다.

입에 거품이 물렸다. 그리고…….

‘차라리 처음부터 그랬다면 수월했을 텐데…….’

현당은 정좌한 자세 그대로 서서히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다시 의식을 잃었다.

*  *  *

결승전을 전후로 단목기는 단 하룻밤 사이에 완전히 다른 세상에 떨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일도 많았다. 찾아오는 손님에, 쏟아지는 일감에, 일일이 신경 써야 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게다가 우승자라는 이름 때문에 찾아다니면서 인사해야 하는 것들까지!

피곤했다. 하지만 단지 일 때문에 피곤한 것만은 아니었다. 어쩌면 반대로 피로를 느끼지 않는 것이 정상일지도 몰랐다.

의당 즐거워해야 할 승리였지만, 그리고 그동안 고생에 대한 보상이라고 한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겠지만 뒤끝이 개운하지 않았다. 혼자 힘으로 차지한 자리가 아니라 우희의 기획과 감독하에 이루어진 결과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귀가하기 전에 문사로부터 또 내일 할 일들에 대한 지침을 받았다. 그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쉬고 싶었다. 단목기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침상으로 올라갔다.

“으헉!”

침상에 올라가자마자 기겁을 하며 단목기는 뛰어 내려왔다.

“누, 누구냐?”

정상적인 강호인의 반응이라면 당장에라도 자신의 이불 속에 있는 사람을 족쳤을 것이다. 하지만 살갗에 닿는 느낌이 여자라는 확신이 들었기에 단목기는 그럴 수 없었다.

이불이 꿈틀거리더니 사람의 얼굴이 나타났다.

배시시.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얀 피부가 창틈으로 스며드는 달빛에 반사되었다. 드러난 그녀의 어깨가 서러워 보였다.

“어, 어떻게 된 거야? 언제 왔어? 아니, 어떻게 들어왔지?”

단목기는 무엇부터 물어야 할지 몰랐다. 그녀를 만나서 반갑기는 한데, 지금의 상황이 마냥 좋아하고 있을 일은 아니었다.

찰나였지만 그의 몸에 와 닿은 촉감은 분명히 맨살이었다. 그녀가 벗은 몸으로 그의 방에 있다는 것을 남들이 안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빠르게 주변을 탐색했다.

‘내 승리가 달갑지 않은 건가? 그래서 이런 누명을 씌워서 내 자리를 빼앗으려는 건가? 사대 세가가 아니라 오대 세가로 되돌아가는 게 그렇게도 마음에 안 드나? 아니면…….’

머리가 아팠다. 이런 분석은 철벽 단목기가 아니라 우희 나연희의 몫이었다. 그의 분석력으로는 다른 가능성이 생각나지 않았다.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걱정 안 해도 돼.”

속삭이는 그녀의 목소리가 달콤했다.

“아무도 모르니까.”

“아무도 모른다고?”

되묻는 단목기의 목소리가 한층 진정되어 있었다. 그녀와 그가 처한 상황을 아는 사람이 없다는 말에 안심이 되었다.

“그, 그럼 총관이나 시비 몰래 들어왔단 말인가?”

“아니, 홍 총관하고…… 그 하녀는 아네.”

그녀가 얄밉게 입술 사이로 빨간 혀를 내밀었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귀여운 얼굴은 단목기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태연히 내뱉는 그녀의 말이 단목기를 더욱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호, 홍 총관이 안다고?”

그녀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맙소사! 그럼 태연히 이야기하고 들어왔단 말인가…….”

아무 생각 없이 그녀를 들여보낸 홍 총관의 의도가 궁금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녀를 들여보냈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아니, 태연하게 홍 총관에게 방 안에서 그를 기다린다고 이야기하고 들어온 그녀가 더 이상했다.

스으윽.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순간, 어깨에서부터 흘러내리던 이불이 가슴 능선을 따라 흘러내리다가 무언가에 걸린 듯 멈추었다.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것처럼 큰 죄를 지은 양 단목기는 시선을 돌렸다. 마른침 넘어가는 소리가 천둥을 치는 것처럼 크게 들렸다.

“옷을 입어라…….”

단목기의 목소리가 떨렸다.

스으으윽. 터럭.

다시 옷자락이 흘러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보지 않아도 무엇이 바닥에 떨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몸을 가리고 있던 이불이었다.

“정말…… 그렇게 하기를 원하는 거야?”

“내가 원하냐고?”

“응.”

단목기는 기억하고 있었다. 언제나 그녀는 이렇게 짧게 말하기를 좋아했다. 긴 문장을 읊은 적을 본 적이 없었다. 오늘은 유난히 그녀가 말을 많이 한다고 생각했다.

“나, 여기 있어요.”

바로 단목기의 등 뒤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고 싶었다. 상상되는 그녀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다.

“허어어.”

생각만으로도 단목기는 어지러웠다. 자신도 모르게 숨이 거칠어졌다. 순간, 단목기의 등 뒤로 무언가가 와 닿았다. 부드럽고 따듯했으며 연체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으아아.”

쿠하아앙.

문짝이 날아갔다. 방 안에서 시작한 비명은 밖으로 날아가더니 멀리 사라졌다.

“호호호.”

홀로 남은 방 안에 그녀의 웃음소리만 울려 퍼졌다. 겁을 먹고 도망가는 그가 미련해 보일 뿐이었다.

*  *  *

똑…… 똑…….

무언가가 현당의 입술에 떨어지는 것을 느끼자 자신도 모르게 혀를 내밀어 받아마셨다.

달았다. 그리고 시원했다. 그때까지는 입 안이 깔깔하다는 것도 몰랐다. 방울방울 떨어지고 있는데도 그것만으로도 해갈되었다.

더 마시고 싶었다. 순간, 현당은 깨달았다.

‘내가 살아 있군.’

충분히 입술이 젖었다고 느끼자 현당은 조심스럽게 눈을 떠보았다. 가장 먼저 수련동의 천장이 보였다. 지난 일이 기억났다.

‘독기를 분류하다가 정신을 잃었지…….’

누가 자신을 도와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도 물을 주면서 그를 깨우고 있지 않은가! 그것도 한꺼번에 많은 물을 마시다가는 기도가 막힐 것을 우려하여 방울방울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가 있을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희!”

그가 아니라 그녀라는 것을 아는 순간, 현당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현당이 수련중일 때 들어올 수 있는 그라면 남궁찬 이고, 그녀라면 우희 나연희 뿐이었다. 그녀라고 생각한 자신의 예상이 적중했기 때문이다. 그녀라면 자신을 도울 이유가 충분했다. 정무련에 사절로 파견 나가야 하고, 남궁세가의 후기지수 역할도 해야 하는 등 아직 쓰임새가 남아 있었다.

“괜찮아?”

우희가 물었다.

“응.”

현당이 몸을 일으켰다.

이상 없었다. 분명히 간밤에는 독기 때문에 정신을 잃었는데, 움직이는 데에는 큰 지장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우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운공을 잘못했어.”

“운공을 잘못하다니?”

“그런 게 있어.”

어디까지 설명할까 망설이다가 현당은 대충 얼버무렸다.

“있긴 뭐가 있어? 무슨 짓을 하다가 여기에서 정신을 잃은 거야? 무슨 위험한 짓을 했지?”

당황한 우희가 현당을 추궁했다. 만족할 만한 대답을 듣지 않는 이상 쉽게 물러날 기미가 아니었다. 현당은 간단하게라도 설명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임독 양맥을 뚫으려다 실패했어.”

순간, 우희가 발끈했다.

“그렇게 생긴 사람은 다 그런 거야? 심법의 의미도 제대로 모르면서 혼자 임독맥을 뚫어? 그런 바보 같은…….”

소리를 지르던 우희가 눈빛을 빛냈다. 현당은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왜일까?

“무슨 일이야?”

우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알기로는 승산이 없으면 모험을 하지 않는 사람이 바로 현당인데, 그런 사람이 가능성을 확인하지도 않고 임맥 ․ 독맥을 뚫을 생각을 한 거죠? 그건 당신이 그래야만 하는 어떤 사정이 있기 때문일 거야.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지.”

‘젠장. 여자가 똑똑하면 이래서 안 된다니까…….’

현당은 뭐라 해야 할지 난감했다.

사실대로 이야기할까 했지만 그러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사실을 안다면 우희가 현당을 도우려 들 것이 분명했다. 아직 용도폐기는 멀었으니까.

“내공과 무공, 그리고 무리(武理 : 무공의 이치)는 서로 다르면서도 상당히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말에 혹했던 것이야. 별것 아니라고.”

우희가 현당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알았어요. 당신이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니까.”

현당은 우희가 다른 말을 꺼내기 전에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웬일이야? 이제 나를 찾아올 일도 없을 텐데…….”

우희가 눈을 흘겼다.

“없긴 왜 없어? 정무련에 사절로 파견 갈 준비도 해야 하고, 인선도 해야 하니까 그런 거지.”

“인선이라…… 그건 당신이 알아서 할 일 아닌가?”

“아, 준비는 당연히 내가 하겠지. 하지만 남궁 소가주의 식솔에 대한 준비는 남궁세가 쪽에서 해야 하지 않겠어?”

현당은 심드렁하게 콧구멍으로 소리를 내면서 숨을 몰아쉬었다.

“남궁 소가주의 식솔이라…… 인선의 조건이 어떻게 되지?”

“최소한 남부맹이라는 이름을 더럽힐 짓은 하지 않을 터. 무공이 있으면 더욱 좋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기본이겠지?”

현당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두 사람이 있었다. 경기가 끝난 후, 한 며칠간 보지 못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거의 매일 붙어 다녔는데…….

“아무래도 대도(大盜) 현당의 수하들은 안 되겠지?”

현당이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우희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어.”

“나를?”

현당이 눈을 크게 떴다.

“최근에 누굴 도와준 적 있지 않아?”

현당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런 기억도 없었고 지금 그가 할 일이 태산이었다. 몸속에 다시 잠복한 독기를 모아서 가두어버리거나 배출해야 했다. 그렇지 않는다면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채 평생을 남궁세가라는 감옥 안에서 썩어야 할 신세였다.

“뭐, 중요한 일이 아닌 것 같으니, 나중에 생각하지. 만나고 싶으면 알아서 찾아오겠지.”

우희가 잘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재미있다는 듯 현당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여하튼 여복 하나는 많은 사람이라니까…….”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우희는 밖으로 향했다.

우희를 배웅하려는 순간, 현당은 몸이 어제보다 훨씬 가볍다는 것을 느꼈다. 그가 의식을 잃은 사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잠깐. 나한테 무슨 짓을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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