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
<82화>
남궁찬이 다시 코웃음을 쳤다.
“단목가의 내공심법은 사라졌지만, 놈을 가르친 사람이 죽심거사라는 것을 간과했던 게야. 죽심거사라면 다른 곳에서 놈에게 적당한 내공심법을 찾아냈을지도 모르지.”
현당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남궁찬의 말대로라면, 단목기는 화려한 비상을 하는 데 성공했다. 남궁세가와 모용세가가 현당에게 매달리고 있는 동안 단목기를 철저히 감출 수 있었고, 남부맹의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자리에서 최고수로 등극하는 데 성공했고, 남부맹의 대표가 되는 데 부족할 것 없는 실력을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아마도 정신을 잃은 현당만 모르고 있지, 단목기는 비무장에서 드러낸 도신합일에 이은 어도술, 도기에 이은 도강으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을 것이다.
이제 사대 세가의 가주를 제외하고 남부맹의 최강은 누가 뭐래도 남부맹 무사를 맡고 있는 철벽 단목기임에 틀림없었다. 어쩌면 가주 중에 단목기에게 밀리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수군거릴지도 몰랐다. 워낙 소문에 민감한 세인들이었다. 세인들은 전임 총사인 죽심거사가 괜히 단목기를 무사 자리에 앉힌 것이 아니라고 떠들 것이었다.
그보다 현당은 정말 궁금한 게 있었다.
“이제 저는 어떻게 됩니까?”
순간, 남궁찬이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난다는 것처럼 소리를 버럭 질렀다.
“바보 자식. 네놈 때문에 일이 이 지경이 된 것을 모른단 말이냐? 그런데도 네놈은 남부맹의 대표 사절로 정무련에 가야 한단 말이다.”
남궁찬은 소리를 지르고 있었지만, 현당은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맞아. 난 결승에 올라갔어. 남궁적이라는 이름으로 이제 정무련에 사절로 가야 한다. 그때까지 나를 살려둬야만 한다는 거지.’
살았다는 희열이 현당을 감싸 안았다.
“네놈과 우희 그년의 처리 문제를 놓고 모용가주와 충분한 논의가 있었다. 네놈이 정무련으로 가야 하는 것은 이미 정해진 일정. 네놈에게 우희를 맡기겠다. 정무련으로 사절로 갈 때, 우희와 동행해라. 네가 우희를 감시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그 대응책을 준비할 테니까.”
순간, 현당은 우희에게 정무련의 사절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왜 그토록 우희가 당당했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현당이 아무리 우희가 싫다 해도 사대 세가 가주가 모두 모여 우희를 보내기로 결정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우희는 그런 날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알겠습니다.”
현당은 가볍게 대답했다. 어쨌거나 자신은 그날까지 목숨을 연명할 수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남궁찬이 말했다.
“빨리 일어나라. 네가 할 일이 많으니까 말이다.”
나가는 남궁찬에게 현당이 물었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습니다.”
남궁찬이 뭐냐고 묻는 대신에 몸을 돌렸다. 현당의 질문을 기다리기에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현당은 질문을 할까 말까 몇 차례 망설였다.
“저어…… 적 공자라면 어떠했을 것 같습니까?”
남궁찬은 현당을 빤히 쳐다보다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
“하지만 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현당의 인사에 답도 없이 남궁찬은 바로 나갔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현당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모든 근심 걱정을 다 떨쳐버린 사람 같았다.
“하지만 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하지만, 하지만이라고 말했어. 그 앞은 무엇이었을까!”
뻔했다. 뒷말이 지지는 않았다면, 앞 말은 그 반대다. 이기지 못했다는 말이다. 즉 지금의 단목기의 실력이라면, 진짜 남궁적도 이길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게 남궁찬의 판단이었다. 결국 현당이 나갔든 남궁적이 나갔든 상관없이 비무의 결과는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현당은 베개를 두드려 편하게 자리를 잡았다.
“내가 잘 싸운 것이었어. 그래, 나는 할 만큼 한 거야.”
이제 남궁찬은 무사, 단목기를 견제하기 위해 현당이라는 패를 적극 활용할 것이다. 또한 문사, 우희를 감시하기 위해서도 현당 이상 가는 인물은 찾을 수 없으리라.
현당은 남궁세가에 들어온 이후, 가장 편안한 잠자리를 가질 수 있었다.
* * *
아침 일찍부터 남궁찬은 수련동으로 현당을 찾아왔다.
현당의 자하기 운공이 끝날 때까지 남궁찬은 조용히 기다렸다. 마치 현당의 호법을 서 주는 것처럼.
현당의 전신을 감싸고 있던 안개가 천천히 현당의 몸속으로 사라졌다. 꼭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 타래에 감는 것처럼 현당의 콧구멍으로 빨려 들어갔다.
현당이 눈을 뜰 때까지 기다리던 남궁찬은 현당의 운공이 끝나고 나서야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자하기가 왜 자하기인 줄 아느냐?”
남궁찬의 물음이 대답을 기다리는 질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현당은 말없이 남궁찬을 바라보았다.
“대성하게 되면 자색을 띠기 때문이지. 성취도에 따라 처음에는 운무도 없다가 조금씩 운무가 만들어지기 시작할 때가 이성의 단계다. 백색(白色)의 운무가 전신을 감쌀 단계가 되면 그때가 삼성이지. 차츰 운무의 색이 짙어지기 시작하면서 황색(黃色), 홍색(紅色), 적색의 단계를 거치는데, 각각 오성, 칠성, 구성의 성취도를 나타낸다. 적색이 짙어져 자색을 띨 때 대성이 되는 것이지. 지금 너의 성취도는 황색을 넘어 홍색으로 가고 있으니, 대략 육성의 단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한데…….”
스스스스.
남궁찬이 현당이 보는 앞에서 시범을 보였다. 합장을 한 양손을 벌리자 그 사이로 자색의 운무가 어렸다.
“하단전에서 시작한 소주천이 일주를 끝내면, 전신의 기경팔맥을 따라 대주천을 한다. 임맥을 따라 돈 기운은 다시 독맥을 따라 돌게 되지. 구성이 넘어가면 굳이 좌선을 하지 않더라도 운기를 이끌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수련의 정도에 따라 운기를 이처럼 허공을 격하고 이끌 수도 있게 된다. 그것이 바로 자하기가 고등 심법일 수밖에 없는 증거이기도 하다.”
현당은 남궁찬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남궁 아버지께서는 대성하신 상태이십니까?”
남궁찬이 자랑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 말고 자하기를 극상으로 익힌 사람이 또 누가 있겠느냐?”
“자하기의 단계가 백, 황, 홍, 적, 자색의 단계를 거친다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대성의 단계, 즉 자색의 단계에서 일부러 자신의 수위를 감추기 위해 적색이나 홍색의 단계로 보이게 할 수는 없습니까?”
“안 된다. 자하기의 색은 원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수련에 의해서 자연으로 그 색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다 하더라도 감추려면 운공을 하지 않으면 되지, 누가 일부러 그것을 감추려 하겠느냐?”
“그렇군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현당은 새로운 것을 깨달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현당이 질문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화련검주해에서 읽은 구절 때문이었다.
남궁찬의 선부, 검맹 남궁덕이 말년의 심득을 화련검을 통해 풀어 쓴 책이 바로 화련검주해다. 책을 통째로 암기하고 있는 현당은 화련검주해의 한 구절에 신경이 집중되었다.
책에서 남궁덕은 자하기와 가장 잘 어울리는 검법은 유운검과 화련검이라고 지적하면서 화련검주해를 쓴 다음에는 유운검주해를 쓸 것을 안내하면서 자하기의 단계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것에서 그는 자하기를 십이성 대성을 하면, 자색을 벗고 휘황찬란한 금색을 띨 것이라고 했다.
현당은 정말 남궁찬이 남궁덕의 이론을 모르고 있는지 물어본 것이었다. 역시 그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네 깨달음은 도신합일에 머물러 있다. 신검합일과 어검술은 검리를 따르고, 도기 ․ 도강 ․ 도환(刀環)은 내공을 따른다. 내공이 일 갑자를 넘으면 검기를 익힐 줄 알고, 삼 갑자를 넘으면 검강의 단계에 접어든다. 그것을 검공이라 한다. 하지만 검리와 검공, 이 둘이 전혀 관계가 없는 것도 아니다. 신검합일에 이를 만큼 수련한 사람이라면, 검기를 다스릴 줄 아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어검술을 깨달은 사람은 의당 검강을 익혔으리라. 내가 철벽 역시 도신합일 수준에 머물러 있을 것이라고 섣불리 짐작한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다. 내공심법이 없는 단목가에서 삼 갑자 이상의 내공을 익힐 수 없다고 속단했던 것이지…….”
남궁찬은 미처 그런 사전 지식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자신을 탓하는 것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문사가 가져온 천년하수오를 아직 다 복용하지 않았다면서?”
남궁찬의 물음에 현당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시간이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된 것이라 짐작이라도 했다는 듯 이번에는 남궁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준 설삼이라도 제대로 흡수했다면 좀 더 나았을지도 모르지. 앞으로는 내가 운공을 지도해 주겠다. 준비가 다 되었으면 갖고 들어와라.”
남궁찬이 밖으로 연결되어 있는 설렁줄을 잡아당기자, 기다렸다는 듯, 수련동의 문이 열리고 달기가 들어왔다. 들고 오는 쟁반에는 보자기로 무언가를 덮고 있었다.
“설삼과 미처 복용하지 못한 천년하수오를 같이 조제해왔다. 오늘부터 매일 하루 세 끼씩 일주일간 먹으면 모두 복용할 수 있을 게다. 그 다음 약기운을 제대로 흡수하는 문제는 네 몫이다. 한 방울도 남기지 말고 모두 들이켜라.”
남궁찬이 직접 약사발을 받아서 현당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현당이 모두 들이켤 때까지 한 번도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았다. 턱짓으로 달기에게 신호를 보냈다. 말없이 그녀가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수련동의 육중한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한 후 다시 현당을 향했다.
“약을 복용한 직후에 운기를 하는 것이 가장 도움이 된다. 다시 좌정을 하고, 내가 이끄는 대로 도인하도록 해라.”
남궁찬의 말에 현당은 등을 돌리고 앉았다.
* * *
「잡념을 버려라.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순간인지 모르느냐?」
운기 하는 현당의 머릿속으로 남궁찬의 전음이 들렸다. 현당이 잠시 딴생각을 한 것이 들통 난 것이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토하기가 떠올랐고, 생독진언의 내용이 떠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전에 남궁찬은 현당에게 설삼과 함께 독을 복용시켰기 때문이다. 그 독은 지금도 현당의 몸속 한구석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기회가 닿는다면 밖으로 배출할 생각이지만, 아직까지는 그럴 기회가 없었다.
「오로지 자하기의 운공에만 집중해라. 지금은 그것 이상 중요한 일이 없느니라.」
‘말대로야. 우선은 자하기다. 내 실력이 우선이다.’
현당은 딴마음을 감추고 자하기에만 집중했다.
* * *
처음에는 탕약을 복용한 뱃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하더니, 조금 지나 끓던 곳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명치에서 시작한 불길을 알 수 없는 기운이 들어와 밑으로 끌어내렸다. 기운은 현당의 등 뒤에 장심을 붙이고 있는 남궁찬의 양손에서 시작되었다. 그가 현당의 운기를 유도하고 있었다.
밑으로 내려간 열기가 하단전에 자리 잡고 있던 기운과 섞이기 시작했다. 한 통에 담겨 뒤섞이는 것 같더니, 이내 이전에 현당의 몸속에 있던 것을 모두 녹여버리는 것 같았다.
열기를 끌어내린 기운이 현당의 하단전으로 통하는 모든 길을 막기 시작했다. 이제는 들어오는 길도 끊겼고 나가는 길도 막혀버렸다.
아랫배에 갇힌 열기는 가진 힘을 방출하지 못하고 그곳의 모든 것을 녹여버리고 있었다. 이전에 현당이 운공 하면서 쌓았던 내공은 말할 것도 없고, 토하기를 운공 하면서 모았던 내공은 물론 나중에 시간이 되면 배출하려고 구석에 따로 모아두었던 독기까지 한데 섞어서 잡탕을 만들고 모두 녹여버렸다.
녹은 것들이 하단전을 금세 가득 채우고 밖으로 넘칠 듯했다. 금방이라도 현당의 뱃가죽을 녹여버리고 밖으로 쏟아질 것만 같았다. 압력이 가중되면서 현당의 아랫배가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현당은 속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 특히나 독기가 녹아내리고, 타는 순간에 만들어지는 것 같은 유독한 기운이 그의 기혈을 뒤집었다. 구토라도 해서 뱃속에서 끓고 있는 것들을 밖으로 끄집어내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아랫배를 가라앉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할 수가 없었다. 의지와는 달리 꼼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몸속에 들어온 남궁찬의 기운이 그를 그렇게 만들고 있었다.
미칠 것 같았다. 뱃속은 끓고 있고, 내장은 모두 녹아내리더니 불길에 타오르고 있었다. 머릿속은 하단전에서부터 치솟는 열기 때문에 뇌가 다 타버리는 것 같았다.
‘여, 역류…….’
남궁적이 운기 중에 기혈이 뒤집혀서 의식불명이라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현당 자신도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닌가 걱정되었다. 아니, 걱정은 어느새 확신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때였다.
끓고 있는 냄비 밑바닥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하단전에 구멍이 뚫렸다. 처음에는 녹아내리다가 잠시 후 끓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완전히 불길에 타오르고 있는 현당의 뱃속의 모든 것들이 뚫린 구멍을 통해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마치 관을 통해 끓는 물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현당의 하단전의 불길은 빠른 속도로 회음을 거쳐 미려혈(尾閭穴)로 향했다. 그곳으로 가는 동안 주변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에 불길이 번졌다.
회음에 이른 불길은 다시 척추를 따라 협척, 옥침을 지나면서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현당의 등뼈는 마치 아궁이에 이어진 굴뚝같았다.
「이제 독맥이 터진다. 준비해라.」
그 말이 들리는 것과 동시에 척추를 따라 올라온 불길이 번지면서 등허리가 녹는 것 같았다.
‘흐어어.’
비명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입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신음 소리조차 새어나갈 수 없었다.
불길에 타오른 등골이 녹아내리고, 척추가 무너져 내렸다. 더 이상 탈 것이 없는데도 불길은 잦아들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다시 임맥을 타고 내려갈 것이다.」
직접 머릿속으로 울리는 소리가 이미 반쯤 넋이 나간 현당을 붙잡았다.
아직도 회음혈과 미려혈에 자리하고 있는 불길이 모두 위로 치솟았다. 이제는 다 타고 남은 곳은 뇌밖에 없는 것 같은데, 그것도 남겨놓을 수 없는 듯 하나같이 그곳으로 몰렸다.
미칠 것만 같았다. 이대로 있다가는 정신이 어떻게 될 것만 같아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일 뿐이었다. 그의 몸뚱이는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 자리에서 옴짝달싹 못하고 있었다.
화르르.
뇌마저 다 태운 불길이 다시 얼굴을 지나 밑으로 향하는 순간, 현당은 의식의 끈을 놓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