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무사-77화 (77/175)

# 77

<77화>

남궁진이 신음 소리를 내며 뒤로 신형을 뺐다. 하지만 현당의 왼손에 들려 있는 단도가 남궁진이 도망가도록 그냥 놔두지 않았다. 구의 휘어진 날이 단도의 도신에 걸렸던 것이다. 이제 남궁진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구를 버리거나 목숨을 내놓거나…….

하지만 그의 생각과는 달리 남궁진은 세 번째 방법을 택했다. 오른손의 구로 현당을 밀면서 왼손에 들고 있던 검으로 천인혈을 막았다.

까항!

쇠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키익…….”

남궁진이 쉰 소리를 지르며 신형을 뒤로 뺐다.

현당은 망설임 없이 있는 힘껏 천인혈을 내리그었다. 순간적으로 힘이 들어가면서 칼끝이 무뎌졌다.

‘아차…….’

천인혈의 끝에 무언가가 걸렸지만 살을 베는 느낌은 아니었다.

‘놓쳤다.’

순간의 실수로 무리한 힘이 들어갔고, 그 결과 칼끝은 둔해졌다.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남궁진은 비무대 밖으로 달아나 버렸다. 현당은 망설이지 않고 밖으로 달아나는 남궁진을 쫓았다.

“주재자, 주재자…….”

비무대에서 뛰어내리고 맨 바닥을 구르며 남궁진이 소리쳤다. 뜀박질하다 제 발에 걸려 바닥에 굴렀다. 비무대를 완전히 벗어난 맨땅이었다. 하지만 더러운 진흙이 반갑게 느껴졌다.

“그만 거기까지. 남궁적 공자, 승!”

주재자가 뛰어오르며 소리쳤다.

현당에게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마지막 일격을 펼치기 위해 천인혈을 머리 위까지 들어 올렸다.

‘참(斬)!’

현당의 머릿속으로 기합이 울렸다. 이제 그대로 내리그으면 된다. 긋기만 하면 된다. 긋기만 하면…….

일격에 모든 것을 베어버리는 수법, 참이었다. 지금이야말로 검도 구도 없는 남궁진을 벨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만. 그만…… 남궁적 공자, 그만!”

주재자가 현당을 붙잡았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라 네 명이나 달려들어서 현당의 팔과 도를 잡고, 남궁진의 앞을 가로막았다.

툭툭.

안심이 되었는지 남궁진은 그제야 진흙이 깔려 있는 맨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며 옷을 털었다.

현당이 남궁적인 이상, 남궁적을 죽일 생각으로 비무를 벌인 남궁진을 그 또한 살려둘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호시탐탐 자신을 죽일 기회를 엿보고 있는 상대를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죽이기를 포기한다면 그것은 바보나 하는 짓일 터였다.

현당은 결코 바보가 아니었다. 바보이기는커녕 죽지 않기 위해 며칠 사이에 이렇게 실력이 일취월장한 놈이 바로 현당이었다.

그건 남궁진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검이 부러지는 순간, 남궁진은 비무대 밖으로 신형을 날렸다. 남궁진이 살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었다. 비무대 위에 있는 이상 남궁적이 자신을 죽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가 패배를 인정할 틈도 남궁적은 주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애초에 남궁진 자신도 그럴 생각이었으니까!

하지만 비무대 밖으로 달아나면 남궁진의 패배가 분명해진다. 승패가 드러나면 경기는 그것으로 끝! 그러면 주재자가 현당을 말릴 것이다. 결과가 드러났음에도 도를 쓴다면 그것은 비무가 아니라 살인이다.

패하면 살 수 있다. 승패가 갈렸는데도 남궁적이 남궁진을 죽인다면 그때는 살인이 된다. 사람들은 살인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 기를 쓰고 남궁적을 말릴 것이다. 결국 남궁진은 살기 위해 비무대 밖으로 달아나는 것을 택했다.

“운이 좋네…….”

남궁진이 이를 드러내며 현당에게 웃어 보였다.

똑같은 말이지만 전과는 의미가 달랐다. 처음 대한 수련동에서는 현당을, 지금은 자신의 운이 좋다는 소리였다. 그러나 현당을 놀리려는 의도는 똑같았다.

흥분을 가라앉히며 현당이 숨을 골랐다.

“정말 운이 좋군, 삼…… 촌.”

남궁진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소리쳤다.

“난 네게 패한 게 아니라 천인혈에게 패한 거야. 알아? 조카!”

“그런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지지 않아. 패. 자!”

현당은 그 말을 끝으로 더 볼 것도 없다는 것처럼 몸을 돌렸다.

남궁진은 이가 갈렸다. 건방진 조카한테, 그리고 그를 혼내지 못한 자신에게…….

남궁진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현당도 이를 갈았다.

현당이 몸을 돌리자, 그제야 조카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던 남궁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통증이 밀려왔다.

주르르.

그제야 상처가 벌어지며 피가 번졌다. 남궁진의 왼쪽 볼에서 끊어진 상처는 오른쪽 가슴에 다시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남궁진의 얼굴이 하얘졌다.

‘분명히 피했는데…….’

도기(刀氣)였다.

조카를 노려보는 남궁진의 눈빛에 불꽃이 튀었다. 조카 놈이 비무대 위에서 휘두른 천인혈이 비무대 밖으로 도망간 남궁진을 끝까지 쫓아서 피를 보고 말았던 것이다.

남궁진의 신형이 보이지 않게 경련을 일으켰다.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것을 생각이 아니라, 오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공포라고 불렀다.

*  *  *

현당은 태구에게 비무대에서 가져온 구(鉤)를 넘겨주었다.

“받아요. 다른 것은 줄 것 없고…… 기념품입니다.”

태구가 머뭇거렸다.

“이건 남궁진…… 이가주의 병기가 아닙니까?”

현당이 태구를 노려보았다.

“지랄, 염병할. 이가주는 무슨 이가주! 그래서? 가질 거야, 안 가질 거야?”

현당이 그에게 소리치기는 처음이었다.

태구의 목소리가 확 달라졌다. 기가 팍 죽어서 단번에 얼어버렸다.

“아! 아닙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본인이 아직 흥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현당은 심호흡을 했다. 진정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듯싶었다.

“이건 저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전리품입니다. 비무를 벌이던 사람이 무기를 버리고 도망갔으니, 그건 이젠 내 것이겠지. 하지만 내게는 이렇게 한 쌍의 도가 있고 태구 대협, 당신도 그 물건에 원한이 있지 않소?”

순간, 태구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

태구는 그 물건에 원한이 있었다. 딱히 원한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 그 구에 의해 개합신공이라고 알고 있는 가문 비전의 무공이 깨졌다. 비록 현당에 의해 완성이 된 미완의 무공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자부심을 갖고 수십 년을 익혀오던 무공이었다.

“감사하오이다.”

파캉.

태구는 망설이지 않고 구를 부러뜨렸다. 태구가 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이것이었고, 현당은 그런 태구의 속마음을 읽고 있었다.

현당은 몸을 돌려 비무대를 완전히 벗어나며 중얼거렸다.

“좋은 쇠로 만들어졌더구려. 부러진 도를 어디 좋은 대장간에 가져가면, 쓸 만한 단검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게요. 아는 데가 없으면 내가 소개시켜 주거나…….”

태구가 다른 소리를 하기 전에 선기가 잽싸게 대답을 가로챘다.

“저는 아는 데가 없으니 소가주만 믿겠습니다.”

현당을 향해 내미는 선기의 손에는 이미 남궁진이 사용하던 허리가 부러진 검이 들려 있었다. 현당이 말하는 대장간이 어디인지 선기는 알고 있었다. 감히 내밀 엄두가 나지 않았는지 의뭉하게 태구도 부러진 구를 들어 보였다.

남궁진의 병기에 화풀이를 한 현당은 조금이나마 속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꼈다. 망설이지 않고 태구와 선기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서 부탁해 주겠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현당은 고개를 들어 다음 비무를 위해 비무대에 오르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소가주께서는 이기셨는데, 왜 화가 나신 거야?”

뒤에서 선기와 태구가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  *

두 번째 비무는 싱겁게 끝이 났다.

모용미는 결코 단목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몇 초 겨루지도 못하고, 모용미와 단목기의 실력 차는 여실히 드러났다.

그때까지 단목기는 모용미의 공격을 맞받아치지도 않고 툭툭 건드려서 방향만 틀었다. 그런데도 모용미가 채찍처럼 휘두르던 채대는 뭉텅뭉텅 잘려나가며 길이가 짧아졌다.

“후우, 졌어요.”

결국 비무대에 올라왔을 때의 채대가 절반 정도로 줄어들었을 때, 모용미는 스스로 패배를 인정했다.

“와아아아.”

사람들의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결선에 오른 사람이 비로소 결정되었다. 남궁세가의 소가주 패왕 남궁적과 남부맹의 무사이자 단목가의 젊은 가주 철벽 단목기의 대결로 결정되었다.

현당의 얼굴 표정이 굳어 있었다. 사람들은 단목기와의 비무 생각에 현당이 긴장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현당은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의 모용미와 단목기는 이전의 두 사람이 아니었다.

단목기부터 달랐다.

독고진을 상대하던 그때의 태산처럼 무겁고 바위처럼 단단하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원치 않는 비무에 끌려나온 것처럼 어쩔 수 없이 비무 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모용미도 이상했다. 서문장천을 상대할 때의 도도한 표정은 사라지고, 대충 채대를 휘두르다가 내려갔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거래가 있었나? 아니면 거래를 성공하지 못한 것인가?’

현당은 다시 한 번 그의 수하들을 만나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들이라면 사대 세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냈을 것이다.

*  *  *

총관 왕륜은 현당의 비무가 끝났을 때, 바로 본가로 돌려보냈다. 현당이 보내지 않아도 왕륜이 먼저 가겠다고 했을 것이다. 서둘러 현당의 승리 소식을 남궁찬에게 전하고 싶었으리라.

또 현당은 단목기의 비무가 끝나자마자 선기, 태구와 헤어졌다. 늦기 전에 단목기 대(對) 모용미 사이에 얽힌 거래를 밝히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도 그를 따르는 사람이 남아 있었다.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고 있지만 현당은 알고 있었다.

‘항상 놓치는데, 지겹지도 않나? 아직도 쫓아오는군.’

현당은 골목을 돌면서 손사래를 쳤다. 문사 우희라면 이쯤해서 포기할 만도 하건만, 아무래도 포기라는 단어를 모르는 것 같았다.

‘우희가 완전히 통솔하지 못한다는 소리겠지. 자아. 그럼, 또 시작해볼까?’

서둘러 다음 모퉁이를 돌자마자 현당은 벽에 달라붙었다. 장포를 머리 위까지 뒤집어쓰면서 담장 너머로 돌을 던졌다.

쨍그랑.

“누구냐?”

담장 안쪽에서 고함이 들리더니 누군가 서둘러 달아나기 시작했다. 현당이 숨어 있는 골목이 부산해졌다.

“서둘러라. 놈이 담을 넘다가 들켰다.”

“이쪽이다.”

서너 명이 소리가 난 방향으로 담을 넘는 소리가 들렸다. 현당이 담을 넘었다고 생각하고 그쪽으로 가고 있는 중이리라. 물론 지금 담을 넘어 도망가는 사람이 있었고 현당을 쫓던 무리는 지금 도망자를 쫓고 있는 중이었다.

‘하나, 둘, 셋, 넷. 아직 밖에 더 남아 있겠군.’

장포로 얼굴을 가린 채 현당은 도리질을 쳤다. 수준 차이가 나도 너무 났다. 우희라면 이런 얕은 수에 속지 않을 터였다.

‘아직도 멀었어. 어떻게 이렇게 단순한 사람들이 우희 같은 불여우의 수하가 될 수 있었던 거지?’

속임수는 간단했다. 현당은 먼저 담장 너머에 도둑이 숨을 죽이고 기회만 엿보고 있는 것을 눈치채고 이쪽으로 왔다. 다음 돌을 던져 집주인을 깨우고, 발각되었다고 착각한 도둑이 달아나는 틈을 이용하여 건물 담벼락의 그늘진 그림자 속에 몸을 감추었다. 현당을 쫓던 무리들은 달아나는 사람이 현당이라는 생각에 엉뚱하게 도둑을 쫓았던 것이다.

현당은 굳이 몸을 감출 수 있는 위장막 같은 것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정교하게 만든 물건이 아니라면 눈에 띄게 마련이고, 반대로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도 어두운 건물 그림자 주변을 찾지 않을 것이었다.

단지 효율성의 문제이고, 급한 상황에서의 사람들의 습관 문제였다. 그저 불빛이 없는 어두운 건물 벽에 찰싹 붙어서 그림자 속에 모습을 감추고 눈빛이나 얼굴이 불빛에 반사되는 것만 신경 쓰면 되었다.

그렇게 건물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기고, 현당은 다음 차례를 기다렸다. 한 무리가 지나갔더라도 다른 무리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숨 한번 돌릴 사이도 없이 곧바로 현당이 기다리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도둑이닷!”

“잡아라!”

현당이 돌을 던진 집의 대문이 열리고 일단의 인원이 몰려 나왔다. 손에는 몽둥이와 흉기가 될 만한 것을 들고 사라진 도둑을 잡기 위해 밖으로 뛰쳐나오고 있었다. 현당은 잽싸게 그들 무리에 합류하면서 같이 고함을 질렀다.

“잡아라!”

골목을 빠져나가면서 현당은 골목 입구에서 표적을 잃고 얼이 빠져 있는 사람들을 향해 비웃음을 흘렸다.

자신을 쫓던 놈들을 다 뿌리치고 현당은 드디어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가고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뒤를 밟히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일순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건물 벽에 기대어 서 있는 남장 여인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이었다.

“이런…… 드디어 내가 잡힌 건가?”

현당을 알아본 남장 여인이 몸을 바로 했다.

“아니. 내가 어떻게 당신을 잡을 수 있겠어? 천하의 현당을!”

문사 우희였다.

우희가 현당보다 먼저 이곳에 와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 뿌리쳤다고 생각했던 현당인데, 태연자약하게 걸어 나올 현당을 우희는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신의 수하들은 그런 생각을 안 하는 것 같더군. 포기할 줄 모르나 봐.”

우희가 환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강호 경험이 부족해서겠지. 이제 곧 세상은 넓고 인물도 많아서 할 일도 많다는 것을 깨달으면 안 그럴 거야.”

“제발 그런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군. 이거 원, 세가를 벗어날 때마다 이러니 귀찮아서 말이지…….”

현당의 너스레에 우희는 어이없어 하며 실소를 흘렸다. 아직도 현당은 한 번도 일당의 본거지를 들켜본 적이 없었다.

“사실은 본인도 즐기면서 왜 그래?”

현당이 겸연쩍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알고 있었어?”

우희는 알고 있었다는 듯 대답 대신 미소로 답했다.

어쩌면 현당 본인도 반복되는 상황을 즐기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속이는 것도 세가에 갇혀 살면서 즐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여흥거리이기도 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나를 다시 추격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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