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
<68화>
첫날의 예심은 그렇게 끝났다. 그 외에 사대 세가의 방계 출전자들이 몇 명 더 있었지만, 눈에 띌 만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흩어질 때, 현당은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심이 열리고 있는 시합장으로 향했다. 선기가 그 뒤를 따랐다. 또 선기를 뒤따르던 태구가 현당과 눈이 마주치자 짐짓 딴청을 부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공자? 궁금하신 것이라도…….”
현당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선기를 바라보았다.
“석관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정말 두께가 한 자가 넘는지 말입니다.”
“아…….”
선기의 얼굴이 밝아졌다. 다른 사람들은 들어가지 못해도 남궁세가의 소가주, 남궁적이라면 능히 시합장에 들어가 볼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그들을 막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현당이 허리에 차고 있는 검파를 보고는 순순히 길을 내주었다. 그만큼 남궁세가의 위력은 대단했다.
“이제…… 우린 무엇을 하지요?”
선기가 조심스런 어조로 물어보았다.
현당이 선기를 슬쩍 돌아보았다. 알아서 움직이는 자신의 수하들과는 차이가 있었다.
“선 대협께서도 궁금한 게 있으실 텐데…….”
“아, 감사합니다.”
대답을 하는 것과 동시에 선기가 앞으로 뛰어나갔다. 이제야 현당이 자신을 여기까지 데려다 준 이유를 깨달았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석관을 직접 확인하지 못할 터였다. 선기나 태구는 처음부터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출전을 꺼리고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들에게도 가능성이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선기와 태구는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거리를 재고, 두께를 재는 등 바지런히 움직였다. 현당이 바라는 바였다.
현당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각자의 문제점을 찾아서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었고, 그들도 그렇게 하기를 현당은 바라고 있었다. 또한 현당이 조직을 이끄는 방법이기도 했다. 현당의 바람대로 선기와 태구 역시 자신의 문제나 한계를 찾기 시작했다.
이제는 현당 차례였다.
현당은 물길 속을 바라보았다. 모용미가 어떻게 물 위를 걸었는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한참 물을 바라보던 현당은 드디어 직접 물속으로 들어갔다.
물은 깊지 않았다. 키가 큰 현당의 무릎에서 조금 위까지 물에 잠길 정도로 깊었다. 현당은 물속을 걸어 다니면서 바닥을 뒤졌다.
드디어 원하는 것을 발견했다. 자루 두 개가 보였다. 지금은 찢어져 있지만 그 전에는 무언가가 담겨 있었을 주머니였다. 아마도 모용미가 물을 다 건너는 순간, 보이지 않게 찢었을 것이 분명했다. 자루 속에 무언가가 모용미의 신형을 떠받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 물속에 이 자루는 누가 던졌을까 생각해 보았다.
“남매는 용감했군.”
확인할 수는 없지만, 추리는 할 수 있었다. 모용탄이 먼저 물 위를 넘어가면서 모용미를 위한 기관을 설치했으리라.
현당은 자루를 꺼내들었다. 순간, 물이 가득 담긴 자루가 딸려 올라왔다. 신기한 것은 또 있었다. 현당은 그것도 놓치지 않았다.
“뭡니까?”
호기심 어린 눈으로 선기가 다가와 물었다.
“나도 모릅니다.”
현당이 자루를 높이 올렸다. 하지만 자루 속에 담긴 물은 빠지지 않고 있었다.
“분명한 것은 이 자루는 방수처리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물이 담겨 있지만 전에는 다른 것이 담겨 있었겠지요.”
현당은 범인을 심문하는 눈초리로 자루를 노려보았다.
* * *
각자 일을 끝낸 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 앞에는 오늘의 화제를 양념삼아 먹을 만찬이 준비되어 있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선기나 태구는 현당이 먼저 무슨 말을 해주기만 기다릴 뿐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현당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그 둘을 쳐다보았다. 분위기가 너무 굳어 있었다. 저들은 지금 현당을 상전으로 생각할 뿐 함께 문제를 논의할 동지로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의도한 바와 달리 제대로 된 대화와 토론이 이루어질 리 만무했다. 분위기를 바꿀 전환점이 필요했다.
“독고린 낭자 말이오…….”
현당이 선기를 쳐다보았다. 그도 현당을 돌아보았다.
“혹시 사귀는 사람 있소? 없으면 내가 한번 시도해 보고 싶은데…….”
선기가 깜짝 놀라 물었다.
“그럼 모용미 낭자는 어쩌구요?”
“다다익선 아니오?”
선기가 놀란 눈으로 현당을 바라보았다. 태구도 마찬가지였다. 현당이 그들에게 시원스런 미소를 지어 보였다. 태구가 먼저 웃어 보였고 선기의 얼굴에도 웃음이 번졌다.
“자, 오늘 본 것을 이야기해봅시다. 서로 알고 있는 것을 종합하면 도움이 될 테니까 말이오.”
현당이 허리를 앞으로 숙이면서 그들에게 다가갔다.
선기와 태구의 얼굴이 풀어졌다. 이제 이야기를 할 준비가 되었다.
“석관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현당이 이번에는 태구를 돌아보았다. 현당의 시선이 태구에게 머물자 선기도 태구를 쳐다보았다.
머뭇거리던 태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화살을 날리는 기관을 살펴보았소. 석궁이 장치되어 있더이다. 아무래도 내 무공으로는 무리더군요. 신법도 모르니 차라리 포기해야겠습니다.”
세 사람의 대화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 * *
둘째 날, 드디어 예심에 응시를 하다가 죽은 사람이 나타났다. 단목가의 가주이자 남부맹의 무사를 맡고 있는 철벽 단목기가 예심을 통과한 직후, 출전한 후보가 물을 건너던 도중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처음 한 대의 화살을 발목에 맞고 걸음을 멈춘 순간, 그의 몸뚱이는 고슴도치로 변해버렸다.
곳곳에서 비명이 흘러나왔다.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에 사람들의 얼굴 표정이 경직되면서 아무도 움직이는 사람이 없었다.
현당은 예상했던 일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으로 사람들이 환상에서 벗어나겠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기가 그 뒤를 따랐다.
“어딜 가십니까?”
“더 볼 것이 없을 듯합니다. 보시고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으면 같이 저녁이나 먹으면서 그때 이야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태구 대협도 같이 오시지요.”
선기가 눈을 빛냈다.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는 태구를 잡아서 현당 앞으로 끌었다.
“제가 책임지고 데려가겠습니다.”
선기가 현당을 향해 재빨리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그림을 그리던 현당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수련동 안으로 누군가 들어오고 있었다. 우희가 보였다.
“전에는 음악이더니 오늘은 미술인가요?”
현당이 미소 지었다.
“오늘은 또 웬일이신가?”
우희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뭐, 내가 오면 안 되나?”
“아니. 그런 것은 아니고…… 지금 한창 예심에 본선 준비까지 바쁠 것 같은데, 모든 일을 책임지신 문사께서 이곳까지 왕림하시니 감격해서 그렇지.”
우희가 콧잔등에 주름을 잡으면서 혀를 날름 내밀었다.
“이것도 일이니까. 그런데 오늘은 예심을 보지도 않고 나갔다면서?”
현당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볼 것은 다 봤어. 그나저나 이젠 비난이 좀 쏟아지겠군.”
“상관없어요.”
우희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어차피 피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닥쳐올 일이 얼마나 피비린내 나고 살벌한 일인지 그때 깨닫고 말 테니까요. 그때 알고 대처한다면 이미 늦어요. 이건 전쟁이니까. 천천히 면역이 되어야지요.”
현당은 할 말을 잃은 듯 바닥에 쭈그리고 앉은 채 우희만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덕분에 어쭙잖게 참가 신청했던 사람들이 많이 기권을 했으니 잘된 일이지요. 일이 훨씬 수월해졌잖아요?”
우희가 애써 얼굴을 펴면서 중얼거렸다.
“그런데 뭘 그리는 거예요? 풍류를 즐길 여유가 없을 텐데…….”
“아…….”
그제야 현당이 바닥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손에 들고 있는 것은 그대로였다. 양손에 똑같이 생긴 정(釘)을 들고 있었는데 엄지 쪽이 밑으로 가게 쥐고 있는 모습이 특이했다.
우희의 시선이 바닥에 그려진 그림으로 향했다. 현당이 앉아 있던 자리를 중심으로 좌우로 똑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마치 종이를 반으로 접으면 딱 포개질 것 같은 좌우대칭의 그림이었다.
“이것도 수련이었군요. 뭐죠? 쌍수도? 양 손으로 그렸으니, 쌍수도가 아니군요. 쌍도라고 해야 하나?”
현당이 들고 있던 정으로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들켰군.”
우희가 현당을 빤히 쳐다보았다. 마치 그의 속을 구석구석 꿰뚫어볼 듯한 시선이었다.
“남궁세가에는 양손을 쓰는 검이 없는 것으로 아는데요.”
마치 못된 짓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현당이 멈칫거렸다.
“그런가?”
다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우희도 마주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현당의 미소가 시원하다면, 우희의 미소는 달콤하게 느껴졌다.
“지금 상황에서 무언들 못 하겠어요. 다 살려고 하는 짓인데…….”
볼일이 끝났다는 듯 우희가 몸을 돌렸다.
“이제 사흘 남았지요? 부디 예심은 통과하기 바라요. 그래야 당신을 살려낸 보람이라도 있을 테니까…….”
현당이 주먹을 불끈 쥐며 얼굴 앞에서 흔들었다.
“그래야지. 암, 그래야 하고말고!”
한 번 고갯짓을 한 우희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부디 절전(絶傳)된 것으로 알려진 용봉쌍검(龍鳳雙劍)의 진전도 잇기를…….”
우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면서 나직이 말했다. 겨우 현당에게 들릴락 말락 하게……. 하지만 현당의 얼굴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우희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래야지. 암, 그래야 하고말고!”
언제 그랬냐는 듯 현당의 기운찬 대답이 우희의 뒤를 쫓았다.
* * *
집으로 들어가던 태구는 깜짝 놀랐다. 집 앞에서 현당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분명히 선기와 함께 셋이서 저녁을 먹고 헤어진 지 일각이 지나지 않았는데, 현당이 먼저 그의 개합문에 와 있었다.
“여긴…….”
“아, 문주님께 부탁할 게 있어서 말이오…….”
현당이 싱긋 웃으며 태구 곁을 스쳐 지나갔다. 태구의 의심스런 눈빛이 현당의 뒤를 쫓았다.
“들어가십시다. 밖에 너무 오래 있었더니 피곤하구려.”
현당이 태구를 재촉했다.
“어서 오십시오, 소공자. 이놈아, 뭐 하고 있는 게야? 소공자께서는 너를 보러 왔다면서 한사코 네놈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셨단 말이다, 이놈아.”
작달막한 키의 개합문 문주, 태봉이 태구의 넓은 등짝을 치면서 안으로 몰았다. 마치 키 작은 목동이 제 몇 배나 되는 소를 몰이하는 것 같았다.
태봉은 현당을 내당으로 안내하려 했지만 현당은 한사코 수련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결국 현당은 상전 대접하는 것을 포기한 태봉이 서둘러 수련관 청소를 시키고 그곳에 자리를 깔았다.
“넓어서 좋습니다.”
현당이 수련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말이 수련관이지 거의 무너져가고 있는 건물이었다. 듬성듬성 지붕에 뚫려 있는 구멍으로 하늘의 별들이 보였다.
“저어, 그게 예전에는 제자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정무련에 밀려서 그런지 거의 들지 않고 있습니다.”
태봉이 미안한 듯 중얼거렸다.
“뭐가 정무련 때문이야! 제자들이 오지 않는 것은 주가가 우리 솔가를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있기 때문이지.”
태구가 볼멘소리를 내뱉자 태봉이 눈을 흘겼다. 아마도 현당이 이 자리에 없으면 한 대 패기라도 할 기세였다.
“곧 들겠지요. 소문주 태구 대협이 예심을 통과하고 본선에 오르기만 하면 말입니다.”
순간, 전혀 부자지간처럼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의 얼굴이 소리가 나도록 돌아갔다.
“고, 공자.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태구 대협이 예심을 통과하고 본선에 오른다고 했습니다.”
두 부자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현당이 하는 말이 무슨 소리인지 듣고도 모르는 것 같았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시오. 여기가 어디 남궁세가인 줄 아시오? 정신 나간 소리일랑 공자집에나 가서 하시오.”
“예끼, 태구 이놈. 소가주께서 말씀하시지 않느냐.”
태봉의 말에 태구의 씩씩거리는 소리가 잦아졌다.
“지금 태구, 이놈이 예심을 통과한다고 하셨소이까, 공자?”
믿기지 않는지 태봉이 다시 현당을 쳐다보았다.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셋이 머리를 맞대면 말입니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태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런 개 같은…… 오늘 죽는 놈을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한단 말이야?”
현당이 침착한 목소리로 태구를 올려다보았다. 앉아서 자리에서 일어난 태구를 위로 올려다보니 정말 거구였다.
“태구 대협에게 필요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내공이고.”
현당이 품에서 작은 단합(丹盒)을 꺼내놓았다.
“다른 하나는 호신공의 완성입니다.”
태구보다 먼저 태봉이 단합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 이것은…….”
현당이 더욱 목소리를 낮췄다.
“보천환(補天丸)입니다.”
태씨 부자의 눈이 부릅떠졌다.
“오오오…….”
태봉이 떨리는 손으로 단합을 잡았다.
태구의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내공은 그것으로 어찌어찌 한다 해도 호신공은 어떻게 할 것이오? 불완전한 무공이란 것을 소공자도 알 터인데…….”
침착한 시선으로 현당이 태구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지도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밀 엄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 태봉 대인께서는 저희 둘의 호법을 서 주셔야만 하겠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조용히 이야기를 한다 해도 이곳을 감시하고 있는 놈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어느 누가 개합문을 감시한다고요…….”
태봉이 겸연쩍은 듯이 긁적이고 있다가 현당과 눈이 마주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알아 모시겠습니다. 소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