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
<66화>
제23장 감읍, 또 감읍합니다.
남궁세가의 수련동으로 들어서던 우희는 깜짝 놀랐다. 오늘 새벽까지 기운 없어 보이던 현당이 지금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검무(劍舞)를 추고 있었다. 아니 천인혈을 들고 있으니 도무(刀舞)라고 해야 옳았다. 분명히 모용세가 안에 들어가서 좋은 일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뭐 하는 거죠?”
현당이 겸연쩍은 듯이 멈칫거렸다.
“뭐 하긴…… 흥에 겨워 그냥 춤추는 것이지.”
“갑자기 무슨 흥이라니?”
“글쎄…….”
현당도 자신의 변화에 당혹스러웠다.
“아무래도 오늘 서고에서 음보(音譜 : 악보)를 봐서 그런가 보지. 보고 있노라니 오늘 하루 종일 그 당악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네.”
우희가 입술을 삐죽이며 현당을 놀렸다.
“아침에 모용가에서 몰래 나오는 것을 봤는데 하루 종일이라니? 그런데 무슨 춤이 그래? 그나저나 당신에게 그런 풍류가 있는 줄은 몰랐네. 의외로군…… 요.”
현당이 슬쩍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어렸을 때 내가 있던 마을에 사당패들이 온 적이 있지. 그때 정말 재미있게 구경했어.”
“그것을 기억해?”
현당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가 본 데까지는 기억해. 정말 흥겨웠거든. 그래서 그것을 본 데까지 따라하면서 놀곤 했지.”
우희가 약간 놀란 듯 물었다.
“다 보지는 못했다는 말이군요?”
현당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쫓겨났거든.”
놀란 눈으로 우희가 현당을 바라보았다.
“왜?”
“사람들이 같이 섞여 있는 우리를 보고는 인상을 찡그렸지. 냄새가 났거든.”
“무슨 냄새?”
“땀에 전 냄새, 옷이 때에 전 냄새. 그리고 씻지 않아서 지저분한 냄새, 쉰내, 한마디로 거지 냄새.”
우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거지 냄새?”
현당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되물었다.
“몰랐어? 내가 천애고아 출신이라는 것을. 난 태어나는 순간, 버려졌었어. 부모 얼굴은커녕 이름도 몰라. 지금 이 현당이라는 이름도 내가 지은 거야.”
우희는 분위기를 바꾸려는 의도에서 화제를 돌렸다.
“춰 봐요. 한번 구경이라도 해보게…….”
“구경할 만한 수준은 못 된다니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현당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천인혈을 가지고 춤을 추었다. 처음에는 어색해서인지 뻣뻣하게 움직이는 듯하더니 차츰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이내 구름 속을 산책하는 신선처럼, 땅을 딛고 서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현당은 미끄러지듯 동작을 연결했다.
우희는 아무 말 하지 않고 현당의 춤을 구경했다.
“여기까지밖에 몰라.”
현당이 춤을 멈추고 우희를 바라보았다.
“응?”
깜짝 놀란 우희가 되물었다.
“못 들었어? 여기까지밖에 모른다고.”
“아아…….”
잠시 생각을 하던 우희가 품속에서 옥피리를 하나 꺼냈다. 엷은 비취색이 감도는 피리였다. 대금(大笒)보다는 작고 소금(小芩)보다는 큰 크기의 당적(唐笛) 같아 보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정말 귀한 물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춤에 음악이 없으면 안 되죠. 다시 한 번 해봐요. 반드시 정형이 있을 필요는 없으니까, 추고 싶은 대로 한번 춰 봐요.”
우희는 현당의 말은 듣지도 않고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피리 소리가 들리자 머뭇거리던 현당이 다시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훨씬 부드러운 동작으로 춤사위를 풀어갔다. 연주를 잘하는 것인지, 춤을 잘 추는 것인지 음악에 맞춰 처음 춰 보는데도 율동은 박자를 맞춰갔다.
우희가 입에서 피리를 떼고 한동안 멍하니 현당을 바라보았다.
아직까지 현당은 음악이 끝나고 우희가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정말 제 흥에 겨워 이리저리 천인혈을 흔들며 너울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춤을 추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피리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는 멈칫거렸다.
우희가 실눈을 뜨고 현당을 노려보았다. 마치 무슨 비밀이라도 캐내려는 사람 같았다.
“무슨 무공이죠?”
현당이 흠칫 놀랐다.
“무공이라니?”
“지금 추던 춤 말이야. 무슨 무공이야?”
아직도 현당은 우희의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고 멍하니 우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현당의 모습이 답답한지 우희는 현당이 들고 있는 천인혈을 가리키며 말했다.
“모르겠어? 춤을 출 때 도끝에 현기(玄機)가 어렸었어. 그것은 기를 모았다는 뜻이지. 언제 도에 기를 모을 수 있게 된 거야? 그것뿐이 아니야. 도초의 동작은 유운검법을 따르고 있어. 게다가 보법과 신법이 같이 어우러진 것이 정말 자연스럽더군.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바람 따라 흐르는 구름처럼 정해진 형이 없이 자연스럽게 아무렇게나 흘러갔지만, 그 속에서도 힘과 흐름을 갖고 있어. 유운검법은 언제 그렇게 숙련했지?”
오히려 현당이 놀란 표정으로 우희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현당은 우희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고 있었다.
한참을 생각하다가 현당이 따지듯이 되물었다. 우희의 질문에 대답할 생각은 하지 않고 엉뚱한 것을 물고 늘어졌다.
“그런데 언제부터 나한테 반말이지?”
우희가 빤히 현당을 쳐다보면서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몰랐어? 꽤 되었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멍하니 우희를 쳐다보던 현당이 먼저 실소를 터뜨렸다. 그도 우희가 말을 트는 것에 딱히 불만이 있지는 않았다. 웃음은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겠다는 표현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이지?”
생각난 듯이 우희가 정색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예심 일정과 과정이 확정되었어요. 오늘 낮이면 발표될 거예요.”
현당이 놀라 물었다.
“예심이라니?”
우희가 편하게 벽에 기대어 섰다.
“이번 선룡대회를 기회로 남부맹 소속 문파들의 친목과 우의를 다질 생각으로 출전 자격을 자유롭게 했더니, 예상 외로 참가 신청을 한 사람이 많아요. 너무 많아서 자격을 제한할 필요가 생겼어요. 정해진 실력이 되지 않으면 본선에 참가를 하지 못하도록 할 생각입니다. 그래서…….”
현당은 우희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결국 우희의 말대로 현당이 선룡지회 참가 신청을 접수한 지 며칠 지나서 예심이 열렸다. 참가하는 데 의의를 둔 사람이 많았는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참가 신청을 한 덕분이었다. 예심도 닷새에 걸쳐 열릴 일정이었다. 첫날은 따로 참가 신청을 받은 사대 세가의 출전자들의 예심이 있고, 나머지 나흘은 일반 참가자들의 예심이 참가 신청 순서대로 열린다고 했다.
예심의 방법은 간단했다.
석관 속에 들어 있는 본선 출전 신청서를 꺼내는 것인데, 정해진 위치에서 표적까지의 거리는 열 장(약 31m)에 달했다. 그리고 석관 바로 앞에 커다란 비석 모양의 장애물이 하나 설치되어 있어서 석관은 예심을 시작하는 위치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비석이 있는 곳까지 바닥에는 성인의 허벅지 높이로 물이 흐르고 있었고, 좌우로 일순간에 백 대의 화살이 발사될 수 있는 기관이 설치되어 있었다. 예심 방법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석관 속의 본선 출전신청서를 꺼내는 것이었다.
방법은 간단하지만 결코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응시자는 화살을 피할 만큼 신법이 빠르거나, 화살이 미치지 않는 곳까지 박차고 오를 수 있을 정도의 내공을 소유하고 있어야 했다. 그도 아니면 화살을 모두 퉁겨낼 수 있을 정도의 호신강기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
다음으로 석관이 문제였다. 석관을 부수거나 석관 문을 열어야 하는데, 석관의 두께가 한 자나 된다고 했다. 보통 힘만으로는 뚜껑을 들어 올리는 것만으로도 힘이 벅찰 터였다.
“정말 교묘하군.”
예심이 열리는 첫날, 시합장을 돌아본 현당의 말에 그를 따라온 선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말씀이십니까?”
“예심 말이오. 정말 실력도 없이 출전이나 한번 해보겠다는 사람을 가려내기에 좋게 만들어놓았소.”
“아아…….”
아는 척 감탄사만 연발하던 선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왜 그렇습니까?”
이유도 알지 못하고 그냥 고개를 끄덕이자니 궁금함을 참지 못한 선기는 결국 현당에게 질문했다.
“생각해 보시오. 무엇보다 우선 물길을 건너야 하오. 물속에 빠지지 않을 정도로 빠르지 않다면 화살을 피할 수 없소. 그 정도의 실력을 일컬어…… 그게…….”
신법에는 자신이 있던 선기는 당장 아는 척을 했다.
“그것을 답설무흔(踏雪無痕)이라고 하지요.”
“답설무흔?”
“예. 눈 위를 달려도 흔적이 없다는 말로, 발로 바닥을 딛지만 사실 딛는 것이 아니라 그 위를 미끄러지는 경지입니다. 답설무흔에 이르면 물속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보다 낮은 경우로 초상비(草上飛)가 있고, 더 뛰어난 경우를 능공허도(凌空虛渡)라고 합니다. 허공을 걷는 경지라고요.”
현당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 정도로 뛰어난 자가 아니라면 도전할 생각을 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물에 빠진다면 결코 기관에서 발사되는 백 대의 화살을 피할 수 없으니까요. 여기에서 또 궁수를 쓰지 않고 기관을 선택한 것도 훌륭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건 또 왜 그렇습니까?”
“사람이 화살을 쏜다면 아무래도 인정에 치우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아는 사람이라면 위협이 안 되도록 쏠 것이요, 사적인 앙금이 있는 자라면 더욱 치명적인 곳에 쏠 것이 분명하니까요. 그러면 예심 이후에도 분란의 소지가 남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관이 쏘는 일은 인력과는 상관없는 일. 고로 다치거나 죽을 줄 알면서도 참가한 자신에게 모든 책임이 돌아가는 것이지요. 결국 죽기 싫으면 아예 시도도 하지 말라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현당의 말에 선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기뿐만 아니라 현당과 선기 주변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게다가 일정의 배치 또한 한 치 앞을 내다보고 있군요.”
현당의 말에 다시 사람들이 귀 기울였다.
“일반 예심을 열기 전에 먼저 사대 세가를 비롯한 명문인들의 예심을 먼저 엽니다. 가문에서 가려 뽑은 자들이니 예심에서 탈락하는 수는 극히 적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 일은 알 수 없는 것이지요. 사소한 실수로 피를 보는 일이 없으리라는 보장이 없지요. 하지만 그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사대 세가 소속이 아닙니까? 결국 정한 규칙에 따라 다쳤으니, 벙어리 냉가슴 앓듯 꾹 참고 운 없는 자신을 탓해야겠지요. 이제 그것이 선례가 됩니다. 사대 세가에서도 아무 말 없이 문당이 정한 예심의 규칙을 따랐다. 그럼 그 뒤에는 어떻게 될까요? 다른 사람들은 다쳐도 하소연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실력이 모자라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참가를 포기하겠지요. 일정은 닷새로 잡았지만, 첫째 날 뒤의 나머지 처리는 매우 간단해졌지요.”
듣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고개만 끄덕였다. 그들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안배였기 때문이다. 그냥 가볍게 일정을 고려해서 정한 예심이라 생각했는데, 그것만으로도 선룡대회의 선수는 이미 충분히 가려지게 된 셈이었다.
현당의 설명이 끝날 즈음, 출발선에 사람이 나타났다. 드디어 시작이었다. 모두가 사대 세가 자제들의 무공 실력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구경거리였다.
“와아아아…….”
“서문장천 공자다.”
“서문세가의 장천 공자가 나왔다.”
함성이 울려 퍼졌다.
모습을 드러낸 서문장천이 환호하는 사람들에게 답례로 손을 흔들었다.
“망할, 제가 무슨 영웅이라도 되는 줄 아나 보지…….”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현당의 속마음을 대신 말하고 있었다. 시원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그대로 드러낼 현당이 아니었다. 현당은 무표정한 얼굴로 전방만 내다보고 있었다.
언제 나타났는지 태구가 현당 가까이 와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십 보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이 사람아 왜 이렇게 늦었어?”
선기가 반가운 표정으로 태구를 현당 곁으로 잡아끌었다.
“늦기는…… 벌써 와서 다른 쪽에서 구경하고 있었어.”
태구가 볼멘소리로 대답하더니 현당을 힐끗 쳐다보았다. 이내 퉁명스런 목소리로 현당에게 인사를 건넸다.
“일전에는 고마웠소.”
현당이 그의 장기인 시원한 미소을 보여주었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것을 끝으로 현당은 시선을 시합장으로 돌렸다. 다시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망설이던 태구는 그 덕분에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도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콰아앙.
커다란 징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함성이 잦아들었다. 출발선에 서 있는 후보가 정신을 집중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입을 다물었던 것이다. 이제 시작이었다.
“강호 동도 여러분.”
서문장천은 시작은 하지 않고 둘러선 사람들에게 일장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이번 선룡대회는 남부맹에서 출전할 후보를 뽑는 대회요.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문호를 개방하고 출전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옳다고 본인은 생각하는 바이오.”
“와아아아…….”
쾡쾡쾡……. 둥둥둥…….
마치 미리 준비해 놓은 것처럼 그의 말에 동조하듯 여기저기에서 북소리와 꽹과리소리가 울렸다.
“그런데도 이런 복잡한 예심을 거친다는 것은 그들에게 출전 기회를 박탈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오.”
“와아아아…….”
좀 전보다 더 커다란 함성이 울렸다. 이번에는 한 번이라도 본선의 출전 무대를 밟아보고 싶은 사람들이 동조한 듯싶었다.
“그래서 본인은…… 지금부터 예심이 열리지 않도록 석관을 부술 작정이오. 저 석관이 없으면 예심이 열리지 않을 테니까 말이오.”
“우와아아아…….”
여기저기에서 소리를 질러댔다. 현당이 있는 곳도 예외가 아니었고, 선기나 태구마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고 소리를 질렀다.
“바보…….”
현당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 소리를 들은 선기가 잽싸게 현당 곁에 다가앉았다.
“누가 바보란 말씀이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