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
<65화>
“그, 그럼 언제까지…….”
흠칫 놀란 선기가 눈을 빛냈다. 마치 죽고 사는 문제가 지금 현당의 한마디에 달려 있는 사람 같았다.
“빨라야 연맹지회가 끝난 연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선 남부맹의 존립이 먼저입니다. 때문에 아직은 사대 세가 간의 반목은 피해야 할 때로군요. 연맹지회가 준비되면 새로 맹주도 선출될 것이고, 세가 간의 서열도 정비가 될 테고, 연맹지회가 끝나면 모든 상황이 정리될 것이니까 세력구도도 바뀔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까지 지금은 세가 간에 의심을 살 만한 일은 철저히 경계해야 할 때! 그때까지 참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만…….”
“알고 있습니다. 알고 말고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선기가 당연하다는 듯 소리를 쳤다.
* * *
현당은 끝까지 소가주를 호위하겠다는 선기를 떼어놓느라 무진 애를 썼다. 이 기회에 현당에게 확실하게 눈도장을 찍겠다는 것이 선기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현당은 선기를 데리고 움직일 수는 없었다.
선기를 떼어놓았다고 확신이 들자 현당이 낮게 소리쳤다. 아니, 중얼거렸다는 것이 더 정확했다.
“아무도 없나 보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느긋한 걸음으로 현당은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더 가자 모퉁이가 나왔다.
현당은 골목을 따라 돌았다. 돌기가 무섭게 현당은 소리 없이 담을 넘었다. 이어 건물을 가로질러 반대편 담을 넘어 건너 길목으로 나타나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현당은 다시 중얼거렸다.
“아무도 없나 보군…….”
또 대답이 없었다.
다시 현당은 월장과 골목으로 숨기를 반복했다.
* * *
우희는 직접 현당을 쫓고 있었다.
“아무도 없나 보군…….”
현당의 말을 듣는 순간, 우희는 머뭇거렸다.
우희 자신이 직접 현당의 뒤를 밟는다는 것을 현당이 눈치챈 것은 아닐까 우려되었다. 이내 우희는 고개를 저었다. 우희가 여기 온 것은 채 일각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부문사 주근혜(朱勤慧)가 현당과 선기가 독대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곧 현당이 그의 수하들과 접선하리라는 판단에 그 모습을 확인하고 싶어 직접 나온 것이었다. 그러니 현당이 우희의 존재를 파악할 만한 시간은 안 되었다.
우희는 숨을 죽였다. 현당의 말은 혼자 중얼거리는 독백이 아니라는 판단에서였다. 분명히 현당이 기다리는 누군가가 근처에 있을 것이었다. 우희는 조용히 그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현당의 옛 수하이거나 현당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일 터였다. 앞으로는 현당을 쫓느니 그를 쫓는 것이 더 쉬울 것이었다.
우희는 눈빛을 빛내며 주변을 살폈다.
순간, 현당이 골목으로 사라졌다.
조심스럽게 현당의 뒤를 밟았다. 서둘러 쫓다가는 현당에게 그녀의 행각이 발각될 게 뻔했다.
“후우우…….”
골목 모퉁이로 다가선 우희는 심호흡을 하고 골목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피식.
우희는 싱겁게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싶었는데 역시 예상대로 현당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달아났군. 어디로 갔을까?”
우희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순간, 우희는 깨달았다.
분명히 근처에서 우희는 현당과 자신 외에 다른 사람의 인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좀 전까지 여기 있던 사람은 우희와 현당 밖에 없었다. 그런데 현당이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것은 결국 우희 혼자만의 오판이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이곳에는 우희와 현당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현당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척하며 우희와의 거리를 벌려놓았고, 현당이 누군가를 기다린다고 착각한 우희는 현당의 계획대로 그의 추격에서 한발 물러났던 것이다.
“또 당했네…….”
우희는 혀를 날름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언제까지…….”
우희는 언제쯤 현당의 의중을 꿰뚫어볼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현당에게 또 패했음에도 분하다는 생각보다는 통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형님…….”
근거지에서는 신현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생익덕 수구나 우타 추완성 등이 이미 대기하고 있었다. 현당이 올 때까지 하루든 이틀이든 종일 자리를 지키고 있을 참이었다.
“잘들 지내지?”
현당이 미소를 지으며 얼굴을 비볐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마주치고 어깨를 두드리고 어린 수하들은 껴안아주기까지 했다.
“너희들이 고초가 심하구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형님. 형님이 준비해둔 자금으로 지금도 호의호식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럼 지루하겠구나.”
현당이 시원스럽게 이를 드러내며 웃는 모습을 보였다.
“참, 형님도…….”
정다운 말들이 오가고 사람들의 얼굴에 생기가 넘쳤다. 그때였다. 신현이 볼멘소리로 현당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형님은 언제까지 거기에서 지낼 생각이십니까?”
현당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처음에는 신현을 쳐다보았지만 이내 먼 곳을 바라보는 것처럼 두 눈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언제까지…… 아마도 내가 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때까지겠지.”
현당의 입을 타고 흘러나오는 말에는 기운이 없어 보였다.
처허어억.
생익덕 수구가 현당의 등을 북소리가 나게 두들겼다.
“걱정 마십시오, 형님. 우리는 형님이 안전해질 때까지 숨소리도 내지 않고 기다릴 테니까 말입니다.”
“아흑!”
이번에는 우타 추완성이 신현의 등을 세게 갈겼다. 신현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걱정 마라, 인마. 형님이 보통 분이시냐? 형장에서도 살아 돌아오신 분이시다.”
현당은 애써 눈에 생기를 담으며 그들을 둘러보았다.
“동생들한테 부탁할 게 있네.”
수하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전에 없던 생기가 그들 눈에 넘쳐났다. 현당의 부탁이라는 말 한마디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추완성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아마 동생들 모두가 움직여야 할 거야.”
“시켜만 주십시오.”
수구가 두어 차례 자기 가슴을 두들기며 따라 일어났다.
그들의 눈빛에서 현당에 대한 신뢰를 확인하면서 현당은 느린 동작으로 수하들을 한 명씩 훑어보았다.
“사람들을 감시해 주게.”
추완성이 앞으로 나왔다. 역시 머리를 써야 하는 일은 현당이 없을 때는 추완성이 알아서 해주고 있었다. 이번도 예외가 아니었다.
“누구를 감시하면 됩니까?”
“이번 선룡대회에 출전한 사대 세가와 단목가. 다섯 가문밖에 안 되지만, 그들 모두가 무공 고수이기 때문에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될 게야. 그리고 추완성은 자료를 좀 모아줘. 사대 세가가 솔가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솔가들이 언제 독립했는지 말이야.”
“가계도를 말씀하십니까?”
현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데 단순한 가계도가 아니라 각 솔가가 자랑하는 무공들도 같이 알아봐 줘. 장기라든가 특기가 있을 것 아냐.”
현당은 차근차근 지시를 내렸다.
* * *
현당이 비밀 근거지를 나왔을 때는 이미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서둘 필요가 전혀 없었다. 새벽길을 걷는 현당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걱정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수하들을 만나면 일이 풀릴 테니 무언가 홀가분할 것 같았는데 오히려 짐만 지운 것 같았다.
그들은 언제나 평소와 똑같은 모습으로 현당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삶의 희망이 없는 자신을 마냥 기다리고만 있었다. 그저 자신만 믿고 따르는 그들이기에 더더욱 지시하기가 어려웠다. 물론 그들은 현당의 지시를 현당 본인이 하는 것처럼 철저히 따를 것이다. 더 하지도 않고 덜 하지도 않게…….
처음 현당은 어디서부터 이야기할까 고민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 없었다. 그저 현당은 지시를 하고 그들은 따를 뿐이었다. 모두가 현당에 대한 신뢰가 바탕이 되어 있기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 현당은 어떻게든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시간이 갈수록 낮아지는 것 같았다.
먼저 남궁진이 나타나서 현당의 목숨을 노리고 있고, 현당이 남궁진을 이기지 못한다면 남궁찬이 현당의 목을 벨 터였다. 그것이 아니라도 진짜 남궁적이 살아서 돌아온다면 현당은 죽은 목숨이었다. 남궁찬이나 우희가 남궁적을 포기하지 않는 것을 보면 남궁적은 아직도 가능성이 있다는 소리였다.
시간이 갈수록 현당이 죽을 확률은 높아만 가고 있었다.
오늘도 현당은 그들에게 그저 기약 없는 약속만 하고 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무언가 가슴속에 응어리가 남아 있었다. 이럴 때는 어떻게든 풀어야 다시 기운을 차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현당은 예의 문당 앞에 서 있었다.
“내가 왜…….”
현당은 알 수 없었다. 하고 많은 곳 중에서 하필 왜 문당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참으로 절묘한 곳에 문당이 자리하고 있었다. 대로를 사이에 두고 왼쪽에는 다점, 오른쪽에는 문당이 있었다. 그리고 문당 바로 옆으로 나란히 모용세가의 솟을대문이 보였다. 현당은 문당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다점을 찾아온 것이었다.
“다점이라…….”
현당은 다른 생각은 하지 않고 다점의 간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층의 창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가 애용하던 방이었다. 오늘도 그 방은 주인을 기다리며 창문이 닫혀 있었다. 주인이 들어와 문을 열 때까지 창문은 닫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창문이 열리면 등이 내걸릴 것이고…….
그때 현당은 누군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시선을 오른쪽 위로 돌렸다. 이층 창을 통해 자신을 내려다보는 사람과 시선이 마주쳤다.
우희였다. 우희가 도도한 시선으로 현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현당이 우희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희도 이제는 저 방을 알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기가 생겼다. 저 방에 들어가지 않으면 내가 화를 풀 곳이 없는 줄 아느냐 하는 오기였다. 또 내가 너를 찾아갈 줄 아느냐 하는 오기이기도 했다.
현당은…….
현당은 우희가 보고 있는 앞에서 자신 있게 월장을 했다. 그것도 모용세가의 담을 넘고 있었다. 구렁이 담 넘어간다는 소리가 무색할 정도로 소리 없이 스르르 미끄러지는 것처럼 타고 넘어갔다.
현당은 사라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우희를 향해 한 번 미소 짓는 것을 잊지 않았다.
* * *
“헉. 가가…… 여긴 어떻게…….”
현당은 황급히 모용미의 입을 가렸다.
“쉿. 전에 소리도 없이 얼굴을 돌리는 미매를 보았을 때, 내 마음이 찢어지는 줄 알았소.”
동시에 그의 손은 모용미가 덮고 있는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역시 구렁이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가가…….”
현당은 다시 모용미의 입을 가렸다.
“쉿. 미매…… 보고 싶었소.”
손을 떼기가 무섭게 현당은 모용미가 다른 소리를 할 사이도 없이 모용미의 입을 가렸다. 그것도 자신의 입으로…….
“흡…….”
신음 소리는 모용미가 아니라 현당이 토했다. 모용미의 입을 덮친 사람은 현당인데 자신이 통째로 모용미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모용미의 가는 손가락이 현당의 머리를 헤집기 시작했다.
당황한 현당은 숨을 쉬기 위해 황급히 모용미의 입술에서 자신의 입술을 떼었다. 그렇지 않으면 산소결핍으로 숨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아아, 가가…….”
현당은 호흡을 조절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자신이 모용미에게 끌려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현당의 자제력은 우희에게 들었던 말을 모용미에게서 듣는 순간, 무너져 내렸다.
“좋아. 너무 좋아. 더 세게, 더 깊게, 더 크게!”
* * *
누워서도 현당은 걱정이 앞섰다.
행여나 모용세가의 시종들이 모용미가 지른 교성을 듣고 찾아오지나 않았을까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엎드린 모용미가 현당을 바라보았다.
현당이 몸을 일으키자 모용미도 따라 일어났다.
“가시려고요?”
“곧 날이 밝을 텐데…….”
“헤어져 있어야 할까요, 우리는 언제까지…….”
모용미의 질문에 현당은 멈칫거렸다. 그의 시선이 이제 막 침상에서 팔을 지지대 삼아 상체를 일으키는 모용미에게 향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모용미의 깨끗하면서도 부드러운 굴곡이 드러났다. 힘이 다시 불끈 솟았다. 수십 년 면벽을 한 고승이나 이제 곧 벽에 똥칠할 늙은이도 피가 솟을 것만 같은 선의 맵시였다.
자신도 모르게 현당은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모용미가 현당을 잡았다. 현당이 쓰러졌다. 항거할 수 없는 힘이 모용미에게는 있었다. 현당의 위로 모용미가 올라갔다.
현당은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어나려 상체를 일으켰다. 순간, 모용미가 가늘고 긴 손가락을 양손으로 현당의 가슴을 눌렀다. 모용미의 손도 두 개였고, 현당의 젖가슴도 두 개였다. 하나에 하나씩 모용미의 손이 포개졌다.
“하아아…….”
달뜬 음성이 들렸다.
“하아악.”
먼저 신음 소리는 모용미가 냈지만 이번에 들리는 짙은 신음 소리는 현당이 지르고 있었다. 현당은 그의 모든 것이 모용미의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동시에 현당은 스스로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어야만 했다.
잠시 후 식었던 떡메 소리가 다시금 방 안을 울렸다.
“좋아. 너무 좋아. 더 세게. 더 깊게, 더 크게!”
현당의 양쪽 가슴에는 반원형의 방사선 모양을 한 긴 손톱자국이 살을 파고 문신처럼 새겨졌다. 양쪽의 젖가슴에 각각 다섯 가닥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