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
<61화>
오늘 현당은 책을 쓰고 있었다. 쓰고 나면 항상 쓴 것을 바로 불에 태워서 없앴다. 매일 반복하는 일이기에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오늘 쓰고 있는 것은 비폭연과 함께 가져왔던 감리(監理)의 내용이었다. 이것 역시 다 외우고 있었다. 놀랍게도 감리의 저자는 남궁가 사람이 아니었다. 아마도 남궁가 태사자원 안에 있는 책 중에 유일한 것일지도 몰랐다. 꽤 오래 전에 쓰인 책 같았다. 다행스러운 것은 감리의 책머리에 검맹 남궁덕이 부연설명을 해놓은 것이었다.
현당은 감리의 내용뿐만 아니라 남궁덕이 써놓은 설명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검법은 검을 쓰는 형(型)에 불과하다. 단지 쓰임에 따라 유용하거나 요긴하게 쓸 수 있는 것, 자주 쓰이는 것들을 모아서 그 틀을 만들어 놓은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검법에 치우치다 보면 형에 집착하게 되고, 틀을 벗어난 상황에서는 오히려 몸에 익은 형이 자신을 제약하는 꼴이 되어버린다. 결국 검도(劍道)를 깨우치기 위해서는 그 형을 파괴해야 하는 모순에 부딪히게 된다.
일찍이 성현들이 말씀하시기를 무(無)에서 도(道)가 나왔고, 도가 의(意)를 만들었으며, 의는 기(氣)를 모았고, 기가 모여 형(型)을 이루고 다시 형이 변화하여 세상만물을 이루었다고 했다.
이 말은 무엇인가? 결국 도를 깨우치기 위해 우리는 형을 배우는데, 형은 결국 의와 기로 가기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 하나 우리는 형에 매달려 그 기와 의를 모름에 정작 도와는 더욱더 멀어지고 있음이니.
이에 나, 남궁덕은 말년에 이른 지금, 더 늦기 전에 깨달음의 끝자락이라도 얻기 위해 검을 버리고자 한다. 내게 있어서 검은 나를 구속하는 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뒤늦게나마 그것을 알게 된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말이었다.
아직 현당은 감리라는 책이 그곳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의 깨달음의 수준이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분명한 것은 감리를 태사자원 서고에 갖다 둔 사람이 바로 남궁덕이라는 사실이었다. 직접 책머리 앞에 자신의 깨달음을 적어놓았을 정도로 남궁덕은 이 책에 애착을 가졌던 것이 분명했다.
“그도 이 책을 봤을까?”
현당은 고개를 저었다.
보기는 했다 해도 대충 보고 말았을 것이다. 어쩌면 책머리에 쓰인 남궁덕의 글을 보고는 바로 덮었을지도 모른다. 남궁찬은 남궁덕이라는 이름에 강한 반발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남궁덕과 친해지는 것이 남궁찬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때문에 현당은 남궁덕의 자취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 생각은 어느 정도 주효하고 있었다.
남궁찬의 가르침보다 많은 것을 화련검주해에서 얻을 수 있었다. 물론 남궁찬이 비폭연을 시범 보여주고, 자하기의 무리를 강독하지 않았다면 깨달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현당은 남궁덕의 자취를 뒤지면서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만큼 현당이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현당의 성장은 거기까지였다.
“신(身)은 곧 자아의 실체로다. 의(意)에 따라 몸이 움직임에 몸과 마음은 결코 둘이 아니라 하나로다. 도구 역시 수족의 연장인지라, 도구의 움직임은 우리의 동작에 연속됨이요, 결국 의의 집행에 다름 아님이라. 도대체 뭔 소리야?”
아무리 읽고 생각해 봐도 감리에 나와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깨닫지 못한다면 우선은 눈을 감고 그릴 줄은 알아야겠지. 언젠가는 쓰일 데가 있을 거야. 어디까지 읊었더라? 그렇지. 결국 몽둥이[棍]이든 도구이든 또는 어떤 병장기이든지 그것은 수족의 연장이고, 의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리라. 결국 도구에 익숙함은 의의 깨달음에 있는 것이니, 병장기를 수족과 같이 다루는 것이 바로 신병합일(身兵合一)의 시발이요, 어병술(御兵術)에 이르는 첫 관문이라…….”
현당은 종이를 태우면서 그 안에 쓰여 있는 내용을 중얼거렸다.
* * *
이제 현당은 태사자원의 서고에는 들어갈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곳에 있는 책들은 모두 외우고 있고, 이제는 외우고 있는 것을 몸으로 익히는 일만 남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내용을 머릿속에 담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익히는 일이 중요한 때였다.
현당은 여유를 찾기 위해 정심당의 서고로 향했다. 남궁세가가 수 세대에 걸쳐 모아놓은 서적들이 정리되어 있는 곳이었다. 무공비급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보(棋譜), 사서삼경, 영웅전기 등 신변잡기에 대한 모든 책들이 그곳에 있었다.
책을 훑어보며 현당은 어려서부터 이곳을 이용했을 사람에 대한 부러움이 몰려왔다.
“복 받은 놈들이 그것이 복이라는 것을 알기나 할까?”
혼자 묻고 혼자 답했다.
“그럴 리 없지. 처음부터 갖고 있는 것은 없는 것이 이상할 테니까. 죽을 때까지 몰랐을 거야. 좋은 집안에 태어난 것이 얼마나 큰 복이란 것을…….”
현당은 망설이지 않고 무서가 정리되어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 그가 이곳에 온 것은 모용곽이 그에게 검을 벗어나 권장지각에 대한 책들도 찾아보라고 한 말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찾고 있는 책이 따로 있었다. 태사자원의 가주 전용 서고에는 없는, 하지만 반드시 봐야 하는 책이 이곳에 있었다.
“유운신보(流雲身報), 유운보보(流雲步報)…… 여기 있군. 이것도 남궁찬은 보지 않은 것 같아. 분명히 유운검보랑 같은 흐름의 내용이건만. 남궁덕 옹은 유운검결은 유운신법, 보법과 함께 기신체(氣神體)의 삼합을 이루어야 제대로 된다 하였건만, 그것을 간과한 것이 분명해. 남궁가주는 이것도 안 보았겠지? 저놈도 볼만 하겠군. 경풍권록(輕風拳錄)이라. 산들바람 같은 권법에 대한 책이란 말이지? 자하기랑 잘 어울리겠군.”
현당은 망설임 없이 마음에 드는 책부터 살펴보기 시작했다.
* * *
우희가 현당에게 처음부터 다시 제련현마강을 가르치기 시작한 지 꽤 여러 날이 지났다.
그 사이 현당의 실력은 일취월장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향상되고 있었다. 마치 바싹 마른 해면(海綿)이나 수세미가 물을 흡수하듯 우희의 지도를 그대로 빨아들였다.
가르치는 동안 우희는 겁이 났다.
과연 현당의 숨은 재능이 어느 정도인지 걱정이 앞섰다.
언젠가 때가 되면 현당을 포기해야 할 텐데, 그럴 수 있을지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우희가 현당의 실력을 인정할지라도 다른 남부맹의 사대 세가 사람들이 현당의 존재를 인정할 것인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언제까지 현당이 남궁적의 행세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우희는 그런 걱정은 접어두고 우선은 현당을 지도하는 데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미 현당과 남궁찬으로부터 현당이 비폭연 같은 상승 검법을 수련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우희의 생각에 남궁찬은 우희에게 이야기한 대로 현당에게 정성을 쏟고 있었다. 그런 만큼 우희도 진심으로 현당을 지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데 현당의 실력이 우희의 예상보다 빠르게 진보하고 있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현당인지라 마른 땅에 장마가 내린 것처럼 현당이라는 나무는 쑥쑥 자라만 갔다.
이제 현당은 자하기를 완전히 제련현마강으로 전환시키기에 이르렀다. 검기나 도기 등의 강기만으로는 현당의 신체에 겨우 생채기 정도나 낼 수 있을까? 결국 현당에게 충격을 주기 위해서는 도검 등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심경, 진경 등의 내가 중수법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할 것 같았다.
우희는 모든 지도를 끝내고 무릎을 가볍게 두드리며 물었다.
“이제 말해봐요. 왜 그렇게 내공에만 매달리는지…….”
현당이 고개를 비틀어서 목 언저리를 보여주었다.
남궁진의 구(鉤)에 당한 상처는 이제 딱지가 떨어지고 가늘게 흉터만 남아 있었다.
“이것 때문이지.”
우희는 말없이 현당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당시 내 제련현마강 역시 결코 낮은 수준이 아니었어. 모용가주의 내공을 실은 일합을 고스란히 온몸으로 받으면서도 몸에 상처 하나 안 남을 정도였으니까. 한데 남궁진의 공격은 내 목을 자를 정도로 날카로웠지.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니 두 가지가 있더군.”
우희는 묵묵히 현당의 설명을 듣고만 있었다.
“하나는 진정한 실력의 부재였고, 다른 하나는 내공의 부족이었지. 천하의 신병이 있더라도 그 사용법을 모르면 아무 소용없는 것. 천인신수라는 늙은이가 명도라고 지적한 천인혈은 단지 내게는 장식품에 지나지 않았어. 그때 깨달았지. 난 잔꾀만 피울 줄 알았지, 정작 무공을 익힐 생각은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우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현당이 전하는 말에 가슴이 저몄다. 우희는 남자가 패하는 것도 이렇게 멋있을 수가 있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을 조였다. 처음 알았다. 언제나 이긴 승자만 멋있는 줄 알았는데, 때로는 패자에게도 멋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 * *
현당은 느린 동작으로 도검요결을 덮었다.
드디어 도검요결마저 다 보았다. 그냥 본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암기하는 수준이었다.
“화련검주해가 검법의 정리라면 도검요결이야말로 도법의 집대성이라 할 만하군.”
도검요결에는 천하의 모든 도법이 다 담겨 있는 듯했다.
도를 뽑는 발도에서부터 도를 꽂는 납도까지 도를 쥐고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한 수 한 수가 나뉘어져 설명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한 동작씩 분절되어 있었지만 이제 현당에겐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떤 초식이라도 나누어서 볼 수 있고, 그 나눈 동작을 하나로 엮어서 하나의 초식으로 완성시킬 수 있게 된 현당이기에, 도검요결의 모든 내용은 현당에게 적지 않은 깨우침이 되어주었다.
“검법과 달리 도법은 매우 단순하군. 마치 삼재검을 도를 이용해서 펼치는 것 같아…….”
습관적으로 도검요결에 불을 붙이면서 현당은 중얼거렸다. 종이가 타들어갔다.
때마침 우희가 수련동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무슨 책을 태워?”
“도검요결.”
우희가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배교의 마지막 호교신장이 썼다는 그…….”
현당은 불타고 있는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맞아. 그 책이야. 본 적 있어?”
“워낙 유명한 책이니까. 그런데 왜 태우지? 남들은 갖고 싶어서 난리인데…….”
현당이 씨익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군. 태울 필요는 없는 책인데 습관이 되어서 그런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리질을 쳤다.
그런 현당을 빤히 쳐다보던 우희가 되물었다.
“습관이 되어버렸다는 말은 이전부터 책을 태웠다는 이야기? 흐음. 당신은 여기 와서 글을 배웠으니까, 이전에는 책을 가까이 하지도 않았겠죠? 그럼 남궁세가에서 지내는 짧은 세월 동안 많은 책을 태웠다는 소리군요? 왜 태웠을까? 남들이 봐서는 안 되는 책이라는 소리겠군요? 남이 보면 안 되는 책이 무엇일까? 또 여기에서 남이란 누구죠?”
현당이 흠칫 놀라는가 싶더니 이내 평정을 되찾고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련하시겠어! 남부맹의 문사 나리. 뭐, 내가 대답하지 않아도 추리가 가능하겠군. 그런데 여기는 왜 왔지?”
우희가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좀 전에 사대 세가의 가주 회동이 끝났어요.”
현당의 얼굴 표정이 굳어졌다.
“그래서?”
“선룡대회 날짜가 정해졌어요.”
현당은 아무 소리 하지 않고 가만있었다. 마치 석상이 되어버린 것처럼 가만히 숨만 쉬고 있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 현당이 움직였다.
“자, 그럼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난 것인가? 그럼 내려가야겠군.”
현당이 씩씩하게 중얼거렸다.
제22장 더 세게, 더 깊게, 더 크게
우희는 현당 앞에 여러 개의 타격대를 갖다 놓았다. 그냥 타격대가 아니라 등신상이었다.
“웬일이지?”
우희가 미소 지어 보였다.
“이제 곧 실전을 치루지 않으면 안 될 테니까. 지금 당신에게 가장 필요한 게 뭐죠?”
현당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내공.”
우희는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내공은 하루아침에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죠. 그 다음에는요?”
“무공.”
우희는 기다리던 대답을 들은 것처럼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맞아요. 무공이죠. 하지만 한번 묻고 싶군요. 당신이 알고 있는 무공이 정말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우희의 말에 현당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요. 당신은 오히려 지금의 당신이 소화하기에도 벅찰 정도로 많은 무공을 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러니까…… 지금 해야 할 것은 내공을 수련하는 것과 동시에 그 무공을 정확하고 빠르면서 적절하게 쓸 수 있도록 갈고 닦는 것이지. 그러기 위해서는…….”
우희는 현당 옆에 섰다. 두 사람 맞은편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등신상의 타격대가 서 있었다.
“무엇보다 자세를 가다듬는 것이 중요해. 같은 기지일보를 펼쳐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