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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무사-58화 (58/175)

# 58

<58화>

우희가 와야 할 시간에 오늘은 모용가주가 찾아왔다. 그는 수련동에 들어와서는 잔뜩 인상을 찡그리고만 있었다.

“진 아우에게 패했다면서?”

잔뜩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모용곽이 물었다.

현당은 왜 남궁진이 모용곽에게 아우가 되는지 생각을 해보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해할 수 있었다.

사대 세가는 같은 사문은 아니지만, 한 지역에 오래 있으면서 한 사문처럼 지내게 된 것이고, 결국 세대를 중심으로 같은 배분을 쓰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므로 남궁찬의 동생이 되면, 모용곽에게는 사제뻘 되는 것이리라.

현당은 순순히 패배를 인정했다.

“힘 한 번 못 써보고 졌습니다.”

그러자 모용곽은 더욱 인상을 찡그렸다.

“힘 한 번 못 써보고 졌다니, 그동안 자네를 가르친 나를 앞에 두고 그게 어디 할 소리인가? 내가 잘못 가르쳤다는 소리가 아니고 무엇인가?”

현당은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어디 가르침이 부족해서 졌겠습니까? 이 촌부(村夫)의 자질이 부족했던 것이지요.”

순간, 모용곽이 흠칫 놀라는 듯하더니 다시 얼굴이 굳어졌다.

“아니, 다행일세. 난 비인부전이라는 말이 맞는다고 생각하네. 자네가 가르침을 따라올 만한 재목이 안 된다면, 더 이상 지도할 필요가 없다고 보네. 그래서 이번 참에 발길을 끊을까 하네.”

현당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그동안 보살펴주신 은혜, 감사드립니다. 사제지은은 구배(九拜)를 올리는 것이 정상이나…….”

현당이 아쉽다는 듯 머뭇거리더니 절을 한 번만 올렸다.

“지금은 남궁가 행세를 하고 있는 놈이 모용가주를 사부로 모신다는 것 또한 옳은 일이 아닐 터. 단지 그동안의 연(緣)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커험, 그럼 잘 지내게.”

멈칫거리던 모용곽이 잘 되었다는 듯이 잽싸게 몸을 돌렸다.

“그 전에 잠깐…….”

현당이 모용곽을 불렀다.

“커험. 어허험. 험험…….”

화들짝 놀란 모용곽이 잔기침을 하며 긴장을 풀면서 다시 몸을 돌렸다.

“또 무슨 일인가?”

“마지막으로 가르침 하나를 부탁드립니다.”

모용곽이 머뭇거렸다.

“가, 가르침이라니?”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 남경의 포도청에서 이곳으로 저를 데려온 사람이 가주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제게 마지막 음식을 공급해 주신 분 역시 가주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저는 다른 것은 몰라도 한 번 본 얼굴만은 절대 잊지 않습니다. 저를 살려주신 김에 마지막 인연이라 생각하시고, 무리(武理 : 무공의 원리)에 대해 하나만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행여나 그것이 연이 되어 저를 또 한 번 살려낼지 누가 알겠습니까?”

모용곽의 얼굴이 펴졌다.

저렇게 이야기하는데 안 해준다면 그것 또한 이상하리라. 그동안 좋은 느낌을 일순간에 다 무너뜨리는 꼴이리라.

“좋아. 딱 하나만 가르쳐주지. 무엇을 원하나?”

“토하기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순간, 모용곽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감정을 감추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설마 현당의 입에서 토하기라는 말이 나올 줄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토, 토, 토하기?”

현당은 모용곽이 다른 말을 하기도 전에 잽싸게 대답했다.

“예. 토하기 말씀입니다. 남부맹 사대 세가 중 부드럽기로 이름난 곳이 남궁세가이고, 무겁기로 이름난 곳이 독고세가입니다. 변화무쌍한 곳은 서문세가요, 모용세가는 강맹하기로 이름난 곳입니다. 즉 모용세가의 무공은 일도양단, 파죽지세의 기세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릇 여타 무공이 그러하듯 모용세가의 무공의 단초는 역시 모용세가의 내공, 즉 토하기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제가 알고 싶은 것은 그렇게 강맹한 무공은 어떤 무공의 이치를 갖고 있는지 하는 것입니다.”

모용곽이 실눈을 뜨고 현당을 노려보았다. 현당의 말이 진심인가 파악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좋아. 내 약속했으니, 그것 하나는 들어주지.”

잠시 시간이 지난 후, 모용곽은 힘든 결정을 내렸다.

우선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사대 세가 중 한 세가의 가주라는 사람이 말을 꺼낸 지 일각도 되지 않아 말을 번복한다면 무엇이 되겠는가? 지금 보고 들은 사람이라곤 현당밖에 없지만 지킬 것은 지켜야 했다.

두 번째로 현당은 오로지 무리, 즉 무공의 이치만을 요구했다. 내공을 수련하기 위해서는 무리와 함께 구결과 운공비법, 즉 내공을 운결 하는 흐름을 알아야 했다. 토하기의 무리를 알려준다고 해도 내공의 순환로를 모른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혈도를 따라 내공을 순환시키는 것을 운기(運氣)라고 하고, 운기 하면서 구결에 따라 행공하는 것을 행법(行法)이라고 하며, 그것을 운기와 행법을 합쳐서 운기행법(運氣行法)이라고 한다.

하지만 모용곽은 생각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일전에 현당이 의식을 잃었을 때, 모용곽 본인이 현당의 체내에 토하기를 집어넣으면서 운기행법을 말했었다. 사실 그때 현당은 의식을 잃은 척하고 있었다.

“토하기는 탕탕하게 흐르는 황하의 물줄기를 보고 깨달음을 얻으신 우리 모용가의 조사께서 창안하신 내공심법이다. 다른 여타 심법과 달리 쌓고 쌓은 것 위에 또 쌓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채우면 내공이 넘치고, 넘친 내공은 더 넓은 세상, 즉 더 큰 그릇으로 퍼져 나가는 것에 그 이치가 있으니, 결국 수련을 하면 할수록 내공이 넓이가 넓어져, 캐도 캐도 끊이지 않고 그 깊이가 줄지 않는 것이 바로 우리 토하기의 장점이라 할 수 있다. 남궁세가의 무공의 단점이 무엇인 줄 아느냐? 오로지 검에만 매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도구는 단지 수족의 연장일 뿐이야. 검을 들던 창을 들던 그것은 변함없다. 차라리 검에만 매달리느니, 그 원류를 찾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한 때다. 때문에 우리 모용세가는 어느 특별한 병기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천하의 십팔반병기 모두를 다루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속에서 통일되어 흐르는 원류를 깨닫고자 함이니! 네놈도 시간이 있다면 검에서 눈을 돌려 권장지각에 대해서도 배워놓도록 해라. 언젠가는 요긴하게 쓰일 곳이 있을 테니…….”

현당의 맑은 눈이 더욱 빛을 발했다. 모용곽의 말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현당은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모용곽의 말을 새겨듣고 있었다.

*  *  *

모용곽이 가고 현당은 한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만 있던 현당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탕하번천보(蕩河翻天步)를 아무리 연습해도 모용가주가 보여준 보법이 나오지 않는 것은 당연했어. 화련검을 비롯한 남궁가의 검법이 자하기를 바탕으로 하듯, 모용가의 탕하번천보도 토하기가 바탕이 되어야 하는 거야. 토하기의 무리를 모르고, 탕하번천보의 보보(步步)의 순서만 아는 것으로는 완벽한 탕하번천보를 흉내 낼 수는 없었던 거지.”

현당은 바닥에 깔았던 거죽을 걷어냈다. 전에 그려놓은 발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처음 시작할 때의 발자국을 따라서 천천히 발을 옮겼다. 점차 현당의 신형이 빨라졌다. 이내 모용곽이 보여주었던 몸놀림을 그대로 현당이 흉내 내기 시작했다.

*  *  *

새벽이 되자 현당은 부리나케 수련동으로 찾아들었다. 이제는 매일 일어나는 일이기에 수련동을 지키는 시위들도 현당을 막지 않았다.

남궁찬은 앞으로 남궁가 가산의 후미진 수련동을 쓰지 말고 태사자원의 가주 전용 수련동을 쓰라 했지만 현당은 이곳을 찾았다.

안으로 들어선 현당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현당의 주변으로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이제 막 떠오르는 햇살을 받아 반짝이기까지 했다. 그냥 안개가 아니라 누에가 몸에서 뽑은 고치처럼 뭉쳐 있는 안개였다. 때문에 비단실처럼 반짝였다. 그것도 한 올 한 올씩 뻗어 나와서 길게 똬리를 틀듯이 틀어진 모양을 하고 있었다.

빛깔도 오묘했다. 분명히 한 가닥만 놓고 보면 하얀색이지만, 뜨는 태양빛을 받아서 반짝일 때는 여러 가지 빛을 냈다. 마치 금강석을 빛에 비출 때 오색찬란한 것처럼 말이다. 전체적으로는 엷은 자색을 띠고 있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햇빛을 가리는 안개가 더욱 짙어졌다. 결국 현당의 전신을 감쌀 정도로 커지더니 정점을 이루었는지 천천히 현당의 콧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모든 안개가 현당의 콧속으로 들어가자 현당은 천천히 눈을 떴다.

“이 정도면 어느 단계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현당은 말없이 한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조금 있다가 대답이 들렸다.

“글쎄…… 한 덩어리인 것을 보면 오기조원이나 삼화취정은 분명히 아닐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일원기조라고 하기에는 또 애매하네요.”

우희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 알았어요? 아니, 어떻게 알았어, 내가 왔다는 것을? 수련에 방해가 될까 봐 일부러 기를 감추고 있었는데…….”

현당이 상의를 걸치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나 오랜 기간 한 자리에 앉아 있었는지, 아예 그가 앉아 있던 자리는 사람이 가부좌를 하고 앉는 모양으로 틀이 잡혀 있었다. 하루 이틀에 만들어진 자리가 아니었다. 적어도 한두 달 이상은 그 자리에서 같은 자세로 꾸준히 수련을 할 때 만들어진 흔적이었다.

현당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이 시간에 이 자리에 와서 내공 수련을 한 것이 틀림없었다. 소림사의 면벽동에는 달마대사의 삼 년 면벽 수련이 벽에 투영되어 있다고 하지 않은가.

“그러다가 한 번 당했지.”

“누구한테? 아, 남궁진.”

질문하던 우희가 알겠다는 듯 알아서 대답했다.

우희는 남궁진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눈에 불을 켜는 현당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안광은 바로 사라지고 현당의 눈빛은 무심했다.

그동안 우희는 현당의 실력이 어느 정도로 늘었는지를 가늠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라면 상대의 눈빛만으로도 그의 수련의 깊이를 측정할 수 있었다. 이미 현당은 우희의 상상을 벗어나고 있었다. 이제는 암수나 임기응변으로 상대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진신의 실력으로 남을 제압할 수 있는 고수로 현당은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지금의 현당은 직접 칼을 겨누지 않고는 진짜 실력을 가늠할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사람마다 기가 있지. 그리고 그 기는 또한 사람마다 다르고. 하지만 고수는 그 기를 감출 수 있다는 것을 몰랐어. 그게 바로 고수라는 것마저도. 내게 다가서는 남궁 아버지나, 우희 당신도. 그리고 모용가주도 언제나 기를 드러낸 상태로 내게 접근했지. 기가 무엇인지를 느끼면서 만난 고수는 이 셋이 전부니까. 하지만 난 남궁진이 내게 접근한 것도 몰랐어.”

우희는 현당의 눈빛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눈빛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 깊숙한 곳의 현당의 내심을 투시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맑고 깊기만 한 현당의 눈빛은 깊은 속내를 전혀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마치 속마음마저도 저처럼 맑고 깊은 것처럼…….

“사실 난 그때 죽을 수도 있던 거였어. 만약 남궁진이 수련동을 지키는 시위에게 들키지만 않았다면 나를 죽였을지도 몰라.”

“설마…….”

우희가 도리질을 쳤다.

현당은 무심한 눈길로 우희를 쳐다보았다.

“남궁진을 처음 봤을 때, 난 그의 눈빛 속에서 살기를 느꼈어. 남궁찬을 처음 본 날 느꼈던 눈빛 속에 담겨 있는 의미랑 똑같았지.”

현당이 별일 아니라는 듯 우희를 쳐다보며 미소 지었다.

아주 찰나였지만 우희는 더욱 차갑게 무심해지는 현당의 눈빛을 발견했다. 순간, 이 사람과 적이 되지 않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드시 현당은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순간도 짧게 지나갔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현당의 눈빛은 평소와 똑같았다.

“그때 깨달았어. 고수는 기마저도 감출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나도 연습하기 시작했지. 어떻게 하면 기를 느낄 수 있을까?”

우희는 흥미롭다는 듯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다.

“그래서 어떻게 알아냈어?”

현당이 시원스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알고 보니, 별거 아니더군. 정순하게 내공을 쌓으면 자연스레 감각이 발달하는 거였어. 그런데 어느 정도까지 발달할 수 있는 것이지?”

말로는 별것 아니라고 했지만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표현은 단순할지 모르지만 그것을 깨닫고 느끼기까지 얼마나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 하는지를 생각하자 우희는 현당이 새삼 다시 보였다.

“흐음…….”

심드렁한 표정으로 우희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모로 돌렸다. 살짝 곁눈질로 현당을 쳐다보는 것이 알고는 있는데 이야기하기 싫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나도 잘은 모르지만 대충은…… 그보다 당신의 상태가 어느 정도이지? 한 갑자? 그건 넘은 것 같고, 두 갑자? 삼 갑자를 넘으면 삼화취정에 오를 수 있다고 하니까, 그건 아닐 듯한데…… 정확히 어느 정도지?”

현당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뭔데?”

현당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인 우희가 실소했다.

“설마…….”

현당이 궁금한 듯 말똥말똥 쳐다만 보자 우희는 현당의 질문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 정말?”

현당은 우희가 무엇을 묻는지도 몰랐다.

정말로 현당은 일원기조니 삼화취정, 오기조원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내공의 수위를 따지는 단위가 있다는 것마저도 모르고 있었다.

우희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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