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
<57화>
지금까지 몇 수를 나누지 않았지만 바둑을 두면서 현당은 고민을 많이 했다. 지금 두는 대국은 처음 접하는 바둑 대국이 아니었다. 우희와 현당이 맨 처음 바둑을 둘 때, 그때의 대국 그대로였다.
현당은 처음과 똑같이 두고 있는데도 많이 힘들었다. 그때는 너무나 당연해 보이던 수도 지금은 전혀 달랐다.
따각.
흰 돌을 내려놓으면서 우희가 물었다.
“왜? 전에 그렇게 시원하게 두시던 양반은 어디 갔나요? 돌을 놓는 순서는 그때랑 똑같은데…….”
현당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밀리고 있는 탓에 얼굴은 웃고 있지만 속옷은 땀에 젖어 있었다. 머리끝까지 치솟는 화를 억제하느라 주체할 수 없었다. 요 근래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었다. 남궁진이 온다는 소리를 듣고부터 계속이었다. 우희에게 수를 읽히고, 모용미를 달래주지도 못했고, 남궁진에게 패했고, 까딱 잘못했으면 남궁찬의 손에 의해 목숨을 잃었을 지도 모른다. 게다가 지금은 우희에게 수담을 통해 조롱당하고 있었다. 현당은 가슴속에서부터 치솟는 분노를 가라앉히느라 애쓰는 중이었고, 다시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도록 안간힘을 썼다. 흥분하면 안 된다, 흥분하면 또 진다…… 열심히 주문을 외우고 또 외웠다.
“그때는 어떻게 그렇게 용감하게 두었는지 모르겠군.”
우희가 시원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바로 그것이죠.”
우희가 더 이상 바둑을 둘 생각이 없는지 돌을 쓸어 담았다.
“그만 두는 것인가?”
당황한 현당이 물었다.
“오늘은요. 먼저 알려드릴 것을 다 알려드렸으니 다음으로 넘어가야지요.”
현당은 깜짝 놀랐다.
우희의 말대로라면 무언가 가르쳐 주었다는 소리인데 알 수 없었다. 현당은 그녀가 한 말을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바로 그것이라고 했다. 그 전에 현당이 그때는 어떻게 이렇게 용감하게 두었는지 모르겠다고 했고…….’
순간, 현당은 둔기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똑같은 수였지만 그 수를 두는 사람이 달랐다. 그날의 현당과 오늘의 현당이 달랐다. 똑같은 위치에 똑같은 순서로 둔 것일지라도 그 날의 현당이 두는 수는 고작 한 수 앞을 내다보는 정도밖에 안 되었지만, 오늘의 현당이 두는 수는 사오 수는 생각하면서 두고 있었다. 겉으로는 같을지 몰라도, 그 안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는 전혀 달랐다. 그것도 차원이 달랐고 의미뿐만 아니라 그 돌 하나하나가 지닌 힘도 달랐다.
우희가 지적한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같은 화련검 일초라도 맨 처음 목검을 잡았을 때의 현당의 기지일보와 얼마 전 천인혈을 처음 안았을 때의 현당이 펼치는 기지일보가 달랐다. 또한 그것은 남궁진에게 패한 현당이 내지르는 천인혈의 화련검 기지일보와 결코 같을 수가 없었다.
어떤 무공이든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수련의 깊이요, 내공의 정순함이고, 초식의 의미의 깨달음이다.
너무나 큰 깨달음에 현당이 전신 근육에 경련을 일으켰다.
오늘 남궁찬에게 자하기 수련을 받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예전에 어깨 너머로 훔쳐 배운 자하기였다. 모르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막상 정식으로 배우자 현당이 알고 있던 것과 전혀 달랐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내기의 순환 경로일 뿐, 그 속에 담긴 힘과 그 힘 속에 담긴 내경, 내경 속에 담긴 우주의 창조 원리, 그리고 다시 그 원리를 따라 현당의 하단전에 소우주를 만드는 그 힘을 모르고 흉내만 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모른 채 자하기를 흉내 낸다면 달걀 껍데기는 만들 수 있어도 달걀 속에 들어 있는 노른자와 흰자는 만들 수도 없었을 테고, 달걀을 깨고 나오는 봉황은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현당은 마음속으로 자세를 바로 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척 우희를 바라보았다.
“그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지.”
현당의 말에 우희가 마음에 든다는 듯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좋아요. 그럼 무엇부터 시작할까? 화련검? 육합검? 아니면 삼재검?”
현당은 고개를 저었다.
“제 ․ 련 ․ 현 ․ 마 ․ 강!”
또박또박 끊어서 발음하는 소리가 수련동 안을 울렸다.
* * *
태사자원은 작은 남궁세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람이 먹고 잘 수 있는 침실과 거실이 있는가 하면, 가주 전용의 해우소도 있었고, 서고, 무고, 약실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그것도 남궁가에서 가장 좋은 것들로만 꾸려진 곳이 바로 태사자원이었다.
현당은 태사자원이 왜 그렇게 클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제야 깨달았다.
태사자원 안에 있는 수련동에서 현당은 남궁찬의 집중적이고도 정성 어린 조련을 받았다. 전과 달리 현당의 초식 동작을 보면서 자상하게 틀린 곳을 일일이 지적해 주기까지 했다.
그러기를 한 달여……. 현당의 실력은 나날이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그것은 현당 본인이 실감할 지경이었다. 깨닫는 바가 달랐고 덕분에 도를 쓰는 법도가 달라졌다.
오늘은 웬일인지 남궁찬은 현당과 마주앉아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했다. 전과 다른 무언가가 또 있었다. 현당은 긴장하면서 남궁찬의 말을 새겨들었다.
“네가 이곳에 온 지 얼마나 되었지?”
현당이 바로 대답했다.
“네 달째 되어갑니다.”
남궁찬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태사자원에서 네놈을 가르친 지 말이다.”
“아…….”
현당은 깨닫는 바가 있었다. 남궁찬은 지금 진심으로 남궁찬이 현당을 지도하기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는가를 묻고 있었다.
“한 달 정도 되었습니다.”
남궁찬이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이라…… 네가 욕심이 많아서인지 성취도 빠르구나.”
현당은 가볍게 양손을 포개고 읍했다.
“다 남궁 아버지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남궁찬이 잔을 내려놓았다. 현당도 자세를 바로 했다. 전과 달리 기간을 따지고, 현당의 성취를 격려하는 것으로 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분명했다. 한 마디도 놓치지 않을 것처럼 현당은 귀를 씻고 머리를 비웠다.
“그럼 오늘부터는 본가 가주만의 무공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을 익히겠다. 시간이 되는 대로 차근차근 익히도록 하고, 우선 오늘은 내가 시범을 보일 테니, 그것을 눈여겨보도록 해라.”
오랜만에 남궁찬이 직접 자신의 검을 집어 들었다.
“우리 남궁세가에는 네 가지 절기가 있다. 첫 번째는 바로 남궁세가의 모든 무공의 근간(根幹)이 되는 자하기다. 비 온 날 새벽에 끼는 안개처럼, 하늘에 떠 있는 구름처럼 사람과 세상 사이를 흐르는 바람처럼 어느 곳이라도 무리 없고 막힘없이 유유히 흐르는 내공심법이 바로 우리 가문의 자하기다.”
현당도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에 현당은 아무 표정 없이 남궁찬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두 번째는 네가 배운 적이 있는 유운검법이다. 흐르는 물처럼, 바람결에 모였다 흩어지는 구름처럼 형이 없이 자유롭게 흐르는 검법이 바로 유운검법이다. 유운검법이야말로 자하기와 한 쌍을 이루는 검법이라 할 수 있다. 안으로는 자하기가 흐르고, 밖으로는 유운검이 흐름으로써 제대로 된 검법이 펼쳐진다. 자하기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유운검법의 극의에 도달할 수 없다.”
듣고 있던 현당은 남궁찬이 너무 간단하게 설명을 하느라 이야기를 빠뜨린 것이 아닌가 싶었다.
남궁덕이 유운검법에서 이르기를 안으로는 자하기, 몸으로는 유운신법과 유운보법이 그리고 검으로는 유운검을 펼쳐 기신체(氣神體 : 기운과 의식과 몸)의 삼합을 이루어야 한다고 되어 있었다.
한데 지금 남궁찬은 유운신법이나 유운보법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고 하고 있었다.
남궁찬은 현당이 표정 없는 얼굴로 자신의 말을 듣고 있기에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현당이 듣고 있는지 아닌지 신경이 쓰였다.
“다음으로 세 번째는 일지선(一指禪)이라는 권법이다. 경풍권록(輕風拳錄)의 권법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상승 무공으로 나가기 위해 기초적으로 익혀야 할 권각술에 불과하니, 일지선이야말로 남궁세가의 이름에 걸맞은 유일한 권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는 칼이 없는 검사(劍士)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속설을 의식하고 만들었다는 말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권법이다. 일지선은 다음 기회에 네게 가르쳐 주겠다.”
이것도 현당은 알고 있었다. 이건 권도 아니고, 장도 아니요, 지도 아니었다. 검으로 찌르듯이 내지르는 일초의 수도(手刀)라고 하는 것이 가장 적당할 것 같았다. 상대의 공격을 팔다리로 막는 것이 아니라, 그 틈을 파고 들어가 검법의 찌르기처럼 상대의 혈이나 급소를 일초에 찌르는 것을 말했다.
하지만 현당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그게 아니었다. 남궁세가에는 또 다른 권법이 있었다.
용봉쌍련(龍鳳雙連).
남궁덕이 만든 권초로, 용과 봉이 함께 춤을 추듯이 권장지각(拳掌指脚)에 구애받음 없이 자유롭게 펼치는 권초다. 이는 검맹 남궁덕이 노년에 검을 놓으면서 창안한 권법으로 정해진 투로나 형이 없고, 내기의 흐름과 수족의 놀림에 따라 그리고 그 상황에 따라 펼치는 무공이었다. 남궁덕이 이르기를 이제야 깨달음에 한발 다가섰다 하며 유운신법, 유운보법과 한 쌍이 될 수 있는 권각이라고 했다.
하지만 남궁찬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용봉쌍련에 대한 이야기는 쏙 빼놓고 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되는 이것은 네 사대조 조부되시는, 아니군. 내 삼대조 즉 증조부 되시는 분이 창안한 검법으로 오로지 검기만을 이용하는 상승 검결의 집대성이라 아니할 수 없다. 비폭연(飛瀑淵)이라고 하지. 폭포를 뛰어오르는 잉어를 보고 지으셨다고 전한다.”
겉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머릿속으로 현당은 비폭연의 앞에 쓰여 있는 글귀를 떠올리고 있었다.
필부(匹夫)가 검기를 뛰어넘어 검강(劍罡)만을 위한 검법을 생각하느라 고심하던 차, 간밤에 꾸었던 꿈속에서 이무기가 폭포를 거슬러 승천하면서 용이 되는 것을 보았다.
굉음을 울리며 떨어지는 물줄기는 오히려 이무기에게는 길이 되어 주었고, 바위도 뚫는 그 힘은 반대로 승천하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드디어 물줄기를 벗어나 하늘로 비상하는 순간, 전신이 폭죽처럼 터지면서 순간, 이무기는 더 이상 이무기가 아니라 비룡이 되어 구름을 뚫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것을 본 필부는 여기 사초식의 검강만을 위한 검법을 남긴다.
책에서는 분명 검기가 아니라 검강이라 했다. 잉어가 아니라 승천하는 용이라 했고, 사초 검법이라고 했다.
이제 현당은 확신이 들었다. 남궁찬은 의도적으로 다르게 지도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그래 왔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남궁찬이 현당에게 지도하고 있는 것은 그랬다. 겉으로는 남궁세가의 무공의 핵심을 가르치고 있는 듯싶지만, 그중에서도 마지막 정화(精華)만은 의도적으로 빼놓고 지도하고 있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던 현당의 상념은 남궁찬이 하는 다음 말에 끊어졌다.
“잘 봐두도록 해라. 일초, 회회각리(回回角鯉).”
회회각리.
뿔이 돋은 이무기가 폭포 바로 아래에 빙빙 맴돌면서 바위도 뚫는 폭포 줄기에도 굴하지 않고 기운을 모으고 모아 한순간, 승천할 기회만을 노린다.
남궁찬의 검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마치 그의 몸은 한 마리의 잉어이고, 천 근 바위도 뚫을 것처럼 사방에서 쏟아지는 폭포의 물줄기가 행여나 잉어의 비늘 하나라도 손상시킬까 온몸을 감싸고도는 것처럼 검이 움직였다. 보이지 않는 검기가 그의 진신을 에워쌌다. 어느 것으로도 그것을 뚫을 수 없을 것만 같아 보였다.
남궁찬이 있는 바닥의 주변으로 돌 조각들이 튀면서 흙먼지가 일었다. 그리고 바닥이 깊게 패였다. 그만큼 검기가 강하게 남궁찬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깊게 파고 들어가고 있었다.
“이초. 명리탄폭(命鯉彈瀑)”
명리탄폭.
하늘로부터 승천의 명을 받은 이무기가 폭포를 타기 시작한다.
그물처럼 남궁찬의 전신을 감싸던 검기가 하나로 뭉치기 시작했다. 마치 사방으로 흩어졌던 날실과 씨실이 모이면서 하나의 단단한 줄기를 만드는 것처럼 엉키기 시작했다.
파바바.
남궁찬이 서 있는 맞은편 수련동 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새로운 균열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검기를 버티지 못하고 깨져 나가고 있었다.
“삼초. 비리탈망(飛鯉脫網).”
비리탈망.
드디어 날아오른 잉어는 폭포의 물줄기가 만드는 그물을 뚫고 벗어난다.
남궁찬이 하나로 엮은 검기가 일시에 살아 있는 잉어처럼 펄떡이기 시작했다. 그가 이끄는 대로 검기는 용틀임하면서 수련동의 벽을 파내고 골을 만들기 시작했다.
콰르르.
벽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한쪽에 구멍을 만들었다. 이곳 태사자원 안의 수련동이 지하였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벽이 무너지면서 밖이 보일 뻔했다.
“비폭연은 모두 회회각리, 명리탄폭, 비리탈망의 삼초로 되어 있다. 이 모두가 상승 무공의 검기를 다루는 비법으로 내공의 소모가 심할 뿐만 아니라 극히 패도적이기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드물다 할 것이다. 익힐 시간은 없을지라도 상승 무공으로 가는 지름길이니 눈여겨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현당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산을 허물고 물을 가른다는 전설의 무공이 실존한다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본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익힐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현당의 얼굴이 굳은 이유는 딴 데 있었다. 남궁찬은 설명을 하지 않고 있지만, 현당은 이미 비폭연이라는 책을 모두 외우고 있었다. 그것을 어떻게 익히고 수련하고 어떻게 펼치는 것인지를 모르고 있었을 뿐이었다.
지금 남궁찬은 잉어 리(鯉) 자를 쓰고 있지만, 실제 비폭연에서는 이무기 곤(鯤) 자를 썼다. 회회각리, 명리탄폭이 아니라 회회각곤, 명곤탄폭, 비곤탈망이었다. 더욱이 현당이 지금 머릿속에서 그리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사초. 화룡파란(化龍破卵)…….’
마침내 이무기는 용이 되어 알을 깨고 하늘로 날아오른다.
남궁찬이 시연한 비폭연 일, 이, 삼초를 보면서 남궁찬이 입도 뻥긋하지 않고 있는 마지막 사초 화룡파란을 현당은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