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무사-56화 (56/175)

# 56

<56화>

털썩. 처컹.

지쳐 바닥에 드러누운 현당의 모습이 보였다.

우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남궁찬이 열어놓은 문을 통해 밖이 보였다. 벌써 날이 밝고 있었다. 꼬박 사흘이었다. 현당은 사흘 동안 쉬지 않고 도를 놀렸던 것이다.

시녀가 살짝 고개를 내미는 것이 보였다. 안에서 들리는 소리가 멎기를 지금껏 기다리고 있었던 듯싶었다. 이것 모두 남궁찬의 조치였을 것이다.

우희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녀가 준비된 물건을 갖고 들어왔다.

우희가 현당에게 다가가자 시녀도 따라왔다.

“오지 마.”

현당의 목이 바싹 말라 있는지 쉰 목소리가 들렸다.

우희는 현당의 말을 무시했다. 하지만 완전히 무시하지는 못했는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현당이 손을 들어 눈을 가리고 있었다. 울고 있는지도 몰랐다.

빠드드드…….

남궁진에게 패한 것이 분한지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남궁진에게 졌기 때문에 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이 누군가에게 패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분한 것이리라.

우희는 옷이 더럽혀진다는 사실은 신경 쓰지도 않고 현당 곁에 무릎 꿇고 앉았다. 그리고 가만히 현당의 손을 쓰다듬었다.

쓰라릴 것만 같았다. 물집이 터지고, 허물이 벗겨지고, 피고름이 딱지를 얹었다가 그것도 부서져서 허연 속살이 드러나 있었다. 끈적끈적한 진물이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우희가 고개를 끄덕이자 시녀가 뽀로통한 표정으로 들고 온 것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했다.

벌써 현당이 건드린 시녀라고 우희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익히 우희가 알고 있는 현당이라면 그냥 놔두었을 리 만무하니까 말이다.

우희는 시녀가 두고 간 물건들을 들여다보았다.

대야와 수건 몇 장, 그리고 물약이 담긴 약병, 물병과 그리고 고약이 전부였다. 우희는 침착한 동작으로 대야에 물을 붓고, 약병의 약을 부었다. 청아한 향기와 함께 대야에는 먹물처럼 검은색의 약물이 만들어졌다.

우희는 현당의 머리를 들어 자기 무릎 위에 얹었다. 그리고 물병을 기울여 그의 입술에 방울방울 떨어뜨렸다. 말라서 부르튼 입술 위로 물방울이 충돌을 일으키고는 부서졌다. 이내 찢어진 입술 사이로 스며들었다.

현당의 마르고 갈라진 입술이 꿈틀거렸다. 상처가 벌어지며 따가울 것만 같았다.

다음으로 우희는 조심스럽게 현당의 손을 대야에 담갔다. 말라비틀어진 피고름이 떨어지면서 상처가 드러났다. 상처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현당의 손이 떨렸다. 그게 아니라면 힘이 없어 근육들이 경련을 일으키는 것이리라.

우희는 마음이 저려왔다.

현당의 손에 묻은 먼지와 고름과 피딱지를 다 닦아낸 우희는 그의 상처를 수건으로 깨끗이 닦아냈다. 이어 고약을 발라 상처를 감싸고는 마지막으로 약물을 적신 수건으로 현당의 얼굴을 쓰다듬듯이 닦아주었다.

현당의 헌앙한 얼굴이 마치 흙 속에 덮였다가 드러나는 것처럼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불현듯 우희는 지금 하는 일이 즐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그녀의 손길에 따라 그녀가 좋아하는 얼굴이 나타나는 것이 즐거울 따름이었다. 현당의 얼굴이 좋은 것인지, 남궁적의 얼굴을 좋아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우희는 전부터 상상하던 일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불현듯 이게 행복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우희의 손이 다시 현당의 입술에 이르렀을 때, 우희는 극도의 자제심을 발휘해야만 했다. 자신의 입술로 갈라진 그의 입술을 적셔주고만 싶었기 때문이다.

크게 숨을 몰아쉬면서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그제야 현당의 목에 나 있는 상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가늘게 베어진 상처. 보통 날카로운 칼날이 아니라면 저런 상처가 날 리 없었다. 면도(面刀 : 납작한 칼날병기)도 보통 면도가 아니리라.

상처가 깊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저도 모르게 손이 그곳으로 향했다.

“엉터리야.”

오랜만에 현당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가?”

“제련현마강 말이야. 뭐가 고금제일의 호신강기야. 남궁진의 강기 하나 막지 못하고…….”

그제야 우희는 그 상처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제련현마강은 엉터리가 아니에요. 정말 고금제일이 맞습니다. 당신이 제대로 수련하지 못한 것이지요. 그게 아니면 내공이 부족하거나.”

현당이 이죽거렸다.

“그게 아니면 가르치기를 제대로 안 가르쳤거나.”

쿵.

“아!”

현당이 손으로 뒤통수를 싸매며 비명을 질렀다. 우희가 현당의 머리를 받치고 있던 무릎을 빼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던 것이다.

“엉터리는 당신이에요.”

“뭐라고?”

현당이 소리치며 상체를 일으켰다. 이내 몸을 지탱하던 팔에 힘이 없어서 도로 엎어졌다.

“그런 칼질은 백날을 백번 해도 소용없으니까.”

대답하면서 우희는 현당이 집어던진 천인혈을 잡아갔다. 망설이지 않고 현당이 서 있던 자리에 가 섰다. 도를 머리 위로 치켜 올리더니 앞으로 한 발 나가면서 그대로 내리그었다.

사아아…….

베어지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저 우희가 현당이 두들기던 원목의 타격대를 스쳐 지나갔을 뿐이었다.

쿠궁.

그제야 잘린 나무가 바닥을 짓찧는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도는 도, 부(斧)는 부예요. 도에는 도에 맞는 사용법이 있고, 부에는 적절한 부법이 따로 있다는 말.”

우희는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몸을 돌렸다.

“오후에 다시 오겠어요. 이제부터는 쉴 시간도 없을 테니까, 그렇게 알아요.”

우희는 싸늘한 한마디를 남기고 몸을 돌렸다.

몸을 돌리고 나가는 사람은 우희인데 무언가를 놓친 듯한 허전함에 가슴 속이 저며 오는 사람도 우희였다.

*  *  *

현당은 태사자원에 들어서는 순간, 느껴지는 싸늘한 냉기에 멈칫거렸다. 하지만 그것을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왜 멈칫거렸느냐?”

“기를 느꼈습니다.”

“무슨 기더냐?”

현당은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사실대로 이야기할까 망설였다.

“살기였습니다.”

“그럼 살기를 느끼고도 왜 들어섰느냐?”

“정말 저를 죽일 생각이시라면 기를 남기지 않으셨겠지요.”

현당의 살을 에는 듯한 기운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남궁찬이 살기를 거둔 것이었다.

“기는 언제부터 느끼기 시작했느냐?”

그냥 인기척 같은 느낌이나 감을 묻는 것이 아니었다. 진짜 고수들이 자연발생적으로 풍기는 기운을 말하는 것이었다.

현당은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얼마 되지 않습니다.”

대답을 하면서 현당은 ‘그’의 호칭을 뭐라고 해야 할지 망설였다. 진 삼촌이라고 할까 하다가 남궁찬이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자 그만 두었다.

“일전에 남궁진을 처음 보았을 때, 그때 느꼈습니다.”

“큭.”

남궁찬은 코웃음을 치면서 몸을 돌렸다.

“따라와라.”

남궁찬은 현당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  *  *

그그그.

현당이 들어서자 등 뒤의 문이 닫혔다.

“여기는 가주와 가주를 이을 사람만이 들어올 수 있는 진짜 수련동이다. 가주 전용의 밀실이라고 할 수 있지. 대대로 가주가 차기 가주에게 상승 검법과 자하기의 상승 심결을 지도하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적아가 주화입마에 빠진 곳도 바로 여기다. 너를 왜 이곳으로 데려 왔는지 아느냐?”

“제게 바라는 바가 있어 오셨을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현당은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것도 한 자 한 자 똑똑 끊어서 발음했다.

“타(打). 도(倒). 진(進)!”

남궁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진을 이기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느냐?”

“상승 무공. 진짜 고수에게는 더 이상 꽁수가 먹힐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상대가 방심하기를 기다릴 수도 없고, 임기응변으로 대처하기에는 남궁진의 무공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입니다.”

남궁찬의 목소리가 조금 격앙되었다.

“강할 뿐만 아니라 놈은 치밀하기까지 하다. 게다가 적아나 너처럼 수련동에서 이론만으로 익힌 것이 아니라,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실전으로 단련한 것이 틀림없다.”

현당은 깜짝 놀랐다.

분명 정보력은 우희가 났다는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는데, 우희는 그런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우희가 그 이야기를 안 했을 리가 없었다. 그것은 곧 우희도 거기까지는 미처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했다.

“어찌…….”

“어찌 아냐고? 녀석의 동작을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녀석은 네놈이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살모사처럼 그곳을 파고들어서 독니를 콱 박고 마지막 한 방울의 독까지도 다 쏟아 부을 것처럼 네 허점을 파고들었다. 녀석의 별호가 무엇인지 아느냐?”

“패검군(覇劍君)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래. 패검군이다. 하지만 지금의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패검(覇劍) 군(君)이 아니라 패(覇) 검군(劍君)이다.”

현당은 그 말이 무슨 뜻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패검 띄고 군자를 붙였다면, 패검을 따르는 무도인이라는 뜻이고, 패자만 따로 띄어서 검군 앞에 붙인다면, 검군을 무너뜨린다는 소리다. 전자가 아니라 후자, 즉 검군을 무너뜨린다면 검군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현당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남경에서 검의 조종이 누구인가? 바로 남궁세가를 말한다. 즉 검군이란 남궁세가의 가주를 뜻하는 것이리라. 남궁진은 은유적으로 남궁세가와 칼을 겨루겠다는 뜻을 드러내고 있었다.

“놈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한시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 첫째도 실력, 둘째도 실력이다. 알겠느냐?”

현당은 자세를 바로 했다.

남궁찬이 수련동이 아니라 태사자원 안의 밀실로 현당을 데려온 것에서부터 남궁가주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제대로 가르칠 터이니, 제대로 배우라는 말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남궁가의 모든 무공은 자하기에서 시작해서 자하기로 끝난다. 지금부터 자하기 수련에 들어가겠다.”

현당이 남궁찬의 말을 끊었다.

“그 전에…….”

말이 끊긴 남궁찬이 현당을 노려보았다. 감히 네놈이 내 말을 중간에 끊었느냐고 묻는 눈빛이었다.

현당은 남궁찬의 눈빛을 무시했다.

“한 번 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순간, 남궁찬의 눈빛이 풀어졌다.

현당도 알고 있었다. 남궁찬에게는 남궁진에게 패한 현당이 더 이상 쓸모없었다. 그렇다면 굳이 살려둘 이유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도 남궁찬이 현당을 이곳으로 데려온 것은 아직도 현당을 활용할 생각이고, 그래서 제대로 한번 써보기 위해 조련할 생각에서였다.

남궁찬이 실소하더니 이내 정색을 하며 얼굴색을 바꾸었다.

“하지만 잊지 마라. 난 아직도 내 아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언제라도 내 아들에게 위험이 되거나 걸림돌이 되는 놈이라면 그것이 누구이든 상관없이 가차 없이 베어버릴 것이다.”

현당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남궁 아버지.”

냉랭한 시선으로 남궁찬이 현당을 쳐다보았다. 현당도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현당의 눈빛은 의외로 담담했다.

‘그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현당은 피부에 와 닿는 밀실 안의 차가운 공기를 통해서 되찾은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

*  *  *

수련동으로 들어서던 현당은 머뭇거렸다. 우희가 먼저 와서 현당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수담(手談 : 바둑)이나 한번 할까요?”

우희가 우아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현당은 조금 당황했다. 무공 수련을 지도하리라 생각했던 우희가 갑자기 수담을 나누자 했기 때문이다.

“수담이라니, 의외로군.”

현당은 우희와 마주앉으면서 흑을 잡았다. 우희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전에 맞두고도 저를 이겼잖아요?”

“그때는 우희가 내 실력을 몰랐기 때문이지. 정말 문사의 실력이 나보다 못해서가 아니잖아.”

우희가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스스로 하수임을 인정하는 현당이 현명해 보였다.

“그럼 내가 백을 잡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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