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무사-53화 (53/175)

# 53

<53화>

현당은 벌써 흥분이 가라앉아 있었다. 아니, 오히려 머리만 뜨겁고 몸과 마음은 싸늘하게 식어 있다고 하는 게 옳았다.

겉으로는 우희의 말에서 단서를 잡고 좋아하는 척했지만, 그것이야말로 우희가 원하는 바이기 때문에 그런 척했을 뿐이었다. 표정과 달리 현당의 머릿속은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왜일까? 왜 내게 남궁진이 온다는 것도 알려주고, 묻지도 않았는데, 남궁진이 나를 본 지 십 년이나 지났다는 이야기를 해준 것일까? 넌지시 흘린 것을 보면, 분명히 내가 원하는 정보가 그것이라는 것을 알고 알려준 것이 틀림없는데…….’

머리가 아파왔다.

이 모든 것이 결코 쉽게 넘겨서는 안 될 일이지만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당장은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들이 쌓여 있었다. 현당은 우희의 속내를 파악하는 문제는 일단 뒤로 미루어놓았다. 어쨌거나 당면 문제는 남궁진이었다. 남궁진이 현당 대신에 남궁가의 대표로 나가는 일은 없어야 했다.

이것은 현당이 죽고 사는 문제였다. 남궁진에게 패하고 더 이상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현당을 남궁찬이 살려둘 리 없기 때문이다.

남궁가의 문 안으로 들어서는 현당을 기다렸다는 듯이 동가륜(桐家輪) 왕람(王嵐)이 낚아챘다.

“어디를 다녀오십니까? 가주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현당이 깜짝 놀랐다.

“이야기하지 않았나? 모용가에 다녀온다고…….”

왕람이 눈을 살짝 흘겼다.

“다음부터는 다른 세가에 가실 일이 있으시거든, 꼭 제게 먼저 기별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건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니까 말입니다.”

현당은 고개를 끄덕이는 둥 마는 둥 했다. 무엇보다 남궁가주가 그를 찾은 이유가 시급했기 때문이다. 서둘러서 왕람의 뒤를 따라 태사자원으로 들어섰다.

*  *  *

타앙.

현당이 들어서기가 무섭게 다탁을 내리치는 소리가 대전 안을 울렸다.

“하라는 수련은 안 하고, 어딜 다녀오는 게냐?”

현당은 어이가 없었다.

분명히 시위를 통해 기별을 넣었고, 허락을 받은 후 나갔건만 보고를 받지 못한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대꾸하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최대한 공손한 어조로 대답했다.

“황급히 나가는 바람에 제가 말씀드린다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모용가에 다녀왔습니다.”

순간, 남궁찬의 굳은 얼굴에서 흠칫 놀라는 표정이 그려졌다. 모용가를 다녀왔다는 사실에 놀란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놀란 이유는 하나뿐이다. 그에 대해 들어놓고도 남궁찬은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예상대로였다. 기억을 더듬는 것처럼 남궁찬이 잠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다른 일 때문에 보고받은 내용을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현당의 머리가 빠른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남궁찬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들었던 소리마저 잊어버리고 있는 것일까? 분명 다른 생각은 하지 못할 정도로 급한 일을 의미할 터였다. 무엇일까? 행여나 지금 현당이 당황하고 있는 일과 연관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현당이 모용가에 무슨 일로 다녀왔는지도 궁금할 텐데…….

현당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기대했던 질문이 이어졌다.

“갔던 일은 잘 되었느냐?”

역시 그랬다. 남궁찬 역시 남궁진의 출현에 대한 정보를 듣고 조급해하는 중이었다.

“예, 아버님. 좋은 이야기를 듣고 왔습니다.”

남궁찬이 허리를 앞으로 숙였다.

“좋은 일이라니?”

“구(鉤)에 대해 듣고 왔습니다.”

타앙.

다시 다탁을 내리치는 소리가 울렸다.

똑같은 다탁을 두드렸지만 소리가 달랐다. 처음에는 누군가를 질타하듯이 대전 안을 짓누를 것처럼 강한 소리였지만, 지금은 흥에 겨워 박자를 맞추느라 두들기는 소리 같았다. 남궁찬은 입으로 ‘옳거니!’ 하고 추임새를 넣는 대신에 다탁을 내리쳤던 것이다.

현당이 이유 없이 구에 대해 묻고 다녔을 리 없다 생각했다. 즉 현당 스스로가 구의 용법과 대응책의 필요성을 느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현당도 남궁진이 오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그에 대해 대비책을 강구하기 위해 모용곽을 찾아간 것이 마냥 대견스러웠다.

이제 현당은 확신할 수 있었다. 남궁찬이 이처럼 다급하게 현당을 찾은 일이 남궁진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도 남궁진이 남경으로 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현당이 깨달은 것은 따로 있었다. 남궁세가보다 문당의 정보력이 더 빠르고 정확했던 것이다.

남궁찬은 이제야 남궁진에 대한 소식을 듣고 현당을 찾았는데, 우희는 벌써 예전에 현당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고, 모용가에게도 현당이 올 것이라 통보하지 않았던가. 이것은 분명 정보력에 있어서는 문당이 앞선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면서 현당은 놀라는 모습을 감추었다.

다행히 남궁찬은 그 점을 지적하지 않고 넘어갔다. 그만큼 남궁진의 출현이 남궁찬에게는 중요한 일이라는 소리였다. 그런 소소한 것들을 파악하지 못할 만큼…….

“간 김에 모용미도 보고 왔느냐?”

현당은 고개를 저었다.

“일이 급하여 눈인사만 하고 왔을 뿐입니다.”

타앙.

말은 하지 않아도 마음에 든다는 소리였다. 남궁찬 생각에 일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현당이 흡족했다는 것이리라.

“가서 무엇을 듣고 왔는고?”

“날이 굽은 단병기의 용(用)을 배웠습니다.”

타앙!

“그래서 무엇을 얻었는고?”

현당은 천인혈을 도병에 꽂은 채 앞으로 당겼다.

“모르겠습니다. 고작 생각나는 방법이라곤 공(攻)에 공(攻)밖에 없었습니다.”

“공에 공이라?”

“상대가 움직이기 전에 먼저 제압하는 것 외에 다른 방도를 못 찾겠습니다.”

남궁찬이 조용히 미소 지어 보였다.

“그것도 한 방법이지.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거늘…….”

눈을 가늘게 뜨면서 현당을 바라보았다.

“따라오너라. 내가 직접 가르쳐 주겠다.”

남궁찬이 먼저 수련동으로 향했다. 앞서가는 그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벌써 현당에게 무엇을 가르치겠다는 마음에 흥이 겨운 것이리라. 어쩌면 남궁찬은 머릿속으로 현당이 남궁진을 베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  *  *

“타핫.”

현당이 쥐고 있는 낫을 휘두르는 것보다 먼저 남궁찬이 뒤로 물러났다. 지금은 현당이 겸을 휘두르고, 남궁찬이 검으로 상대하고 있었다.

“공의 공만 있는 것이 아니라, 퇴(退)의 퇴(退)도 있을 수 있다. 단병기의 단점이 무엇이냐? 공격의 반경이 작다는 데 있다. 아직 검과 도의 이치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최선의 방어가 공격이라는 생각에 공격에 또 공격을 하겠다고 생각했을 수 있지만, 차라리 상대의 한 치 짧은 병기를 상대할 때는 내가 한 치 물러남이 더욱 좋은 수로다. 봐라. 난 네 사정거리 밖에 있지만, 넌 내 사정거리 안에 있지 않느냐?”

남궁찬이 검으로 현당의 미간 사이를 노렸다. 현당은 꼼짝할 수가 없었다. 지금 현당이 양손에 쥐고 있는 것은 낫이었다. 하지만 날이 짧은 낫으로는 남궁찬의 옷깃 하나 건드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 낫을 치켜들기도 전에 검에 미간이 꿰뚫릴 것만 같았다.

“또 해보아라.”

남궁찬이 검을 거두었다.

“타핫.”

기다렸다는 듯이 현당이 앞으로 뛰어나갔다. 그러나 멈칫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공격하기 위해서는 한 발 다가서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피를 보지 않으면 방법이 없었다. 어느새 남궁찬의 검이 현당의 명치, 즉 단중혈(膻中穴)에 닿아 있었다.

“잊었느냐? 내 검은 네 낫보다 무려 한 자 다섯 치가 길다. 네 움직임보다 한 발 늦게 움직였음에도 네 예봉을 꺾을 수 있는 것이 바로 병장기의 길이에 있음이다. 후발선제(後發先制)의 가장 단순한 이치가 바로 여기 있느니.”

현당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낫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옷을 뚫고 명치까지 서늘한 예기를 뿌리는 남궁찬의 검을 보았다. 마지막으로 그가 갖고 있는 천인혈을 내려다보았다.

“그렇군요.”

현당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이 모든 대응 방법의 공통점은 무엇이냐?”

“내 병기의 이점을 취하고, 상대 병기의 단점을 노리는 데 있습니다. 상대가 다가오는 것보다 먼저 물러나되, 내 사정거리 안에 두는 것도 한 방법이요, 상대가 공격 범위 안까지 다가서기 전에 내 사정거리에서 먼저 선공하는 것이 후발선제에서의 핵심이었습니다. 모두가 한 자 이상 긴 검의 길이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남궁찬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알겠느냐? 상대가 무엇을 쥐고 어떤 것을 들던, 너는 네가 알고 있는 것을 제대로 알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모르고 있었다. 아니, 들었지만 그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항상 머리만 써서 급한 대로 일을 해결할 생각만 했지, 어디에나 통할 수 있는 정도(正道)로 남들 다 가는 길을 갈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평범한 곳에 진리가 있다고 이제야 그것을 깨닫기 시작한 현당이었다. 어느 병장기를 들던 상관없었다. 알아야 할 것은 자신이 들고 있는 병기의 용법과 용례였다. 그 안에 해결책이 있고, 그 안에 길이 있었다.

이제 가르칠 것은 다 가르쳤다는 듯 남궁찬이 검을 거두며 묻고 싶은 말을 꺼냈다.

“그런데 진이 녀석이 온다는 것은 누구에게 들었느냐? 나도 좀 전에야 알았거늘…….”

순간, 현당은 깨달았다. 왜 우희가 현당에게 남궁진에 대한 정보를 흘렸는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남궁진이 남경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남궁가의 가주, 남궁찬보다 우희가 먼저 알고 있었다. 그 말은 곧 문당의 정보망이 벌써 남궁가의 정보망을 넘어서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었다. 우희는 현당에게 그것을 과시하려고 했던 것이다. 더불어 현당에게 살기 위해 남궁가를 선택할 것인가, 우희와 손을 잡을 것인가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것은 현당이 우희에게 들이민 칼을 반대로 퉁겨내고 동시에 그 칼로 현당의 멱을 노리도록 한 것이었다. 남궁가를 버리고 문당에게 몸을 맡긴다는 것은 지금까지 계획하고 실행해온 현당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뒤집을 수 있는 일이기에 충분했다.

현당은 암담해졌다.

남궁가가 우희의 문당보다 뛰어나다는 전제하에 남궁가라는 언덕에 몸을 비비려던 현당은 계획을 다시 세워야 했다.

*  *  *

한창 천인혈을 흔들며 검법을 도법으로 변환시키던 현당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누군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헉!’

서둘러 뒤로 신형을 날리며 사방을 훑어보았다.

찰나에 몸에 걸친 옷자락으로 식은땀이 스며들었다. 상대가 현당을 노렸다면 그는 쥐도 새도 모르게 목이 베어졌을 것이다. 그동안 가만있다가 상대는 일부러 현당이 느끼도록 인기척을 냈던 것이다.

“뭐가 패왕이고, 뭐가 후기지수야. 고작 일부러 살기를 드러내야만 내가 들어왔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놈이!”

맑으면서도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수련동 안을 울렸다.

현당은 눈을 부릅떴다. 저렇게 작은 키에서 이런 큰 목소리가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한 오 척은 겨우 넘었을까. 작은 키, 왜소한 몸매에 이목구비가 예쁘장한 것이 여장을 하면 영락없이 여자였다. 게다가 옷차림의 배색마저 신경을 쓴 세련된 구색이었다. 흠이라면 먼지를 뒤집어썼다고나 할까? 그건 그가 멀리서 여기까지 쉬지 않고 달려왔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현당의 시선으로 허리에 찬 그의 검이 눈에 띄었다. 사자상이 양각되어 있는 검 자루[劍把]였다. 남경에서 사자상은 오로지 남궁가의 직계만 소지할 수 있는 상징이었다. 그렇다면 이 키 작은 젊은이는 남궁 성을 사용하는 자라는 소리다.

현당이 모르는 남궁가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삼…… 촌?”

그제야 키 작은 젊은이의 얼굴이 펴졌다. 좀 전의 굳은 표정은 사라지고 환하게 웃는 낯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래, 이놈아. 십 년 만에 봤더니, 얼굴도 못 알아보는 게냐?”

“정말 남궁진 삼촌 맞습니까?”

현당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미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아는 척했다가 호되게 당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남궁진이 현당을 향해 팔을 벌렸다.

“이놈, 말하는 것 좀 보게. 완전 어른이 다 되었구나. 어디, 네놈 한 번 안아보자. 십 년 전에 떠날 때는 코흘리개였던 놈이 벌써 이렇게 대성했구나!”

너무나 다정한 얼굴로 남궁진이 현당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현당의 등줄기로 다시 식은땀이 흘렀다. 생각하고 있던 남궁진과의 대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현당은 머릿속을 빠르게 회전시켰다. 그러는 사이에 남궁진은 자연스럽게 현당을 향해 다가왔다.

“아프다더니 헛소문인가 보구나. 멀쩡해 보이는군. 이젠 다 컸구나. 형님이 좋아하시겠다.”

그동안에도 현당은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십 년 만에 만나는 삼촌과 조카. 이들은 이전에 어떻게 행동을 했고, 어떻게 서로를 대했을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십 년이라는 세월은 그것을 무시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저 보통의 삼촌과 조카처럼 행동하리라 마음먹었다. 그것도 정파의 명문가 출신답게 처신해야 했다.

“오셨습니까.”

가볍게 허리를 숙이면서 양손을 가슴 앞에서 포갰다. 격식은 갖추었지만 결코 극진한 공대는 아니었다.

삼촌이라면 부모를 대신할 수도 있는 만큼 가까우면서도 반대로 엄부(嚴父)만큼 어렵지도 않은 사이였다. 게다가 남궁적과 남궁진은 고작 열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형과 아우가 더 적당했다.

조용히 남궁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아프다더니, 다 헛소문이었냐?”

“운기 중에 내상을 입었습니다.”

남궁진이 인상을 찡그리며 미간 사이에 주름을 잡았다.

“이런! 운기 중에 입는 내상은 쉽게 낫지 않는 법이거늘. 괜찮으냐?”

현당이 별일 아니라는 듯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덕분에 진보가 늦어졌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남궁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력은 많이 나아졌느냐? 검을 버리고 도를 잡았다는 소문도 파다하던데…….”

정말로 실력이 늘었는지를 묻는 말이 아니리라. 남궁적이 얻었다는 소문이 파다한 도에 더욱 관심이 있는 말이다. 현당이 천인혈을 앞으로 끌어당겼다.

“이놈입니다.”

“오오…….”

남궁진이 손을 내밀었다.

“이게 바로 천인신수 옹께서 만들어주셨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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