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무사-43화 (43/175)

# 43

<43화>

현당은 한창 운공에 빠져 있었다.

지도를 끝낸 우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의 수련 과정을 마친 이상 현당을 그대로 놔두고 나가도 되리라 생각되었다. 그녀는 수련동의 입구로 나와 문을 두드렸다.

“끝났습니다.”

밖에 있는 경비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밖에 있던 경비들의 모습이 보였다.

“수고하셨습니다.”

겉치레로 경비들이 인사하는 모습도 보였다. 우희는 고개만 까닥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맑은 공기가 우희의 얼굴을 간질였다.

뒤에서 웃는 소리가 들렸다. 저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분명히 그녀를 향해 웃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희들끼리 뭐라 쑥덕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그녀의 등 뒤로 눈빛이 꽂히는 것도 느껴졌다.

“왜 웃죠?”

웃던 경비들이 자세를 바로 했다. 세 놈 중 한 놈이 낯빛을 바꾸며 우희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 모습으로 밖으로 나가실 생각이십니까?”

“그 모습이라니?”

놀란 우희가 자신을 돌아보았다.

‘헉…….’

숨이 끊어질 뻔했다.

우희는 침착한 모습으로 몸을 돌렸다. 최대한 빠르게…….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배운 적이 없었다. 무조건 스스로에게 침착해야 한다고 주문을 걸었다.

그녀의 앞섶이 갈라져서 속살이 비치고 있었다. 언제 베어졌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럼 그때?’

현당이 도기를 날릴 때의 모습이 생각났다.

‘내 옷깃에 칼끝이라도 닿는다면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고 했는데…….’

현당에게 내걸었던 조건이 생각났다. 우희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벌어진 앞섶을 두 손으로 꽉 움켜쥐고 있었다.

* * *

문당으로 돌아온 우희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자 더욱 일에 몰두했다. 이제는 새로 들어온 사람들도 슬슬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갑자기 벌어지는 사태에 적절히 대응하는 연습도 했고, 자신의 임무에 맞게 적응하는 모습도 보이기 시작했다.

“잘 끝나셨습니까?”

“응.”

건성으로 대답하며 앞섶을 움켜쥐었다. 옷을 갈아입었음에도 저도 모르게 손이 앞섶으로 향했다. 아직 현당이 전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질문을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새로 영입된 자들 중에서 행동이 바르고, 사리분별도 빨랐고, 가장 신뢰가 가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십여 명 단위로 편제된 그들 중에서도 작은 소조직의 지휘를 맡은 다섯 사람 중 하나였다.

주근혜(朱勤慧).

새로 영입된 사람들은 모두들 강호 초출이기 때문에 별호도 없었다. 여장부답게 큰 체구에 선이 굵은 여자였다.

우희는 자신을 대신할 부장(部將)으로 그녀를 쓰고 싶었다.

낭중지추(囊中之錐)라고 난 놈은 어디에 내놓아도 두드러지는 법이었다. 때가 되면 자연히 다른 사람보다 두드러질 것이고, 그때까지 기다려도 늦지 않을 터였다.

우희는 주근혜를 남들도 인정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놈이 한 말을 믿으십니까?”

“무슨?”

“남궁세가에 발설을 하지 않겠다는 약조 말입니다.”

실소가 흘러나왔다.

“믿을 것을 믿어야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일취월장하고 있는 현당의 실력이 생각났다. 절정의 고수가 매일 신경 써서 가르치지 않으면 있을 수 없었다. 현당은 남궁세가의 가주와도 거래를 하고 있는 중이리라.

도리질을 쳤다.

“믿을 놈을 믿어야지.”

우희는 했던 말을 반복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 * *

현당은 정심각으로 들어서는 남궁찬을 보고 몸을 일으켰다.

“기침하셨습니까?”

남궁찬이 만족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련의 진도가 상상 이상으로 빠르더구나.”

손을 내밀자 시녀가 약사발을 들고 따라 들어왔다.

“다, 아버님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공손히 약을 받아들은 현당은 단숨에 약을 들이켰다.

평소와 다름없이 소매로 입가를 닦고 약사발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도가 너무 약합니다.”

현당이 손잡이만 남은 장도를 넘겼다.

“이, 이런…… 벌써 부서졌느냐?”

남궁찬이 도를 받아들었다. 손잡이에서 한 치 정도가 겨우 달려 남아 있을 뿐이었다. 재미있다는 듯이 남궁찬은 부러진 도의 단면을 바라보았다. 그냥 힘으로 부러뜨린 것이 아니라, 안으로 주어진 힘에 의해 깨진 것을 입증하듯 깨진 면이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쇠라는 것은 적당한 힘이 주어지면 휘어지지만, 더 강한 힘이 주어지면 부러지는 법이고, 일시에 그보다 강한 충격이 오면 깨지는 법이었다. 단면은 그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조각났겠군.”

남궁찬이 만족스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검고로 가자. 도는 몇 자루 없지만, 하나같이 쓸 만한 놈들로만 간추려져 있지.”

드디어 현당도 듣고 싶은 말을 들을 수 있었다.

* * *

드디어 모용세가의 모용곽이 현당을 찾아왔다. 생각보다 늦게 찾아왔다.

“오셨습니까?”

“네놈이…….”

모용곽은 오자마자 현당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현당의 신형이 마치 뒤에서 줄을 잡고 잡아당기는 것처럼 뒤로 날아갔다.

“큭. 네놈이 피한다! 지은 죄는 인정하는구나.”

모용곽의 신형이 현당을 바짝 뒤쫓았다.

현당의 신형이 철판교 수법으로 뒤로 넘어갔다. 미처 그런 변화를 예상치 못한 모용곽이 헛손질을 했다. 뒤쫓아 현당을 짓밟으려 그의 신형이 날았다. 그것도 모자라 지면에서 한 치만 남겨놓고, 현당의 신형이 발뒤꿈치를 중심으로 수평으로 회전했다.

결국 모용곽은 헛손질에 이어 헛발질까지 했다.

철판교 그대로 현당의 신형이 뒤로 날아갔다. 모용곽이 따라가기가 무섭게 그의 신형이 위로 치솟아 올랐다. 게다가 허공에서 팽이 돌듯이 회전을 하며 빠져나갔다.

“오냐, 네놈이 언제까지 도망다니나 보자.”

“진정하십시오. 계획이 있었습니다.”

모용곽의 걸음이 빨라졌다. 지면에 그의 족적이 깊숙이 남겨졌다.

* * *

퍽. 퍽. 퍼헉. 퍼허억.

모용곽의 주먹이 현당의 복부에 작렬했다.

“우욱. 우욱…….”

신음을 토하며 현당이 바닥에 엎어졌다. 입에서는 벌써 피를 토하고 있었다.

“그만 하시오, 모용가주.”

언제 들어왔는지 남궁찬이 그들 앞에 서 있었다.

“놈이 내 딸아이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신단 말이오?”

“알고 있소. 그래서 저놈이 문사의 어둠 속에 숨어 있던 문당의 세력을 낱낱이 밝혀낸 것도 알고 있소.”

모용곽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모르는 무언가를 이 둘은 알아냈던 것이다.

모용곽은 붙잡고 있는 것을 놓아버렸다. 덕분에 축 늘어진 현당의 신체가 바닥에 둔중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내 방으로 가십시다. 그곳에서 이야기하십시다.”

모용곽은 현당을 힐끔거리더니 더 이상 현당을 상대하지 못하고 남궁찬을 따라나섰다.

문이 닫힐 때까지 현당은 그 모습 그대로 엎어져 있었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날 때까지 가만있었다.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때까지 참았다가 움직였다.

“그 노인네, 힘 하나는 정말 대단하군.”

목을 움직이자 뼈마디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이어 어깨를 돌리고 허리까지 접었다 폈다.

“제련현마강! 부작용만 아니라면, 정말 좋은 무공이야…… 퉷.”

뱉는 침에 피가 섞여 나왔다.

“남궁가주가 올 줄 알았으면 씹는 게 아닌데, 괜히 입 안을 뜯어가지고 아프기만 하군.”

현당은 바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빗자루를 들고 바닥에 나 있는 발자국을 지워갔다. 그것도 정확히 자신의 발자국만 골라서 지웠다.

한참이 지나자 원하는 모용곽의 발자국만 남았다. 처음에는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가 일정한 공간에 이르러서는 하나의 정형을 그리고 있었다.

“어디부터인가? 이쯤이 되겠군. 대략 여기에서부터 모용세가가 자랑하는 탕하번천보(蕩河翻天步)라는 이야기지? 우희가 서문장천의 신법을 막으려면 일시에 육방을 다 봉쇄하는 탕하번천보밖에 방법이 없다더니, 그럴 것 같군.”

현당은 더 이상 모용곽을 신경 쓰지 않고 보법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 * *

현당은 남궁찬을 따라 비밀창고로 들어갔다.

남궁가에 들어와서 이런 곳이 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병기고였다. 백여 종의 병기가 벽에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대부분이 검이었지만, 간혹 검이 아닌 물건도 보였다. 검도 막상 이곳에 들어와 보니, 상당히 다양한 형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난 백여 년의 남궁가의 역사라고 할 수 있지. 이건 네 증조부이신 남궁강(南宮江) 어른이 쓰시던 검이다. 한 치가 길면 그만큼 유리하고, 한 치가 짧으면 그만큼 날카롭다고 하지. 증조할아버지는 후자를 택하셨다.”

남궁찬이 자랑스럽게 검을 들어 보였다.

채 두 자가 안 되는 검이었다. 한 자 반이나 될까? 손잡이를 제외하면 날의 길이는 한 자를 갓 넘을 것으로 보였다.

“이건 또 할아버지 남궁덕 옹의 것이고. 네가 참 닮기를 원하던 분이셨지. 항상 검의 도를 찾으시던 분이라, 검 역시 가장 일반적인 정형을 택하셨지. 날의 길이는 두 자 세 치. 손잡이 길이는 일곱 치. 합이 딱 세 자.”

이번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는 검소한 검을 집어 들고는 감탄 어린 눈으로 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궁찬은 이곳에 들어와서는 현당이 남궁적이 아니라는 것을 잊은 듯했다.

“아…… 커험.”

그제야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상대가 남궁적이 아니라 현당이라는 생각을 떠올렸는지 헛기침을 했다.

“내가 너를 이곳에 왜 데려왔는지 아느냐?”

현당은 말없이 남궁찬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곳에는 남궁가의 역사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대 문중의 가주나 문중에서 배출한 걸세출의 영웅의 흔적이 고스란히 이곳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내 검을 이곳에 보관하게 될 게다. 네가 남궁가의 사람 흉내를 제대로 내려면 남궁가의 정신도 알아야 한다. 외유내강. 독고세가는 강중중(强中重). 서문세가는 쾌(快)와 환(幻)을 그리고 모용세가는 변을 택했다. 네가 어떤 병기를 택하고 어떤 무공을 익히건 그것은 네 자유다. 하지만 네가 남궁가의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하려는 한, 남궁가의 전통을 잊지 말기 바란다. 골라라. 여기 있는 도는 하나같이 명도이지만, 주인이 없던 도이니까.”

주인이 없던 도라는 말은 전리품이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돈을 주고 샀거나 남에게서 빼앗을 물건임을 의미했다.

현당은 수많은 검을 스쳐 지나갔다.

언월도(偃月刀)도 보였고, 귀두도(鬼頭刀), 백근도(百斤刀)도 있었다. 도라고 하기에는 폭이 좁은 협봉도(狹鋒刀)도 보였다.

이상하게 검에는 정이 안 가는 현당이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현당의 시선이 한쪽 구석에 있는 물건에 고정되었다.

왜도(倭刀)였다. 장도와 단도가 한 쌍을 이루고 있는 물건이었다. 지금까지 그가 다루던 병기와 흡사한 도였다. 현당은 자기도 모르게 그 도를 집어 들었다.

손끝에 도가 닿는 순간, 현당은 멈칫거렸다.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차가운 예기뿐만 아니라 뭔가 그의 손끝에서부터 타고 올라 척추를 지나 꼬리뼈까지 전율을 일으켰다.

정전기라고 생각했다. 망설이지 않고 장도를 집었다. 정전기는 그렇게 하면 그냥 흘러가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도신의 거무튀튀한 모습이 밝은 조명을 어지럽게 반사시켰다. 어둡다 못해 붉은 기운까지 돌았다.

“내가 강호 활동을 할 때, 왜구에게서 빼앗은 물건이지. 그 왜구의 옷차림을 보아하니, 분명 제 놈 나라에서는 한 자리 하던 놈이 실권을 잃고 쫓겨난 놈이 분명했어. 물건이 좋기에 가져왔다. 하지만 날에 서린 사기(邪氣)가 마음에 걸려서 구석에 처박아두었는데, 흑도인 네 녀석 출신은 어쩔 수가 없구나. 그런 놈을 집어 들다니.”

현당은 홀린 듯이 장도를 바라보았다.

도병 바로 밑에 새겨진 한 쌍의 빨간 눈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마치 살아 있는 귀안(鬼眼)처럼 느껴졌다.

“거기 처박힌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손질하는 데 공을 들여야 할 게다. 도병(刀柄 : 칼 손잡이)은 내가 주문해서 갈아주겠다. 남궁가라면 당연히 사자상을 새겨야지.”

현당은 더 이상 남궁찬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오로지 들고 있는 장도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 * *

현당은 도를 들고 대장간으로 갔다.

그냥 대장간이 아니라 남경에서 제일가는 병기점이었다. 천인장(千仞莊)이라는 현판이 사람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천인(千仞). 천 번 재고 벼려서 날을 만든다는 뜻이었다. 그만큼 자신의 이름을 걸고 나간 물건에 자신한다는 소리였다.

남경에서 세도 좀 있다 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곳에서 만든 병기를 차고 다니는 것이 유행이었다.

현당이 안으로 들어가자 입구 쪽에서 연장을 들고 뛰어다니던 소동이 현당을 바라보았다.

“어찌 오셨소?”

대뜸 반 반말이었다.

잡일을 하는 소동이 손님에게 반말을 하는 것을 보면 이곳 대장간의 위세가 어느 정도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아버님께서 청하시는 것이 있어 왔네.”

현당이 중얼거리며 뒷짐 지면서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치 나도 한 위세 한다고 보여주려는 것처럼 한껏 자세를 잡았다.

“안으로 드십시오. 미리 전갈이라도 하셨으면 사람을 시켜 마중을 나갔으련만, 미처 몰라 뵈어 죄송합니다.”

금방 소동의 자세가 달라졌다.

현당은 망설이지 않고 소동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 * *

소동의 안내로 현당을 맞은 젊은이가 도를 받아들었다.

“정말 좋은 물건을 구하셨군요. 사전에 약속을 하셨다 하셨는데, 기록에는 없습니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 예약을 하셨는지요?”

현당은 인상을 찡그렸다.

남궁찬이 이곳에 도병을 부탁해 놓을 테니, 시간이 되면 아무 때나 가서 갈라는 말을 듣고 무작정 나온 자신이 바보 같았다. 사전 예약이 필요한 곳인 듯싶었다.

“예약을 안 하면 방문도 못 한다는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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