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무사-41화 (41/175)

# 41

<41화>

우희가 등을 돌렸다.

동시에 수하들이 몰려들었다. 수중에서 시퍼런 흉기가 번뜩이고 있었다. 현당에게 무슨 일이 있기라도 한다면 당장 달려들 기세였다. 그 전에 우희가 모용세가 사람들을 돌려보낸 것이 다행이었다. 덕분에 피를 보지 않았다.

“대형!”

“대형…….”

“대……형.”

현당이 우희에게 한마디 하려는 순간, 현당을 발견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 사람들아. 다시 만나서 반가우면 웃어야지. 왜들 울고 난리인가. 웃으시게. 웃으라고. 하하하…….”

호방하게 웃는 현당의 눈가에도 눈물이 맺혔다. 뒤돌아본 현당의 시야에서 우희는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 * *

현당은 정신없이 마셨다.

누가 그를 감시하고 있든 말든 신경 쓰지도 않았다. 당연히 문당에서 나온 사람들이 그를 감시하고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그들의 시선을 신경 쓸 만큼 여유롭지가 못했다. 옛 동료들, 그리고 수하들을 다시 살아서 만났다는 것이 그로 하여금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수 없도록 만들었다.

지금 이 순간은 옛 동료들을 만난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비록 손가락, 발가락, 심한 경우는 눈, 코, 귀 등이 없을지라도, 그들은 그의 수족이었고, 눈과 귀였던 사람이었다. 다시 살아서 만난다는 것 자체가 즐거울 따름이었다.

그간의 이야기는 뒷전으로 미루고, 예전의 화려했던 소패 일당의 영웅담으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것만으로도 벌써 날이 밝고 있었다.

“형님. 그동안 굶으셨지요? 저희가 형님 취향에 맞는 계집으로 자리를 마련해 놓았습니다.”

“형님이 굶을 사람이야? 아까도 봤잖아. 그런 딱 형님 취향인 여자가 둘씩이나 형님을 호위하는 것 못 봤어?”

“그게 형님을 호위한 거야?”

“반은 맞고 반은 틀렸으이. 하나는 형님이 호위한 거고, 다른 하나는 형님을 호위한 게 맞네.”

“형님, 형님. 둘 중 누가 형님 취향이십니까?”

“아, 둘 다라니까.”

“그게 말이 되나? 완전히 반대잖아. 하난 굳세게 생겼고, 다른 하나는 불면 날아갈 것만 같은데.”

현당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까 생각하면 그저 조용히 입 다물고 있는 게 상책이었다. 하나같이 그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건만, 모두들 현당을 형님이라 불러주고 있었다. 그가 나타났다는 소리에 다시 모여든 이들이 고맙기만 했다. 현당은 그들에게 미소 짓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저 웃고만 있었다.

“그만 하십시오. 얼마나 굶었기에 불알 달린 저희마저 꼬드기려 하십니까? 그런 웃음은 계집에게만 보여주라니까요.”

한 놈이 소매로 눈을 쓰윽 닦았다.

저도 모르게 현당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 * *

오랜만에 단잠을 잔 현당은 몸을 일으켰다.

수하들이 자리를 마련했지만, 현당은 그곳에서 몰래 몸을 뺐다. 당연히 그곳은 우희의 가시권 안이라는 판단에서였다.

현당이 그곳을 떠나 자신만의 장소로 가는 이유는 또 있었다. 우희에게 자신은 아직도 건재함을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아무리 네가 나를 감시하더라도 헛수고라는 것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그래서 우희가 자신의 실력과 세력을 앞으로도 계속 얕보지 못하도록 쐐기를 박을 생각이었다.

현당이 빠져나가는 것을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도록 했다. 우희의 감시자이든 현당의 옛 수하들이든 아무도 모르게 할 필요가 있었다.

목욕도 하고, 옷도 갈아입은 후, 현당은 묵었던 방이 아니라 다른 방을 통해서 버젓이 정문으로 걸어 나왔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미련한 놈들이나 뒷문을 이용하는 법이다. 그래서 쫓는 자들 중에 뭔가 아는 자들은 가장 먼저 뒷문부터 노린다. 오히려 허점은 정문 쪽에 있다. 막상 기다리는 놈과 조금 다르게 생겼으면 정문으로 걸어 나오는 놈은 그냥 보내는 법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현당은 버젓이 정문으로 걸어 나왔다.

설마 현당이 여장을 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하리라.

우선 배에 커다란 복대를 두른 후 그 위에 치마를 둘렀다. 꼭 들통처럼 뚱뚱한 아낙네 같은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런 다음에 키를 낮추는 데 성공했다. 다리 뒤쪽으로 활을 붙잡아 묶었다. 활 끝이 한쪽은 허벅지에 다른 한쪽은 발목에 가도록 했다. 그러면 굽혀지기는 해도, 다리가 완전히 펴지지는 못했다. 그런 다리를 활시위가 더 이상 당겨지지 못하게 붙잡았다. 무릎걸음 비슷해지지만 절룩거리지는 않았다.

굽은 다리를 들키지 않을 수 있는 것은 통 넓고 안에 공간이 충분한 치마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여기에 볼에 솜까지 넣어서 얼굴을 불룩하게 하고, 겨드랑이에 이불빨래가 잔뜩 담긴 바구니까지 꼈다. 누가 보더라도 새벽 일찍 방 청소하러 온 품삯 아낙이라고 생각할 모습이었다.

현당은 그렇게 자신의 안가로 돌아왔다. 바로 모용가의 정문 맞은편에 있는 다점이었다. 취식까지 가능한, 다점이라고 하기에는 객잔에 가까운 곳이었다. 객잔이라고 하면 싸구려 느낌이 난다 하여 다점이라고 간판을 걸어두었다. 모용가의 정문이 내려다보이는 바로 그곳이었다.

늦은 시간에 찾아왔는데도 현당의 방은 비어 있었다. 워낙 현당이 비싼 손님이기에 현당을 위해서 저녁이면 방을 비워놓았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늦은 시간에도 현당을 기다리던 갑부의 첩은 방에 등이 달리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왔다.

그녀가 현당을 기다렸던 것처럼 현당은 그녀를 만족시켜 주었다. 아니 그보다 현당은 그날, 하루 종일 쌓였던 모든 불만을 그녀에게 쏟아낼 수 있었다.

모용미와 같이 있으면서도 풀지 못한 성욕에, 그를 폭행한 모용곽에 대한 화풀이, 그리고 자신의 수하들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불만까지 모든 감정의 응어리들을 그녀에게 쏟아냈다. 그리고 이곳은 안전하다는 생각이 현당으로 하여금 못다 한 일을 원 없이 하도록 만들었다.

어찌나 거칠었는지 나중에는 그녀가 그만 하자고 사정할 때까지 그녀를 괴롭혔다.

어쨌거나 현당은 달게 잤다.

“으응…….”

옆에서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그녀가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예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 위로 다른 사람들의 얼굴이 겹쳐졌다. 한 사람도 아닌 두 사람의 얼굴이었다.

현당은 그가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얼굴을 생각하며 자고 있는 갑부의 첩을 쓰다듬었다. 한 명은 모용미였고, 또 한 명은…….

“우희…….”

“깨어났군요.”

현당은 벗은 몸이라는 것도 잊고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우희 나연희의 남장을 한 단정한 모습이 맞은편에 조각된 것처럼 놓여 있었다.

“우희?”

“날이 밝았으니, 이제 돌아가야지요?”

우희의 목소리에 갑부의 첩도 잠이 깼는지 화들짝 놀라며 일어났다. 이불을 끌어다 벗은 몸을 가렸다.

“당신에게는 볼일 없어요. 더 주무셔도 됩니다. 이 남자만 데려가면 되니까.”

우희가 한껏 부드러운 미소로 새가슴처럼 벌렁거리고 있는 여자를 달랬다.

현당이 놀라 물었다.

“놀랍군. 여기 오는 동안 들킬 리가 없었는데!”

“아, 당신이 어디에서 어떻게 이곳으로 왔는지는 몰라요. 처음부터 그쪽은 신경 쓰지도 않았지요. 그것은 아무리 당신 뒤를 쫓아도, 당신은 도망갔을 테고, 아무리 우리가 찾아도 못 찾았을 테니까. 대신에 처음부터 여기에서 당신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언제 들어왔지?”

우희가 득의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승자의 여유가 묻어났다.

“이 방에 등불이 걸릴 때부터.”

“다 봤군.”

“벗길 때부터 쭉…….”

뭐, 한두 번 보여준 것도 아니기에 현당은 거리낌 없이 이불을 털고 일어났다. 그의 벗은 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생각대로 우희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당당하게 현당의 벗은 몸을 즐기고 있었다. 마치 전리품을 감상하는 듯했다.

현당이 어이없다는 듯이 도리질을 치면서 옷을 입었다. 이제는 피하려야 피할 수 없었다. 저렇게 빤히 쳐다보는데서야 빈틈을 찾을 수가 없었다. 우희를 따라 남궁세가로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

“여긴 어떻게 알았지?”

“당신이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야 할 모용 소저를 알아보는 순간, 알 수 있었어요. 남궁세가로 찾아온 모용 소저를 내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당신은 정혼자인 척 행동을 했지요. 그건 당신이 이전에 모용 소저를 봤다는 이야기. 당신이 그녀를 볼 수 있는 때가 언제일까요? 내 경계망에서 벗어난 때밖에 없지 않나요? 그때, 당신은 이곳에 와 있었다는 말이지요.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잖아요?”

현당이 재미있다는 듯 가볍게 이마를 쳤다.

“그렇군.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지. 하하하핫.”

호쾌하게 웃는 현당의 웃음소리가 실내를 가득 채웠다.

* * *

남궁찬은 반가운 표정으로 현당을 맞았다. 현당을 남궁세가까지 안전하게 호위를 한 우희는 일이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문당으로 돌아간 후였다.

남궁찬은 현당이 돌아오자마자, 실내에 있던 모든 사람을 내보내고 둘이만 마주 앉았다.

“그래, 피로는 다 풀고 온 건가?”

현당은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겸손한 어투로 대답했다.

“덕분입니다.”

“그럼, 그럼. 그럼 이제 다시 못다 한 이야기를 풀어야겠지?”

“일도 많았지요.”

“그렇겠지. 자네 덕분에 나도 문당의 꼬리를 봤네. 고맙네.”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역시 문사인지라 바로 그것을 알아차렸더군요. 다점에서 있었던 모든 일들이 가주님과 제 계획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겠지. 그렇지 않았으면 남부맹의 문사가 될 수 없지. 그래, 문사가 자네에게 무엇을 제시하던가?”

남궁찬은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는 듯이 질문을 던졌다.

“제가 알아낸 것들을 비밀로 하는 대신에 제게 상승 무공을 주기로 했습니다.”

“큭큭큭.”

남궁찬이 고개를 돌리고 코웃음을 쳤다. 현당이 모든 것을 자신에게 이야기할 것이라는 것을 아무도 모르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이제 남궁찬은 모든 사람보다 우위에 있을 수 있었다. 다른 세가와 문당 간의 비밀 계약을 알고 있으니 말이다.

“알고 있겠지? 문사가 자네에게 제시하는 것보다 더 훌륭한 것을 나는 자네에게 줄 수 있네.”

현당이 자못 탐이 난다는 듯이 물었다.

“자하기의 모든 것도 말입니까?”

순간, 멈칫하던 남궁찬이 현당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럼. 자하기뿐만 아니라, 남궁가의 상승 검공까지. 가주의 호가 무공만 제외하고 무엇이든 줄 수 있네. 그것만으로도 대성한다면 자네는 검의 조종에 못지않는 고수가 될 수 있네.”

미소를 지으며 현당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검에 있어서는 한 수 접을 수밖에 없겠지요.”

놀란 눈으로 남궁찬이 물었다.

“누구한테?”

“아버님을 이길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아! 하하핫. 하하하…… 그걸 말이라고 하나, 이 사람아!”

통쾌하다는 듯이 남궁찬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내 정색을 하고 현당을 바라보았다.

“그럼, 그 비밀이라는 게 무엇인가?”

현당은 거리낌 없이 우희와 나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역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제 판단대로 독고세가가 문당을 밀어주고 있었습니다.”

남궁찬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 그게…… 그게 가능한 일인가?”

“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최소한 문당의 인원은 반백이 넘습니다. 그런 인원이 먹고 자고 생활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어느 한 문파가 전폭적으로 후원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거기에 이번에 등장한 사람들의 면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문당에 고용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의 소유자가 하나 같이 강호 초출입니다. 그것도 오십에 가까운 인원이 말입니다. 즉 어느 누가 처음부터 작정을 하고 인재를 양성했다는 소리이지요. 이것은 오래 전부터 준비를 해왔다는 소리!”

“그런…….”

“그럼 누가 문당을 밀어주고 있다는 소리 아닙니까! 남궁가는 아닙니다. 모용가도 아닙니다. 모용가라면 그 사람들이 문당으로 가지 않고, 모용가로 들어가야 했으니까요. 그럼 서문세가와 독고세가만 남습니다. 절반의 확률을 가지고 저는 독고세가를 들먹이며 운을 떼어 보았습니다.”

갈증이 난다는 듯 남궁찬이 침을 삼키며 물었다.

“그랬더니, 어떻던가?”

“술술 불더이다.”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단지 확률만으로 운을 뗀 것인가?”

현당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요. 심증이 있었습니다.”

“심증이라면?”

“남부맹의 맹주 자리가 너무 오랫동안 공석입니다. 낙점되어 있는 사람이 있지만, 그를 앉히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따졌습니다.”

남궁찬도 그것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독고진, 어린놈이 그새…….”

“결코 어린놈이 아닐 것입니다. 호랑이 새끼는 죽어도 호랑이입니다. 놈은 남부맹을 만든 독룡 독고룡의 아들이란 말입니다. 나이든 세 가주를 제 손안에 넣고 주무를 정도로 영악한…….”

“내 이놈을!”

황급히 현당이 남궁찬을 말렸다.

“지금은 아닙니다.”

“그럼?”

현당이 오른손으로 눈앞에 있는 잡초를 한꺼번에 휘어잡는 것처럼 손을 휘두르면서 움켜쥐었다.

“일망타진!”

“일망타진?”

“서서히 서문세가와 모용세가를 회유해서 그들과 손을 잡고, 독고세가와 문당이 야심을 드러내는 순간, 한꺼번에 싹 쓸어버리는 겁니다.”

“그때가 언제라고 생각하나?”

“우희는 제가 남궁 아버님으로부터 특훈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중에 사대 세가의 대표를 뽑는 자리에서 문당은 대놓고 독고진을 밀 것입니다. 그때 독고진을 밀어서 떨어뜨리면 되는 것입니다. 문당과 독고가를 고립시키는 것이지요. 그러면 남부맹의 대표가 누가 되건 상관없이 모든 일을 진행한 남궁가가 다른 두 가문보다 한 자리 위에 서게 되는 것은 자명한 일!”

“큿. 좋아, 좋았어…… 정말 좋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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