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36화>
순간, 모용곽은 자신이 실언을 했음을 깨달았다.
“우리 사위될 남궁가의 공자 말이다. 그럼 지금 내가 누구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게야!”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안 되겠는지 모용곽은 다시 총관을 닦달했다.
“문당은 어떻더냐? 문당에서는 다른 변화가 없는 것 같으냐?”
총관은 이번에는 가주의 마음에 흡족한 소식을 가져왔다고 생각했다. 가주 모용곽이 시키지는 않았지만 문당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총관이었다.
“예. 문당은 지금 뻔질나게 사람들이 들락거리고 있습니다. 공녀께서 출타하신 이후, 그런 경향이 특히 심해졌습니다. 벌써 여덟 명이 들락거린 것으로 판단됩니다.”
총관은 이마를 싸고 주저앉았다. 모용곽의 손에서 날아온 문진이 총관의 이마를 찧었다.
“미련한 놈. 그런 소리를 이제야 하다니…… 내가 문당으로 가겠다.”
모용곽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 * *
다시 모용세가 바로 옆에 있는 문당.
가쁜 숨을 몰아쉬며 모용곽이 문당 안으로 뛰어들었다.
“문사. 이게 어찌 된 일이오? 그 아이들에게서 아직도 다른 소식이 없소?”
자리에서 일어난 우희가 모용곽에게 자리를 권했다.
“현당이 술을 대작하고 있다고 합니다.”
“술을? 우리 딸아이하고 말이오?”
모용곽이 놀란 눈으로 우희를 바라보았다.
우희는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모용곽을 바라보았다.
“예. 사실입니다.”
모용곽은 그제야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차를 마신다면 한 시진도 긴 시간이지만, 술을 마신다면 두 시진은 긴 시간도 아니었다. 차를 마시고, 술도 마신다면 세 시진은 족히 걸리리라. 이해가 갔다.
“커험. 그나저나 우리 딸아이도 술을 마신다니, 금시초문이로군.”
중얼거리는 순간, 모용곽은 자신의 가솔들이 헛소리를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적잖이 안심이 되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다른 일이 있으면 사람을 시켜 연통을 해 드릴까요? 아니면 여기에서 기다리시겠습니까?”
순간, 모용곽은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문당에서 다음 소식을 기다리자니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동안 문당은 사대 세가의 공적인 일을 맡아서 하는 하수인에 불과하다는 것이 세 가주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한데 자신은 지금 이곳에서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마치 잔칫집 문간에 앉아서 흘러나오는 떡고물과 고기 몇 점이라도 얻어먹으려는 사람처럼 말이다.
하지만 무작정 나가자니 자신의 준비가 너무 부족했다. 현당이 다점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으면 그가 들을 수 있는 말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 목적지인 팔각정까지 가지 않는 이상…….
다점에서 팔각정까지는 남궁가의 영역이지만, 팔각정부터 이소원, 고서점까지는 자신의 구역이었다.
모용곽은 망설임 끝에 결정을 내렸다. 아직은 자신의 구역이 아니었다. 자기 구역에 현당이 나타날 때까지 현당이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어차피 나중에 듣게 될 이야기들이니 예서 같이 들읍시다. 서로 얻어듣는 바를 종합하면,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겠지요.”
변변찮은 핑계를 중얼거리며 모용곽은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우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다시 다점 안.
드디어 참다못한 점원이 이 층 계단 쪽에 앉아 있는 한 쌍에게 대놓고 이야기했다.
“아니, 차를 마시러 오셨으면 차를 다 마신 후에는 나가셔야 할 것 아닙니까? 손님들이 오셨다가 그냥 가십니다. 그 때문에 저희 가게가 입는 피해를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셨습니까?”
한 쌍의 남녀는 난처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직도 그들은 이곳을 떠날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하기야 현당이 나가지 않고 있는데, 그들이 일어날 리 만무했다.
현당은 그들을 보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왜 웃으세요?”
“누가 생각나서요.”
모용미가 궁금하다는 듯 허리를 앞으로 뺐다. 벌써 몇 잔의 술 때문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누구 생각인데요? 설마 나를 앞에 앉혀놓고 다른 여자를 생각하시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현당은 모용미를 빤히 쳐다보았다. 술기운이 올라 열이 오른 모용미의 얼굴이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오오오…….’
현당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하체에 힘이 실리기 시작한 것이다. 얼마 만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침이면 불끈 솟아서 우람한 자태를 자랑하던 그의 분신이 제 모습을 잃고 고개를 숙인 패잔병처럼 늘어진 지 벌써 보름이 넘었다. 그러던 놈이 모용미를 앞에 앉혀놓고 드디어 힘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제는 일이 가능했다. 할 수 있다!
현당은 기분이 좋아졌다.
“말해봐요. 누구 생각이에요?”
모용미의 혀가 살짝 꼬부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예쁘기만 한 게 아니라 귀엽기까지 했다.
“초패왕을 아시오?”
모용미가 어이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어떻게 패왕 항우를 모를 수가 있어요? 천하의 남궁적 공자의 별호가 바로 패왕인데…….”
현당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항우가 유방에게 패한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오? 그건 바로 용병술에 있었소. 유방에게는 전략가 장량, 대원수 한신, 그리고 군수를 책임진 소하 등의 참모들이 있었지만, 항우에게는 범증 한 사람뿐이었소. 아무도 항우를 대신해서 전장에 나가 승리를 거둘 사람이 없었던 거요. 아무리 실력이 좋고, 무공이 뛰어나고, 기질이 뛰어나다 한들 그의 주변에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그는 자신의 재능을 제대로 펼치지도 못하고 질 것이오. 항우는 그래서 졌소.”
현당은 우희를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 못지않은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 배운 학문에 무공과 경륜까지 자신보다 훌륭한 사람이 우희였다. 하지만 우희는 자신을 이길 수 없었다. 왜냐하면 우희가 부리는 사람은 우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희가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상황에 그녀의 수하들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면 결국 그때마다 적절하게 대응을 하는 현당이 이길 수밖에 없으리라. 게다가 오늘 보여주는 무공은 어떨지 몰라도, 우희의 수하들의 실력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장터에서 먹고 자란 장돌뱅이만도 못 하다는 것이 현당의 결론이었다. 그들의 실력이 조금만 더 좋았다면, 현당은 다른 수단이 필요했을지 모른다. 그들의 불행이 현당으로서는 다행이었다.
현당은 이번 머리싸움에서도 자신이 이겼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쯤해서 우희의 백기를 받아주어야 했다. 우희가 작정하고 달려든다면, 그때는 현당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으리라. 우희는 수십 명의 수족을 거느리고 있지만, 자신은 팔다리 모두 잘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침 기다리던 신호가 왔다. 다점의 맞은편, 반점의 닫힌 문이 열리고 등이 걸렸다. 장사를 시작하려는 것이었다.
이곳에서 확인할 것은 다 했다는 뜻이리라. 다점에서 확인할 일이란 바로 이쪽에 나와 있는 문당의 식솔들을 파악하는 일이었다.
이제 다음 장소로 이동할 때가 되었다.
“그만 일어나지…….”
현당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동안 일어났다 앉기를 무려 세 번이나 반복했다. 그때마다 계단 입구의 한 쌍도 일어났다 앉기를 반복했다. 일어났다 앉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일어나면 먼저 남자가 내려갔다 올라오고, 앉으면 다시 여자가 내려갔다 올라왔다. 그때마다 다점을 빠져나간 사람이 여섯 명이나 되었다. 합, 여덟 명이 이곳, 다점에 있었다. 처음에 나간 둘까지 합치면 열 명이다.
맞은편 반점에 불이 켜진 것은 앞서 나간 여덟 명 중 어느 누가 다시 돌아왔다는 소리였다. 새로운 사람이 아니라 왔던 사람이 또 왔다는 것은 더 이상 새 인물이 없다는 뜻이리라.
이제 볼 사람은 다 봤다. 더 드러날 것이 없다는 소리다.
“어디로 갈까요? 평소대로 팔각정으로 갈까요, 아니면 오늘은 색다르게 다른 곳을 먼저 갈까요? 이소원? 아니면 고서점?”
현당은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특히 현당이 고서점이라고 말했을 때, 한 쌍의 남녀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고서점부터 가 봅시다. 오랜만에 책 냄새나 흠뻑 마시고 싶구려.”
현당은 모용미의 말은 듣지도 않고 그녀를 데리고 나갔다.
* * *
현당이 다점을 나간 직후, 반점.
“고서점으로 간다고 했습니다요.”
현당이 나가자마자 다점의 점원이 반점으로 뛰어들었다.
남궁찬이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총관 준비되어 있겠지?”
왕람 총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어, 그곳에 갈 수는 없습니다.”
자리를 차고 일어났던 남궁찬도 주춤거렸다.
“그렇군. 그곳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그곳은 바로 모용가의 구역이었다.
사대 세가의 가주나 총관이 남의 구역에 들어갈 때는 사전에 양해를 구해야만 했다. 그것은 상대 가문에 대한 예의였다.
또한 가주나 총관이 아니라 해도 서로 상대 가문의 가신이나 가솔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는 사대 세가였다.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느라 생긴 일이었다. 때문에 고서점이나 이소원으로는 남궁가가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제길. 이제는 녀석을 믿을 수밖에 없겠군.”
남궁찬이 아쉽다는 듯이 혀를 찼다.
왕람이 놀라 물었다.
“녀석이라시면…….”
“아!”
남궁찬이 깜짝 놀라 혀를 찼다.
“적아, 이놈 말일세. 정말 많이 크지 않았나? 제 한 몸 뛰어들어 다른 세력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말이네…….”
“아아…….”
왕람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있었다더니 소가주도 사람이 참 많이 바뀌었지만, 소가주를 대하는 가주도 사람이 바뀐 것 같았다.
왕람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전까지 그가 알고 있던 소가주는 세상 물정 아무것도 모르고, 차와 검만 아는 수재 바보였기 때문이다. 새삼 그가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저어, 말씀하신 대로 일은 다 했습니다만, 만족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다점의 점원이 손을 비비며 말을 끌었다. 아직 계산이 남아 있었다.
* * *
같은 시각, 문당.
“고서점으로 향한다 했습니다.”
소식을 들은 두 사람은 서로 상반된 표정을 짓다가 서둘러 얼굴색을 바꾸었다. 모용곽은 잘 되었다고 생각했고, 우희는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서점에 심어놓은 병력을 벌써 철수시켰기 때문이다.
“다른 말은 없더냐?”
우희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보고를 한 남자가 바로 대답했다. 다점에서 차를 마시던 한 쌍 중 남자가 지금 이곳에 있었다.
“항우의 고사를 이야기하면서 나갔습니다. 그 외에는…….”
“커허엄…….”
모용곽이 헛기침을 했다.
고사(古事) 등의 옛 이야기. 세상 경험이 없는 남궁적이 즐기던 대화였다.
딱히 들을 것이 없으리라. 그럼 이제 모용곽은 문당에 더 있을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오히려 문사 우희가 모용곽이 필요했다.
아직 모용가의 식솔들은 고서점 주변에 배치되어 있었으니까! 우희의 표정을 보니, 문당의 인원이 고서점에는 깔려 있지 않은 듯싶었다.
“좀 더 있다 가시지요…….”
아쉬운 대로 우희가 모용곽을 붙잡았다.
“아니올시다. 차도 마셨고, 일도 바쁘신데 나도 내 일을 돌봐야지요. 그럼 나중에…….”
모용곽은 우희가 붙잡기 전에 서둘러 나갔다.
우희는 나가는 모용곽의 뒷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만 보았다.
“또 당했어. 놈은 지금쯤 내 사람이 고서점에서 철수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야.”
우희는 침착하게 오늘 있었던 일들을 정리했다.
“왜 그랬을까?”
우희는 현당이 고집스럽게 다점을 고수한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보고를 정리해 보았다. 순서대로 추려서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첫 번째, 나가려 일어난다. 두 번째, 다시 앉았다. 세 번째, 다시 나가려 일어난다. 네 번째, 다시 앉았다.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도! 그럼 이건…….”
우희는 머릿속으로 번개가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다른 감시자가 있었어. 내가 현당을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현당이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던 거야. 그럼 누구를 통해서?”
우희는 다점이 남궁가의 구역 안에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놈……. 남궁가주와 손을 잡은 거야!”
우희는 문당을 들여다보고 있을 남궁찬의 시선이 느껴졌다. 발가벗겨진 느낌이었다.
머리를 흔들었다. 아직 정리할 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어디로 간다고 했지? 고서점. 모용가의 영역이야. 왜일까? 다점에서 팔각정까지는 남궁가 구역. 나나 문당을 감시하려면 팔각정으로 가야 해. 그런데 왜 모용가의 고서점을 택했지? 가면서…….”
우희는 현당이 항우에 대해 이야기한 것을 떠올렸다.
“독불장군 항우!”
독불장군(獨不將軍)!
혼자서는 장군이 될 수 없다. 제아무리 잘났어도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변변찮다면 성공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우희는 지금 바로 자신의 처지가 항우와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당의 인원은 몇 배로 늘어났지만, 그들이 지닌 실력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강호의 이런 일에는 초출이거나 하수라고 하는 것이 더 적당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뿐.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실수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말과 통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실수를 했고, 현당은 그 실수를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준비해라. 내가 직접 간다. 놈은 고서점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어.”
우희는 현당이 자신에게 보내는 신호를 감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