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
<35화>
같은 시각, 다시 다점 이 층.
현당은 이 층으로 올라오는 모용미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에는 예의 그 특유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현당은 모용미를 향해 미소 짓는 것이 아니었다. 그 시각에 한창 도망다니고 있을 상인을 생각하니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양반도 재수 더럽게 없지. 하필 오늘 내 앞에 앉았더냐!’
“뭐가 그렇게 좋아요?”
다가오며 모용미도 같이 얼굴에 미소를 머금었다.
“당신을 보니 기분이 안 좋을 수 있겠소?”
염소수염의 상인에 대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며 현당은 앞으로 모용미와 즐길 시간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 * *
“오늘은 참 말씀이 많은 것 같아요…….”
한껏 웃는 얼굴로 모용미가 말했다.
“글쎄…… 내가 그랬나?”
현당이 씁쓸하게 웃었다.
‘남자는 좀 우수에 젖어 보이는 게 멋있어 보이는 법이야.’
씁쓸한 표정과 머릿속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그랬어요. 전에는 한 시진도 안 되어 말이 없었는데, 오늘은 전혀 아니군요. 왠지 딴 사람이 된 것 같아요.”
“오래 못 봐서 그런 것일게요.”
현당이 가슴 아픈 사연이 있는 듯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시선을 밖으로 돌렸다. 그녀도 현당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벌써 지는 해가 보였다. 정말 시간이 많이 흘렀다.
“그럼 평소와 다름없이 산책을 해볼까…….”
현당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용미도 고운 얼굴을 가볍게 끄덕이며 현당을 따랐다.
다점 이 층 계단 입구의 젊은 한 쌍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일어나던 현당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모용미가 의아함에 눈빛을 빛냈다. 말로 하지 않고 행동으로 보이는 것이 더욱 고왔다.
“아니…… 움직이려니 당신의 얼굴을 못 보게 될 것만 같아서…….”
모용미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기분이 나빠서도 아니고, 아파서도 아니었다. 현당의 말이 빈말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자주 볼 수 있잖아요.”
현당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같이 나란히 걷는 동안은 못 보잖소.”
모용미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공감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상관없으리라.
“그러면…… 그럼 뭐 하죠? 이야기를 많이 해서 그런지 목도 마르네요.”
현당이 점주를 불렀다.
“오늘은 안 하던 것을 한번 해보고 싶군.”
점주가 놀란 얼굴로 현당을 바라보았다.
“안 해보시던 것이라면…….”
머뭇거렸다.
남궁적은 여태껏 그런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글쎄…… 뭐가 좋을까?”
모용미를 바라보던 현당이 시선을 점주에게로 돌렸다.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떴다.
눈치를 챈 점주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그동안 차만 드셨으니, 이번에는 술이 어떻겠습니까?”
현당이 짐짓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표정만 놀란 표정이지, 현당이 모를 리가 없었다.
“다점에서 술도 파나?”
“간혹 찾으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에 갖춰놓고는 있습니다.”
현당이 겸연쩍은 듯이 모용미를 바라보며 들으라는 듯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렇군. 그렇다는군요. 그러면 어쩌나…….”
모용미를 바라보면서 눈치를 살폈다. 모용미가 굳이 피하려는 분위기는 아닌 것 같았다.
“가끔은 하지 않던 것을 경험해 보는 것도…….”
모용미의 말이 끊겼다. 그녀가 다른 말을 하기 전에 현당이 잽싸게 모용미의 말을 가로챘기 때문이다.
“그럼 한번 맛이나 봅시다. 기왕이면 진한 놈으로!”
현당은 진한 놈이라는 말을 강하게 발음했다.
물장사 한두 해 한 사람이 아니라면, 현당이 말한 진한 놈이 어떤 종류의 술이라는 것은 잘 알 것이다.
술은 두 가지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다. 하나는 발효와 숙성만 거치는 저농도의 발효주이고, 다른 하나는 발효된 술을 다시 중탕을 통해서 분별 증류한 후 숙성시키는 증류주이다.
진한 술은 당연히 증류주를 말한다. 도수도 높고, 향과 맛도 진할 뿐 아니라 자극도 훨씬 강하다.
싸구려 증류주는 나쁜 곡물이나 과일 등을 발효시킨 후 증류해서 보관하지 않고 바로 판매를 하지만, 좋은 술은 반드시 숙성 과정을 거친다.
보관 방법과 기간에 따라 술의 향과 맛도 달라지는 법이다. 흔히들 그것을 풍미라고 한다.
점주가 눈치껏 좋은 술을 가지고 올라왔다. 주문하지도 않았는데, 안주로 간단한 소채까지 챙겨왔다. 주문하지 않았으니 돈을 받을 리도 만무했다. 그런데도 가져온 것을 보면, 남궁적이 이곳에서 중요한 손님인 것은 분명했다.
자주 오는 것은 아닐지라도 점주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손님으로, 바로 이곳이 남궁가의 구역임을 상기시켰다.
현당은 잔에 따라진 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감회가 새로웠다. 마셔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한참을 생각해서야 죽기 전에 사형수에게 제공되는 조그만 병 하나가 떠올랐다. 그때 마신 후 처음이었다.
불현듯 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손으로 잔을 잡고 빙글빙글 돌렸다. 잔 안의 술이 넘치지 않기 위해 맴돌기 시작했다.
“안…… 드세요?”
마주앉은 모용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응? 아, 아니…… 갑자기 딴생각이 나서!”
“딴생각이라니요?”
현당이 실없는 표정으로 웃음을 흘렸다.
“세상은 말이지. 참 불공평한 것 같아. 어떤 놈은 부모 잘 만나 호의호식하고, 어떤 놈은 제 부모 얼굴도 모르는 놈도 있고. 게다가 남의 죄를 뒤집어쓰고 죽는 놈도 있다지.”
모용미가 양손을 모아 턱밑으로 가져갔다.
“아아…….”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응?”
현당의 질문과는 상관없이 모용미가 몽롱한 눈빛으로 현당을 바라보았다.
“멋있어요.”
현당이 겸연쩍게 웃어 보였다.
“갑자기 왜 그래?”
“가가가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잖아요. 그래서 전 가가가 사람이라는 느낌이 안 들었는데, 정말 사람이 바뀐 것 같아요.”
“죽다 살아나니 세상이 달라 보이더군.”
현당이 멀리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바뀐다…… 사람이 바뀌었다. 바뀌었지. 그리고 바뀌지 않으면 이 세상은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고…….”
중얼거리듯 말을 토해내고는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쪼르르르…….
내려놓은 잔에 망설임 없이 술을 부었다.
“안 독해요?”
“응?”
모용미가 현당의 손을 잡았다.
“전에는 술이라면 한 잔도 못 했잖아요. 독한 술은 입에 대지도 못했는데…….”
현당이 자신의 손을 잡은 모용미의 손을 바라보았다.
얼굴만이 아니라 모용미는 손마저 고왔다. 하얗고 가느다란 긴 손가락.
“아…….”
모용미가 쑥스러운 듯이 손을 뺐다.
현당은 괜스레 뭔가 허전함을 느꼈다.
* * *
같은 시각, 역시 현당이 앉아 있는 다점 이 층.
바로 계단 앞에 한 쌍의 남녀가 앉아 있었다. 현당이 들어오기 전부터 앉아 있던 사람들이었다. 현당이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다정하게 밀담을 나누던 사람들이 모용미가 들어온 지 한 시진이 지난 즈음부터는 연방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했다.
처음에는 현당 쪽은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다가 나중에는 가끔 흘겨보곤 하더니, 이제는 대놓고 현당과 모용미를 쳐다보았다.
분명히 무언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틀림없는데, 아직 때가 안 되었는지 초조한 듯 앞발을 이용해 바닥을 탁탁 소리가 날 정도로 두들기고 있었다.
시간도 꽤 흘렀음인지 한 사람이 나갔다 들어오기를 반복했다. 밖에서 무슨 소식이라도 오는 것인지, 그것이 아니면 밖에 전할 이야기라도 있는 것인지 들락날락거렸다.
이들 손님이 너무 오래 앉아 있자 이제는 점원이 그들 앞을 자주 왔다 갔다 했다. 주문했던 차는 벌써 다 마셨고, 맹물만 몇 번 시키는지 셀 수가 없었다. 돈이 없는지 더 이상 차를 시키지도 못하고 앉아서 무슨 일이 생기기를 기다리고만 있다.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라도 부쳐 먹지…….”
구시렁거리는 점원의 말이 계단을 통해 위층까지 전해졌다.
* * *
같은 시각, 문당.
우희는 인상을 찡그렸다.
“아직도 거기 있다더냐?”
짜증이 났다. 분명히 반 시진 후에 팔각정으로 자리를 옮기라 지시를 했건만, 현당은 다점에 들러붙어서 세 시진이 될 때까지 요지부동이었다.
벌써 다섯 번째 보고를 받았다. 물론 그 소식을 전한 사람은 모두 달랐다. 현당이 다점에 앉아 있는 동안 다섯 명이나 다점에 갔다 온 셈이었다.
이제는 대기시켰던 예비 병력을 모두 이용한 것 같았다. 다른 곳에 배치시킨 놈들을 이쪽으로 옮겨와야 할 것 같았다.
시간을 생각해 보았다.
“다음 일정은 팔각정. 그 다음에는 이소원(離所院). 그리고 마지막에 들르는 곳이 고서점(古書店). 시간이 이쯤 되면, 고서점까지 갈 수는 없으리라. 반드시 놈은 중간에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을 거야. 그럼 어디에서 빼내는가가 문제인데…….”
지도를 펼치고 우희는 거리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가서 고서점에서 이소원까지 배치되어 있는 애들을 귀환시키도록. 일정을 바꾼다.”
“존명.”
우희는 쥐고 있는 붓의 붓대가 부러지는 것도 모르고 있었지만 실내에 있던 사람들은 볼 수 있었다. 지금 막 소식을 전한 사람이 서둘러서 밖을 향해 뛰어나갔다. 흥분한 우희의 모습이 그를 더욱 급하게 만들고 있었다.
* * *
같은 시각, 다점 맞은편의 반점(飯店).
이곳은 남궁가의 총관 왕람이 점령하고 있었다. 창문도 닫고, 문에는 금일휴업이라고 적은 종이까지 내걸렸다. 그렇다고 모든 창문이 닫힌 것은 아니었다. 맞은편, 다점의 입구를 바라볼 수 있는 쪽창은 열려 있었다.
왕람은 그곳에서 다점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또 한 명이 다점 안에서 밖으로 뛰어나가자, 점원이 밖으로 나와서는 문설주 왼편에 걸었던 입간판을 오른쪽에 옮겨 걸었다.
왕람은 더 볼 것 없다는 듯 손가락을 퉁겼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가신이 밖으로 달려 나갔다. 가신은 이제부터 좀 전에 다점에서 뛰어나간 사람을 뒤쫓을 것이었다. 그가 가는 곳, 그가 만나는 사람 모두를 점검하고 기록할 것이었다.
벌써 여섯 번째 사람이 나갔다. 이러다가는 함께 나온 가신이 부족할지도 몰랐다.
“너는 가서 가주님께 사람이 더 필요하다고 전하라. 생각 외로 문당의 규모가 큰 것 같다고 말이다.”
“예. 총관.”
대답하며 다른 한 명이 뛰어 나갔다. 그의 목적지는 남궁가였다. 그가 다른 사람을 데리고 돌아올 때까지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이 다 나가지 말아야 할 텐데 걱정이 되었다.
뒤를 돌아보았다. 차례를 기다리며 호명되기를 기다리는 가신이 이제 둘 남아 있었다.
“안 되면 나라도 나가야지…….”
한숨을 쉬며 왕람이 고개를 저었다.
* * *
다시 남궁세가.
다점의 맞은편, 반점에 자리를 틀고 있을 왕람으로부터 인편이 도착했다. 소식을 들고 온 전령은 막힘없이 가주의 집무실까지 직통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가주. 총관이 사람이 더 필요하다고 합니다. 벌써 여섯 이상이 다녀갔습니다. 그들 모두가 문당으로 들어간 것 같습니다.”
남궁찬이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럴 리가 없어. 안에 둘. 지금 나간 놈들이 여섯. 맨 처음 출발한 놈들이 둘. 지금까지만 해도 무려 열 명의 인원이다. 다점, 팔각정, 이소원, 그리고 고서점까지. 네 곳에 열 명씩만 배치시켜도 사십이다. 게다가 지금 발견된 인물은 모두가 못 보던 얼굴들. 결국 새로 영입된 문당 소속이라는 말인데, 기존의 문당에 속한 사람들의 수가 스물. 그럼 모두 합해서 문당의 인원이 육십여 명을 넘는다는 소리 아니냐? 숫자만으로는 문당의 인원이 한 가문의 절반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말 아닌가! 그럼? 그 돈은 다 어디에서 나오고?”
믿기지가 않았다.
현당이 문당의 실체를 보여주겠노라고 할 때까지만 해도 반신반의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직접 눈과 귀로 확인하고 있는데도 믿을 수가 없었다.
사대 가문에서 지원받는 후원금으로 꾸려지는 문당이었다. 때문에 사대 가문의 의사를 존중하고, 그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는 문사 우희와 문당이었다.
그런데 문당에 사십여 명의 인원이 새로 보충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도 사대 가문의 지원을 받지 않고서 말이다. 문당이 자생적으로 조직을 꾸려갈 수 있는 방도를 찾았음을 의미했다.
결코 쉽게 간과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자본과 인력, 여기에 정보력까지 합해지면, 그것은 이미 하나의 방파로서 손색이 없는 조직이었다. 결국 사대 가문 밑의 남부맹과 문당이 아니라, 사대 가문과 나란히 서 있는 문당이라는 소리였다.
남궁찬은 소름이 돋았다.
“있는 애들, 없는 애들 다 끌어 모아서 왕람에게 보내라. 아니다. 내가 직접 가겠다. 서둘러라.”
남궁찬은 뚜껑 달린 서랍을 꺼내들고, 그 안에 오늘 들어온 보고서를 모두 쓸어 담았다. 직접 움직일 생각이었다.
* * *
같은 시각, 모용세가.
모용곽은 초조한 마음으로 등룡전(騰龍殿)를 왔다갔다 반복하고만 있었다.
“어찌 되었느냐, 어찌 되었어!”
호출을 받고 들어온 모용가의 총관은 지금까지 했던 말과 똑 같은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
“젠장. 그것이 말이 되느냐? 놈이 아직도 다점에 틀어박혀 있다는 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소리냐?”
“놈이라시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