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
<34화>
“오랜만이네. 돌아가거든 꼭 둘이 하나라고 전해주게.”
순간, 상인의 얼굴이 더 이상 일그러질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졌다.
“커험. 험…….”
큰기침까지 하면서 상인은 현당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 순간, 현당이 상인의 소매를 휙 잡아당겼다. 서로 얼굴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상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뒤를 조심하게. 자네를 쫓는 놈들이 있을 테니…… 정 안 되겠으면, 하늘에 돈비를 뿌리게. 그럼 살 수 있네.”
현당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상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상인은 얼굴이 빨개져서는 황급히 내려갔다.
현당의 앞으로 찻잔과 주전자가 새로 놓아졌다.
멀리서 장사치 한 사람이 계단을 내려갔다.
현당은 자연스럽게 차를 마셨다.
또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중년인 둘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급한 일이라도 생긴 듯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현당은 느긋하게 의자 등받이에 몸을 맡긴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출구 쪽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가장 먼저 염소수염을 한 상인이 서둘러 다점을 나가는 것이 보였다. 바로 그 뒤로 이 층에서 서둘러 나간 장사치가 나가고, 장사치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또 한 명이 따라 나섰다. 못 보던 놈이었다. 즉 이 층에 없던 사람이라는 뜻이다. 예상대로 장사치의 일행이 아래층에 더 있었다.
이번에는 형제 중년인이 나섰다. 한 명은 장사치를 따라가고, 다른 하나는 다른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현당은 다른 방향으로 가는 형제 중년인의 목적지를 알고 있었다. 바로 남궁가였다.
이 모든 것을 내려다보면서 현당은 특유의 시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현당은 예전에 남궁적이 그랬던 것처럼 창밖을 바라보며 모용미를 기다렸다. 급한 일은 다 했다. 이제 그녀가 올 때까지 그가 할 일은 없었다. 느긋한 마음으로 차나 홀짝였다.
* * *
같은 시각, 우희가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문당.
문당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보자마자 우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점에 있던 장사치였다.
“꼬리를 잡았습니다. 예상대로 놈은 바로 접선을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우희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았어. 어떤 자더냐?”
“행색은 상인 같아 보였습니다만, 근처에서 못 보던 자라 합니다. 아직 확인되지는 않았습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반드시 그자의 신원을 파악해라.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장사치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러실 줄 알고, 벌써 아이들을 시켜 그의 뒤를 쫓고 있습니다. 곧 보고가 들어올 것입니다.”
“좋아. 강바닥을 뒤집으면 가물치가 올라오는 법이다. 이번 기회에 놈들의 조직망을 샅샅이 파악할 수 있도록!”
우희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같은 시각, 남궁세가.
남궁찬은 자신의 집무를 보는 태사자원(太獅子院)에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때마침 왕람이 기다리던 소식을 가지고 왔다.
“대인. 나갔던 장일(張一)이 돌아왔습니다.”
“어서 들라 하라. 총관도 같이 들어오고!”
남궁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놈의 예언대로 장일은 돌아오고, 장이(張二)는 다른 곳으로 가고 있으리라.
“어찌 되었느냐?”
왕람이 들어와서 앉기도 전에 남궁찬이 물었다. 그만큼 마음이 급했다.
왕람의 뒤를 따라 장일이 들어왔다. 다점에서 현당 뒤에 앉아 있던 형제 중년인 중 한 명이었다.
“말씀대로 소가주께서 차를 마시는 순간, 저는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동생은 지금 소가주가 신호한 대로 그때 나간 사람을 뒤쫓고 있습니다.”
남궁찬이 캐묻듯이 되물었다.
“설마 들키지는 않았겠지?”
“그 문제는 염려 마십시오.”
“좋아. 적아가 뭐라더냐?”
“아무 말씀 없으셨습니다.”
“아무 말이 없어?”
남궁찬이 목소리를 높였다. 화를 버럭 내려다 참는 것 같았다. 약속으로는 분명 무슨 말이 있었어야 했다.
“침착하게 다시 말해봐라. 정말 아무 말 없었더냐?”
주눅이 들었는지 장일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정말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오히려 저희를 알아보시지도 못하셨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 분명히 네놈들에게 해준 말이 있을 터인데?”
순간, 남궁찬은 깨닫는 것이 있었다.
이들은 남궁적을 알지만 현당은 이들을 모르고 있었다. 단지 짐작으로 이들이 남궁가의 가신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행동으로 지시를 내리는 현당의 실력이 새삼 놀랍기만 했다.
“알겠다. 그럼 적아가 다점 이 층에 들어간 이후에 벌어진 일을 다시 이야기해봐라.”
상황의 심각함을 눈치챘는지 옆에서 왕람이 채근했다.
“하나도 빠짐없이 소상히 아뢰렷다!”
“어느 안전이라고…….”
장일은 급히 허리를 숙이며 현당이 이 층에 올라오는 발걸음부터 차를 한 모금 마실 때까지의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이야기했다.
“잠깐. 뭐라고 했다고?”
“제가 바로 소가주의 등 뒤에 있었기 때문에 똑똑히 들었습니다. 소가주께서는 그 사람의 손을 붙잡고 ‘오랜만이네, 돌아가거든 꼭 둘이 하나라고 전해 주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자도 틀림이 없습니다.”
남궁찬은 깨달았다.
그 이야기는 상인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바로 자신에게 들려주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둘이 하나라고…….”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그럼 그 안에 누가 있었더냐? 너희들 말고 있던 사람들을 이야기해 보아라.”
왕람이 잽싸게 종이를 꺼냈다.
다점 이 층의 좌석 배치가 그려진 종이였다. 지시가 있었는지 벌써 준비를 해놓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소가주께서는 여기 앉으셨을 테고, 그럼 자네 형제들이 여기 앉았다는 소리 아니냐? 그럼 그 상인은 이쯤이더냐?”
장일은 붓을 들어 좌석 배치도에 표시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곳에 일남일녀가 앉아서 다정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쪽에는…….”
“잠깐.”
남궁찬이 말을 끊었다.
“일남일녀라 했더냐?”
“그렇습니다. 아주 젊어 보이는 한 쌍이었습니다.”
남궁찬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둘이 하나라. 바로 두 사람이 한 쌍을 이루었다는 뜻이로다. 왕 총관.”
“당장 아이들을 풀겠습니다.”
남궁찬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총관이 직접 가게. 그들을 놓쳐서는 아니 되네. 그들이 만나는 사람, 만나는 장소, 다시 만난 연놈이 가는 곳과 또 만나는 사람까지 하나도 놓쳐서는 아니 되네. 이 모든 것에 차기 남부맹 맹주 자리가 걸려 있어!”
자리에서 일어나던 왕람이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존명!”
“나갔던 장이로부터 보고입니다.”
나가려던 왕람이 멈칫거렸다.
“대인…….”
남궁찬이 손짓으로 왕람을 붙잡았다.
“어서 들라 하라.”
문이 열리고 소동이 봉인된 서찰을 들고 들어왔다. 남궁찬은 봉인을 확인할 틈도 없이 서찰을 뜯었다. 힐끗 훑어보고는 그것을 왕람에게 넘겼다.
“알겠지.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허어억. 조, 존명!”
서찰을 받아든 왕람이 황급히 허리를 숙이고 대답했다.
서찰에는 단 네 글자가 휘갈겨 쓰여 있었다.
‘문당 도착.’
순간, 왕람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의 전모를 깨달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으로는 문당과 모용가의 세력과 실체, 그리고 규모까지 파악하기 위해 소가주가 직접 몸을 던져 미끼가 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 기회에 자신도 전력을 다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 * *
같은 시각, 모용세가.
모용곽도 보고를 받고 있었다.
“남궁 공자는 상인과 이야기를 나눈 후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계시다고 합니다.”
모용곽은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보고를 마친 가신이 나가고 다음 가신이 들어왔다.
“문당으로 장사치 차림의 한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좋아. 그자는 놓치지 않고 계속 쫓아라.”
“존명.”
또 손가락을 까닥이자 다음 사람이 들어왔다.
“곧 공녀께서 다점에 도착하실 것입니다.”
모용곽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좋아, 좋아…….”
이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자신의 귀로 들어올 것이 분명했다.
문당도 바로 자기 집 앞으로 이사시켜 놓았으니, 문당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모용곽은 앉아서 알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현당이 만나는 사람이 바로 자기 딸이니 걱정할 것이 없었다.
그게 아니라도 현당과 딸아이가 갈 만한 곳에 이미 모용가의 식솔들을 쫘악 깔아놓았으니, 이미 그의 눈이 천지 사방에 깔려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쓰읍.”
생각이 현당에게 이르자 잠깐 걱정이 앞섰다.
‘설마 현당 그놈이 우리 딸아이를 건드리지는 않겠지? 아닐 거야. 현당 놈의 실력으로는 우리 미아가 쓰러지지도 않을걸? 무공 실력도 실력이려니와 얼마나 고고한 아이인데…….’
모용곽은 바로 머릿속에서 걱정을 지워버렸다. 단 일초라도 재고의 가치가 없는 걱정이었다.
그보다 이번 기회에 문당의 실력과 규모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모용곽은 벌써 기대에 차 있었다.
‘죽심거사의 안배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거야.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지…….’
* * *
같은 시각, 남경의 뒷골목.
염소수염을 한 상인은 똥줄이 타도록 달리고 있었다.
“헉헉헉헉…….”
재수가 더럽게 없어도 정말 없었다.
새로 판로를 넓혀보겠다고 가지 않던 다점에 가는 게 실수였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고, 평소 물건을 납품하던 정무련 구역에서 장사나 열심히 할 것이지 왜 남부맹의 이쪽까지 눈을 돌렸는지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그냥 욕심내지 말고 정무련 쪽 납품이나 하는 건데…….’
속으로 후회를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좋은 자리라 그곳에 있다 보면 남쪽의 대소 상인들을 만날 수 있다고 해서 간 것인데, 일이 이렇게 틀어질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거기에 차 값은 왜 그렇게 비싼지……. 그건 둘째 치고, 그 얼굴에 기름기 좔좔 흐르는 기생오라비 같은 놈과 눈빛을 마주칠 때부터 낌새가 좋지 않았다.
자신의 불운은 그때부터 시작된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 기생오라비 같은 놈이 자신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낸 것이었다. 처음에는 저놈이 누구를 잘못 알아본 게로구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놈은 계속해서 자신에게 신호를 보내다 못해 아예 눈짓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면 저 기생오라비 같은 놈이 유혹하고 있는 상대가 바로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느끼하기까지 했다. 온몸으로 소름이 돋는 듯하더니 침이 묻은 것처럼 끈적거렸다.
“허억.”
그제야 그 눈빛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놈은 남색(男色)을 즐기는 놈이 분명했다. 몸서리가 쳐졌다.
‘저놈이 오늘 이 자리에서 누구랑 만나기로 약조가 되어 있었던 게야. 나를 그 사람으로 착각한 게지.’
기분이 더러웠다.
이제는 놈이 입맛까지 다셨다. 생긴 것도 재수 없게 기생오라비 같이 느끼하게 생겼다 싶었더니 남색이라니…….
‘후장을 후빌 놈…….’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속으로 욕을 바가지로 퍼부으면서 상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수도 더럽게 없지. 나가려면 놈의 곁을 지나가야만 했다. 서둘러 나가려는데 놈이 그의 손을 붙잡았다.
“오랜만이네. 돌아가거든 꼭 둘이 하나라고 전해주게.”
‘뭐, 뭐라는 거야?’
뜻도 알 수 없는 말을 기생오라비 같은 놈이 주절거렸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놈은 그의 손까지 주물럭거렸다.
구역질이 쏟아졌다.
“커험. 험…….”
그는 놈에게 그런 사람이 아니니 사람을 잘못 보았다 알려주려는 듯이 헛기침을 했다. 순간, 놈이 그를 확 잡아당겼다.
“뒤를 조심하게. 자네를 쫓는 놈들이 있을 테니…….”
또 모를 소리를 주절거렸다.
소름이 쫙 돋았다. 거칠게 놈의 손을 뿌리치고, 상인은 서둘러 다점을 나왔다. 나오면서 놈의 말이 무슨 뜻일까 생각해 보았다.
그때였다. 그의 바로 뒤로 이 층에서 한 사람이 따라 내려오고 있었다. 멀찍이 앉아 있던 장사치였다.
‘장사치…….’
같은 상인이었다.
‘나를 쫓는 놈이 있을 거라더니…….’
순간, 상인은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좀 전에 돋았던 소름과는 다른 의미의 소름이었다. 첫 번째 것은 징그러워서, 더러워서 돋은 것이지만 지금 것은 두려워서, 목숨이 위태롭기 때문에 돋은 소름이었다.
이 구역을 담당한 놈들이 타 구역을 기웃거리는 자신에게 꼬리를 다는 것이 분명했다.
발걸음을 빨리 했다. 골목이 보이자 잽싸게 몸을 돌려 담을 넘었다. 누구네 집인지도 몰랐다. 다짜고짜 문으로 뛰어가서는 대로를 가로질러 뛰었다. 힐끗 뒤를 돌아보니 바로 등 뒤로 놈들이 따라붙었다. 한두 놈이 아니었다.
“헉헉헉…….”
놈들에게 잡히면 끝장이었다. 매 맞는 수준에서 끝나지 않을지도 몰랐다. 자신은 정무련 구역에서 온 사람이고, 이곳은 남부맹 구역이기 때문이다.
발소리가 들렸다. 놈들은 아직도 그를 쫓고 있었다.
“독한 놈들…….”
울상을 지으며 상인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정 안 되겠으면 하늘에 돈비를 뿌리게. 그럼 살 수 있네.’
마지막으로 상인은 기생오라비가 그에게 해준 말을 떠올렸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이고, 이판사판이었다. 돈이 아무리 귀하다지만 우선 살고 볼 일이었다.
상인은 전낭을 풀면서 사람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돈비다. 하늘에서 돈비가 내린다.”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이 무슨 소리냐며 그에게 시선을 모았다. 상인은 망설이지 않고 전낭 안의 돈을 하늘에 뿌렸다.
“와아아…….”
사람들이 놀라서 돈을 받기에 급급했다.
상인은…… 그렇게 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