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
<28화>
“적, 있나? 남궁적! 어디 있어?”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현당은 인상을 찡그렸다. 하루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을 처음 듣는 목소리가 방해하고 있었다.
“누구지?”
현당의 질문에 시녀 한 사람이 의아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안내 없이 여기까지 들어오실 분은 한 분밖에 없지요. 서문 공자 말입니다.”
현당이 잠시 생각을 하더니 손가락으로 자신과 문밖을 번갈아 가리켰다.
“그 말은 저 친구와 내가 서로 아는 사이란 말이지?”
시녀들이 의아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현당은 허락을 받지 않고 들어올 수 있다는 시녀의 말에 예전부터 서문장천과 남궁적이 가깝게 지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반문을 했던 것이다.
현당은 최대한 느린 동작으로 굼뜨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아는 척하기는 정말 싫었다.
예상대로 서문장천이 말도 없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어이.”
현당이 손을 흔들었다. 그의 모습을 위아래로 한 번 훑어보던 서문장천이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뭐야, 멀쩡하잖아.”
“내게 무슨 일이라도 있기를 바랐나?”
서문장천이 현당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내 실내에 있는 이질적인 존재들을 한번 흘겨보았다. 서문장천의 시선을 받은 시녀들이 어정쩡하게 몸을 사렸다. 마치 있어서는 안 되는 곳에 있어 죄를 지은 듯한 행동이었다.
“자네…….”
현당이 서문장천의 말을 끊었다.
“뭐? 취향이 바뀌었다는 말을 하려는가? 사람이 어찌 밥만 먹고 살 수 있나?”
현당이 서문장천의 시선을 피하려 고개를 돌렸다. 이내 눈짓으로 시녀들에게 나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취향이 바뀐 것이 아니라 사람이 바뀌었군.”
현당이 고개를 돌렸다.
“사람이 바뀌다니?”
“자네 말이야.”
서문장천이 현당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변해도 많이 변했어. 마치 껍데기는 그대로인데 안에 들어 있는 이는 딴 사람처럼 말이지.”
현당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무슨 말인가?”
“자네는 일미를 제외하고는 어느 여자도 가까이 하지 않던 사람이야. 그런데 저렇게 버젓이 시녀들을 방 안으로 들이기도 하고, 문사에게는 하루에 한 마디도 안 하던 사람이 지금은 문사의 방문을 매일 받고 있다고?”
잠시 멈칫거린 현당은 순간적으로 남궁적의 일상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아침 일찍 일어나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수련동에서 일출을 맞으며 자하기를 연마하고, 그런 다음 오전에는 검술을 연마한다. 남궁가의 검법이 주종이지만, 천하의 모든 검법이라면 굳이 가리지를 않는다. 오후에는 다시 검리를 따져본다. 어느 검초가 정말 좋은 것인지 연구를 계속한다.
저녁이 되어서야 아버지와 남궁가의 대소사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일찍 잠에 든다. 다음 날 일찍 일어나기 위해 몸의 긴장을 풀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도 모르게 낮게 중얼거렸다.
“바보 같으니라고…….”
정말 바보 같았다. 이 좋은 집, 이 좋은 신분으로 세상의 모든 즐거움은 맛보지도 않고 집의 담장 안에만 틀어박혀 있다니……. 아무리 남궁적이 머리가 좋을지라도 결국 세상 물정 하나 모르는 헛똑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말인가?”
“아, 아니. 아닐세. 그 외에 내가 또 뭐가 바뀌었나?”
서문장천이 가뜩이나 가는 눈을 더욱 가늘게 떴다.
“정말 모르겠나?”
“모르겠네. 말해보게.”
퍼헉.
“네놈이 언제부터 내게 반말을 지껄였다고 반말이야, 반말이!”
현당은 뒤통수에서부터 눈앞으로 불똥이 튀는 것을 느꼈다.
* * *
우희에게서 소식을 들은 남궁찬이 서둘러 달려 나왔다. 서문장천이 현당을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이렇게 다급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서문장천과 현당이 서로의 실력을 겨룬다는 소리를 듣는 순간, 참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현당의 지금 실력으로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문장천은 서문세가의 소가주였다. 게다가 현당의 진짜 신분을 모르니 남궁찬이나 모용곽처럼 현당을 봐주지도 않을 터였다.
현당이 장도를 들고 서문장천이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그들의 비무를 바라보고 있는 우희도 보였다. 사람을 시켜서 남궁찬에게 이 소식을 전한 사람이 바로 우희였다.
험한 얼굴로 짐짓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안 말리고 무얼 하는 게요?”
“제가 달려왔을 때는 이미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둘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서문장천이 먼저 움직였다. 마치 돌개바람이 이는 것처럼 그의 신형이 사람들 시야에서 사라졌다.
쿠우우우.
현당의 신형이 마치 바람에 휩쓸린 것처럼 떠올랐다가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쓰러지지 않은 게 용했다. 가까스로 균형을 잡고 비틀거리는 찰나, 사라졌던 서문장천의 신형이 바로 현당의 코앞에서 다시 나타났다.
기다렸다는 듯이 현당의 장도가 바람을 갈랐다. 하나 노력도 헛되이 장도는 허공을 갈랐고, 엉뚱한 곳에서 튀어나온 주먹이 현당의 하복부에 꽂혔다.
“후우우으…….”
현당의 입에서 헛바람이 새어나왔다. 뒤로 한 발짝 물러서는 현당을 향해 하늘에서 떨어지는 주먹이 우박같이 날아들었다.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며 이에 질세라 다시 장도를 휘둘렀지만, 애꿎은 바람만 불러일으킬 뿐 아무것도 걸리는 것이 없었다. 오히려 뒤에서 날아온 발길질에 앞으로 고꾸라졌을 뿐이었다.
슈아아악.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서문장천의 신형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현당이 서 있던 곳에서 한 발자국 뒤였다.
“뭐야? 주화입마의 충격으로 머리까지 이상해졌다더니 헛말이 아니로군. 보이지 않으면 아무 힘도 못 쓴단 말인가?”
“크으으…….”
바닥에 엎어진 현당이 피가 흐른 입술을 닦고 다시 일어났다.
“그래. 그래야 남궁적이지.”
힐끗, 서문장천의 시선이 남궁찬에게 향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현당의 신형이 바닥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리고는 그가 구사할 수 있는 한 가장 빠른 검식으로 장도를 내리그었다.
“아…….”
우희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터졌다.
아름다웠다. 허공에 그려지는 하얀 도의 궤적이 정말 아름답다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노력도 헛되이 서문장천의 신형은 또 사라졌고, 현당은 아무것도 베지 못한 채 빈 공간만 갈랐다. 다시 현당의 신형이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바닥을 뒹굴었다.
남궁찬이 우희를 바라보았다. 우희는 방도가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어색한 미소만 흘렸다.
“뭐야! 실력이 반의반도 안 되잖아? 자네의 그 시간을 쪼개고 하늘을 가르던 검기는 어디 갔나?”
바닥에 엎어진 현당은 머리를 흔들었다. 충격을 이기지 못한 듯 멍하니 있다가 한차례 우희를 노려본 후, 입술을 타고 흐르는 피를 다시 한 번 닦아내고 일어섰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이 멀리서도 보였다.
“벌써 지쳤나?”
서문장천이 이죽거렸다.
“다시 하지.”
현당이 도를 들고 섰다. 자세가 바뀌었다. 그가 가장 잘하는 초식, 화련검의 기지일보였다.
“그건 또 뭔가? 내상을 입더니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닌가? 나한테 그런 하급 초식이 통하리라 보는 건가?”
“그건 해봐야 알고…….”
“큭…….”
서문장천이 팔짱을 끼면서 현당을 노려보았다.
“후기지수를 뽑을 때, 세상 사람들이 그랬지. 나는 잡히기만 하면 방법이 없다고 말이야. 하지만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어. 누가 과연 나를 잡을 수 있을 것인가? 보이지도 않는데…… 실제 실력을 직접 비교하지도 않고 무조건 네가 낫다고 했지. 그때 난 아무 말 안 했어. 그래, 보자. 나중에 남부맹에 일이 생겼을 때, 누가 힘이 되는지, 누구를 믿을 수 있는지 그때 보여주마. 난 그렇게 다짐했네. 하지만 우희한테 네 이야기를 들으니 더 이상 가만있을 수 없더군. 제대로 칼을 잡을 수도 없게 된 네놈을 후기지수 자리에서 끌어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게 내가 남부맹을 위해 할 일이고, 우리가 살 길이야. 이번 한 번으로 끝내자.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놈을 갖고 장난하는 것도 재미없으니.”
호흡을 가다듬은 현당은 두 손으로 잡는 장도를 왼손으로만 잡고, 오른손은 손잡이에서 살짝 떼고 닿을락 말락 하게 놔두었다.
“와라.”
현당이 기합을 넣으며 소리쳤다.
순간, 우희가 남궁찬에게 속삭였다.
“부탁합니다. 현당의 도(刀)…….”
남궁찬이 낮게 대답했다.
“준비됐네.”
모든 사람의 준비가 끝났다. 우희도, 남궁찬도 그리고 현당도. 이제 서문장천이 먼저 움직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쏴아아아.
바람이 일었다. 동시에 서문장천의 신형이 사라지면서 현당의 주변 대기가 일렁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무언가가 현당을 들이받았다. 현당의 동체를 통해서 미미한 진동이 허공으로 퍼졌다.
정작 현당은 꿈쩍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가 입고 있는 옷들이 찢어지고 흩날리며 허공으로 흩어졌다. 어느새 현당은 상체를 벌거벗고 있었다.
파하아아.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현당의 오른손이 수도(手刀)가 되어 허공을 베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 현당의 오른손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놓치지 않고, 현당은 그것을 움켜잡았다.
‘기지일보.’
현당의 신형이 그쪽을 향해 비틀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방향을 잡은 왼발이 신형을 앞으로 밀었고, 오른발이 튀어나갔다. 그보다 멀리 왼손의 장도가 허공을 꿰뚫었다.
그 순간, 남궁찬도 움직였다. 그의 수중을 벗어난 종이 한 장이 현당의 장도를 향해 날아갔다. 쇠가 부러지는 소리가 울리고, 허공에는 피가 솟았다.
전경이 드러났다. 현당의 오른손에는 서문장천의 소매가 잡혀 있었고, 잡혀 있는 서문장천의 목 언저리를 날이 부러진 장도가 긁었다. 간신히 급소를 벗어난 상태였다. 장도의 날은 손잡이에서 세 치 정도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멀리서 남궁찬이 소리쳤다.
“놈. 그렇게 심마(心魔)를 다스리라 했건만, 또다시 살겁(殺劫)의 유혹에 빠지느냐!”
불호령에 서문장천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현당은 부러진 장도를 내팽개치고 오른손을 끌어당겼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서문장천이 맥없이 끌려왔다. 그 순간, 현당의 왼손이 정권으로 바뀌더니 서문장천의 콧잔등을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케헥.”
서문장천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권장이 현당의 앞가슴을 후벼 팠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마치 천 근 쇠 종을 두들기듯이 비어 있는 소리만 울릴 뿐 현당은 맞는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서문장천을 후려갈겼다.
허공을 날아가던 서문장천의 신형이 다시 현당에게 끌려왔다. 현당은 잡고 있는 오른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동시에 이번에는 현당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무릎으로 서문장천의 복부를 강타하고, 바닥에 드러눕는 서문장천을 깔고 앉았다.
현당의 난타는 그렇게 남궁찬이 말릴 때까지 계속되었다.
* * *
“어찌 되었지?”
옷을 갈아입고 있던 현당은 방으로 들어서는 우희를 볼 수 있었다. 눈짓을 받은 시녀들이 밖으로 나갔다. 그 와중에도 걱정스런 눈빛을 현당에게 보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대단하군요.”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다듬던 현당이 물었다.
“뭐가?”
“며칠 만에 시녀들을 완전히 휘어잡았군요.”
대답 대신 현당이 우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서문…… 서문장천은?”
“의생들이 응급조치만 하고 돌려보냈습니다. 급소는 피했기 때문에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 했습니다. 한 치만 안으로 흘렀으면 경동맥이 잘렸을 판입니다. 앞으로 사람을 상대로 도를 휘두를 때는 주의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눈이 찢어졌고, 코가 부러지고, 앞니가 세 개 나갔다더군요. 뭐, 비무 중에 생긴 일이니까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 발로 찾아와서 비무를 청한 서문장천이니까요.”
현당이 묻고 싶은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우희가 시켰지?”
우희는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뭐를요?”
“아버지에게 내 도를 부러뜨리라고 말이야.”
“그렇지 않았다면 당신은 서문 공자를 죽였을 테니까요. 그러면 남부맹은 그것으로 끝장입니다. 남부맹이 없다면 당신도 있을 수 없습니다. 당신 때문에 남부맹이 깨질 수는 없으니까요.”
우희가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게 그렇게 하라고 이른 것은…….”
“전음이라고 합니다.”
“아아. 전음은 다른 사람은 못 듣나?”
“예. 하지만 매우 내공이 높고, 청정심법의 도의를 깨달은 사람은 전음도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만, 모르죠. 남궁가주가 들을 수 있었을지. 하지만 서문 공자는 절대 못 들었습니다. 만약 들었다면 당신의 그런 꽁수에 당할 리가 없었겠지요.”
그랬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
우희는 현당에게 서문장천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전음으로 가르쳐주고, 현당이 서문장천을 죽일 수 없도록 남궁찬에게 벌어질 사태를 미리 알려준 것이다.
“큭…….”
현당이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뼈를 주고 살을 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