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무사-27화 (27/175)

# 27

<27화>

잊고 있었다. 환골탈태는 다시 태어나는 것과 다름없었다. 때문에 이전에 심각한 내상을 입었을지라도 그 후에 환골탈태를 하면, 내상은 씻은 듯이 사라질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환골탈태는 일생에 한 번 올까 말까 했다. 벌써 환골탈태를 한 사람이라면 그 기회는 앞으로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주화입마에 빠졌다면 그것은 이제 치유할 수 없는 내상을 입은 것과 다름없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남궁적은 내공이라는 분야에서는 불구나 마찬가지라는 소리다.

세상 사람들은 남궁적과 독고진을 같은 선에 놓고 볼지 모르지만, 이제 둘은 서 있는 위치가 달랐다. 주화입마에 빠진 남궁적이 결코 독고진과 같은 자리일 수가 없었다. 독고진은 이미 남궁적을 앞서고 있었다.

그런 줄 꿈에도 생각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은 장차 호적수가 될지도 모를 남궁적을 위해 치료하라고 하수오를 준 독고진의 칭찬으로 입을 모았다.

“좀 있으면 후기지수를 다시 뽑을지도 몰라. 아니, 분명히 다시 뽑자고 할 걸세. 그때를 위해서 준비나 해두시게. 아버지가 안 계시니 그건 총관이 해야 할 일 아니겠어. 안 그런가?”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문진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할 일이 많았다. 세가 사람들과 친해놓아야 하고, 이웃들에게 잘 보이도록 돈도 뿌려놓아야 했다. 세상 사람들의 인심을 얻기 위한 물밑 작업은 소가주가 벌써 시작한 상태였다.

“그마저 없다면 나는 얼마나 적적할까…….”

느긋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독고진은 안으로 들어갔다. 진심이 아닌 남들을 의식해서 한 소리였다.

독고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문진은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일쯤이면 독고진이 남궁적이 없으면 세상이 얼마나 적적할 것이냐고 했다는 소문이 돌 것이었다.

“정말 크신 분이야…….”

이문진의 얼굴에는 좀 전까지의 근심 대신 만족감이 어려 있었다.

* * *

우희는 걸음을 멈칫거렸다. 수련동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들어올 때, 경비들은 남궁적 공자가 안에서 수련 중이라고 했다. 남궁가주도 아침 일찍 다녀갔다 전했다. 그럼 당연히 현당 혼자 수련에 열중하고 있어야 할 텐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연공을 쌓고 있으리라.

우희는 현당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되도록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현당은 정좌한 자세로 운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우희는 최대한 현당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우희는 조용히 수련동 안을 둘러보았다. 현당 때문에 그동안 수십 차례 들락거렸지만 한 번도 자세히 구경할 겨를이 없었다.

여기저기 긁혀 있는 검 자국, 검흔이 눈에 띄었다. 얼마나 많은 고수들이 이 수련동에서 득도를 했고, 남궁가의 인물이 새로운 검술을 만들었던 그 모든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우희는 조심스럽게 벽에 나 있는 흠집들을 쓰다듬어 보았다. 고르게 패여 있는 것, 들쭉날쭉 흔들린 것, 간격도 천차만별이었다. 개중에는 남궁적이 남긴 것도 있을 것이었다.

그때 우희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안개에 휩싸인 현당의 모습이 보였다. 그냥 안개가 아니었다. 내공이 일정 단계에 이르러 몸 밖으로 배출되어 형성된 내기였다.

우희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현당의 수준이 저 정도까지 이르렀을 줄은 미처 모르고 있었다.

우희는 긴장하여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갑자기 불안감이 전신을 에워쌌다. 과연 자신이 현당을 끝까지 통제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계산한 것 이상으로 현당의 실력이 향상되고 있었다. 게다가 벌써 자신의 시야를 벗어나고 있었다.

현당은 남궁가주의 허락 하에 이제는 남궁적의 방을 제 집 드나들듯 들락거렸다. 언제 남궁가주와 손을 잡고 진짜 남궁적의 행세를 할지 모를뿐더러 그러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운공 중에는 방어할 수단이 없다. 누군가가 현당을 제거하기에는 지금이 최고의 적기였다. 주화입마에 빠진 남궁적 역시 운공 중에 일이 발생했다.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다.

우희는 현당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의심이 들었다. 당연히 그녀가 올 것을 알고 있으면서 저처럼 태연하게 운공이나 하고 있을까? 그녀가 현당을 죽이지 않으리라는 보장이라도 있단 말인가?

참으로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 현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엉성하게 꼬인 누에고치처럼 현당의 전신을 감싸고 있던 내기가 조금씩 그의 콧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후우우우…….”

우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현당을 제거하더라도 앞으로 발생할 일들이 문제였다. 그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여기까지 오기도 힘들고 멀었지만, 무엇보다 현당의 재질이 아까웠다. 남궁적과 닮은 사람이 다 뛰어나다고 보장할 수 없는 만큼 현당이라는 패를 계속 밀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아직 우희는 현당을 감싸야 했다.

우희는 냉정한 시각으로 상황을 분석하기 위해 한발 물러섰다.

전설처럼 이야기하는 삼화취정(三華聚頂) 오기조원(五氣朝元)은 아닐지라도, 일원기조(一元基調)는 멀지 않아 보였다. 오래 지나지 않아 곧 정수리 위에 하나의 고리가 형성될 것이었다.

우희는 젊은 고수들 중에서 이 정도의 수련을 쌓은 사람이 얼마나 될지 생각해 보았다. 주화입마에 빠지지 않았을 때의 남궁적이나 독고진은 채 열 살이 되기 전 환골탈태를 해 이 수준은 넘어 있었다. 서문세가의 서문장천은 그들보다는 못하지만 이 정도는 넘을 것이었다.

무사 단목기도 이 수준은 넘어 있었다. 만약 단목가가 세가에 끼어 있었다면, 남궁적이 그렇게 쉽게 후기지수로 선발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니, 경력이나 수위 등 무엇을 보더라도 단목기가 후기지수로 뽑혔을 가능성이 훨씬 컸다.

마지막으로 모용가의 모용탄이 생각났다.

우희는 고개를 저었다. 모용탄은 일원기조까지 이르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면 모용가주가 모용탄이 남경을 그렇게 활보하고 돌아다니게 놔두었을 리가 없었다. 어물전의 꼴뚜기가 바로 모용가의 모용탄이었다.

이미 내공 수준에서 현당은 그 정도의 위치에 올라 있었다. 현당을 뽑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만 하면 어디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우군 하나를 만들 수 있었다.

문득 현당이 어디에서 그런 내공을 끌어 모았을지 궁금해졌다.

제련현마강은 그 자체가 내공심법은 아니었다. 내공의 운용법이라 하는 것이 더 정확했다. 현마강을 만들고 단련시키는 것이 바로 제련현마강이었다. 즉 제련현마강은 다른 곳에서 만들어진 내공을 현마강으로 전환시키고, 그것을 단련하는 운결이지 심법은 아니었다.

제련현마강이 완전한 심법이 되기 위해서는 또 다른 한 쌍인 조련제마공(造鍊帝魔功)이 필요했다. 조련제마공이야말로 마의 심법으로, 멸문한 배교의 이대 심법 중 하나였다. 규화신공보다 처지는 마의 무공, 흡정대법의 근본이 바로 조련제마공이었다.

결국 조련제마공을 제외시키고 제련현마강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았다. 커다란 부작용을 가진 껍데기…….

우희는 현당이 남궁가에 들어온 이후의 일들을 하나하나 되짚어보았다.

현당이 그녀의 시야를 벗어난 때는 남경의 저잣거리에서의 두어 시진뿐이었다. 그렇다면 현당은 그녀가 보는 앞에서 내공을 흡수했다는 것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우희는 현당이 먹은 것, 현당이 접촉한 것, 현당이 만난 사람을 되새겨보았다.

“헉!”

남궁찬과 모용곽!

그들은 현당의 요상을 치료하는 데 자신의 내공을 사용했다.

우희는 놀란 눈으로 현당을 바라보았다. 벌써 누에고치의 실처럼 풀렸던 내기가 현당의 콧속으로 거의 다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우희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녀는 현당이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현당이 눈을 떴다.

순간, 우희는 눈을 깜박거렸다. 갑자기 현당의 눈에서 비추는 안광이 눈을 시리게 만들었다. 다시 눈에 힘을 주고 현당을 바라보았을 때에는 이미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무엇인가요?”

우희는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뭐가?”

“현마강만으로는 부족하고, 무엇을 연공하고 있었나요?”

현당은 특유의 시원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우희는 짜증이 났다. 현당의 저런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치 그런 이야기를 꺼낼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모든 것을 통달한 것 같은 여유 있는 자의 모습이었다.

“말해봐요. 남궁가의 자하기? 아니면 모용가의 토하기인가요?”

“무엇일 것 같은데?”

현당이 우희를 놀리듯이 되물었다.

우희는 잠시 한발 물러서서 생각하려는 것처럼 수련동의 벽에 기대면서 팔짱을 꼈다. 그 모습에서는 말해주지 않아도 알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엿보였다.

“주된 기원(基源)은 아무래도 제가 복용시킨 천년하수오겠지요. 아직 충분히 흡수하지는 못했겠죠? 알고 있죠? 전 천년하수오의 반도 채 안 주었으니까요. 그리고 영약을 먹었다고 그것이 내공이 되지는 못하고…… 반드시 그 영기를 흡수할 수 있는 내공심법이 필요하지요. 운기토납만으로는 안 될 테고. 결국 다른 사람의 운결을 훔쳐 배울 수밖에 없었을 텐데…… 그럼, 결국은 모용가의 토하기인가요?”

우희는 확신이 들었다. 모용곽이 현당의 수련 정도를 확인하기 위해 비무해 주다가 실수로 내공을 운용했고, 그때 응급조치를 취한다고 자신의 내공인 토하기를 현당에게 넣어주었을 것이다. 그때 운기를 돕기 위해 토하기의 심법대로 진기를 인도했으리라.

모용곽이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모용곽만 어리석다고 할 수는 없었다. 우희 그녀도 현당의 그런 깜짝 공연에 속고 있었던 것이다.

“토하기가 확실하군요.”

우희는 단언하듯 말했다.

하지만 현당은 예의 그 미소만 지은 채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무언가 꺼림칙했다. 마치 자신을 조롱하고 있는 듯했다.

우희는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순간, 최근에 현당과 가까이 지내는 남궁찬이 떠올랐다.

“설마…….”

그제야 현당이 입을 열었다.

“내 그랬지. 무공과 내공을 떼려야 뗄 수 없는 것 같다고 말이야. 그랬더니 남궁 아버지께서 직접 설명을 해주시더군. 사지의 연장이 도구이고, 그 도구의 사용은 바로 내기의 흐름을 따른다고. 결국 내공심법에 따라 무공도 제대로 발휘할 수 있고, 무공에 맞는 내공이 따로 있는 법이라고. 마치 소림 공부는 소림 내공이어야 제 맛이 나고, 제 눈에 안경인 것과 같은 이치지. 그것을 일컬어…….”

“기공조화(氣功調和)!”

대답하면서 우희는 몸서리쳤다.

지금 현당은 남궁찬으로부터 직접 자하기를 전수받고 있었다. 우희의 시선이 출입문으로 향했다. 그녀의 시선이 움직이는 것을 현당은 놓치지 않았다.

우희는 잽싸게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현당이 문을 가로막고 섰다.

“비켜요. 남궁가주에게 이야기해야겠어요.”

“왜?”

“즉각 당신에 대한 수련을 중단하라고. 당신이 남궁가주를 가지고 놀고 있다고 말이에요.”

“과연 그 말을 남궁 아버지께서 믿어주실까?”

우희는 또 한 번 몸서리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남궁 아버지라니…… 벌써 현당과 남궁찬은 부자지간의 연이라도 맺은 것인가?’

우희는 심호흡으로 호흡을 가다듬었다.

“무슨 말이죠?”

“한두 번 지도한 것으로 내 내공의 수위가 그 정도에 이르렀다는 말을 믿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지.”

현당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자신도 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 이가 갈렸다.

“당신, 일부러 내게 당신의 수위를 보여준 것이군요?”

너무 하얘서 분가루가 묻어날 것 같은 우희의 뺨을 현당이 손으로 부드럽게 쓸었다.

“결국 우리는 한 몸이라는 이야기지. 당신이 내게 가르쳐 준 제련현마강이 없었다면, 나는 토하기의 내공과 자하기의 내공을 하나로 합칠 수도 없었을 거야. 중요한 건 내게 제련현마강을 지도해 준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는 것이지. 설마 잊은 것은 아니겠지?”

현당은 우희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당신이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현당의 입김이 우희의 얼굴을 간질였다.

“흡.”

현당이 급히 뒤로 주춤 물러나더니 몇 걸음 떼지도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모로 드러누워 양손으로 사타구니를 움켜쥐고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

“잘 봤어요.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수련하도록 해요. 내가 부를 때까지는 남들에게 드러나지 않도록 신중하게 감추도록 하고! 한 가지 모르고 있는 일이 있는데, 서로 다른 내공을 하나로 합치는 것은 제련현마강이 아니라, 조련제마공이에요. 제련현마강은 그저, 내공을 호신강기로 전환하는 것일 뿐!”

우희의 조롱하는 듯한 냉정한 목소리가 실내를 가득 채웠다.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한 현당이 밖으로 나가는 우희를 쳐다보았다. 우희는 나가다 말고 현당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아직도 바닥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그를 향해 엄지와 검지를 들어서 원을 만들어 보여주었다.

“발기하면 이 정도 되는군요.”

홱 소리가 나도록 몸을 돌리는가 싶더니 이내 우희의 모습이 사라졌다.

“하하하하…….”

시원스러운 현당의 웃음소리만이 수련동 안을 가득 채웠다.

* * *

문당으로 들어서던 우희는 멈칫거렸다. 안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큰 키에 비쩍 마른 몸. 얼굴까지 길쭉한 젊은이였다. 눈까지 위로 찢어져 있어, 전체적으로 날카로운 인상을 지울 수 없는 서문장천이었다.

서문가에서는 가주 대신 소가주인 서문장천이 그녀를 찾아온 것이었다.

‘아직 콧대가 높군.’

우희는 서문세가의 콧대를 한번 꺾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일거양득. 일석이조!’

* * *

“그게 말이야, 엄청 즐거운 거라고. 처음에는 아프기도 하지만, 그것은 궁극의 즐거움을 깨닫기 위해 거쳐야 할 관문이란 거지. 고통은 한순간, 쾌락은 영원이라는 말 있잖아.”

“호호호호…….”

“오호홋. 소가주님은 아프시고 나더니 사람이 바뀌신 것 같아요. 전에 없이 농담도 잘하시고…….”

현당은 즐거운 마음으로 자신의 권리를 즐겼다. 느긋한 자세로 침상에 기대어 앞에 앉은 시녀가 따라주는 녹차를 받아 마셨다.

하나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우희의 주술이 지금도 유효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 일인지 방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물건은 제 모습을 잃고 주눅이 들어 있었다. 그렇다고 아무 짓도 하지 말고 가만있어야만 한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만은 아니었다.

현당은 장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충분한 시간 여유를 가지고 여자를 달구는 것도 나름대로 즐거웠다. 일상 속에서 여자와 이야기하는 것도 행복이라는 것을 예전에는 모르고 지나쳤던 것이다. 물론 지금 하는 이야기는 일상사가 아니라서 그렇지만 말이다.

그때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