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무사-14화 (14/175)

# 14

<14화>

“허억. 모용가주!”

“이, 이런…….”

우당탕…….

현당의 신형이 바닥을 구르는 것과 동시에 모용곽의 당황한 목소리가 함께 들렸다.

당연히 진향만리가 펼쳐지리라 예상했던 모용곽이었는데, 펼쳐진 초식은 그것이 아니라 기지일보였다. 앞서간 자신의 잘못도 있었지만, 현당이 무의식중에 펼친 일초가 그만큼 유효적절했고 위력적이었다.

이에 당황한 모용곽이 본능적으로 익숙한 살초를 펼쳤던 것이다. 직선으로 내지르는 장도를 낚아채는 것과 동시에 다른 손으로 내공을 실은 공격으로 현당의 비어 있던 가슴을 가격했다. 충격을 막지 못한 현당의 신형이 바닥을 굴렀다.

모용곽의 손에는 현당의 소맷자락이 들려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펼친 살초에 적지 않게 당황한 것이리라.

어느새 우희는 현당을 부축하고 있었다.

“이보세요. 현당. 현당? 현당…….”

“허억. 허억. 허억…….”

현당의 호흡이 끊어질 듯 끊어질 듯하며 간신히 이어졌다.

“비, 비키시게.”

서둘러 모용곽이 현당에게 다가갔다.

현당을 끌어 앉히고, 그 뒤에 가서 가부좌를 틀었다.

타다다다…….

현당의 등 뒤 척추를 따라 있는 혈도에 맞추어 모용곽의 손이 움직였다. 추궁과혈(推宮過穴)의 일종인 타혈법이었다.

“커헉. 커헉…….”

막혔던 기혈이 뚫린 것처럼 현당이 잔기침을 토했다.

“허어억. 허어어어…… 후우웁. 후우우…….”

드디어 현당의 호흡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끓었던 기혈이 가라앉기 시작한 증거였다.

“후우우…….”

모용곽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저 친구…… 초식은 익숙해 졌는데, 내공에 문제가 있군. 내, 보약을 보내주겠소. 문사께서 알아서 저 친구에게 조식을 시켜주시오. 그리고…….”

모용곽이 말끝을 흐렸다.

우희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모용곽의 말뜻이 무엇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 실수는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남들에게 떠들 만한 일이 못 되지요.”

우희가 부드러운 말로 모용곽을 달랬다. 자신이 본 것을 절대로 발설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전했다. 안심이 되었는지 모용곽이 굳은 얼굴을 풀었다.

“특히 상품(上品)으로 신경 써서 보내겠소.”

우희는 조용히 눈을 아래로 내리까는 것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

현당이 간신히 눈을 뜨자 우희가 보였다.

“당신…… 의도했던 것인가요? 아니면 무의식중에 그랬나요? 다시는 그러지 말아요. 다행히 공수가 자유로운 모용가주라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가는…….”

걱정스레 말하는 우희의 말이 들렸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좀 전까지 있었던 모용가주가 보이지 않았다. 언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이번에는 모용가주가 치료했나? 확인을 해봐야겠는데, 이 여자는 언제 갈 건가?’

현당은 알 수 없었다.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뭐가?”

“당신…….”

우희가 벌떡 일어났다. 걱정이 되어 현당에게 충고한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짜악.

현당의 얼굴이 돌아갔다. 당최 왜 맞았는지 이해를 할 수 없는  표정으로 현당은 밖을 나가는 우희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현당은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숨을 고르며, 새로이 그가 배운 심법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    *    *

현당은 장도를 정말 열심히 휘둘렀다. 그의 바로 앞에서 우희가 그를 상대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이익.”

이를 악물고 기합을 질러댔다.

타항. 타하아…….

그녀가 고수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그녀에게 패하는 것이 싫었다. 한때는 남경의 밤거리를 쥐고 흔들던 조직의 우두머리였는데,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는 없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기세와는 달리 도의 끝이 자꾸만 밑으로 처졌다. 역시 힘만으로는 안 되는 게 무공이었다.

현당은 실력의 차이를 절감하고 있었다. 아무리 거세게 쳐내도 우희의 검극은 현당의 명치를 노리고 있었다. 검극이 향한 방향은 언제나 현당의 명치였다. 피해도, 막아서도, 도망가도……. 언제나 명치였다. 한 치만 찔러도 심장을 뚫어버릴 수 있는 곳이 바로 명치, 거궐혈(巨闕穴)이었다.

현당은 자신이 아는 모든 초식을 다 동원했다. 안다고 해봐야 세상 사람들은 다 아는 육합권과 이번에 배우고 있는 화련검이 전부였지만…….

‘녹목개화도 안 되고, 만화화려도 안 되고, 진향만리도 안 되고, 어쩌란 말인가?’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막지 못하면 같이 찌르는 것. 죽기 살기로 현당은 화련검의 첫 번째 초식 기지일보를 시전 했다.

카하아…….

장도 끝에서 시작한 격렬한 진동이 현당의 팔을 통해 어깨를 지나 가슴까지 이어졌다.

“커헉…….”

피를 토하며 장도를 떨어뜨렸다.

“이런! 괜찮아요?”

놀란 우희가 달려왔다.

“아아, 괜찮아, 괜찮아…….”

잔기침을 하던 현당이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벌써 우희는 현당의 등을 두들기고 있었다. 좀 전까지 현당의 앞에 있던 그녀는 지금 바닥에 엎어진 현당의 앞에서 팔을 뻗어 현당의 등을 두들기는 자세였다. 그 때문에 현당의 잔기침에 섞여 나오는 피가 그녀의 백의에 튀었다.

현당은 자기 잘못이라도 된다는 듯 손가락으로 우희의 옷에 튄 핏자국을 가리켰다.

“저기…… 옷에 튀었군.”

“아!”

우희는 고개를 돌려서야 현당이 가리키는 것이 무언지 알 수 있었다. 별일 아니라는 듯 우희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기지일보…….”

“뭐?”

“기지일보요. 다른 것은 몰라도 당신은 이제 기지일보만은 완벽하게 시전 할 수 있어요.”

정말 옷자락에 튄 핏자국은 별 게 아니었다. 최소한 현당은 기지일보만은 완벽하게 구사했다. 그것도 강호 고수를 당황하게 하기 충분할 정도로. 모용곽이 미처 방비하지 못하고 당했다면, 우희는 방비를 하고 있었음에도 쉽게 막지를 못했다. 때문에 내공을 끌어올려야 했고, 아직 완치가 되지 않은 현당의 내상이 도졌던 것이다.

기뻤다. 현당의 실력이 이렇게 빨리 좋아질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현당이 남궁적의 흉내만이라도 제대로 낸다면 그것으로 만족이었는데 어쩌면 현당은 남궁적의 대역을 완벽하게 해낼지도 몰랐다.

지금 당장은 현당의 내상을 치료하고 내공을 모아야 했다. 내공이 밑바탕이 되지 못한다면 대역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어요. 우선 운기 조식과 내공을 익히는 것이 급선무로군요.”

우희는 현당을 그대로 두고 몸을 일으켰다.

“필요한 약을 준비했어요. 독고세가에서 보내준 천년하수오는 너무 약 기운이 강합니다. 먼저 모용세가에서 보내준 탕약으로 내상을 치료하는 게 순서일 것 같군요.”

“우희.”

현당이 부르는 소리에 우희는 몸을 돌렸다.

“네?”

현당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아무런 가식 없는 얼굴이었다.

“고마워.”

우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모든 게 말이야. 날 다시 살려준 것 하며, 또 무공을 가르쳐준 것. 그리고 이제는 내 상처를 치료해 주고, 약까지 처방해 주니…….”

우희는 놀란 얼굴로 현당을 빤히 쳐다보았다.

“……적.”

“뭐가?”

“아, 아니요…….”

우희는 얼굴을 붉혔다. 행여나 달아오른 자신의 얼굴이 현당에게 들킬까 걱정되어 고개를 돌렸다. 왜 갑자기 남궁적이 생각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남궁적은 우희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오로지 남궁적의 시선은 검법과 모용미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검을 익히지 않으면 모용미와 만나는 것이 전부였다. 항상 남궁적의 곁에 있었지만, 한 번도 그와 시선을 마주친 적이 없던 우희였다.

우희는 서둘러 수련동을 빠져나갔다.

‘남궁적이 아니야. 이 사람은 단지 그의 대역으로 선발된 현당이야. 그뿐이야…….’

불현듯 언제나 목석같다가도 모용미를 바라볼 때면 환한 미소를 짓던 남궁적이 그리워졌다.

*    *    *

꿀꺽. 꿀꺽. 꿀꺽…….

우희는 현당이 약을 먹는 것을 지켜보았다.

“크으…… 쓰군.”

현당이 소매로 입가를 쓰윽 문질렀다.

‘적은 저렇지 않아. 언제나 품위를 지켰고, 기품이 있는…….’

우희는 애써 현당과 남궁적을 떼어놓았다.

“무슨 생각해?”

“아! 아니요. 약을 먹었으면 약효를 빨리 흡수하기 위해 즉시 조식을 취하는 것이 좋아요.”

우희는 가져온 책을 집어 들었다.

“이건 가장 기초적인 운기토납법입니다. 상승 심법을 익히기 전에 토대가 될 호흡법과 자세, 그리고 마음가짐 등이 기술되어 있지요. 물론 이곳에 오기 전에 운기토납에 대해 배웠겠지만, 그것은 요체가 빠진 것이고, 정작 중요한 것은 제대로 배우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희가 내미는 책을 현당은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다시 우희를 올려다보았다.

“가르쳐주었잖아?”

“심법을? 언제?”

“현모강. 그건 그럼 심법이 아니었어?”

우희는 적잖이 당황했다. 이런 일은 계산에 없었다. 부작용을 직접 몸으로 깨달은 현당이 그것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아아, 그건…… 올바른 정통 심법이 아닙니다. 임시방편으로나마 잠깐 활용할 수 있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때문에 제대로 배우려면 기초부터 공부해야 합니다.”

“기초부터?”

“예. 기초부터.”

“그렇군. 기초부터…….”

현당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내 두 눈을 반개하고 호흡을 고르며 무심을 찾아들었다.

“휴우우…….”

우희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갑자기 현당이 현모강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서 당황했다. 이렇게 넘어가 다행이었다. 순간, 무언가가 그녀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항상 나보다 한 발 앞서 생각하던 현당인데…….’

불안했다.

정말 자신의 말대로 수긍하고 넘어간 것일까? 혹시나 속내를 알고 저러는 것은 아닐까?

“뭐가?”

우희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네?”

“뭐라고 하지 않았어? 제련(製鍊) 뭐라고…….”

“아니요. 아무 말도…….”

“난…… 내가 잘못 들었나 싶었지. 잘못 들은 게 맞군. 수련을 방해하지 말고 저만치 물러서 있으라고. 뭐라고 혼자 구시렁거리니까, 정신 집중이 안 되잖아.”

우희는 인상을 찡그리며 수련동을 빠져나갔다. 입이 방정이라더니, 제 생각에 골몰해서 뭐라고 한 것 같았다. 그 자리에 있다가는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것만 같았다.

“세상에 내가 현당 앞에서 ‘제련’이라는 말을 꺼내다니. 요즘 정신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도…….”

순간, 우희는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아, 알고 있었어. 현당은 어느 새 현모강의 원래 이름이 제련현마강(製鍊賢魔罡)이라는 것을 알아낸 거야. 어쩌면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고…….”

*    *    *

우희는 운기토납에 몰두하고 있는 현당을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현당이 하고 있는 것이 단순한 운기토납인지 아니면 자신이 가르쳐준 제련현마강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후우우우…….”

길게 토해내는 호흡과 함께 굵은 땀방울이 현당의 콧잔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내뿜는 호기(呼氣)는 마치 폐 속에서 수년 동안 잠겨 있던 찌꺼기를 끌어내는 것처럼 길게 늘어졌다. 마치 이 호흡 하나로 숨을 끊을 것처럼 내뱉었다.

스으윽.

현당의 운기가 끝난 것을 확인한 우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행동은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눈을 떴다고 해서 완전히 잠에서 깨는 것이 아니었다. 약간은 몽롱한 상태. 사람에 따라서 그 차이가 있었다. 운기가 끝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운기를 끝내고 정상으로 돌아오는 반응의 시차가 바로 고수와 하수의 차이였다.

우희는 현당의 수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때문에 행동이 그만큼 조심스러웠다.

현당이 눈을 떴다.

“뭐가?”

“또 뭐요?”

눈을 뜨자마자 묻는 말이 뭐냐는 한마디였다. 당연히 돌아가는 우희의 목소리는 퉁명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현당의 얼굴에 웃음이 걸렸다.

“왜 그렇게 조심스럽냐고?”

“아…….”

우희는 현당이 그 전에 깨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현당의 지금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지침이기도 했다. 고수일수록 주변의 변화를 쉽게 깨닫는 법이었다. 현당은 이미 우희의 판단보다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내상은 어때요?”

“괜찮군.”

현당이 습관적으로 어깨를 흔들었다. 그냥 위아래 또는 앞뒤로 흔드는 것이 아니라, 굳은 몸을 푸는 것처럼 커다랗게 원을 그리며 운기 과정에서 뻣뻣해진 근골을 완화시켰다.

우희는 현당을 노려보았다. 앉은 자리에서 주변의 변화와 흐름을 한눈에 알아차리는 현당이 얄미웠다. 좋은 마음이 들 리 없었다.

현모강이라고 말한 내공 심법이 제련현마강이라는 것도 알아차렸고, 무인검 남궁찬 가주의 심경의 변화도 자신보다 먼저 눈치채고 있었다.

처음 보는 남궁찬에게 ‘안녕하시오, 아버지.’라며 첫인사를 건네지 않나, 이곳이 남부맹의 한 곳이라는 것도 알려주지 않아도 알아차렸다. 똑똑한 사람을 찾아서 선발한 자지만, 지나치게 영리했다. 질투가 나도록…….

“그건 어떻게 알아차렸죠?”

우희는 불편한 속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이번 기회에 현당의 약점을 잡아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강호에서 금지되고 있는 무공을 현당에게 전수했다는 죄목을 그대로 뒤집어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현당의 입을 막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현당이 어떻게 알아냈는가를 먼저 알아야 했다.

“사람이 새로운 이름을 만들 때는 처음부터 새것을 찾는 경우는 드물지. 대부분 있는 것을 변형시키려 하는 경향이 있거든. 그게 편하고, 쉽기 때문이지. 그것도 급히 이름 하나를 지어야 한다면, 특히 더하겠지. 현모강이라는 이름과 유사한 이름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면, 쉽게 답이 나오지 않겠어? 모(母)자와 비슷한 마(魔)야. 게다가 다섯 글자 중에 두 글자를 빼는 것도 쉬운 일이고.”

현당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시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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